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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을 생소하게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 공공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어? 내가 다 아는 내용이잖아?’ 했다.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지만, 한국교회 내에서 공공신학을 본격적으로 논의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어도, 복음조차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이 시대에 공공신학은 그 논의가 더 활발해져야 하며 삶의 현장에서 더 구현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이 유독 반가운 것 같다.
공공신학은, “성경적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 드러나도록 세상과 소통함으로써 복음의 총체성을 회복하려는 신학”이다. (65p) 내 언어로 다시 설명하면, 복음이 모든 피조세계의 회복을 목표로하는 ‘공적인 것임‘을,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모든 영역(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가정,교육,종교 등)에서 공공선을 추구하고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구현하며 살아야함을 가르쳐주는 신학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입문서답게 공공신학이 무엇인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성경적/신학적 근거는 무엇인지 골고루 다루고 있다. 특히 “인물로 본 공공신학”에서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와 미국의 흑인 차별 폐지를 통해 역사속에서 공공신학이 어떤 영향력으로 발휘되었는지를 살펴본 것은 공공신학을 더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허공의 메아리가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세밀하게 작용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4장 “신학으로 본 공공신학”은 어려울 수 있는 공공신학자의 논지를 잘 정리해서 소개하고 있다.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의 ‘5가지 관계’를 숲으로하여 3명의 공공신학자 -데이비드 반드루넨, 제임스 스미스, 데이비슨 헌터- 를 소개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로써 공공신학이 나아갈 길과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향을 정리한다. 공공신학은 시대의 요청이지만 동시에 시대와 환경을 아우르는 것임을 알게하는 부분이었다.
세명 다 수용할 수 있는 견해이기에 때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저자도 각각의 관점에 시사점과 평가를 분석하되 ‘드레스코드’처럼 유연하게 적용하라고 결론을 내린다. -출처: 교보문고 리뷰(종이책)-
표지 그림이 ‘공공신학’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 같다. 삽화들도 글밥에 지친 눈을 쉬어가게 해주었다. 각장의 말미에 제시된 토의질문은 읽었던 내용을 스스로 정리해 볼 수 있게 했다. 소그룹에서 이 질문을 활용하면 유익할 것 같다. 일상속 이슈들과 공공신학을 연결 짓는 작업도 좋았다. 직장생활, 장애인 이동권 보장, 정치참여, 기후위기, 각종 차별과 혐오 등의 문제에 기독교인들이 공공신학을 바탕으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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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발췌]
어서 와 공공신학은 처음이지?_일상과 신앙을 이어주는 공공신학 입문서
황경철, 세움북스, 2022
복음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공공신학(28-30)
네덜란드의 신학교 총장이자 수상을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너무 뛰어 견디기 힘들 지경입니다! 이것을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이라고 부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교회, 가정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카이퍼가 전혀 새롭게 주장한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고스란히 전달한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당당히 간증한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행 26:18). 그러나 복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복음은 부부관계를 새롭게 합니다(골 3:18,19). 복음은 부모와 자녀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골3:20,21). 복음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골 3:22, 4:1). 단순히 노예제도를 개선하거나 철폐하는 것을 넘어서 노예를 형제로 대하고 사랑하는 지점까지 나아갑니다(몬 1:16)
많은 사람이 한국 교회 쇠퇴의 원인을 진단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빠지지 않는 공통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이원론적 삶’입니다. 교회당에서의 삶과 직장에서의 삶이 다릅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는 장로님이 대학에 출근해서 진화론을 가르칩니다. 제가 아는 분은 직장 상사가 분식회계를 지시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사가 안수집사님이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는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존경받고 신뢰받아야 할 성직자가 성희롱, 재정 횡령에 얽혀 지탄을 받습니다.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가사적 영역에 갇힌 채 공적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을 중단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원론적 삶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었습니다. 교회당과 직장, 주일과 주중이 이원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만물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골 1:14). 동시에 바울은 예수님의 보혈로 만물이 회복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복음은 개인을 구원할 뿐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합니다. 그 중심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머리로 모신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죄에 종노릇하던 우리가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영광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실패한 문화명령을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 안에서 수행할 자격과 능력을 신자는획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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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Francis Shaeffer)의 지도로 우리 시대 훌륭한 기독교 세계관 학자로 평가받는 낸시 피어시 (Nancy Pearcey)는 <완전한 진리>에서 회심한 미술 교사의 고백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제 삶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하기를 바랍니다. 제 신앙과 예술이 별개의 방으로 나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는 복음이 삶의 전 영역에서 작용하는 복음의 부요함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총장인 피터 릴백(Peter A. Lillback)이 한 대담에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퍼거슨 박사님, 개혁주의가 오늘날 세속 문화에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우리는 개혁신학이 필요다고 생각하십니까?”
싱클레어 퍼거슨은 잠시 생각하다가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신학은 복음을 총체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개혁신학은 우리의 신앙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광활한 관점(massive vision)을 제공합니다.”
복음은 종교적 감정이나 개인적 영역으로 후퇴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공적이요, 우주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공공신학의 과제입니다.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것은 1970년대입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이 이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독일 나치의 학살과 만행, 남미의 민주화 시위, 남아공의 인종차별 등에 대한 신학적 응답을 교회가 제시하는 과정에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역사 속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추적했습니다. 문화의 세속화가 가속화되면서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32-33)
공공신학은 복음이 사사화(privatization, 私事化)될 수 없는 공적이고 우주적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지지합니다. 공공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교정합니다. 공공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긴장성과 역동성 속에서 신자가 일상을 살아가도록 촉구합니다. 공공신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담대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풍성한 현존과 총체적 범위와 우주적 영향력을 제시합니다. 신자는 가슴 뛰는 감격으로 복음의 부요함을 누리며,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도록 초대받은 것입니다.(44)
공공신학, 성경 어디에 나오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난간설치를 명하셨다구?
신명기를 읽다 보면 매우 흥미로운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신 22:8).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거라."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난간이 없으면 지붕이나 옥상에서 사람이 떨어져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의 집들에는 대부분 평평한 옥상이 있었는데, 그 평평한 옥상은 다락방이나 여가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수 2:6, 삿 16:27). 사람이 많이 사용하는 옥상에 난간이 없다면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집을 지을 때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난간을 설치하도록 율법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이 규정을 위반하여 사람이 다치면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처벌 조항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난간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살인 태만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가난한자, 고아와 과부, 외국인을 돌아보라
하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생계와 필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49-51)
공공신학의 정의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마틴 마티(Martin Marty)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4년 시카고 대학의 마틴 마티가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를 공공신학자로 평가하면서부터입니다. 학문적으로 공공신학의 역사가 길지 않은 만큼 그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습니다. 저는 특징적인 학자들의 공공신학에 대한 정의를 제시한 후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략한 정의로 요약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윤리는 공적인 이슈를 다루어야 하고, 비기독교인들과 사회적 윤리에 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면서 사회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맥스 스택하우스
“교회와 기독 시민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 정치, 경제 현안과 관련하여 크게 네 가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양심이 외면할 수 없는 고통받는 자를 향한 동정,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한 교육적 영향력, 성경적 정의의 추구,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는 자연질서에 순응해야 할 책임이다.” -윌리엄 템플
“신학은 사회의 공적인 일에 관여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의 눈으로 사회의 공공복리를 바라보며 깊이 유념하면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 위르겐 몰트만
“공공신학은 교회 안과 밖으로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전개하면서, 교회와 시민사회의 상호작용을 도와야 한다. 공공신학자들은 소통 가능하고, 수용 가능한 방식들을 찾으면서 기독교 신념과 실천이 공적 삶과 공공선 추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 헤롤드 브라이덴버그
“공공신학은 온 세상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구현된 신학, 즉 교회적 신학이다.” - 이승구 (63-64)
공공신학의 특징
독일 개신교 협의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 의장이며, 루터교회의 리더 중한사람인 하인리히 베드포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은 공공신학의 특징을 다음 여섯 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1. 성경적 신학적 특징
만일 어떤 논의가 공공신학의 다른 특징들을 모두 보여 준다고 하더라도 성경과 신학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공공철학’, ‘공공경제학’으로 불릴 수는 있어도 공공신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공적교회였으며, 교회의 공적 발언은 교회의 사명의 한 중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신학적 성찰에서 도출되고,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진정한 공적 자산으로 여기고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이중언어 능력
공공신학은 신자들만 아니라 비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중언어로 소통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기독교가 제시하는 가치와 목소리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 점을 계속 무시하면 신학은 오직 기독교 내부로부터만 지지를 얻고,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학의 언어와 세속적 이성의 언어를 모두 수행할 수 있도록 이중언어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공공신학의 주된 과제입니다.
3.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
공공신학의 전제가 세상의 모든 영역과 모든 학문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다른 학문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복음을 세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고 주장한다면 성경적 관점에서 다른 학문을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적극적이고 겸허한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낸시 피어시는 종교가 주관적 감정이나 개인적 취향으로 치부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복음을 전하려면, 모든 학문 가운데 드러난 기독교 진리의 전체적 통일성이 우리 메시지의 핵심을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4. 선지자적 역할
구약시대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messenger, 使者)로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상기시킴으로써 예언하고, 경고하고, 훈계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공공신학은 공적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경고하고, 저항하고, 비판함으로써 선지자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가 그러했듯이 공공신학은 부당하고 불의한 정책들을 성경적 가치와 윤리를 따라 안내하고, 교정하려고 노력합니다.
5. 방향성 제시
다원주의 사회는 다양한 의견과 목소리가 존중되는 사회입니다.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회가 분열되거나 표류할 위험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공신학은 성경적 신학적 전통에 기초한 지식과 지혜를 통하여 시민사회에 방향성을 제시하고, 공적 영역에서의 토론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정의, 정치, 경제 문제, 특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의 권리에 대한 헌신은 사회 전체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개적인 성명은 사회의 나침반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6. 상호 맥락성
한 나라에서 유용했던 공공신학이 다른 나라에서는 적실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지역과 나라에 따라 직면한 문제가 다르고, 문화가 상이하며, 국민들의 정서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이러한 국가와 문화와 정서를 존중합니다. 이것을 상호 맥락성이라고 합니다. 유럽,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한 지역의 공공신학은 다른 지역과 원리는 동일해도 적용점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존중하고 교류하며, 서로를 교정해 주며 발전할 수 있습니다.(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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