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창석 별칭 용덕(容德·龍德)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군사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본문 호는 창석(滄石), 이명(異名)은 용덕(容德·龍德)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1920년 중국공군군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졸업 후 공군군관학교 교관, 수상비행대장,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지냈다. 1922년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 조선무산자동지회장 김한(金翰)과 만나 폭탄 운반 및 투척 계획을 협의하는 등 상하이[上海]·톈진[天津]·베이징[北京]·안둥[安東] 등지에서 의열활동을 지원하였다.
1932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하였고, 1940년 중국 육군대학을 이수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참모처장·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여 중앙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8월 대일독립전쟁에 한국인 비행사를 참전시키기 위해 공군설계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군과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1946년 귀국하여 한국항공건설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한 뒤 미군정청과 미군사고문단을 상대로 항공부대의 창설을 교섭하였고, 1948년 4월 항공건설협회의 간부 장덕창(張德昌)·이영무(李英茂)·박범집(朴範集)·김정열(金貞烈)·이근석(李根晳)·김영환(金英煥) 등과 함께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 그해 6월 육군항공기지 부대장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950년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공군후방사령관·항공기지사령관·공군본부작전참모부장·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한국미술사-조선시대 ;유교의 영향,문인화 중심으로 | 동양미술사 2005.12.17 20:15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7, 서울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1997, 서울 ·李丙壽 著,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9, 서울 ·논문 ·이철규, 〈조선말기 문인화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연구〉,...
솬(shwan09) http://cafe.naver.com/artgs/41
.. http://www.khartnet.com/html/kyung.htm
조진희 - "유교가 조선 회화사에 미친 영향 "
유교가 조선 회화사에 미친 영향
- 문인화를 중심으로 -
목 차
1. 서론 1
2. 조선시대의 사회와 회화
1) 조선전기의 사회와 회화사상 2
(1) 양반의식과 유화사상론 3
(2) 미술인의 천기사상 4
2) 조선중기의 사회와 회화 5
3) 실학의 발생과 조선회화의 변모 7
4) 추사 김정희화풍의 대두 9
3. 문인화에 반영된 유교문화
1) 한국 문인화의 시작 12
2) 문인화의 개념과 사상적 배경 13
3) 문인화 속의 유교적 성격 14
4. 결론 15
참고 문헌 16
1. 서론 고대로부터 미술은 그 나라의 정치이념 및 종교·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 선사시대에 그려진 암각화라든지 고대의 벽화그림 등은 그들의 신념과 믿음·기원에 대한 반영물로써 표현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서양의 경우에 있어서도 중세의 미술은 기독교 미술로 특징지어질 만큼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고구려 고분 벽화중 사신도는 도교의 음양오행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는 대표작이라 할 것이다. 또한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의 경우, 다양한 형식의 불교미술이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경우는 어떠한가.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나라이니 만큼 유교의 기본틀 안에서 미술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유교의 영향이 한국 미술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려때 융성했던 불교미술이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이라고 하는 유교정책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제까지 발전되어오던 불교미술양식이 한편으로는 분명 사향의 길을 걷게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미술의 퇴보를 의미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미술은 한국 미술사상 가장 수준 높은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그 양상도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논고에서는 유교가 조선시대의 미술에 미치게 되는 미술사의 새로운 영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교문화가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단지 중국에서 한자가 들어왔을때인 전국시대 말이나 한나라초로 추정할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유입은 한사군의 점령이후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유학이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이후 유학은 정치·종교 이념으로서의 유교와 학문·교육 체제로서의 유학으로 한국사와 계속 맥을 같이 해오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명실공히 통치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보다 조선시대에 유교가 문화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생각되어 조선, 그 중에서도 회화를 중심으로 유교문화가 조선회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유교적 입장에서 회화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는 그 성질상 불교와 같이 필연적인 미술활동을 요구하지 않아, 전문적인 화원들은 자유롭게 자기 고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면, 조선시대 문인들 또는 예술인들은 회화의 독자적 경지를 이루기보다는 회화를 정신적인 수양의 수단이나 여기로 생각하여 '餘技的 文人畵', 즉 四君子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책을 읽는 독서인으로, 도를 향해 의를 잃지 않는 성실인으로, 신념을 가진 지조인으로 그리고 예술을 아는 풍류인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조선시대의 문인화는 이러한 선비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문인화의 한 부류인 사군자가 함축하고 있는 지조·절개·강인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선비사상과 부합하는 것이었기에 사군자화의 발전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조선시대의 사회와 회화에 대해 시기별로 간략하게 알아보고, 유교문화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문인화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2. 조선시대의 사회와 회화
1) 조선 전기의 사회와 회화사상
조선시대 초기의 인문사상은 고려시대의 지식인들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려 말의 민심은 불교의 지나친 성행과 민간생활의 침투로 차차 지식인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를 무시하고 유교를 숭상한 이른바 척불숭유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조선을 건립한 세력은 이성계의 군사력과 그를 뒷받침해 준 사대부들로 이루어졌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새로운 통치사상으로 유교와 그 교조주의자들을 이용하여 건국 이념을 유교적인 방향으로 안배하였다. 이로 인하여 15세기 초부터 지식인들의 사상이 성리학적 유교관념론의 지배적인 인문사상으로 대두되었는데 이들은 곧 사림파라는 양반계급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군주들은 정치적으로는 불교를 배제하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여전히 숭불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들이 정치적으로 불교를 배제한 이유는 국가나 왕에 대한 태도보다는 해탈이라는 교리로 사람들이 물질적 오염과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부처가 된다는 불교의 기본교리가 통치자들의 절대왕권을 수립하는 데는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의 인문사상은 정치적인 유교적 명분정신과 개인적인 신앙인 불교사상의 갈등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출세적인 안목으로 유교의 성리학 사상을 대의명분으로 하여 그들의 사상을 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유교사상은 성리학으로 형성된 '이'와 '기'의 대립논쟁이었다. 이러한 '이'와 '기'는 회화에 있어서도 문인화의 요소가 되는 것들이다. 문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와 사회적인 사상성, 즉 '이'가 내포되어야 한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문인화의 사상성이 가장 많이 내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지식인들 사상 역시 이 성리학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문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사상성을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교사상에서 가장 나쁜 것 중의 하나인 천기사상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림에 소질이 있거나 이해를 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전혀 작품에 손을 대거나 논하는 것조차도 회피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대부들은 그림을 직접 그리려하는 것을 천시함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초기를 통하여 화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몇몇 있기도 하였지만 이들 역시 한두 편의 문장을 남겼을 뿐, 화론적인 전문적 입장에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도 조선 초기의 회화는 이후 조선회화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굳건히 다지게 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때에 형성된 한국 화풍의 전통은 초기의 成宗朝(1469∼1494)를 거쳐 中宗(1506∼1544) 末年과 明宗(1545∼1566) 初年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로도 중기 회화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축적되었던 중국의 화적(畵跡)이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한 명과의 회화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이 중국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근본 이유 또한 유교사상에 근거하여 계획적으로 그 사상의 발원지인 중국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배우려하는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조선 초기는 대내외적으로 그들의 건국기반을 보다 탄탄하게 다짐과 동시에 조선의 기본 틀을 다지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기본틀이 유교라고 하는 사상·정치이념에 근거함은 물론이다. 이후, 조선은 명실공히 유교국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 함으로써 그 안에서의 문화 역시 이전의 고려와는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1) 양반의식과 유화사상론
유교는 중국의 하(夏)·은(殷)·주(周) 3대의 문화를 계승하여 공자(B. C. 551∼479)에 의하여 정립된 인본주의 윤리사상이다. 유교는 그 사상적 구조에 있어 윤리, 정치, 문학 및 예술에 그 범주를 두고 있으며, 시서(詩書) 및 사서(四書)를 기초로 하는 인간주의로서 삶의 존엄성을 천명한 사상이다. 유교의 핵심사상은 교화(敎化)를 위한 호학정신(好學精神)에 있는데, 이 호학정신은 공자가 인륜의 질서를 이룩하기 위해 내세운 것으로, 그 정신의 내용은 사서오경(四書五經) 혹은 육경(六經)이요, 그 정신의 표현은 효제(孝弟), 충신(忠信)을 골자로 한 禮요, 즐거움과 평화를 생활 속에 담기 위해서 樂을 들었다. 禮는 인간의 욕망을 바로 인도하는 윤리의 틀이었으며, 樂은 인간성을 교화하는 힘이었고, 詩는 도덕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우리 인간의 윤리적 성정(性情)을 고양하고 본능을 절제시켜 주는 힘이 있으므로, 특히 청년은 시를 읽고 또 지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러한 유교가 가르치고 있는 지향목표는 첫째가 인간교육이며, 둘째가 인류사회에 있어서 인도주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고, 마지막이 전통문화의 계승과 창조이다. 이러한 유교의 사상이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융성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모든 것이 '유교'의 틀 안에서 용인되고 장려될 수 있었다. 예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그들 조선 사회의 기본정신 기조인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나 불교적인 영향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은 그들이 사회의 유교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성립시키지 못하였다. 그들은 조선조 초기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 장인(匠人)으로 전락되어 아예 예술 이론을 포기하였으며 자신들의 인권도 포기하였다. 또 사대부 양반계급들은 그들대로 예술에 대한 학문은 천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술에 관한 한 권의 책도 남긴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결과는 현대에 미술이론 방면에도 황무지를 조성하게 되어 작가란 한낱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로 인식되었으며 학문적 기본 바탕이 결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회화사상은 이러한 유교적 국가정책에 의하여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고려로부터 전해오는 절개, 즉 지조를 굽히지 않는 군자사상·선비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유교사상에서 유래되는 화가의 천대였다. 따라서 조선초기의 회화는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 다소 자유롭지 못한 양상을 보이게 되며 선비들이 그들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곧 유교정신에 바탕을 둔 문인들의 여기로부터 시작되는 4군자의 성행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교를 옹호하는 사대부들이 회화 선택에 있어서도 그들의 성격에 알맞은 묵죽(墨竹) 등을 가장 최고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의 회화는 문인화의 발전을 촉진하였으며 서화일체사상을 수묵화로 발전시켜 문인화를 생성케 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유교적 회화 사상은 현종조의 문인화가 김진규(金鎭圭)의 그림을 유두서(尹斗緖)가 평하여 "유화(儒畵) 중 제일"이라고 한 데서도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문인화를 유화(儒畵)라고 할 만큼 그 당시 사회에 유교사상이 깊숙이 침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문인화를 유화(儒畵)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의 유가화풍을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2) 미술인의 천기사상
조선왕조는 정권 장악 후 그것을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유교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양반과 상놈이라는 두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형성된 양반과 귀족들의 제도와 천인들의 노비문서에 의한 천민의 신분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조선왕조시대의 미술인은 천한 기술을 가진 천인의 신분이었으나 그런대로 국가의 기관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대부 양반들의 모든 행사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이러한 천기사상의 시작은 이미 이전부터 있어왔다. 고려시대 중엽부터 공예인들이나 다른 잡직에 대하여 차츰 차별대우가 시작되었으나 이러한 천기사상이 뚜렷해진 것은 송에서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고려의 사회 지배층이 차츰 유교성리학자들로 구성되어 사대부들에 대한 대칭으로 기술관, 즉 잡직에 대한 천시가 시작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지배신분의 재편성 과정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유교의 관념적인 기술 천시 경향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사대부들의 통치 이념인 유교에서 기술을 관념적으로 천시하였기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이 기술관이 되는 것을 꺼려하였고, 따라서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점차 양반의 업소에서 벗어나 양반 신분에서 도태되는 사람들과 하급신분에서 상등되는 부류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차츰 사대부들의 서자들로 그 계층을 충당하여 조선시대의 미술인들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은 미술사에 있어 선비 정신의 발현이라고 하는 문인화 등의 회화양식을 통해 천박하지 않고 정신상이 강조된 수준높은 미술형태로 발전했다는 일면과 함께 그와 반대되는 것은 무시하고 천시함으로써 어찌 보면 진정한 창작예술로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하는 모순점 또한 갖고 있다. 물론, 이후 실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유학의 대두로 이러한 모순점을 극복해 보고자 했으며, 실제 그러한 노력이 회화사에 있어서도 진정한 한국적 회화의 성립이라고 하는 커다란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뿌리깊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성리학 중심의 유교 문화는 예와 덕, 대의명분 등을 강조하며 이와 같은 이련의 노력들이 계속적으로 연계되는 것을 저지하였다. 특히, 이후에 살펴보게 될 추사 김정희는 나름대로 문인화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위에서 말한 실학의 영향에 의한 한국적 화풍의 형성을 저해하는 선두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2) 조선중기의 사회화 회화
조선 전기의 미술은 사실상 양반 귀족들의 전횡물이었고 그 원인은 조선사회의 신분적 계급의 제정에 있어서 예술인들은 모두가 사회참여도, 그들의 의사도 발표할 수 없게 된 하나의 도구였을 뿐 아무런 인권 행사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통해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대부 귀족들의 무능과 부패로 인하여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생각과 함께 국가를 위하여 애국하는 데 있어서 양반들보다는 공상천노인 서민들이 사병으로 종사하면서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많은 공을 세움으로써 더욱 가능했다. 그러나 이 양대 전란 이후에도 공상천노들의 신분이나 어떤 지위에는 크게 변동이 없었고 다만 사회적인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 중기의 회화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재란 등의 극도로 파괴적인 대란이 속발하고 사색당쟁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특색있는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조선 중기에 그나마 회화가 면면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사실상 중기의 화가들은 안견파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의 화가들은 한가지 화풍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두서너 가지의 화풍을 수용하여 그리는 경향을 현저하게 나타냈다. 이밖에도 이 시대에는 사대부들과 화원들 중에 화가집안을 형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사상에 의해 화가를 천시하던 전통에 근거해 볼 때, 상당히 변화되고 있는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변화는 후에 실학사상이 발생 가능할 수 있는 근저(根?)를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조선 중기의 회화도 초기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면서 이 시대의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 시대는 수묵화의 전성기라고 지칭해도 좋을 정도로 묵법에서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다양한 주제의 구사, 상이한 화풍의 수용과 변용, 변화있는 필묵법 등은 이 시대의 회화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현상들로서 주목된다.
이 외에도, 조선 중기가 그 의미를 더할 수 있는 것은 이후 후기의 실학사상과 회화가 생겨날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사상적 기반을 닦아놓은 데 있다. 17세기의 양대란(兩大亂)을 거치는 동안 나타난 귀족 사회의 모순은 사상적 배경에 있어서도 성리학의 오랜 유학정신에 변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에서 양반 출신의 일부 학자들이 진보적인 생각으로 그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어 왔던 성리학을 비판하는 선진적 철학사상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실학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실학의 기본사상은 현실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정치·경제·법률·제도·군사·산업 등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개발하는 사상이 바로 실학인 것이다. 그리고 실학은 실용·실증·자유주의적인 학풍을 일으켜 고증학과 각종 과학기술과 예술에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고 마침내는 민족의식과 근대 지향의식을 출현케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실학 사상은 그 발생의 토대가 조선 중기에서부터 서서히 다져진 것이다.
3) 실학의 발생과 조선회화의 변모
17세기 중기에서 19세기 초기까지 이어진 조선의 화풍은 의당 실학이라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은 주자학이 강조하는 내적 수양이나 도덕이념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민생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주자학의 교도적인 이념 추구보다는 원시 유학이 지니는 실천성, 즉 도덕의 실천과 민본주의의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경세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실학이 발달한 배경에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의 내·외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요인은 조선왕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이다. 16세기경부터 일부 변질되기 시작한 조선왕조의 통치질서는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동요되기 시작했다. 집권층의 벌열화, 수취체제의 붕괴, 신분체제의 동요, 농본주의, 생산체제의 일부 변화 등은 조선왕조 사회가 기존의 통치 질서에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폭넓은 개혁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다만 보완적인 미봉책으로 자신들의 권력유지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왕조의 벌열세력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치체제를 강화해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갈구했다. 이 과정에서 실학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요인은 사상적인 면에서 조선왕조의 지배원리였던 성리학의 반역사성(反歷史性)에 있다. 전쟁 후 왕조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부조리가 드러났다. 그러나 지배원리인 성리학은 합리적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오히려 명분론을 강화하여 심한 당쟁을 유발했으며, 관념주의에 입각한 성리학적 학풍에 대한 반성과 반발이 일면서 상대적으로 실천적이고 생산적인 학풍의 건설이 요구되었다.
세 번째 요인은 조선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에 따른 신분제의 동요 현상이다. 농업기술의 발전을 통해 보여진 생산력의 발전과 지주제의 변화는 대동법의 실시를 확대시켰고 이를 통해 점차적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화폐경제가 성장하여 부를 축적한 중인들은 축적된 재부로써 영향력을 확대해 갔고, 벌열정치와 당쟁으로 인해 몰락한 양반들의 수요는 급증하여 돈을 주고 그들의 족보를 사는 일이 성행했다.
네 번째 요인은 서학(西學) 및 청대(淸代) 학문의 영향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학 서적들이 일부 전래되면서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했다. 이 때 전해진 서학서들은 수학·천문학·농학과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과 함께 천주교 교리들이었다. 이 책들은 일부 진보적 사상가들의 학문 연구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명말(明末)·청초(淸初) 중국의 실학적 학풍과 청대의 고증학도 조선후기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명말·청초 학술사상에는 민족의식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 의식이 나타나 있었고, 이 특징들이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자극을 준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실학발생 배경은 현실사회에 대한 고식적인 미봉책을 비판하고 현실의 모순점을 비판하는데서 성장하였으며, 청을 통한 서양문물의 전래로 신 과학 문명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신봉하였던 주자학에 대한 반성을 꾀하므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실학이 사회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생성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은 당시 지배층의 이념을 대변하던 성리학과 구별되는 몇 가지 역사적 의의와 시사점을 주는 데 그것은 민족주의적 성격을 담고, 일정하게 근대 지향성을 가졌다는 점과 피지배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요, 이론이라는 점이다. 즉, 화이사상(華夷思想)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여 조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였으며, 각 분야에서 민본주의(民本主義)와 균상주의(均産主義)를 표방하기에 이르렀고 피지배층의 이익을 신장하기 위해 정치·경제·사회적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실학적 경향은 조선 후기 문화 발전에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삼아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실학의 추이와 매우 유사함을 보여준다.
우선, 이 시대의 회화는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회·실경산수화가 정선 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숙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등에 의해 풍미했으며, 김두식을 비롯한 일부 화가들에 의해 서양화법이 수용되었고, 서민들 사이에 민화가 크게 유행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실학은 한국 회화사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진경산수화의 경우, 그 철학적 의미를 도교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발생의 근원은 실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풍속화, 민화 등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회화의 발생은 그 이전 성리학 중심의 유학적 토대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 중기의 사회적 풍토는 이러한 탁상공론적이고 양반중심의 학문에 한계점을 들어내면서 새로운 학풍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회화에서도 양반들의 여기(餘技)를 위한 풍류적이고 고답적인 화풍과 함께 새로운 회화양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4) 추사 김정희화풍의 대두
추사 김정희화풍은 조선왕조 말기의 회화로써 특징지울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추사 김정희화풍을 중심으로 조선왕조 말기의 회화에 대해 알아보고, 실학의 영향으로 나타나던 조선 후기의 회화가 다시 어떻게 변화되고 있으며,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추사 김정희의 사상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 말기는 종래에 조선 후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 시대는 앞에서 살펴본 후기와는 분명히 차이를 드러내므로 따로 편년해서 볼 필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시대상황이나 회화상의 양상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대의 경우와도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그 이전의 시대와 연결이 되어 있고 또 후기의 전통을 계승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후기와 함께 묶어서 보기보다는 구분하여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는 일반사에서 근대라고 편년하는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기도 한다.
이 시대는 우리 나라 역사상 안팎으로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대외적인 면에서는 구미열강과 일본, 중국, 소련 등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각축을 벌이며 위협해 왔고 대내적으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대원군의 쇄국정책, 개화파의 등장과 패퇴, 기독교의 전래와 수난, 엄격하던 신분제도의 동요 등 국가와 사회가 어지럽고 급변하는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 이전의 조선 후기와는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또한 이와 같은 시대적 추이가 당시의 회화에도 다소간을 막론하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회화는 우선 전통의 위축이 뚜렷하여 후기에 유행했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위축되었으며, 김정희파를 중심으로 하여 남종화의 유행이 지배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조선 말기의 선비들은 실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조선 초기에 천기로 생각하고 그때까지 내려오던 그림에 대한 전통관념을 깨고 실학적 사상에서 이를 수용하는 태도가 보인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존재한 유교전통의 봉건제도는 와해시키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아무리 실학자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인 왕조 존립의 문제는 거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학사상도 유교전통의 한계내에서만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인권도 그 한도내에서 평등을 주장하였다. 또 실학사상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양반의 무리들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민본사상내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림의 발전도 사실상 그 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통적인 화풍과 화법, 그리고 그림을 이해하는 화론도 크게 변화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종래보다는 지식인들의 그림행위가 과감해졌으며 또 참여의식이 높아졌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박제가와 정약용 이후에 실학사상을 가진 화가로는 김정희를 들 수 있다.
18세기 말엽부터 성행하여 한국에 새로운 화풍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사군자는 실학의 실사구시라는 뜻과 같이 그림에서 진실을 구하려는 화풍이 일어났다. 그림이란 본래 물질의 실에서 실을 얻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을 취하되 그 아름다움이 형태를 사실대로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형태보다는 형태 속에 숨어 있는 '진(眞)'을 취하는 것으로 '진'이란 '기(氣)'를 표현한 것인데 모든 '기'로 아름다움을 전하고 현상을 남기는 것이며 표면의 상(象)은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다. 양주팔괴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진형(眞形)'을 추구하는 것으로 한국에 실학사상과 함께 들어와 이 시기의 그림도 외형보다는 외형 속에 숨어 있는 '진'형과 '기'를 표현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주자가 추사 김정희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는 조선시대 말기의 저명한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그는 고증학(考證學), 금석학(金石學) 뿐 아니라, 유학, 불학 등 학문에도 깊은 경지를 이루었고, 시(詩)·서(書)·화(畵) 三絶을 이루었다. 24세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교유하였으며, 청대 문예뿐 아니라 많은 작품을 대하였다. 서예에서는 전(篆), 예서(隸書)와 행서(行書)를 독창적으로 변형시켜서 무한한 창노(蒼老)의 기절(奇絶) 경지에 이르는 자기세계를 창출한 유명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었으며, 회화에서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중시하는 문인의 「行萬里路, 讀萬券書」, 즉 수많은 여행으로부터 책을 읽으므로서 체득되는 得道의 경지를 강조하였고 돈아(敦雅)한 탈속의 일경(逸境)을 삼매경(三昧境)으로 이루었다.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인화가로 평가되는 그는 「세한도(歲寒圖)」,「부작난도(不作蘭圖)」 등을 남겼으며, 산수, 사군자 그 중에서도 묵란, 고양이 등을 즐겨 그렸고 조선시대 말기에 중국의 문인화를 수용하는데 절대적인 작용을 했던 인물로서 권도인(權敦仁, 1783∼1859), 조희룡(趙熙龍, 1789∼1861), 허련(許鍊, 1809∼1892), 전기(田琦, 1825∼1854) 등에 의해 화파를 형성할 정도였다. 이 결과로 일면에서는 당시까지 사조를 이루고 있던 풍속화, 실경산수 등의 한국적 회화사조가 급격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경향을 나타냄으로써 그에 대한 평가는 공헌과 부정적 시각이 엊갈리기도 한다.
말년의 추사 김정희는 그가 못다한 정치 포부를 그림과 글씨로 소일하면서 그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그는 국내외의 사군자를 많이 구경하고 자기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통해 추사풍의 난초를 그렸다. 그는 난초 그리는 방법을 화법상으로 설명하여 일종의 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화론에 의하면,
난초를 그리는 법은 역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화를 그리는 화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으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회룡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그리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는 까닭이다.
라고 하여 그의 난화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화론은 서화일체(書畵一體) 사상을 주장하며 북학파들이 시·서화를 필수적인 교양으로 생각한 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김정희의 화론은 그를 추종했던 많은 하가들을 통해 조선 말기의 지배적 사조로 자리잡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말기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현상은 김정희(1786∼1856)의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이 시대의 화단을 풍미하였다는 사실이다. 남종화가 조선 후기에는 토속적인 진경산수화 및 풍속화와 함께 공존하면서 유행을 하였으나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방적인 득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의 남종화는 조선 후기의 업적과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하였다기보다는 김정희의 영향하에 원(元)·명(明)·청대(淸代)의 남종화를 받아들여 사의적(寫意的) 세계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조선말기의 남종화단을 이끈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추사 김정희였다.
이처럼 추사 김정희의 영향은 조선후기 나타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민화 등의 다양한 한국 회화로의 이행을 다시금 차단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또한 회화를 통해 추구되었던 실사구시의 정신보다도 선비들의 고매한 정신과 기(氣)를 나타내는 그림을 제일로 치며 사군자 중심의 문인화를 다시 유행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 역시 이전까지 한국에 뿌리깊게 내려오던 전통 유교의 영향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문인화에 반영된 유교문화
1) 한국 문인화의 발생
한국 문인화의 의식은 고려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초기 불교의 국교사상이 가져온 많은 폐습으로 불교가 차차 국민들의 배척을 당하면서 고려 중엽부터 점차 유교학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중국에서는 유교와 함께 송학이라는 주자학이 성행하여 우리 나라의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유교가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이다. 유학자의 근본 정신은 한가한 정서와 참선하는 교양, 그리고 청빈한 생활 속에서 생활하면서 글이나 쓰고 시나 지으면서 붓과 먹을 항상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유학자 또는 유묵이라고 한다. 그래서 문인화를 일명 유화(儒畵)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문인화는 고려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점차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회화사상으로 고려를 살펴보면, 문종(文宗, 1019∼1083)때부터 명종(明宗, 1170∼1197) 시대에 회화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고려의 학자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인종(仁宗, 1109∼1146)과 명종은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당시의 상류계급들이 그림을 향유하고 또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고려의 지성인으로 그림에 관심있는 사람은 김부식(1075∼1151), 이규보(1168∼1241) 등이 있고 화가로는 이영 등이 있다. 이중 김부식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송나라 휘종황제가 「추성흔락도(秋成欣樂圖)」를 하사한 일이 있어 희화 교류가 있었으며 또 고려에서는 화가를 파견하여 중국의 그림을 묘사해 오거나 아니면 많은 국고를 들여 구입해 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회화 활동은 고려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이규보 같은 유학자는 그림에 대한 문장이 무려 50여 편이나 된다. 이중 상당한 문장이 문인화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한국적 문인화가 정작 올바로 인식된 것은 고려중엽 이후부터이며 이 시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훈고학적 유학에 반대하고 불교의 선종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수용하여 재구성 발전시켜 오다가 뒤에 커다란 문화적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은 복잡한 과정을 겪으면서 고려말기를 맞이하고 문인화의 기초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후 조선조 세종때인 15세기경에 인제(仁齊) 강희안(姜希顔)과 사숙제(私淑齊), 강희맹(姜希孟) 형제에 이르러 문인화의 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의 인문사상은 조선초부터 억불숭유정책에 힘입어 절대왕권확립을 위해 성리학의 이사상(理思想)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명분정신을 정립하고 있었고, 권근(權近, 1352∼1409), 정도전(鄭道傳, ?∼1398) 등은 「'이(理)'란 자연이나 인간에 앞서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기에서 물질적 '기(氣)'나 정신적 '심(心)'이 발생하며, 따라서 理는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활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5세기의 김시습(1435∼1493)가 서경덕(1489∼1546)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개하였으며 그후 퇴계 이황(1501∼1570)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고 율곡 이이(1536∼1584)는 이(理)와 기(氣)를 다같이 인정하면서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여 성리학적 분위기를 성숙시켰고, 이와 같은 이상들은 곧 문인화를 가장 잘 이해·소화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2) 문인화의 개념와 사상적 배경
문인화란 작가의 심의(深意)를 자연의 사물에 의탁한 사의(寫意) 위주의 그림을 말하며, 글자그대로는 '문인들이 그린 그림'이나 실제로는 시(詩)·서(書)·화(畵) 세 개 장르를 하나의 화면상에 합일정착시킴으로써 문인화는 삼절(三絶)이라는 특수양식을 가지게 된다. 또한 사의적인 데에 관심을 주로 두면서 기술적인 면에서는 그들의 사상과 감동 및 이념을 간명직재(簡明直載)하게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처음 문인화란 용어가 직업화가에 對한 말로 사용된 것은 동기창의 '화안(畵眼)」'에서 비롯되었지만 문인계급들이 등장하기는 당대의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또한 중국 회화이론의 대학자인 천헝크어는 그림의 화풍과는 상관없이 문인화란 인품(人品)·학문(學問)·재정(才情)·사상(思想)이 들어있는 그림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문인화는 외적인 형태보다는 영적인 형태를 더 중요시하며, 이것은 작가의 성령을 통하여 개성을 표현한 것이요, 그 표현된 개성이 우미하고 맑고 고상하며 청아하고 고고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문인화란 작가가 높은 인격과 사상으로 시적인 분위기 속에 흥취된 상태에서 어떤 화풍이나 기교에 구애됨이 없이 맑은 정신상태로 대상을 표현한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매(梅)·란(蘭)·국(菊)·죽(竹)의 네가지 식물이 각기 함축하고 있는 고유의 장점을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 사군자화이다. 사군자화는 인격과 깊은 학문을 갖춘 내면적 품격과 자연에 대한 깊은 철학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위에 언급한 내용으로 볼 때 문인화에 있어 사군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사군자의 발생은 남종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불교의 선미(禪味)와 노장의 무위자연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회화정신에, 유교 회화정신이 표현하는 인격수양과 청빈하고 깨끗한 마음가짐 그리고 은일적인 사상이 일치되어 유(儒)·불(佛)·선(仙) 합치의 예술로 승화되어 나타났다. 이러한 사군자의 표현을 사의적인 기법으로 발전시켰으며 사군자가 지니는 서(書)·화(畵)일치성과 상징성은 문인화가 갖는 의의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문인화속의 유교적 사상
문인화란 학문적 바탕을 둔 풍류인들의 대자연과의 합일 과정에서 흉중의 표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일명 사대부화 또는 사대부적 문인화라 칭하기도 하는데, 사대부란 중국의 육조시대부터 존재했던 계층으로 송대에 그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사(士)'란 선비를 뜻하고 중국의 주대(周代)부터 있었던 유가적 의미에서의 사회계급 구분인 사민(四民)중 제일의 계층을 말한다.
따라서 사대부란 글자 그대로 학식을 갖춘 관이(官吏)라는 뜻이며, 유교적 중앙집권의 정치체제와 더불어 이루어진 엄격한 계급사회인 조선왕조에서는 현직 또는 퇴임관료나 지식을 갖춘 사회적 지배층은 그 지위에 합당한 여기(餘技)로서, 또는 스스로 즐긴다는 의미에서 그림을 그렸음은 중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스스로 즐긴다'는 의미를 독점할 수 있었던 계층은 반상의식(班常意識)이 뚜렷했던 조선조에서는 생활의 여유가 있었고 높은 학문을 간직할 수 있었으며 자연을 관조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 계층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대부화(士大夫畵)' 또는 '사대부적 문인화(士大夫的 文人畵)'라는 어구(語句)가 등장했으리라 본다.
이처럼 문인화란 유교적 사상에 의해 특징지어진 계층에 의해 구분되어져 일부 특권계층에 의해 향유되었던 회화양식을 일컬으며, 또한 그러한 계층에 의해 발전된 양식이란 점에서 그 철학적 내용을 따지지 않더라도 가장 유교적 성격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회화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문인화·사군자화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는 사상적 배경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유가사상에 기본하여 문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말기에는 -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미술사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와는 별도로 - 우리 나라 회화사의 큰 정점을 이룬 추사 김정희의 영향으로 서권기(書卷氣)·문자향(文字香)의 화론이 조선 말기 문인화와 사군자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문인화는 선배문화로 일축된다고 볼 수 있는 유교문화의 대표적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조선시대는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더욱 유교의 틀을 확실히 다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교를 건국 통치이념으로 하여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확실히 하려 하였으며 그로 인한 중앙집권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는 이러한 그들의 의도를 타당성있게 하기에 충분한 정치이념이었으며 따라서 조선은 그 어느때보다도 신분제도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가운데, 신분에 의한 활동 역시 분명하게 구분되고 제한되었던 것이다. 사실, 미술이란 역사이래로 일반 민중에 의해 주도된 적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선의 미술이 반드시 유교의 영향에 의해 선비들이 향유할 수 있는 양식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일면 무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그 이전의 미술이 일부 지배계층이나 종교에 의해 향유되고 제작되었던데 반해, 조선시대의 미술은 일부 지배계층이 아니라 선비들의 여기(餘技)로써 대부분의 지식인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미술의 대중화라든지 다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데 한 몫을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조선의 유교는 대부분 성리학 중심으로 발전하긴 했지만, 두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을 통해 시련을 겪게 되면서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미술 역시 다양하고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회화는 이처럼 유교의 사상아래 그 어느 때보다 보수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진취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미술은 서구미술의 유입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시기동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모든 것이 혼란한 시기임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현대에 이어지는 바로 前 시대의 미술을 되짚어 봄으로써, 한국의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한국 회화는 한국인이 가지는 특성에 의해 나름대로의 독창성과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회화는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바를 일시적이나마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충분히 우리의 독창적 양식을 만들어 갈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적 관점에서의 조선회화가 가지는 한계점이 물론 있지만, 그것을 한계로만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가 갖는 특성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유교적 정신세계를 오늘날과 같이 가치관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