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수아 3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옛 이름은 버리고 새 이름을 얻어서 이스라엘이 되었는데, 이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생 라합이라는 것이다. 원래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전담기생이었는데, 이제 이것이 이스라엘로 옮겨져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중부전선으로 갔다가, 그 다음이 북부전선, 그리고 남부전선의 순서로 정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갈렙의 땅을 차지함으로 전쟁이 끝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땅의 정복은 중부전선, 북부전선, 남부전선의 순서대로 진행이 되지만, 그러나 사실은 땅을 다 차지한 것은 아니고 산지만 차지한다는 것이다. 평지는 그대로 두고 말이다. 이렇게 되니까 나중에 사사시대에 가면, 평지에 있는 사람들이 산지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지는 이미 정복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 가나안의 이방민족들은 사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전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그래서 점점 공포심이 조성이 되는데, 그래서 기가 죽을 놈은 미리 기가 죽어서 화친하고 항복을 하면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 여기서 여호수아 10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수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수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수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수 10:19) 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 붙이시매 전쟁 -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족속과 싸울 때, 태양이 머무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붙이시매 전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가나안 족속을 칠 수가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의(義)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것과 기생 라합과 같은 자가 이스라엘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은 다 같은 말인데,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쪽은 의가 없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쪽이 되고, 이쪽은 의가 있기에 공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붙이시매 전쟁이라는 것이다.
* 다시 한번 반복하면, 처음에 유월절을 생각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비석을 세우고,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그리고 마지막에 갈렙의 땅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누가 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산봉우리와 골짜기처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올라갈 때는 여호와의 이름이 개입되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기생 라합이라든지, 아간을 쳐서 돌무덤을 만드는 경우라든지, 자꾸만 이렇게 가시로 찌르는 듯한, 그러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 한다는 것이다.
* 결국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나름대로 일을 해 가신다는 것이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든지, 아니면 온갖 미친 짓거리를 다 해도 주의 일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욕심으로 부부싸움을 해도 주께 감사하라는 것이지, 부부싸움을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 여호수아 10장에서, 태양이 중천에 떠서 머무른 사건을 한번 생각해보면, 도대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태양은 과거에는 창조된 아담 중심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 중심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태양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니까, 지금 그 이름이 이스라엘 안에 있으니 당연하다는 것이다.
* 우리가 부부싸움을 해도 주의 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주님은 주의 이름 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과 더불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중심이 우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라는 것이다.
*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상담을 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 아주머니 : 목사님, 남편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매일같이 두드려 팹니다.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 목사 : 그래요. 그래도 주님의 일은 변함없이 진행됩니다.
* 아주머니 : 그래도 목사님, 제 남편이 너무합니다.
* 목사 : '그래도'가 아니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면 됩니다.
* 너무했나? 다시 여호수아서로 되돌아와서, 지금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있는데, 이스라엘은 싸움을 계속해서 하고 싶은가, 아닌가? 'NO'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무 시간이 끝났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일이 여호수아의 일이 아니고,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하나님 이름의 일이니까, 즉, 태양은 하나님 이름 편이니까, 계속 태양은 중천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말이다. 하나님이 붙여주셨으니까 박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사건을 그대로 조금 전의 한 아주머니의 사건에 그대로 집어넣어서, 이런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하면 주무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모두다 얻어맞으면서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 아주머니는 얻어맞으면서도 눈은 주님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얻어맞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차라리 더 맞자!'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제대로 된 상담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지 않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질문 - 주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주님의 삶의 본을 본받는 것을 의미합니까?
* 답변 - 아닙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의 이름만이 하실 수가 있는 일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들은 '얻어맞아도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담을 받으면 한가지 더 첨가하는데, '같이 때려 패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드려 패도 구원을 받기에 말이다. 이 말은 남편이 술을 먹고 와서 두들겨 패면 경찰에 신고해서 감옥에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러면 왜 그렇게 못하는가? 남편이 없으면 자기 손해이니까 말이다.
* 그러니 이런 상담을 해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중심으로 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을 신고해서 감옥에 넣어서, 비록 독한 여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자기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영생을 얻으면 된다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주머니들이 너무나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집안이 저절로 잘 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스트레스를 안 받고 할 말을 다 하니, 가정에 저절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 스트레스여 안녕 !!
* 다시 말해서, 태양이 중천에 머무른 것은, 흔히 목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데, 사실 기브온 족속의 고통도 엄청나지만 이스라엘도 역시 피곤하다는 것이다. 이제 싸움을 그만하고 쉬어야 하는데, 낮이 훤하니까 싸우고 또 싸워야 하니까 말이다.
* 이런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는고 하니, '여러분 가정에 어떤 일이 있을 때, 내 중심으로 보지를 말고 주님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꾸 주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 10장을 한번 보자.
(수 10:24)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수 10:25) 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 여호수아가 자기의 군장들에게 적의 왕들을 죽이고 매달고 목을 밟으라고 하는데, 그러면 과거에는 왜 그렇게 못하였는가? 왜 이렇게 왕들을 짓밟고 죽이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자기 자신을 짓밟고 죽이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적의 왕들의 목을 짓밟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을 짓밟는 것이다 !!
*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왜 술 먹고 때리는 남편을 고발하지 못하는가? 여자가 자기가 자기의 목을 밟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과 자기 용기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 전도를 하는데, 부끄러워서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밟음이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존심을 버린다면 용기가 생기는데, 즉, 어떤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기면 모든 것을 다 이긴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밟고 난 뒤에 일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 복종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사무엘상 15장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사울 왕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살찐 양과 소들을 살려두는데, 그것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노획물들을 이용해서 전쟁을 잘하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왜 사무엘을 통해서 책망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은 사울이 가지고 있는 노획물이나 장비들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없애버리라고 했던 것이다.
* 그런데 이 사실을 누가 믿지를 않는가? 사울 왕이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사울 왕이여, 왜 양과 소를 다 죽이지 않았습니까?' 라는 사무엘의 말은 바꾸어 보면, '사울 왕이여, 당신은 왜 당신 자신의 목을 밟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사울 당신은 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당신 자신만을 앞세우고, 자신만을 의지하는가? 왜 자기 자신에게 자꾸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 사무엘상 14장에서,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친구가 블레셋에게 달려들어서 싸움이 붙자, 요나단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수(數)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요나단은 자기자신이 먼저 하나님에게 완전히 밟혔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를 따라오되, 그냥 오지를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자기를 매어 달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여기서 십자가를 진디는 것을, '내가 알아서 진다' 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조차도 말이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그런 존재가 못됩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라는 것을 입에 달고서 주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 마태복음 19장에서, 한 부자청년이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 과연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모든 재산을 팔고서 자기를 따르라고 했는데, 그래서 부자청년이 근심하고서 돌아가는데, 사실 정작 놀란 것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누가 과연 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 목사들이 대부분이 오해를 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구원이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 교인 :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 목사 :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교인 : 아는데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 목사 :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교인 : 그것은 아는데요, 예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 목사 :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교인 : 아는데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 목사 : 그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 이러한 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음이 없어서 믿지를 않고, 그런 조건을 자기 쪽에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모독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바보이지만, 인간은 똑똑하다' 라는 것이다.
* 그래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시키고, 명령을 해서 교회가 유지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는가? ① 인간 ② 하나님
* 문제가 너무 어려운가?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죄인이 한다고 하면, 그 죄인이 주체가 되기에 안 되고, 죄인을 통해서 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 자꾸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은 못합니다' 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목사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에, 교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으니까,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말이다.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 그러나 과연 야고보서의 내용이 그런 의미인가? 이 5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가 기도를 하는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까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이 신명기에 기록이 된 말씀에 어긋나니까 '주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이다. 벌을 받을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이 오도록 기도하니까,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목사의 모친이 병에서 낫는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데 뭘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갖다 붙이느냐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아프든지, 죽든지, 살든지, 주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이 목사의 모친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지 않는가? 그런데 왜 안 믿는지, 믿음이 없어서 인가?
◈ 오늘날 한국교회 특징은? -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반드시 인간이 들어가야 된다 !!
*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가? 교회의 지성소 뒤 구석에 계시는데, 그곳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주면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마치 뒷방 늙은이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한국교회 교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한번 도청해보자.
* 교인들 : 하나님, 저희들이 왔습니다.
* 하나님 : 야야, 너그들 왔나? 안 와도 되는데, 바쁜데 온다고 수고했데이.
* 교인들 :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십일조를 가지고 왔습니다.
* 하나님 : 그래, 돈을 고 수고를 많이 했데이. 쓸데도 많을 건데, 고맙데이.
* 교인들 : 아닙니다. 그런데 방이 왜 이렇게 차갑습니까? 여보, 여기 보일러 한대 넣어드려야겠어요.
* 하나님 : 아이다. 견딜만하데이. 콜록 콜록...
* 교인들 : 하나님, 계셔요. 일주일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 함께 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그냥 방 뒤 구석에 갇혀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결코 주의 일이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바로 이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일종의 '스폰서' 라는 것이다. 내가 일을 알아서 하는데, 하나님이 조금만 뒤에서 밀어주면, 일을 잘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만 시원하게 잘 되면, 그때에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교회에 바치겠다는 것이다. 더 잘되면 교회당 하나도 얼마든지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 아낌이 바치련다 !!
* 이것을 뭐라고 부를 수가 있는고 하니까, 하나의 '흥정' 이고, '거래'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능을 전적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 21장을 한번 보자.
(수 21: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이 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함부로 일을 하지 않으시고, '때가 되매'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때가 되매'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 동생들 : 형님, 이 촌구석에 계시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요?
* 예수님 : 아직, 때가 안 되었다.
* 동생들 : 때는 무슨 때입니까? 그냥 가서 얼굴이나 한번 보이면 되지요.
* 예수님 : 아니다. 아직, 내 때가 안 되었다.
* 이 '때'를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것은 말씀 자체가 손에 쥐고서, 말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라,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로버트 오툴의 [루가복음의 통일성] 참고
* 열왕기상 17장도 보면, 그 당시 엘리야 시대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오직 엘리야가 한 과부에게만 갔다고 되어 있는데,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 여호수아서 총정리 !!
* 지금까지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여리고 성 사건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여리고를 친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함께 치셨다는 것이다. 둘 다 버림을 받아야만 되지만, 하나는 긍휼을 입고 다른 하나는 입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 긍휼을 입은 증거가 바로 기생 라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간은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전쟁에서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의 것인데, 아간은 그만 자기 몫으로 챙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리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가 했다는 것이다.
* 십일조가 바로 이런 것을 보여주는데, 이 십일조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멜기세덱과 소돔 왕을 언급해야 되는데, 소돔 왕은 아브라함이 이겼다고 하는데 비해, 아브라함은 소돔 왕이 주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받는 쪽이 드리는 쪽을 축복해준다' 라는 것이다.
* 처음에 멜기세덱은 누구에게 축복을 했는가? 아브라함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복을 레위지파에게 주고 말이다. 그리고 레위지파는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말이다. 그러니 십일조는 복이 어떤 계통으로 내려오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계통에 십일조가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누가 받는가? 십일조란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인데,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맏물의 개념인데, 맏물과 다른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100%중에서 10%가 맏물이 아니고, 맏물은 서열상 장자개념인데, 이 맏물을 드림으로 다른 것이 복을 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받는 분은 하나님이고, 그 내용물은 맏물인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십일조의 완성이고, 그 복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받는 쪽이 내는 쪽을 축복하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십일조이기에, 십일조를 받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만 복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라고 하면, 십일조가 미완성되는 것이고, 만약에 '안 해도 됩니다' 라고 하면, 십일조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복을 안 받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십일조 안에 계셔요'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십일조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더 이상 무엇을 바치고, 안 바치고 할 문제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잠잘 침대를 하나를 사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는 것이다. 극동방송에서 이러한 소리를 했더니만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자기 집에 침대를 넣는 것이 어떻게 주의 일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지, 어떻게 자기의 것이 되는가? 아니 그런가?
◈ 복의 통로 : 멜기세덱 → 아브라함 → 레위지파 → 이스라엘 백성들
* 이 복의 계통이 하나하나 내려올 때마다 십일조를 주고받고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십일조가 예수 안에 있는데, 예수님이 십일조이고, 예수님으로 십일조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일조를 안 내겠다고 하는 것은, 십일조 밖에 있으면서 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기에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십일조를 미완성으로 보기에 역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으면 복을 받게 되어있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침대 하나를 구입해도 주님의 것이기에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다. 무익한 종이 이렇게 사용하게 되니까 말이다.
* 이 문제는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해결이 되는데, 한번 보자.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 사도바울의 말이라는 것이다. 이단 같은 이근호의 말이 아니고 말이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진짜 하나님은 무엇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일조가 무엇인고 하니, 다음과 같은 것이다.
* 하나님 : 너는 내가 준 것 인에 들어있는가?
* 성도 : 예, 들어있습니다.
* 하나님 : 그렇다면, 내가 복 주께, 복 주께, 복 주께 !!
* 성도 : 감사합니다.
* 하나님 : 네가 쓰고 있는 침대는 누구 것인고?
* 성도 : 예, 주님의 것입니다.
* 하나님 : 그렇다면, 내가 복 주께! 아이쿠, 귀여운 내 새끼야 !!
* 성도 : 감사합니다.
* 그러니 성도는 십일조 안에 늘 들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화장실에 가든지, 일하러 가든지, 테니스를 치러가든지 말이다. 항상 주님이 주신 십일조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엇을 바친다고 해서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마지막에 구원받을 때에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네가 무엇을 바쳤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직도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다면, 그분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뽑힌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심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으면 열매를 맺지만, 그러나 떨어지면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해서 세우신다는 것이다.
◈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점은? ① 받으신다 ② 주신다
* 유치원생도 다 아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면 이단시하니까, 이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이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이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를 않는다고 해도, 그런데 소위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들이 성경말씀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성령인가? 악령이면 몰라도 말이다.
* 정말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 같으면, 말씀과 맞아야 하지를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맞지도 않으면서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는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누구 말이 맞는가?
* 사실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하지 않으면 목회가 안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과 맞지 않다면 말이다. 무엇이든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지를 말고, '무엇이 옳은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만이 제대로 된 현실이다 !!
* 이런 주장을 하면, '말은 쉽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현실인가, 아니면 이상인가? 성경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서만 제대로 현실을 볼 수가 있지를 않는가? 한 마디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음의 이야기를 하니까, 이런 현상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 이것이 여호수아서에도 나오는데, 23장을 한번 보자.
(수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 이것은 너희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제 아무리 개판을 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밀어 부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사사기 2장에도 그대로 있는데, 다시 말해서, 성경은 순전히 하나님 입장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 자기편이라는 것이다. 자기 이름 편이라는 것이다.
* 시편 23편을 한번 보자.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구원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를 해주셔서 좋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자기 이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개판을 치면 칠수록 너희들만 손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희들 하나님을 안 믿지?' 라고 하니까, '아닙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한 장만 넘겨보면 당장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미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계속해서 우기는가? 그것은 여호수아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반복을 해야 하는데, 반복도 하지 않고 말이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부모들이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냥 출렁이는 파도만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들이 아무리 말해도, 지금 바다가 그대로 있으니 어떻게 그 사실을 믿느냐는 것이다. 한번 갈라지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기적을 통해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기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반복하라는 것이다. 이 유월절 사건을 반복하면서, 그래서 후손들이 이것을 물을 때, '야야,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단다' 라고 하는 것이다. 유월절을 반복하면, 홍해사건이 반복이 안 되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었는데, 이것을 다시 반복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반복하셨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위를 걷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가 기적이다' 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반복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유월절 사건의 반복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다 !!
* 미친갱이 전가화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는 죽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초대교회는 성령을 받아서 기적과 방언과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안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전가화를 불러서 뭐라고 해야 하는가? '전가화씨, 이리와 보이소. 예수님께서 무엇을 표적이라고 했습니까?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서, 그 표적은 바로 십자가임을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지, 병 고치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 병 고침을 받고 안 믿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10명의 소경이 고침을 받았지만, 몇 명이 돌아왔는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자가 한 명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또 고쳐달라고 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여, 믿나이다' 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과거에는 기도를 하니까 좋은 것이 나왔는데, 그런데 지금은 왜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십자가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인 것이다.
* 그런데 전가화와 같은 무식한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초대교회에는 병을 고쳤는데, 왜 지금은 못하느냐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서 이들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그렇다면 병을 고친다고 하면서 왜 물위로는 걷지를 않는가? 당연히 물위로도 걸어야 하지 않는가?
* 그러니 이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비겁한가? 뭔가 골라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사기' 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유월절의 반복이고, 십자가의 반복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사기에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