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찾아서 - 02. 젠과 페로, 우연이 낳은 만남
민서우
- 02
한편.
뿔테 안경에 얇은 삼각 모자를 쓴 적당한 체격의 소년은 뒤를 보며 황급히 골목길을 뛰다가 눈에 보이는 대로 열린 문 틈 사이로 들어갔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덕에 간판도 안 보고 들어간 소년은 숨는다고 숨은 곳이 하필 계산대 안쪽.
적당히 큰 공간에 각종 생활필수품과 식료품, 잡지와 신문 등이 잔뜩 있는 이곳은 바로 편의점.
때마침 간이식사대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가볍게(?) 먹고 있던 우락부락한 사내는 깜짝 놀라 계산대로 후다닥 왔다.
“야, 인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도둑이면 신고한다?”
“쉿, 쉿!”
무릎을 쭈그리고 앉은 소년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급히 막았다. 그리고 손으로 ‘X’ 모양을 그리며 없는 것처럼 해달라고 했다. 사내는 꼬맹이를 도와줄 생각으로 태연히 김밥을 먹고 현관문 앞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겉으로는 아르바이트생이 손님이 없어 점심 중에 주변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을 쫓아 경사진 길을 뛰어온 몇몇의 흑색 옷차림의 사내들은 편의점 앞에 우뚝 섰다.
“혹시 근처를 지나가던 웬 꼬맹이 하나 못 봤소? 뿔테 안경에 삼각 모자를 쓴 소년인데.”
“글쎄요~ 밥 먹느라 바빠서요.”
우락부락한 아르바이트생은 태연히 왼손으로 김밥을 집어먹었다. 사내들은 그의 대답에 별 의심을 하지 않고 세 개로 나눠지는 길을 따라 흩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사내는 그제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도 쭈그리고 앉아 있던 소년은 벌떡 일어나 계산대 앞으로 나와, 그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휴-! 덕분에 살았습니다.”
“꼬맹이, 혹시 사고 쳤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 같은 천재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소년은 목소리에 힘을 주려다가 말았다. 일단 그는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지 않은가. 인사도 했겠다, 가게를 막 나가려던 소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우렁찬 그 소리를 들어버린 사내는 씩 웃으며 소년을 붙잡는다.
“김밥 하나 줄까?”
“괜찮습니다.”
꼬르륵.
사실 소년은 지금 배가 많이 고픈 상태다. 지각할까봐 아침도 못 먹은데다가, 학교 점심시간인데 프로그램 회사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도망을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속으로 끈질긴 놈들이라 생각하면서 허겁지겁 달리다보니 경사진 길이었고, 위에서는 아래가 안 보인다는 길의 이점을 살려 몸을 숨긴 곳이 편의점이었던 것이다.
“킥킥.”
사내의 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얼굴이 붉어지는 소년이었다. 아~ 참 나! 나 같은 천재가 이게 무슨 꼴이람.
우물쭈물하던 그는 돌아서서 사내에게 물었다.
“돈 내야 하죠.”
여기는 편의점. 즉 돈 받고 물건 파는 상점이다.
“쿡! 내 알바비에서 까이지, 뭐.”
대신 내준다는 소리다. 하지만 소년의 시선은 사내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김밥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공짜로 점심을 얻어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소년은 손을 뻗어 사내의 김밥 하나를 집어서 홀랑 입으로 가져갔다. 사내는 다시금 쿡, 웃었다.
마치 동생이 하나 생긴 느낌이랄까. 처음 보는데도 뭘까, 이 친숙한 느낌은.
“녀석, 넉살은. 너, 이름이 뭐냐? 이 형님은 페로 템블로라고 한단다!”
“템블로…?”
김밥 하나를 더 주워 먹던 소년은 사내의 소개에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기울였다. 막 손님 몇몇이 들이닥치는 통에 둘은 얼른 간이식사대에 김밥을 내려놓고 계산대 안으로 들어갔다. 덩달아 소년도 페로 옆에 섰다. 페로는 손가락으로 옆에 선 소년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네가 여기 왜 서, 인마.”
“아, 잠깐만요.”
두 사람의 작은 투닥거림은 계산대 안에서 벌어졌고, 그 일을 모른 채 각자 살 물건을 고른 손님들은 계산대 앞에 섰다. 소년은 손님 중 한 명이 계산대 앞에 내려놓은 물건을 눈으로 한 번 슥 훑더니 말했다.
“14850케시입니다.”
소년의 말에 손님들과 페로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페로는 미심쩍은 시선과 함께 바코더로 물건을 차례차례 찍었다. 계산기는 총 14850케시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지갑을 꺼내던 손님은 다시 한 번 소년을 바라봤다.
“꼬맹이, 아직 어린데 몇 살이야?”
“저요? 15살인데요?”
소년의 반문에 손님은 20000케시를 페로에게 건네며 물었다.
“미성년자는 알바 금지 아닌가요?”
“하핫! 방금 여기서 작은 일이 있었습니다. 20000케시 받았습니다. 5150케시 여기 있습니다.”
잔돈을 건넨 페로는 손님이 가져온 쇼핑백에 물건을 담아주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다른 손님들의 물건 값 역시 계산기 보다 소년이 먼저 말했고, 그 계산은 모두 일치했다. 손님들이 가고 나자 페로는 간이식사대의 김밥을 갖고 와서 하나 넣어주며 감탄사를 늘어놨다.
“꽤 똑똑한데? 계산이 척척 머리에서 나오고 말이야. 엘프나 메머드는 아닌 것 같고.”
“네. 전 순수 아이렌트 혈통의 사람이에요. 젠 매리아라고 합니다. 형, 혹시 ‘하나 템블로’ 라고 아세요?”
“음, 내 사촌 동생이야.”
페로는 소년, 젠의 입에 김밥을 하나 더 넣어주며 대답했다.
“너 혹시 내 사촌한테 관심 있니?”
“네. 하프 메머드는 저도 처음 보거든요.”
페로의 오른손에 올려진 마지막 김밥 한 조각을 자신의 입에 쏙 밀어 넣는 젠의 대답에 순간 굳는 페로였다. 자신과는 달리 하나는 젠이 말한 대로 하프 메머드. 반쪽 인어다. 순수 메머드 혈통인 자신과는 달리 하나는 바닷물이 아니면 인어로 변신을 못 한다.
대륙 내에는 순수 바닷물이 없기 때문에, 하나가 혼혈이라는 걸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들킬 염려는 극히 드물다.
젠은 몸을 움직여 김밥 하나를 집어 페로 앞으로 와서는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뜯어달라는 행동과 말을 돌려 한다. 간접적으로 말이다.
“제 인생 15년에 이런 거 처음 먹어 봐요.”
“풋! 잘난 척 하기는.”
페로는 젠이 가져온 삼각 김밥을 성큼 뜯어주었다. 그가 김밥을 뜯는 사이 젠은 주머니에서 PT(=P-Terminal)를 꺼내어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페로는 젠이 자신을 “젠 매리아” 라고 소개한 걸 기억한다. 매리아가문은 순수 아이렌트 혈통으로 대대로 백작과 공작을 지낸 가문이다. 이름값이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 집에서도 거의 왕자로 지냈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 서민이나 먹는 이런 김밥을 먹어봤을 리 만무하다. 잘난 척하고 조금 건방지기는 해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녀석이다. 외아들에 사촌 중에도 남동생이 없는 게 결정적일 수도 있을 터.
페로는 자신이 뜯어준 삼각 김밥을 잘 먹는 젠을 보며 물었다.
“참. 너 아까 하나를 안다고 했지? 어떻게 알아? 녀석이 하프 메머드인 건 또 어떻게 알고?”
“제가 1학년인 작년에 학교에서 선, 후배로 만났어요.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가려진 작은 홍점을 우연찮게 보게 된 게 계기가 됐죠. 책에서 봤는데, 이마의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홍점은 아이렌트 어머니와 메머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메머드만이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알았죠. 지금도 PT로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에요. 오늘 감사했어요.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죠.”
젠은 편의점을 나가서 학교 방향을 향해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손님만 들이닥치지 않았어도 페로는 그를 쫓아 배웅을 했을 지도 모른다. 건방지고 잘난 척해도 귀여운 녀석, 이라고 페로는 생각했다. 아. 아까 아는 사이라고 했지? 혹시 나나 그 녀석 뒷조사 한 거 아냐? 그렇다면 하나가 그 녀석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페로는 곧장 주머니에서 PT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사촌 여동생.
“어, 잠깐만.”
그녀는 잠시 있다가 다시 PT 액정에 고개를 내밀었다.
“어, 오빠. 무슨 일이야? 좀 있으면 수업 아냐?”
“점장님이 안 오셔서 아직 편의점이야. 본론으로 들어가서, 방금 어떤 꼬맹이가 쫓기다가 우리 가게로 왔거든. 근데 그 꼬맹이가 자기를 젠 매리아라고 소개하더라?”
“정말? 와~ 걔 내 후밴데! 이런 우연도 있네?”
뒷조사가 아닌 게 확실해졌다. 젠은 실제로 하나가 나온 보헤즈미들스쿨에 다니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굳어 있는 사촌 오빠의 상황을 모르는 하나는 얘기를 계속 했다.
“나 3학년 때 걔가 입학을 했으니까 딱 1년 만났어. 하이스쿨에서는 간발의 차로 수석을 놓쳤지만, 난 그렇게 연연하지 않아. 학생회는 너무 힘들다는 걸 미들스쿨에서 이미 깨달아버렸거든. 아무튼 나도 곧 수업이거든, 오빠? 끊을게.”
“어? 어어.”
오빠가 대답을 하자마자 하나는 종료 단추를 눌러 전화를 끊고 다시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윌과 리유는 조금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
“궁금해. 이유를 알려줘. 내가 종족에 관련된 이 책을 왜 보면 안 되는지. 안 된다고 한 건 너잖아. 왜? 왜 읽어보면 안 되는데? 난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어서 이 학교로 왔어. 내가 가출을 감행하면서까지 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거 이미 얘기했잖아. 그럼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이유를 알고 싶어. 내가 왜 이 책을 보면 안 되는지.”
윌은 다다다다닥 대답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물었다. PT를 주머니에 넣고 다가온 하나는 윌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서 가출까지 했다는 말에 크게 놀랐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한 리유의 얼굴. 그는 알게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책을 보게 되면 자신에 대해서 곧장 알아차릴 테니까. 그렇게 되면 멀리 할 지도 모르니까. 다른 학생들처럼 거리를 둘 지도 모르니까. 이러기 위해서 온 게 아닌데 자꾸만 숨는 것 같아서 스스로가 미웠다.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 하는 리유 옆으로 하나가 다가섰다.
“리유.”
리유는 가만히 하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용기를 내. 먼저 다가서야 하는 건 너야. 우리야.”
하나는 그녀의 말에 안정을 느꼈다. 깨물었던 입술을 풀고, 리유는 조금 딱딱한 표정으로 윌을 바라봤다.
“나…. 하프 엘프야. 그래서 못 보게 했어. 그 책을 보면 나에 대해 눈치 챌 것 같아서. 그러면 한 달 늦게 입학한 너마저 나한테서 등을 돌릴 것 같아서.”
윌은 눈을 껌벅였다. 하프 엘프, 인간과 엘프의 혼혈. 리유는 눈을 꼭 감았다. 윌도 다른 학생들과 같은 반응일 테니까. 하지만 윌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게 그렇게 감춰야 할 정도로 큰 비밀이야?”
집 근처의 놀이터. 하나는 양손 가득한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네에 앉았다. 그녀를 따라 집 밖으로 나온 리유도 그네에 앉았다.
“난 어머니는 아이렌트, 인간이고 아버지는 메머드, 인어야. 21살 언니도 나랑 같은 하프 메머드고, 외할머니는 엘프 메머드래. 하지만 대대로 메인메머드 집안이야. 넌?”
“난 하프 엘프. 어머니가 엘프셔.”
바람이 불었다. 2월의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꽃들도 나뭇잎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바깥세상은 참 평화롭구나. 리유는 그렇게 느꼈다. 그동안 왜 집안에만 있으려고 했을까. 왜 부모님 말씀만 따랐을까. 급격한 후회가 밀려왔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하나가 들고 온 두 개의 봉투가 보였다. 시장 보고 오는 듯했다. 얘는 바깥 세상에 출입을 하는구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넌…. 혼혈이라는 게 싫지 않나봐?”
리유의 말에 하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우리 가족 중에는 혼혈인 사람이 몇 있어서 그런가봐. 그래서 사촌 오빠가 굉장히 이상해 보여. 사촌 오빠는 혼혈이 아닌, 순수 메인메머드거든. 왜? 넌 혼혈이라는 게 싫어?”
“응. 난 싫어. 우리 가족 중에는 혼혈이 없으니까.”
나만 반쪽이니까. 그래서 싫다. 나를 반쪽으로 만들어버린 엄마도 아빠도 다 싫다. 지금까지 쭉 집에서만 지냈다. 바깥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운 것도, 나와 같은 반쪽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바깥세상으로 나와도 난 혼자일 테니까.
“단순히 그런 이유라면 혼혈을 싫어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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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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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의깊게 보지를 않아서 팍 느끼진 못하겠는데 뭔가 하나 부족한 느낌이랄까요.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잘봤어요/
그런가요.(끙)
뭐랄까, 난 케레스님 처럼 글을 잘 쓰는 게 아니기때문에 저런 점은 못 느끼겠어;; 나로썬 언니처럼 쓸 수 있는 때가 언제쯤 올까,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