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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3 동양문화의 뿌리-곡부의 공자유적지 글/사진: 이종원
공자의 발자취-3공 동방의 성지- 곡부의 공묘, 공림, 공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유서깊은 곳이다. 수 천년동안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곡부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며 예를 숭상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벽돌 한장,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찬란했던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공림 공림의 들어가는 문에 '至聖林(지성림)' 이라고 쓰여 있다. 공자가 죽은 후 至聖先師 즉 지식과 인격이 거룩한 전무후무한 스승 으로 추앙되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문에 들어서면 양편에 향나무가 가득하다. 좌측 나무 숫자는 공자의 나이(74세) 를 의미하며 우측 72수는 공자의 제자중 가장 뛰어난 제자수를 의미한다고 한다.
공자묘로 향하는 양편에 기념품점이 가득하다. 들어갈때 이름을 써주면 나올때 찾을 수 있다. (한국돈 1천원)
연애소설에 흠뻑 빠진 중국인 아가씨..설마 정석수학은 아니겠지.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가면 또하나의 문이 나온다. 지성림이라고 쓰여 있다.
공림은 공자의 묘이기도 하지만 공씨집안의 전용 묘지이기도 하다. 무덤만 10만여개에 묘비가 400기가 있어 세계 최대의 가족묘지이기도 하다. 중국전역이 벌채로 벌거숭이가 되었지만 2400년동안 보호 받아 수백년된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자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전국각지에 모여들어 측백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벗나무등 각종 나무를 심어 공자에 대한 애도의 정을 표했다고 한다. 현재 공림의 둘레는 5591미터이고 총 183.33 헥타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공자의 후손만이 누리고 있는 특혜다.
주영교를 건너면 참도가 공자의 묘까지 이어진다.
참도가 공자사당까지 이어진다. 조선 왕릉에도 참도가 있는 것을 보면 2천 5백년 전 스타일이 시차와 거리를 두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 대단하다.
망주석도 보인다. 절에서 당간을 세워 멀리서도 절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는데 무덤에도 역시 망주석을 세워 멀리서 무덤을 쉽게 알수 있도록 했다. 경주의 괘릉이나 흥덕왕릉에도 망주석이 있고..조선의 왕릉 그리고 지금도 부자들의 무덤에는 망주석을 세운다. 우리나라는 주로 봉분 앞에 모셔져 있는데 중국은 초입에 세워 놓았다.
중국사람들은 이 망주석을 건너 뛰으면 복을 얻는 다고 해서 훌쩍 뛴다. 시범을 보여줬던 이철용 가이드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양영훈 여행작가는 오래오래 살거여요.
중국의 사자상은 중국집 아저씨처럼 푸짐하게 생겼다. 거기다 미소까지 짓고 있다. 사자춤에 나오는 사자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 왕릉에는 말과 양, 호랑이가 수호석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이다.
서로 얼굴을 맛대고 있는 표정이 정반대다. 홀을 들고 있는 문인석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고, 칼을 들고 있는 무인석은 인자하게 웃고 있다. 얼굴 주름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을 정도로 섬세하다. 우리 왕릉은 무인,문인의 구분이 확실하다. 무인석은 갑옷을 입고 늠름하게 서 있지만 이곳의 석물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문인, 무인을 구분하기 힘들정도로 비슷하다. 가운데 왕을 상징하는 세발 향로가 보인다.
하늘을 찌르는 나무를 종종 만날 수 있다.
공자의 묘앞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묘다. 유교의 정통성은 손자인 자사가 이어 받는다.
공자묘의 우측편에는 공자 아들 묘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 중국에서는 벌초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균관에서 돈을 들여 벌초를 하겠다고 했는데 중국정부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 나름대로 전통이 있으니까....) 공자묘 동양문화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공자가 아닐까? 그는 BC 551년 노나라 곡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처님이 태어난지 10년 전,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이다. 4대 성인중 3분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공자는 3살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무사인 아버지의 피를 받아 체구가 당당하여 9척 6촌의 장신으로 알려져있다. 한대까지 곡부의 공자묘에 보존되었던 그의 의복을 보아도 그 체격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신흥세도가들이 노나라의 황실을 전횡하자 그는 미련없이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지만 실패하고 다시 귀국하여 작은 벼슬을 얻어 큰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삼환씨의 부도덕한 행실을 참지 못하고 56세에 고국땅을 등지고 14년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방황 한다. 수 많은 고생과 수모 배고픔을 겪은 후 공자는 젊은이를 위한 교육이 세상을 바꿀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 신지식인을 양성한다. 무려 3천명의 제자가 그를 따를 정도였다. 시, 서, 예, 악, 역을 재평가하여 교과서로 채택하고 전통문화를 가르쳤던 것이다.
73세가 되던해 어느날 아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이 시들려는가?'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태산같은 업적을 후세인들에게 남기고 절명한다. 비석에는
전서로 '大成至聖文宣王墓' 라고 새겨져 있다. '왕'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우리나라 성균관 대성전이나 향교에는
아직도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고 쓰여진
위패를 모시고 있다. '크게 이룩하고 지극히 성스럽게 문을 떨친 임금'이라는 뜻이다. 역대 중국의 황제는 공자묘에 참배를 하는데 황제가 왕에게 절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였나보다. 멀찍이서 王이라는 글자를 보면 干자처럼 보인다. ^^
이렇게 가운데 획을 길게 내밀었기 때문이다.
자공의 시묘살이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제일의 변설가(辯舌家)다. 그의 변설은 외교면에서 지극히 유용하여 제(齊)나라와 오(吳)나라를 오고 가면서 변설을 구사하여 노(魯)나라의 위기를 구했다.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자공은 공자보다 현명하다고 했고 당시의 정치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공자의 장례를 혼자 도맡아 치렀고 공자가 죽은후 이곳에서 6년간 공자묘를 지켰다. 그는 재산을 늘리는 재주가 있어서 천금을 쌓았다고 하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부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곡부 곡부는 고대 주나라와 한나라 땅이었으며 800여년 동안 노나라의 수도였다. 유가학설의 창시자인 공자와 제자인 맹자도 곡부출신다. 북경의 자금성과 태안의 대묘와 더불어 중국 3대 고대건축물 중에 하나다. 그렇기에 도시 전체가 역사도시이며 중국내음이 가장 물씬 묻어나는 도시이다.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섰고 10년간 (1966~1976)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곡부는 어린 홍위병에게 치욕적인 굴욕까지 겪기도 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2500년동안 중국인에게 끼쳤던 영향력을 한꺼번에 부정하였기에 로 불가능한 말이다. 지금 중국엔 다시 공자 열풍이 일고 있다.
미국에 피자가 있다면 한국에는 부침개가 있다. 중국 역시 맛나게 보이는 부침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공묘 공묘는 공자의 옛집을 사당으로 삼았다. 그 규모도 대단하여 황궁의 규격을 따랐을 정도다. 공자를 모셔 놓은 전 세계의 사당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기원전 480년 공자가 죽고 난 다음해에 그의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한 행단에 3칸짜리 대성전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이 공묘의 시초다. 그 후 역대 황제에 의해 수십차례 증축을 겨쳐 당나라때 기본 골격을 갖추었고 명,청대에 이르러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황제가 공자에 대한 인력,물력지원을 아끼지 않으니 일반인들도 공자를 추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묘의 첫번째 돌패방은 팔각석주로 이루워진 금성옥진이다. 명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인 호찬종이 쓴 것이다. '글을 읽는 소리는 금소리와 같고 글을 떨치는 것은 구슬과 같다'는 뜻이다.
영성문 후한서의 기록에 보면 황제가 영성에 먼저 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공묘의 제례도 하늘에 드리는 예와 같다는 의미다. 편액은 건륭제의 친필이다.
태화원기는 공자의 유가학설이 우주천체와 같이 영원하다는 뜻이다.
至聖廟 ..지성은 공자에 대한 존칭이다.
매표소는 성시문에 자리잡고 있다. 맹자에 수록된 문구이며 성인들 중에서 공자가 현실 당면문제를 가장 잘 인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시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온다. 자금성이 자객이 숨어있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가 거의 없지만 이곳은 나무가 무성해서 가슴마져 시원하다. 소림사의 관문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성금성큼 걸었다.
홍도문 논어의 위령공에 나오는 말이다. '人能弘道, 非道弘人' 즉 사람이 도를 넓힐 수는 있지만 도가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 라른 말에서 따왔다.
대성전까지 참도가 이어진다. 가운데 길은 귀신이 다니는 신도다.
대중문 지붕이 비싼 청기와로 덮혀 있다. 전직 대통령이 좋아할 문이다.
13비정 십삼비정은 당대이후 역대황제들의 비문을 수장하고 있다.공묘내에 있는 비석중 오래된 것은 한 대의 것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것이 신해혁명무렵의 것으로 시대에 따른 다양한 서체의 비석이 200기가 넘게 경내에 세워져 있다. 공묘는 중국내 유수의 비림중 하나로 손꼽힌다.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규문각 일종의 도서관건물이다. 높이 23.3미터, 가로 30미터로 2층건물이다. 못이나 접착제늘 전혀 사용하지 않고 1천만개의 나무를 모두 하나씩 이어 만든 건물이다.
13비정
대성문 공묘의 마지막 대문으로 송대때 지어진 대문이다. 옛날엔 공자에게 제사 지낼때만 문이 열렸다고 한다. 한국의 성균관 대성전 문은 지금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행단 대성전 바로 앞에 행단이 자리잡고 있다. 송대 이전까지 대성전이 있던 자리였다. 공자가 노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장소로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단이다. 송대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곳에 단을 쌓아 살구 나무를 심어 후학을 가르쳤던 장소를 기념했으며 최근에 다시 에 정자를 짓고 행단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무조건 외웠을 것이다. ^^
대성전 앞에 새겨진 답도. 용은 하늘과 황제를 상징한다. 우리 궁궐에는 황제가 아니라 왕이기에 봉황이 새겨져 있다.
대성전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태안의 대묘의 천황전과 더불어 동방 3대 대전으로 손꼽이는 건물이다. 전세계의 2천여개의 공묘가 있는데 이 모두가 곡부의 공묘를 보방하여 건축한 것이다. 보기만 해도 화려하고 웅장하여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만다. 지붕은 황궁에나 쓴다는 황색유리 기와이며 높이 32미터, 폭 54미터 길이 34미터로 28개의 돌기둥에 의해 공자를 받치고 있다.
대성전을 보노라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성전 앞 마당에서 제공악무가 열린다. 공자의 생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음악,시가, 무용등 종합예술이다.
대성전 한가운데 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9척 장신답게 우람하게 앉아 있다. 공자상 좌우에는 사배라고 불리우는 4명의 현자인 안자, 증자,자사, 맹자상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대성전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 대성전을 받들고 있는 대리석기둥이다. 황제의 상징이기도한 용의 조각은 자금성보다 더욱 화려하고 정교하다. 청나라때 황제가 이곳을 찾았을때 이 건물의 화려함을 보고 노할 것이 두려워 천으로 기둥을 모두 감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황궁에만 용을 새길 수 있으며 다른 건물에는 용을 새길 수 없도록 했다. 이 기둥에 새겨진 비룡만 보더라도 중국내 공자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웃는돌님이 용을 감상하고 있다.
총 28개 기둥이지만 정면 10개의 기둥에만 돋을 새김을 했다.
대성전 동재의 회랑
공택고정 공자가 직접 마셨던 우물이란다.
노벽 우물 뒤에는 벽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공자의 9대손 공푸가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피하기 위해 경서를 고택의 벽에 숨기고 흙을 발라 놓았는데 선한때 궁을 확장하기위해 공자의 고택을 헐어내던 중에 경서를 발견한 것이다. 이때부터 '魯壁藏書'라는 말이 생겼다.
공자의 일대기를 벽화로 만들어 놓았다.
시례당 앞에는 당나라 회나무와 송나라 은행나무가 아직까지 자라고 있다.
공묘에서 나와 골목에서 모놀포즈...한방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가치와 생활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상이 공자사상이 아닐까? 그 정신의 뿌리를 찾아 이 먼땅 곡부까지 왔다. 이젠 눈에 보이는 흔적은 그만 찾고 그의 정신세계를 찾아 떠나야 겠다. '學 而 時 習 之 不 亦 悅 乎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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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자와 그 제자들 그리고 성인을 알아보고 숭상하는 황제들....살아생전 그렇게 등용되기 위해 애쓰다 상가집 개란 욕까지 먹은 공자가 죽어서 황제들의 숭상을 받는 아이러니... 위대함은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오자하나 지적(주영교가 아니고 수수교입니다.)
종원 대장의 글로 다시금 정리가 된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