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功碑文(1963년)
긴 역사를 통하여 잊지 못할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그분들은 모두 금석을 뚫은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나라와 겨레에 보람있는 일들을 한 사람이다. 때가 만약 이분들에게 회천의 거업을 요청한다면 이분들은 정충을 일월과 같이 밝히고 대의를 태산과 같이 무겁게 하여 생명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보고 영욕을 티끌처럼 생각하기도 하나 도리켜 강토를 지키고 인륜을 바로 잡아 수성의 경륜을 이룩할 때에는 정치와 문화를 바로 잡고 나라 사이의 화평을 도모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기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것이다.
여기 일찍 우리들이 잊지 못할 거룩한 분이 있었으니 성은 이씨요, 이름은 예(藝)이며, 자는 중유(仲游)요, 호는 학파(鶴坡)로 학성(鶴城)을 본관으로 하고 뒷날 나라에서 시호를 충숙(忠肅)이라고 나리신 충숙공 이예이시다.
공의 선대는 고려조의 명문이었으나 여말 선초의 왕조 교체때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의로운 절개를 지킴으로써 전락하여 향리 신분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대의 충절을 핏속에 간직한 공은 일찍부터 향리로 출사하여 태조 5년에는 24세의 약관으로 지주관(군수) 이 은(殷)의 서기관이 되었다.
고려말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는 새 왕조가 교체되어서도 쉬지 않았다. 울산은 왜구가 자주 침범한 곳이라 왜구는 드디어 지주사 등을 납치하여 갔다. 공은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상관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 은과 함께 대마도로 납치되어 갔다. 왜인들의 백가지 유혹과 독살하려는 위기에서도 상관에게 바치는 지성과 예절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 없었으니 마치 신라 때 박제상의 충절을 그대로 계승함이라 하겠다. 완강한 왜인들도 공의 행동에 감동하고 드디어 이 은과 같이 본국으로 호송하여 주었다.
조정에서는 공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이역(吏役)을 면하고 벼슬에 등용하였다. 이로부터 공의 일생 사업은 왜구를 막는 일과 왜구에게 납치되어 간 백성들을 구출하여 오는 일과 나아가 당시 조·일 외교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시종하였던 것이다. 조정에서 왜구를 막는데 저들을 회유하는 길과 저들을 정벌하는 길을 아울러 썼다. 저들을 회유하는 길은 소극적으로 귀화하여 오는 자를 포섭하여 편히 살게 하여 주고 적극적으로 대마도주를 비롯하여 일기도와 구주지방 호족들에게 의리로써 달래는 글을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자진하여 왜구를 막도록 타이르는 일이었다. 물론 조정의 자소회유에 의한 것이라 하겠으나 공과 같이 왜인에게 존경받고 신임받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회유하여 듣지 않았을 때 정벌할 수 밖에 없었다. 세조 1년 5월에는 조정에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함에 이종무로 삼군도체찰사를 삼고 공으로 중군 병마부수를 삼았다. 그 죄를 묻고 그 의를 살피고 위덕으로 효유하며, 무력으로 응징하니 공은 유악에 참획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한편 물밀듯 닥쳐오는 저들에게 끊임없이 살육되고 약탈당하는 무고한 우리 백성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는 것이 공의 가장 큰 임무였다.
태종 1년 조정의 명을 받들고 대마도에 가서 도주를 대의로 달래어 왜구를 막도록 납득시키고 납치된 사람을 구출한 뒤로부터 왜인에게 대한 대소사는 직접 간접으로 공이 관여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태종 16년에는 멀리 유구국에까지 가서 왜구에게 납치되어간 우리나라 사람을 돌려왔고 또 우리나라 삶과 같이 대마도로 납치되어간 명나라 사람도 공의 힘으로 돌려 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은 전후 40여차에 걸쳐 사명을 받들고 해외에 내왕하면서 무도한 왜구에게 잡혀간 우리 백성과 명나라 사람을 수 없이 구출하여 왔으니 이러한 일은 공의 사생을 초월한 위국충성과 겨레를 생각하는 간곡한 정성과 임무를 수행하려는 굳센 의지와 아울러 위혜를 배풀어 국위를 이역에 선양하려는 긍지가 아니고서는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의 후덕은 왜인에게도 미쳐서 왜인 통백라의 사죄를 속은하여 주었고 도왜의 생리를 생각하고는 회유의 온정을 베풀기도 하였으니 왜인의 공에 대한 신망은 실로 컸던 것이다. 공의 이름은 비단 우리나라와 일본과 유구국 등에서만 널리 알려졌을 뿐아니라 또한 명나라 사람에게도 알려 졌던 것이다. 그러나 조·명 양국의 봉쇄정책과 왜구 자체의 내란 상태는 회유 무마와 일시적 정벌로서만 진정될 수 없었다. 대외문제를 화전 양면으로 다룬 고은 조·왜 양국간에 있어서 대마도의 비중을 생각하고 도주를 달래어 왜구를 막는 총책임자로 내세우고 문인제도를 실시하여 왜인들이 함부로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울산 염포, 동래 부산포, 웅천 제포의 삼포를 열어 거류민을 허락하고 세견선에 양곡 보조를 하여 주었고 왜구 금알의 발본색원책을 강구한 세종 25년의 계해조약(癸亥條約)의 성립에는 공의 직접 간접의 공이 컸던 것이다.
이 밖에도 공은 태조 이래 세종조에 이르는 동안 국왕의 신임을 받아 대외관계와 국방책에 허다한 공적을 남겼으며 특히 화통 완구의 무기와 병선 제조법 등의 개선을 건의함은 오로지 국방과 조·일 관계에 이바지한 공적이라 하겠다.
공은 태종 1년 벼슬에 등용되어 봉렬대부 예빈소윤 행좌군사직이 되었고 세종 1년 중군 병마부수를 거쳐 세종 3년에는 공패를 받고 절충장군용양위사 상호군이 되었으며 누진하여 자헌대부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세종 27년 2月 23日 정묘에 73세를 일기로 하세하셨다. 영조 13년에 향사를 세워 공의 영현을 봉안하였고 철종 14년 상충사의 비석을 원문 밖에 세웠으며 융희 四년에 시호를 내려 "충숙"이라 하니 사후의 영광이 생전의 공적과 후손의 "승지누공"으로 더욱 빛났다.
뒷 사람이 공을 말하여 "강의하고 질직함은 천성의 돈독함이요 초년에 험난을 피하지 않음은 윗사람을 섬기는 충성이요 중년에 여러 번 바다를 건너서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음은 사신의 재능이요 유악에 참획하여 싸움에 이김은 지혜와 용기를 갖춤이라"고 하니 적중한 말이라고 하겠다.
아! 공은 몸을 변방의 한미한데서 일으켜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신명을 돌보지 않았고 그 남긴 공적이 청사에 영원히 빛나니 어쨰 우리들이 길이 존경하고 추모하지 않으랴, 여기 공의 유허에 한 조각 비문을 세워 그 유렬을 추모하며 그 공적을 약기하여 뒷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려 하는 바이다.
서기 一九六三년 월 일
東亞大學交 敎授 丁仲煥 謹植
國史編纂委員 / 高麗大學校 敎授 李弘稙 謹植
國史編纂委員會事務局長 / 高麗大學校 敎授 申?鎬 謹植
文化財委員會委員長 /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金?基 謹植
延世大學校 敎授 李家源 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