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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하는... 스크랩 <스크렙> 부활절 설교 및 자료모음
주님과 함께 추천 0 조회 103 17.02.10 11: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활절 설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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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

1. 막달라 마리아(마가 16:9; 요한 20:18)

2. 여인들(마태 28:9; 누가 24:10)

3. 베드로(누가 24:34; 고전 15:5)

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누가 24:13-35)

5. 이층 다락의 제자들(누가 24:36; 요한 20:20)

6. 도마와 함께 있는 제자들(요한 20:26)

7. 갈리리 해변의 제자들(요한 21:1)

8. 산상의 11제자(마태 28:16; 마가 16:14)

9. 500명의 제자들(고전 15:6)

10. 야고보(고전 15:7)

11. 승천시 감람산상의 제자들(사도 1:3; 누가 24:50)

12. 다메섹 도상의 바울(사도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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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할 수 없는 부활의 증거

로마의 바티칸 궁정에는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Picta)라는 조각품이 있다. 그 작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성모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이탈리아의 어떤 정신병자가 그 조각을 파손시켰기 때문에, 또 다시 많은 경비를 들여서 보수하였고 지금은 유리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그 조각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이틀 전까지조각했다는 걸작품이다. 이를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데,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그 앞에 꿇어 앉아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그 작품의 모습처럼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일생이 끝났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 할 수 없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슬픔의 종교요 무덤으로 끝나야만 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구원의 종교임을 증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에 대한 기사로 가득차 있다. 부활의 진리를 기독교의 중심되는 내용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며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
람세이(A.M.Ramsay) 교수는 말하기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복음은 결론이 없는 복음일 뿐아니라 전혀 복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 (Thomas Anold)가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때 영국의 무신론자였던 리틀스톤(Girbert West)는 자기들이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의 변화였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변정하기 위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두 사람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도 더 이상 이에 대한 반증을 할 수가 없네.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아니라, 우리들이 죄인임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 밖에 없네"라고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부활사실을 부인하기 위하여 연구하던 무신론자들이 오히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을고백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부활을 부정하는 세력은 다 망했으나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는 교회는 언제나 살아 역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님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 했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속에 시가행진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한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작이 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들처럼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니요 산 자를 믿는 종교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예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을 찾을 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나?"라고 하는 천사들의 책망을 들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요, 책 한권 쓰시지 않으셨고, 번듯한 집 한채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으시면서도 세상의 부의 주인이 되시며, 군사 한 명 없으셨으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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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설교

본문: 요한복음20 : 1 -29 찬송: 154장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중요한 두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절기요,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고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킨 절기입니다.
즉, 성탄이 인류 구속의 시작이라면 부활절은 인류구속을 완성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바로 깨닫고 믿는다면 이 두 절기의 축복과 은혜는 한없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두 절기를 개개인에게 적용해본다면 또 다른 의미와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탄절은 객관적인 주님의 탄생이지만 부활절은 주관적인 주님의 탄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실 때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지만 실제로 주님은 그 당시 만난 사람들 속에서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아니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에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성령으로 오시어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믿을 수도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탄절 보다 부활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님의 수난의 행사 등을 하며 기념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런 행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 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을 찾은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갈릴리 바닷가에 가있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요21:6)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그렇게 하니 그물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숯불에 고기와 떡을 구워 함께 하셨을 뿐 아니라, 그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셨고,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500여 명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고, 40일 동안 계시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또 본문 20- 24절에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야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자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 받는 자리에 도마만이 빠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주님을 쫓아다닌다고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신앙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의심의 장벽을 넘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도마를 사랑하사 도마가 있는 장소에 다시 나타나시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도마에게 부활의 주님이 보이기 사작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의심 많고 피상적인 신앙의 장벽을 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그제서야 예수님은 도마의 주님이 된 것입니다. 즉 도마의 부활절이 온 것입니다. 도마가 그랬듯이 의심 없이 주님을 믿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오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즉 나 자신의 성탄이 되는 부활절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어렵고 힘든 세대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의심은 했지만 도마처럼 자신의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만난 자는 복된 자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차례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에게 미리 말씀하셨고(마12:38-40, 마16:21, 마17:9, 23, 막8:31, 눅9:22, 요2:19-21),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사흘 후에 살아나리라 한 말을 기억하고 무덤을 지키기 위해 수직병을 세웠습니다.(마27:63-66) 무덤을 철저히 지키라는 엄격한 명령을 받은 수직병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 중의 일부였으니 그들은 불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큰돌로 단단히 막고 인봉까지 한 무덤이 갈라지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제일 먼저 목격하고 이 사실을 제사장들에게 알리자 제사장들은 수직병들에게 돈을 주며 군인들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는 수직병들의 증거가 너무도 명백하여 어찌할 수 없게되자 제사장들이 간교한 최후 방법을 쓴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 예수가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부활하였다고 주장할 때 당시의 권세 가진 제사장, 서기관, 바리세인들이 로마제국 병정을 시켜 예수의 시체를 찾아 보임으로서 제자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체가 없음으로 단지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시체를 훔쳐 갔다고 주장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부활의 사실은 무덤에 장사된 예수를 찾아간 여인들이 무덤의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들어가서 예수의 누우셨던 자리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수위까지 발견했습니다. 무덤문이 열려서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과 저들의 손으로 지어 예수의 시체를 쌌던 수의를 발견했다는 것은 예수가 무덤가운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밖에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뵈었으니 어찌 더 다른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 한 두 사람이 목격한 바도 아니요, 오백여 사람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제자들과 함께 떡과 고기도 잡수셨습니다. 제자 중에 믿음이 약한 도마는 그래도 믿기지 않아 예수의 손에 못 박힌 자국과 옆구리에 창에 찔린 흔적까지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각기 고향으로 뿔뿔히 흩어졌던 제자들이 그의 부활하심을 보고, 다시 용기를 얻어 온갖 환란과 시련을 당해도 복음전도에 힘쓰지 않았던가?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거짓증거하고 허위로 선전하였다면 오늘까지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했을 때 그중 한사람이라도 본심으로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송두리채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하고 사기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를 위해 거짓을 말하고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돈과 여자와 명예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도 버리고, 돈과 명예도 버렸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구태여 거짓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하나만으로도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경우를 수없이 당했는데, 거짓말하면서까지 예수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였을까? 를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16-20)
즉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주장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모든 외침은 다 쓸데없는 메아리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가짜 대통령 아들 이강석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사기꾼으로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면 이처럼 큰 거짓말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 가짜 주장으로 인해 지난 이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속아서 살았던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실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기꾼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인류는 그를 4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무언가 이치가 맞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진실로 거짓말로는 굳게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거짓이 아닌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지도자들이나 위인들도 죽음 앞에서는 별 수 없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잠시 기절했다가 회생한 사람은 혹여 있어도 피를 흘리고 사흘이 지난 후에 다시 산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진시황제도 천하를 지배하려했던 징기스칸도 천하장사 항우도 결코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며,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만이 세계인류에게 참 소망을 줄 수 있는 교회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는 종교는 거짓된 길이요, 멸망의 길이며, 내세가 없다 주장하는 무리는 어리석은 자들이요,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2천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십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믿어야 합니다. 보고 믿는 것은 사도들에 의해 끝이 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믿음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믿음하나만 요구하십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 할 때 "오직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증거해야 합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내 가족, 부모, 형제를 구원해야 합니다 .북한동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
셋째,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의 여인과 사도들의 삶은 새로운 삶, 변화의 삶이었습니다. 마귀와 사망의 저주 아래 있던 삶이 구원과 생명, 자유와 승리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끝으로 부활에 대하여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세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부활은 지금까지 말씀한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무덤을 깨뜨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미래의 부활로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는 성경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살과 뼈까지도 그리스도의 변화하심 같이 우리도 변화되며 영원한 복락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현재의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현재에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해골 골짜기와 같아서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은 다 죽은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살기 위하여는 영혼이 햇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기도의 호흡과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진리의 생명수를 항상 마셔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미 주님이 가셔서 일하고 계신 곳을 따라 한국교회도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감격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종교인 기독교에 귀의하되,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전 생애를 걸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다시 살고, 함께 모여 살아 영원 무궁토록 복락을 누립시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온 천하에 전하며 참 평화와 기쁨이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 무덤문을 여시고 이 아침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오며, 우리 주님을 사망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다시 사는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주님 죽으심으로 낙심과 절망 속에 사로 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시므로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주심같이, 우리에게도 오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얻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님, 우리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주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옵소서. 주님 안에서 죄에 죽었던 우리를 주님의 부활 신앙을 통해서 다시 살게 하옵소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주님이 죽으심으로 실의에 찬 길이었습니다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므로 새로운 기쁨을 얻고 예루살렘에 돌아감같이 우리도 엠마오의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오늘날 어두워져 가는 이 역사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옵소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죽음이 없는 영생의 삶이 있음을 확신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담대히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부활의 희망되시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1. 4월 15일 (한 태 완 목사 등대교회 부활절 예배 설교)

* 묵상 및 토의
0 부활은 주님이 오신 목적과 사명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의 표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믿음으로 담대히 행합니까?
0 나는 육신이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 부활 찬송과 루이 14세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성도로서 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죄로 세오졸프라는 사람을 체포하여 파리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 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 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그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 부활에 대한 금언
0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0 기독교는 종교가 끝나는데서 부활과 함께 시작한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죤 s. 웨일)
0 복음 서신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부활이 복음 서신들을 설명한다.(죤 s. 웨일)
0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믿는 것은 오직 그의 부활의 완성된 사실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파운스 박사)
0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좋으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더욱 선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 속에 부활시킴은 더욱 선한 일이다.
0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들 속에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들마다에도 쓰셨다.
0 주님의 왕관에서 빛나는 금강석은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마침내 천국의 불멸하는 존재들에게 내린 은총으로 부활한 모든 인간의 영혼에까지 다다른다.(마르틴 루터)

* 부활의 주님

한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 했었다. 석가모니의 이 유명한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속에 시가행진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한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작이 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기독교는 그들처럼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니요 산 자를 믿는 종교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예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예수님을 찾을 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나?"라고 하는 천사들의 책망을 들었다.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산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볼 것이요, 책 한권 쓰시지 않으셨고, 번듯한 집 한채 없어 머리 둘 곳도 없으시면서도 세상의 부의 주인이 되시며, 군사 한 명 없으셨으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할 것이다.

* 몇 년전 아현동에서 가스폭발이 일어나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불행이 나에게도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땅 밑에 폭발할 가스탱크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죄의 탱크가 있습니다. 죄의 심판은 피할 수도 없으며 그것은 가스폭발보다도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빨리 죄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고 똑똑해도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성인군자나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십시요. 그리고 심판의 불이 붙게 될 당신안에 있는 죄의 탱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신속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하나교회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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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면류관 (부활의승리 향기)

옛날 중세 시대에 어떤 수도사가 성지 순례를 갔읍니다. 갈보리 산 근처를 돌아다니던 중 뜻밖에 이 수도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쓰셨던 가시 면류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가시 면류관은 보기에도 험상스러운 가시로 되었고 피가 묻어 있었읍니다. 볼품은 없지만은 주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 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극한 보배로 여겨져 그 면류관을 고이 자기 나라까지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있는 수도원 예배당의 강대상 위에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부활절 아침을 맞아 수도사들이 일찍 예배 보기 위해서 그 예배당 문을 열었더니 온 예배당이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차 있더랍니다. 이게 웬 일이냐고 사방을 둘러 보니 그 험상스러운 면류관의 가시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많이 피었더랍니다.
물론 얘기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뜻이 있읍니다.
부활주일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승리를 의미합니다. 향기를 의미합니다. 기쁨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깁니다. 향기가 나는 생활로 변합니다.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 부활의 주님을 영접함으로 참된 생명과 승리와 향기와 기쁨을 얻어야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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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인생

중년에 들어선 한 여인이 인공 관절 삽입 수술을 받았습니다. 두 살 때 다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후 돌팔이 의사가 소아마비가 될 것이라고 오진해 무려 40여년을 소아마비 환자로 살아온 여인이었습니다.
40 대에 들어서 통증이 극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탈골된 뼈만 한 번 교정했더라면 아무 이상없이 활동할 수 있었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살았느냐고 의사가 질책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해 이 여인은 건강한 다리를 되찾아 지금 활발하게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돌팔이 의사의 오진이 한 여인의 40여 년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혼 15년째 되던 해 어느 날 남편은 수술을 앞둔 이 여인에게 "만일 당신에게 그런 장애가 없었다면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했겠어?" 하며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이 말에 여인은 지금까지의 불행감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원망했던 돌팔이 의사에게까지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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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찬송과 루이 14세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 권위를 만방에 널리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성도로서 신교를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길을 뻗쳐 칙령 거역죄로 세오졸프라는 사람을 체포하여 파리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 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 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이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 왕"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세우고 감옥으로 들어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고 그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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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

성경: 마28: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을 잘 섬기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송태승 목사

* 영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독자들에게 공모한 적이 있었다. 수천이나 되는 응모엽서 중 다음 것들이 선발되었다.
0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0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0 언제든지 만나도 싫지 않은 사람
0 나에게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사람
하지만 1등은 다음의 글이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신실하신 예수님을 친구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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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복음

복음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이 복음은 아닙니다. 죽으신 것은 반쪽에 불과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대학 캠퍼스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한 학생이 "목사님, 저는 예수님의 죽음은 얼마든지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부활이 안 믿어져요. 예수님의 죽음만 믿고 크리스천이 될 수는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보면 '너희가 만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것을 너희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안 믿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 받게 하시려고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우리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체험하며 날마다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 「이렇게 너의 성전을 거룩되게 하라」/ 이동원
* 묵상: ● 부활은 주님이 오신 목적과 사명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의 표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믿음으로 담대히 행합니까?
●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과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부활의 믿음 안에서 고난까지도 능히 감당합니까?
●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도 없었을 것이라고 외칩니다. 나는 부활에 대해 얼마나 갈망하고 있습니까?
● 부활이 진리라는 것은 나의 삶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나는 부활의 능력을 외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기도: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인해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을 소망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로 주신 그 삶의 확실성을 전파함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 생명의 삶

*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가 남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참을성'과 '이성' 그리고 '소망'입니다. 어떤 어려운 경우라도 참을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성결한 삶을 함께 살아가던 쿰란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이 참을성이었다고 합니다. 참을성은 공동체 안에서 조화롭게 사는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클레이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잘 간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혼돈스러운 세상에서는 명료한 이성이 큰 자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참을성과 이성도 잃지 않아야 하지만 그것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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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성경: 고전15:16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기독교가 2천년 후인 오늘까지 존재할 수 없고 점차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없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해서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본심에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전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입증한 제자들의 진실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그런 사람과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송태승 목사

* 묵상: ● 부활은 주님이 오신 목적과 사명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의 표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믿음으로 담대히 행합니까?
●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과 위험을 겪었습니다. 나는 부활의 믿음 안에서 고난까지도 능히 감당합니까?

*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가 남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참을성'과 '이성' 그리고 '소망'입니다. 어떤 어려운 경우라도 참을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성결한 삶을 함께 살아가던 쿰란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이 참을성이었다고 합니다. 참을성은 공동체 안에서 조화롭게 사는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클레이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잘 간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혼돈스러운 세상에서는 명료한 이성이 큰 자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참을성과 이성도 잃지 않아야 하지만 그것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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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노래

본문 마태복음 28:7-15

본문을 보면 7절에서 10절과 11절에서 15절은 마치 연극의 1막과 2막처럼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28장 7-10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시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한마디로 주제를 정한다면 '환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전해주는 이 말씀을 들은 그 여인, 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그 모습,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전해줄 말, 갈릴리로 가라 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들이 그냥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환호를 하면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환희의 모습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1절부터 15절까지는 전혀 다른 장면이 벌어집니다. "여자들이 갈 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들은 대제사장들, 군병들의 반응인데 이들의 반응을 한마디로 주제를 정하면 '두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을 들은 여인들과 제자들은 환희의 소식으로 받아들이는데 군병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그 소식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묘한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부활의 반응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있고, 오늘날 이 지구촌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이 두 반응은 그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부활의 순간에 아마도 천사들은 찬양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날에도 하늘의 찬양이 있었다고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순간에는 천사의 찬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이 우주적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찬양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늘의 찬양이 있었겠지만 그 찬양의 내용은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어났던 이 두 가지 반응은 찬양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환희의 사건이고 우리가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면 환희를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두려움과 근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활의 이설들

본문에 나타난 데로 장로들과 함께 모여서 대제사장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매수를 했습니다. "너희는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이렇게 돈으로 입단속을 해서 막으려고 하는 제사장들과 군병들의 이 어리석은 행동들이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도적설이 여기서 기인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도적설이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또 어떤 학설이 나왔느냐 하면 타묘설, 즉 이 여자들이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갔다, 그래서 다른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했다 이렇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러나 이런 도적설, 기절설, 타묘설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하는데 부인하는 논리로 절대로 먹혀들어가지가 않습니다. 그러다가 훗날에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들고 나왔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신화설로 돌려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것은 제자들의 사기이지 실제가 아니다 라고 까지 뒤집어 씌웠던 것입니다. 왜 그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못마땅해 하고, 예수님이 살아난 사실이 왜 두렵고, 왜 그것을 돈으로 매수하여 입단속을 할 만큼 중대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살아나신다고 예언을 했고, 그가 살아남으로서 그는 하나님으로서 완전히 확정이 될 뿐 아니라, 입지를 가지게 되고, 로마의 권위도 무너지고,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의 권위도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부활은 막아야 된다, 그래서 돈으로 매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 죄 많은 인간들의 끝없는 불신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어코 라도 심판하고야 마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그 부활을 기뻐하고 영접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이 양면의 인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다 같은 사람인데 왜 그 부활을 그렇게 양쪽으로 반응을 하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연합성

물고기는 신비로운 동물입니다. 수압은 물이 깊을수록 그 압력이 높아갑니다. 수압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하면 한 때 '스피어스'라는 잠수함이 수압에 못 견뎌서 파열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물밑의 수압은 수심 100m, 200m, 300m 이렇게 내려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압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깊은 바다 밑에 사는 그 물고기들은 어떻게 수압을 견디느냐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쇠도 견디지 못하는 수압인데 어떻게 물고기들은 거기서 그렇게 유유히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고기 몸 안에 있는 압력과 수압이 동일하게 때문에 아무런 저항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지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물고기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도 똑같은 원리로 하나님이 적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그 부활을 기뻐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의 상태가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코드와 하나님의 영계의 코드가 같기 때문에 그것은 부담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지 않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욥의 신앙생활을 보면 첫 번째로 그가 물질을 잃어버립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7남3녀를 잃어버립니다. 부인은 죽지 않았지만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여자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잃어버리면 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잃고, 가정을 잃고, 건강을 잃고, 친구를 잃어버리면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욥은 그런 고난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보면 욥의 고통은 그와 같은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힘든 고통을 우리 앞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질을 잃고 고통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가족이 겪는 불행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 하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고통 하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욥이 더 힘들어하는 고통이 무엇이냐 하면 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고통을 당할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왔느냐, 의에 대한 고난입니다. 그 영적인 고난에 대해서 욥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사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어찌하여' 라는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합니까? 죄 없는 나를 왜 버리십니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죄 없이 고난을 당한 모든 의인들의 그 고난을 다 포함하는 주님의 부르짖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이 고난당하는 사람이 다 부르짖었던 그 고통의 절규가 '여호와여 어찌하여 내가 주님을 향하여 의를 행하며 말씀으로 살았건만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라는 것인데 욥이 그 지경에서 아주 힘들어 합니다. 그가 물질을 잃고 자식을 잃은 그 때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라고 그는 육신의 것을 잃어버린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고 친구들이 와서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정죄를 하고 나오니까 내가 이렇게 고통 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줍니까? 하는 주님의 부르짖음을 욥이 이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이 끝까지 견디는 것은 하나님과 욥의 영적 코드가 맞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욥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 관계가 바로 이런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그 생각과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도 우리를 성령으로 품으시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15절 이하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믿게 되고 순종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부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의 신비성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는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오도다케 히로타 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성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다리길이가 10㎝밖에 안 되는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의사가 이 아이를 받아들고 차마 산모에게 보여줄 수가 없어서 한 달 동안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라고 난 게 무슨 나무를 잘라놓은 것 같으니까 의사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산모한테 보여주느냐는 것입니다. 산모가 충격 받을 것을 생각해서 한 달 동안 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안 보줄 수 없습니다. 한 달 만에 이 아기를 산모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이 모자가 상봉을 하기 전 놀라지 말라고 당부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기를 보자 이런 말로 첫 말을 했습니다. "어머나, 내 귀여운 아기!" 하고 그 아기를 안고 귀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그 사람 같지 않는 아기를 얼마나 잘 키웠는지 이 오도다케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 장애인인 줄을 느끼지 못했다. 집에서 조금도 나를 별나게 취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정신적으로 하나도 격의가 없이 그대로 대해주어 길렀습니다. 이 오도다케는 달리기도 합니다. 야구도 합니다. 농구도 합니다. 수영도 합니다. 컴퓨터, 붓글씨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도다케에게는 최고의 장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울해본 적이 없답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자란 적도 없고,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고민을 해본 적도 없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정신건강이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지가 멀쩡한 사람 중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이 오도다케를 만나서 상담을 하고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치유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정신건강미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글에서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장애는 특별한 개성일 뿐이다. 마음을 열고 보면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친구가 더 많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한다. 내가 할 일을 하는 그것이 내 보람이다."

이 오체불만족에서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와 이 오도다케와의 관계입니다. 그 어머니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지선이의 어머니도 위대한 엄마입니다. 또 이희야, 손가락 세 개를 가지고 피아니스트가 된 그 아이의 어머니도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와 오도다케는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오도다케는 그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고 이제는 몸이 성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치료해줄 만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명랑함에 전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운동경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시종일관 웃으면서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준 그 용기와 가능성은 대단히 큽니다. 지금도 온 세계 희망의 메신저로 그는 세계를 순방하고 있습니다. 인격과 환경이 맞아갈 때 이런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으로만 이 부활을 믿을 수 있고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을 수 있고 부활의 환희를 나의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이 여인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이 여인들이 모습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노래를 부를 때 환희의 주제로 이 부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돈으로 상대방을 매수해서 부활의 소식을 막으려 하는 이런 인간들의 반응은 역사 속에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좋은 학문을 했던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진리를 부정하면서 이 부활도 신화로 돌리는 망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아지지도 않고 부정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자산이고 우리의 신앙이고 근본이고 완성입니다. 새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 이용호 목사

꿈이 있는 교회
여러분,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꿈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꿈과 비젼을 가질수 있고, 또 그것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꿈을 갖는데 어떤 꿈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하는 순간부터 그 꿈은 허무하고 의미없는 꿈이 될 수 밖엔 없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믿음입니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걸기를 바랍니다. 꿈이 있는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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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본능과 부활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22절

제가 어려서부터 진시황이 죽지 않는 약(不老藥)을 구해 오라고 동남동녀 500명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닌 전설로만 알고 있었는데 바로 위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천진에 진시황과 신하들이 동남동녀 500인을 떠나보내는 모습의 비석과 동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몇 세기 전이었고 그는 50대 초반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불사약을 구하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렀다고도 하고 혹은 서귀포에 머물러 살았다고 합니다.

1. 영생에 대한 본능
전도서 3장 11절에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영생에 대한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영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능이 있다는 것은 그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물을 먹고 싶다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이고 이성의 본능이 있다는 것은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능만 있고 그 본능을 충족시킬대상물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큰 모순입니다.
고급 생선의 일종인 연어는 부화시켜서 방류하면 한 2주 동안 그 바닷가에 살다가 넓고 넓은 바다로 나아가 저 북태평양까지 수천, 수만 리를 헤엄치며 돌아다니다가 한 3, 4년 후에는 자기가 어려서 살던 그 물맛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그 해안가를 찾아와서는 산란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희안하지 않습니까? 나침반도 없이 이정표도 없는 수만 리 길 바다를 헤엄치다가 다시 어려서 살던 그 해안가로 돌아오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연어의 뇌속에는 잊혀지지 않고 지울 수 없는 향수 혹은 회향병 때문에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고장으로 돌아오고야 만다고 합니다. 그것을 노스탤지어(nostalgia)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생기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영생의 노스탤지어를 갖고 있어서 아무리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세상 재미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지라도 깊은 내면에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참 만족과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어느 날 궤변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줄 터이니 요청하라고 했더니 디오게네스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좋으니 영원한 것(the least portion of immortality)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알렉산더는 "그것은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디오게네스는 "그런데 왜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을 다 정복하려고 고생을 하십니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한순간의 보장도 없으면서…"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알렉산더 대왕은 16살 때 마케도니아의 치리자가 되었고 18살 때 승리의 장군이 되었고 20살 때 왕이 되었지만 33살 때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다가 푹 꼬꾸라져 죽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거지처럼 살았지만 알렉산더 대왕보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라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가지고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공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100년도 못 살고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Bismark)가 어느 날 영국 대사인 앤드류(Andrew) 씨와 담화하는 중에 이런 뜻깊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한순간도 의심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우리의 높은 갈망과 욕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슬프고 불완전합니다. 인간은 한없이 고귀해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무의미하게 끝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완성, 하나님이 우리 위해 예비하신 완성이 있다고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 세상은 불안하고 인간의 생명은 짧고 불완전합니다. 밤이 있으면 낮이 있듯이 불완전이 있으면 완전한 세상,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말하기를 "인간이 불멸(영생)을 믿는 신앙 이야기야말로 최대의 치유책이다. 파멸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집안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인간의 깊은 내면을 잘 파헤쳐 말했습니다.

2. 영생과 부활이 되신 예수님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왜 그 처참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피를 다 쏟고 죽으셨습니까?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죽음을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피 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예수님과 같이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 뒤를 따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을 얻어 들림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부활과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 신학교수들까지도 부활을 믿지 않고 십자가의 구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부활신앙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빈 무덤을 갖고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무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14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

으리다. 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헛믿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만 하고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지 못하십니다.
본문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부활, 영생이 없고 내세가 없으면 무엇하러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찬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짧은 세상에서 고생을 하고 실패를 해도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요사이 자살하는 사람들은 영생과 부활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3. 과거, 현재, 미래의 부활
다음 세 가지 부활을 믿어야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① 과거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부활이며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historical fact).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지 않고 의미상의 부활이니 뭐니 하는 사람은 크리스찬도 아니고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본문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는데 무슨 다른 해석이 필요합니까?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는데 유정란만 부화해서 병아리가 되듯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그 사람이 이단이냐, 정통이냐의 판가름은 바로 예수님의 구속의 죽음과 부활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서 결정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 마귀의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십자가의 부활과 삼위일체를 믿지 않습니다.
가령 불트만(Rudolf Bultman)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재림이나 천국, 지옥을 다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찾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신화화(非神話化, demythologyzation)해서 그 의미를 찾자는 것입니다. 교묘하게 마귀의 변론을 늘어놓는데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불신앙에 빠집니다. 한마디로 성경을 그대로 안 믿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그나마도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② 현재의 부활
이것은 믿는 자들의 영적인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죄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며 영생을 얻습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영혼의 부활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면 죽었던 영혼이 부활하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즉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부활하고 이 거듭난 사람이 예수

님이 재림할 때까지 살아 있게 되면 죽음을 보지 않은 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③ 미래의 부활
미래의 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구원받고 죽은 자들이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고 주와 함께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다가 천년왕국이 끝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 때에 살아남아 있던 신자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천년 동안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가 천년왕국이 끝날 때 둘째 부활, 사망의 부활을 얻고 크고 흰 보좌 앞에서 평생 지은 죄를 드러내 놓고 심판을 받은 후 영원한 불못,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부터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생명책이 한 권 있고 각자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 있는데 11~15절에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부활한 성도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첫째 부활, 생명의 부활을 얻고 주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 말씀하시기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부활,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부활하고 사망의 부활 즉 둘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천년왕국이 끝나갈 때에 부활하여 행위의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부활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 김홍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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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에스겔 37장 1∼10절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중에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산으로 흙들은 마르고 바위 투성이인 골짜기로 뼈만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에스겔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사방으로 보니 뼈들이 말라 도저히 사람의 뼈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인간의 사고로 생각할 때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아, 이 뼈들에게 야웨의 이름으로 대언하라. 뼈에 생기가 들어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돋아 오르고 피부가 덮여 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자기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는 대언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마른 뼈들에 생기가 들어와 뼈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뼈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람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힘줄이 돋아 나고 살이 솟아 오르고 피부가 오르더니 거대한 무리가 골짜기를 덮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있는 사람으로는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에스겔아 생기에게 명령하여 이 사람들에게 들어가 일어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살아나라"라고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무리 가운데 생기가 들어와 살아 일어나는데 큰 군대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부활의 역사를 주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아담의 범죄로 죽은 우리가 예수님의 새생명을 얻어 살아날 것을 의미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1. 사망으로 점령된 세계
우리가 사망으로 점령되어 모든 사람들이 마른 뼈와 같이 된 이 세상에서 주님은 과연 부활을 주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이런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지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마른 뼈와 같은 세계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시편 104편 24절에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을 부요가 가득한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정의가 가득하고 거룩함이 충만하며 병들거나 아픔이 없고 저주와 가난, 죽음이 없는 평화가 넘치고 사랑이 충만하여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세계를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땅의 주인인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하여 스스로를 마귀의 종으로 내놓았습니다. 아담의 죄악과 마귀가 합작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처참한 세계, 마른 뼈와 같은 세계를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생겨서 죄악과 더불어 정의가 죽어 마른 뼈가 됐습니다. 건강과 생명을 죽이고 축복과 풍요를 죽이며 영생이 죽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사라지고 사랑이 죽어 마른 뼈가 되게 하였고, 기쁨과 소망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세속만 가득한 마른 뼈 골짜기로 이 세상이 된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11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탄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뼈들이 말라 소망이 없어지고 우리는 모두 멸절되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을 이러한 식으로 보았습니다. 즉 '인간을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든 자'라고 했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란 '고통, 싸움, 죽음 등에 에워싸여 괴로워하는 존재'라 하였고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죽음이라고 하는 치유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서 있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불행과 고통을 짊어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위를 살펴보면 어느 곳을 보아도 마른 뼈 밖에 없습니다. 이 뼈들이 서로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요즘 일간지와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혹은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부도덕한 일이라도 서슴없이 행합니다. 세계적인 제약회사에서는 고아들을 대상으로 에이즈 백신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처참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이 패륜적으로 나타나는 도덕의 죽임입니다. 반인륜적 행태가 이 땅위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메마른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이 되었습니다. 윤리와 도덕, 인정과 사랑, 희망 등의 모든 것이 마른 뼈와 같이 되었습니다.

2.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사회, 가정이 살만한 곳으로 될 수 있을까요?
부활이란 없는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마귀로 인해 죽은 이 세상이 복구되고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가 모두 죽어 마른 뼈가 된 세상과 삶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에스겔은 "오직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 뼈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교나 철학, 의식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뼈들을 살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였던 그 죄를 청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 부활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서 바울 선생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악을 제하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부활할 수 있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죽은 인생을 살리는 부활의 생기로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지은 반역의 대가를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출생 시부터 상속 받은 죄, 우리의 허물, 태어나서 지은 모든 죄를 청산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바울 선생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우리는 이제 죄에서 벗어나 영원히 의로운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생기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의 생기이십니다. 마른 뼈가 꽉 들어차서 에스겔 골짜기가 된 이 땅에서 예수님은 부활의 생기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본이십니다. 또한 에베소서 1장 20절에는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만리 장천 먼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우리 가슴 속에, 우리 가정과 삶과 세계에 찾아와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부활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장 21∼22절을 통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의의 부활을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부활시키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 가슴에 오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질병에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10절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부활의 영, 생명의 영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영도 마음도 부활의 생명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축복과 부요를 부활시키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메마른 뼈와 같은 세계 속에 풍성한 부요를 보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영생을 부활시켜 주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으로 꽉 찬 골짜기에 오셔서 놀라운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오늘날 와 계십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도 불안과 좌절과 절망이 있고, 서로를 대적하여 싸우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는 이 세계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은 평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를 평화의 왕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랑을 부활시키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기쁨을 부활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어야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 속에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우리가 우리 생활에 다가오는 모든 세력과 어려움을 견디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소망을 부활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디도서 3장 7절에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밥을 안 먹고도 40일을 살 수 있습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4분 밖에 못삽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소망을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속에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속에 다가오면 그 영광 가운데에는 기쁨이 있고 의와 평강과 희락과 소망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과 같은 우리 가슴 속에 오셔서 봄의 생기로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생활의 마른 뼈가 꽉 들어찬 속에 부활의 영광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영국 어느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석탄광 하나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 안에서 일하고 있던 164명의 광부들이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깊은 슬픔을 가지고 사체발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체 옆에 판자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는 이곳에 남지 않고 부활의 생명 가운데 아름답게 꽃 피울 것입니다' 석탄광의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최후 목표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삶의 최후 목표는 죽음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목표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는 죽어도 영혼이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가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아름다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3. 복음증거는 생기를 대언하는 역사다

에스겔 37장 9∼10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대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생기를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사람, 범죄인, 파괴된 가정, 절망적인 현실을 향해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생기를 대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의 대언을 통해 일어납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는 에스겔과 같습니다. 마른 뼈 골짜기에서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으로는 절대 희망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언하고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생기의 대언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5∼8절에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대언하면 생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때문에 신자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생겨나고 변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는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습니다. 생기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에스겔이 마른 뼈 골짜기에서 대언한 것과 같이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생기를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마귀와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마귀와 귀신은 사망의 세력인데 생기를 전하자 이내 무너졌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우리 가슴속에 도적이 들어오면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모든 것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들어찹니다. 가정에 마귀가 들어오면 무질서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파괴됩니다. 사회마다 비뚤어지고 정의가 사라지고 죄악이 가득차면 그 속에는 도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혼돈하고 고통이 들어차 있으면 그 나라의 배후에 도적이, 마귀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세력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 마귀와 귀신이 소리치며 떠나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 마귀와 귀신들이 무너집니다. 쫓겨 나갑니다. 사망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무질서와 파괴와 힘든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가 고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 가정이 잘 살고 평안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배후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와 귀신이 쫓겨 나가면 우리 속에 평안과 기쁨과 안정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고 생기가 일어나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소리치며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다가왔습니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덕적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기가 들어오면 고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하시므로 도덕적인 불구자가 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면 살인자도 변화를 받고 방탕한 자도 변화를 받습니다. 술주정뱅이나 아편 중독자, 음란방탕 했던 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도덕적 불구자가 고침을 받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정신적인 불구자들, 정신적으로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살인, 괴로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생기가 들어오면 변화를 받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불구자는 말할 것도 없이 주께서 고쳐주십니다. 우리 병을 주께서 친히 감당하시기 위해 우리의 연약을 짊어지셨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질병, 불구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구가 된 가정과 사회에도 주님의 생기가 들어오면 치료함을 받아 온전한 가정, 온전한 사회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은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불구가 된 가정을 고쳐 주십니다.
기쁨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요즘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대기업의 회장이 자살하고 정치인이 자살하고 학교 교사마저 자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는 그들 삶의 환경에 어려움이 다가오면 기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쁨을 잃어버리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원천이십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 우편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이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쁨을 생각하고 꿈꾸며, 기쁨을 기도하고 감사하며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기쁨을 빼앗아 가는 원수 마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어 쫓겨나야 합니다. 시편 107편 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 마음이 충만케 되어 기쁨의 강물이 넘쳐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울 철에 돌 밑에서 노랗게 죽은 나무 풀을 보고 돌을 옮겨 놓으면 노란 풀이지만 며칠 지나 푸르게 꼿꼿하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면 생명으로 넘쳐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귀의 세력에 눌린 우리의 삶에 해방을 가져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귀신에게 해방되고 육체적, 정신적인 장애에서 해방되고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 천국이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부활의 생명으로 채워 주시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전도한다는 것은 생기를 대언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13절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우리 마음속에서 닫혔던 무덤 문이 열리게 됩니다. 가정의 문도 열립니다. 사회와 국가에도 모든 문이 열리게 됩니다. 이제 모든 문이 열리면 부활의 생명으로 나오게 됩니다. 주님은 사망을 벗게 하시고 생기로 채워주셔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어 부활의 삶을 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 또한 절대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윤리나 도덕의 훈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마른 뼈와 같은 인생을 부활시키시어 생기로 충만케 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 기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마귀가 죄와 함께 우리의 삶을 메마른 강토로 만들고 골짜기에 뼈만 가득한 인생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뼈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정치나 과학을 통해서, 교육과 사상을 통해서도 이 뼈는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죽으셨다 부활하셔서 생명의 생기가 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 죽었던 뼈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그리스도를 모시고 부활로 충만하여 죽었던 뼈들이 살아나 큰 십자가 군대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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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증인이 되라

본문: 막 16:6-7

부활주일이 되면 부활을 상징하는 삶은 계란을 전도용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이번 부활절에 6,000개의 계란을 삶았습니다.
계란을 기증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게란 포장 작업을 위해 수고해 주신 여러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동사무소, 소방서, 우체국, 노인정, 식당, 점포, 현대 엘리베이터, 서울대학교 병원 등에 부활절 성구와 함께 나눠 드렸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어릴 때에 닭을 먹여보지 않은 가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닭 모이 주는 것이 할 일이었습니다. 어미닭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는 신기한 일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런 알을 수정란이라고 합니다.
요즘,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란은 모두 무정란입니다. 이것은 수컷이 없이 낳은 알이기에 정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알은 아무리 오래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 분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똑 같이 보이지만 부활의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인 중에도 무정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입으로는 부활을 이야기하고, 머리로는 부활을 아는 듯한데,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은 도저히 부활을 알고 믿는 삶의 모습이 아닌 경우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부활을 알고 말하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속에 부활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자 청년들 사이에 유행되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가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남자가 미래가 없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과 결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신앙인이 과거가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 부활신앙도 없어 소망이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을 아는 비결이 있습니다.

1) 내 삶 속에서 주님을 자랑하고 있는가? 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부활의 주님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무정란 신앙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전도가 있는 것입니다. 힘 있고 열정 있는 전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확고한 부활신앙이 나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살려야 합니다. 무정란 신앙을 유정란 신앙으로 바꿔야 합니다.
오늘부터 부흥회가 시작됩니다. 은혜 충만히 받고 무정란 신앙이 유정란으로 변화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내 삶 속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역사를 체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무력한 믿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까? 찬송을 하면 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마음속에 밀려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부활의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 걱정을 몰아내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찌어다, 평안이 있을 찌어다."(요한복음 20:19,21)를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의 불안을 몰아낼 자는 없습니다. 대통령도, 국회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증거가 없다면 문제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 믿음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배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 믿음이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믿습니다'를 수백번 외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을 나의 것으로 확신할 때, 기쁨 평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은헤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1.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히려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는 다 똑 같다는 말을 잘 하지만 세상의 어떤 종교도 '부활'을 말한 종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활의 주인'이심을 당당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6시간 동안 고난을 당하시다가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하여 로마 병정들로 파수꾼을 시켜 지키게 하였습니다. 혹시 누가 시체를 훔쳐가지 않을까 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던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면서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려내었습니다. 그럴 때에 파수꾼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 같이 되어버렸습니다.(마28:4)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파수꾼들은 성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합니다. 대 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의논하고 파수꾼들에게 돈을 주고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습니다.
파수꾼들이 지켰지만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갔다가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천사를 만났습니다.
흰옷 입은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천사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너무나 놀랍고 두려워서 무덤에서 도망하였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확인했고,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들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모두 무덤에서 시체가 다 부패하여 사라졌지만, 예수님께서는 3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하고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습을 보이셨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지상명령을 내리시고, 그 부활에 대해 믿는 사람에게는 능력과 표적이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부활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이 '부활'이시기 때문에 하시는 일들마다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다시 부활되게 하옵소서 . . .' 기도를 잃었습니까? 부활되게 기도하십시오.
열심을 잃었습니까? 열심을 회복 시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이 냉냉하십니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엠마오로 슬픔 속에서 걸어가고 있어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꾸짖으셨습니다. "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냉냉한 가슴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누가복음 24:32).

낙심과 좌절에 빠져 과거의 옛 직업으로 돌아가 고기 잡으러 가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 .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요21:5-6) 말씀을 들을 때 왠지 믿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순종할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조반을 드시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여러분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의심은 우리의 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간신히 얻은 것을 잃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의심은 우리가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솔직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안 믿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그래서 옛 부터 복음을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날조된 학설 내지는 종교적인 맹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학자들 중에는 평생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운 인생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실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학자의 생활을 했다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거짓말로 증명하려고 평생 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으로 학위를 받고 그것을 위해 죽을 때 까지 연구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전하기도 바쁜 오늘에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부활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믿음이 부활되어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신앙생활의 햇수가 점점 늘어갈 수록 불평과 불신과 원망과 비판만 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점점 뜨거워져야 할 마당에. . . . . 이 사람들은 신앙이 부활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에 이런 성도들이 있거든 부활의 주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먼저, 모이기를 힘쓸수록 은혜를 받게 됩니다. 마음만 교회에 있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몸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기도할 때, 예배드릴 때 찬양할 때 . . .

기독교 원리는 있는 자는 더 있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오늘날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의 원리처럼 모두 똑같이 나누는 원리가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더 주십니다. 주인을 불신하고 일하지 않는 자는 있는 것 마저도 뺏기게 됩니다. 그리고 있는 자에게 없는 자의 가지고 있는 것 마저도 뺏아서 주는 원리입니다. 신앙은 애쓸 때 얻습니다. 여러분 애쓰십시오.
여러분의 잃은 믿음이 부활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첫 사랑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막16장7절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갈릴리는 새 출발의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주님이 제자들과 첫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비전을 받았던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은 첫 사랑을 잃고 열정을 잃고 목숨바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숨고 감추면서 겨우 신앙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그 사랑을 부활시키고 나가자는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처음 주님을 만나고 흥분되어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던 그 '갈릴리'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주님을 만났던 그 때를 생각하십시오.
처음에 예수님을 만났던 그 곳으로 가십시오.
불평의 자리에서 감사의 자리로 자리를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던 자리에서 찾아가서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로 자리를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불평의 자리, 소극적인 곳에 앉아서는 결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셋째, 전도의 사명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지상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은 온 천하입니다. 북한, 아시아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계 방방 곳곳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지금은 우리의 태신자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지역에, 우리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얼마나 했는가? 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바로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며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삶의 행복이 있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자로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이 있습니다.

1) 주의 일에는 헛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에 흘리는 땀은 헛되지 않습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따릅니다. 표적이 나타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귀신이 물러갑니다. 가난과 저주도 물러갑니다. 악한 질병도 불러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융(Carl Gustav Jung)은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기적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믿는 자에겐는 기적도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 때문에 로마 제국이 결국 기독교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기적이 나타나면 믿지 않는 식구들도 모두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신앙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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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도(道)를 전합시다

본문: 사도행전 4 : 1 - 12

세간에는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흔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essence)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과연 부활이 가능한가라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뜨거운 감자(a hot potato)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무언가 부활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고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부활절과 성탄절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갖은 모욕을 당할 때 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하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할 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하니 베드로가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마 26:60-75).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은 옛날의 연약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적 복음 전파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 운동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 부활의 도를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 천이나 되었습니다(행 4:4).
이것을 본 사두개인들이 싫어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4장 7절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뉘 이름으로』 라는 말도 어떤 사람의 권위를 배경으로 했는지를 심문하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기독신자들을 핍박할 목적으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는 그의 생애동안 한번도 주님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그가 핍박자일 때 만난 그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예수 세계화 운동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道)를 가르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Ⅰ. 부활은 믿는 자들의 최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에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매우 합리적인 사람들이어서 부활은 믿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부활도 우리의 소망이지만 악한 자의 심판의 부활도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데 불신자들이 죽어서 그 몸과 영혼이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성도와 같이 살아서 그들이 지은 죄악의 보응으로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듯이 영벌도 있어야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마 25:26). 이 진리만 믿는다면 악인의 형통이나 그들이 성도에게 하는 핍박이나 무고히 해치는 억울한 일들을 적어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35장 9-10절에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고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2장 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Ⅱ. 부활은 복음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15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행 7:1). 바울의 전도 메시지와 설교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진리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예수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소망을 전하다가 한결같이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까지 했습니다.

Ⅲ. 부활은 성도 구원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1) 믿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2) 의인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3) 구원의 확정이 되었습니다.
본문 4장 9-10절에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Ⅳ. 부활 증거는 성도에게 주어진 필연적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1) 패권문화 중심에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로마는 패권국가로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1절에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하신 말씀이 로마로 보낸다는 것을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당시의 패권국가인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의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의 복음 사역이 위험이 따르고 힘든다는 것을 암시하시면서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그리고 과학 문명 전역에 걸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담대하게 적용시켜야 합니다.

2) 도취되어 집중력 있게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25절에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옥같은 변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바울을 베스도가 막았습니다. 가이사랴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그가 진지하게 부활을 증거하는 바울을 볼 때 미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베스도는 생각하기를 바울이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조리 있고 논리적 체계와 학적인 술어로 부활을 증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소리를 개의치 아니했습니다. 베스도의 영적 무지함이 바울을 미쳤다고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미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고후 5:13). 예수님께서도 살아 계실 때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요 10:20).

3) 역사적 사실에 힘입어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6절에 『왕께서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그립바 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도 역사적 사실로 공개되었고(눅 22:53) 그의 죽음도 역사의 무대에 공개적이었고(눅 23:2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을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된 것입니다(마 28:9-11).

사실은 언제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가장 능력 있고 효과 있는 언어입니다. 사실을 거짓처럼 전하지 말고 사실을 사실처럼 믿고 전해야 될 것입니다.
세월의 무게가 역사적인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 세계화 운동에 부활신앙을 믿는 자들의 최대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복음 운동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성도 구원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성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패권문화 중심에도, 과학문명의 중심에도 전해야 합니다. 도취되어 집중력 있게 전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에 힘입어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도 교리적으로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도 잘 정리된 책을 통해서 혹은 신학을 통해서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the first fruits of resurrection; 고전 15:20-23)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spiritual body; 고전 15:44)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육의 몸(natural body)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을 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빈 무덤이 이해가 되십니까? 부활을 믿으십시오. 부활은 우리가 가진 과학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교회는 존재하지 아니 했을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를 따라 가는 이유도 주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empty tomb)은 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다고 해서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마 28:6)고 여자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눅 24:8).
Just as he said 예수님은 평소에 말씀하신 그대로,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according to the scriptures ; 고전 15:3-4)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제 1차적 이유입니다.

빈 무덤이나 천사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말씀하셨던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afrid yet filled with joy) 제자들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죽은 몸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입니다. 놀라운 일은 달려가던 여자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고 만나주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산산히 깨져 버렸던 그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갈릴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의 삶의 지평(horizon)을 한없이 넓혀 주셨습니다. 전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았던 곳입니다. 주님은 그곳 갈릴리에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마 28:19-20).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승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높일 때 주께서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죄 값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모두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기만 하십시오.-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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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것

본문: 눅24:36-5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과 일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까지 무엇을 하셨습니까? 복음서들의 증언 속에서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일을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평강을 비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가르치시고 설득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먼저 하신 일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도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첫 안식일이 다 지나려고 하는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제일 먼저 찾아갔던 여자들을 만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평안하냐" 하신 것입니다(마28:1, 8-9). 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 도마도 함께 있을 때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던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죄의식과 자괴감을 일시에 씻어주는 해방과 구원의 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죄의식과 자괴감으로 인해 제자들 스스로는 가질 수 없었던 평강을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확실히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평강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셨음을 알리시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셨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주님께서 부활하시자 제자들은 그 사실을 금방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만나 뵈었다는 다른 사람의 말도 믿지 못했고, 자기 눈앞에 와계신 주님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것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만져 봐라. 내 손과 발을 봐라" 하셨고, 그래도 제자들이 믿지 못하자 "어디 먹을 것 없느냐" 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진짜 몸으로 다시 사신 주님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풀어서 당신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 당신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깨닫게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으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후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집 안에 있을 때에 다시 그들 가운데 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실 만큼 제자들이 부활하신 당신을 믿게 하시려 애쓰셨습니다(요20:24-27). 왜 이렇게 열심히 부활을 믿게 하려 하셨습니까?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활은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이 헛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바로 참 메시야이시고 그의 십자가가 참 구원의 능력임을 확증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며 십자가가 구원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구원의 성취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다 메어야 할 것임을 확신시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2-19)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 훗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믿음을 헛되지 않게 해주는 힘이고 따라서 크나큰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전하시고 당신의 부활을 확신케 하신 후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부활의 주님과 그를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하시고 그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능력으로 입히실 때까지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49절을 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본문의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앞머리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 승천하시기 직전의 예수님의 말씀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보다 분명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8: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는 그것을 전하는 사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비시고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시며 전도의 사명을 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일체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시고 어떤 죽음을 죽으셨습니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지도층의 음모와 허위고발과 거짓증언, 매수되었거나 선동에 넘어간 군중들의 배신, 거기에 제자들의 배신까지 더해져 이루어진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복수심에 불타오를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십자가의 처형에 넘겨준 모든 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불의와 비겁함을 비웃고 조롱과 저주를 퍼부으며 의의 심판을 선언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홀연히 나타나셨다가 홀연히 사라지시듯 그들에게도 그렇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밤 그들의 잠자리에까지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곤 함으로써 잠을 이룰 수 없는 극도의 불안과 번민으로 그들을 괴롭힐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그들에 대한 그 어떤 원한이나 증오심이나 복수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어찌 날 그렇게 다 버릴 수 있었느냐?" 물으신 일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 한 대로 됐지?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는데 기분이 어떠냐?" 빈정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와의 첫 만남의 장소로 그를 다시 찾아가셔서 그에게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는 그 때마다 "내 양을 쳐라. 내 양을 먹여라" 말씀하시며 그에 대한 당신의 신뢰를 재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0-5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52-53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돌아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과 함께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축복을 주시고 경배와 기쁨과 찬송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평강과 믿음과 사명과 복과 경배와 기쁨과 찬송의 근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 부활절이 그저 부활에 관한 찬송 몇 장 부르고 지나가는 연례행사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기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얻으신 승리가 우리 가슴 속에서 확신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확신과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거짓과 불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지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온갖 일들로 인하여 우리의 가슴에 가득 차있었던 절망과 회의와 불안과 슬픔과 후한과 자괴감을 깨끗이 떨어버릴 수 있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가질 수 없는 평강이 주님으로부터 임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온 국민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과 원한과 복수심이 사라지고 오직 평강과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나흘 후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총선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나, 여야의 세력구도가 뒤바뀌는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기존 정치판이 뒤집히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돈과 모략과 음해공작과 허위폭로로 정치생명을 유지해오던 자들이나 그런 당들이 몰락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정치생명이 다 끊어진 줄 알았던 인사나 당이 부활하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결과여하에 따라서는 일련의 정치보복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정치인들은 투표 전에는 집권하게 되더라도 절대 정치보복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골적으로든 교묘한 방법으로든, 언제나 가차 없는 보복이 행해지곤 했습니다. 이번 총선 후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총선은 진실로 한국정치가 깨끗하게 태어나는 역사적 기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당도 신뢰 받는 여당으로 부활해야 하고, 야당도 사랑 받는 야당으로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국민의 건강한 정치의식이 살아나는 새 출발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것처럼 온 국민에게 오직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주는 대한민국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떼~한민국이 사라지고 대한민국이 튼튼히 서야 하겠습니다. 거리의 정치가 물러가고 의회정치가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법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일을 위하여 이번 총선에서 각자의 참정권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번 부활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정치의 부활, 대한민국의 부활을 선물로 받는 감격의 계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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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세가지 회복

본문: 계 21:1-8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1-8 )

예수님을 믿는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골동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성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끔찍한 마음이 들어서 주인에게 이 그림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아들이 주인 말을 가로채면서 아버지에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 아버지! 저 분이 내가 믿는 예수님이예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 지고 죽으시는 장면이예요. 그 옆에 칼과 창을 든 사람들은 로마 병정이구요,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예요. 그리고 저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이들이예요...>
열심히 설명하자 아버지는 <알았다>라고 대답하고 골통품 가게를 나왔습니다. 한참을 걸어 갔습니다. 그 때 아들이 갑자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 아버지! 다시 갈 데가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 손목을 잡고 다시 골통품 가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 그런데요. 아버지! 아까 중요한 한 마디 설명을 빠뜨렸어요. 저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결론은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결론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세 가지를 회복시켜 주는 회복제입니다.

1. 영생의 회복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합니다. 부활은 일시적 삶을 영원의 삶으로, 이 땅의 삶을 저 땅의 삶으로, 유한한 삶을 무한한 삶으로 회복시켜 주는 회복제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87 년부터 미국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쑴멈보눔>이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라틴어라고 합니다. 최고선이라는 말이랍니다. 미이라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 당신이 죽기 전에 미리 미이라 값을 지불하고 죽으십시오. 그러면은 영원히 썩지 않는 기가 막힌 미이라를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호화로운 관을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금관이 될 것입니다. 관값은 100만불(12억원)입니다. 그리고 보석으로 무덤을 장식하여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신청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는 육체 미이라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요한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영생을 잃어 버렸습니다.
<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이 죄에 대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영생의 회복입니다.
영국 로지 경의 아들이 세계 제1차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여 병원에서 치료중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 부모님! 내가 죽더라도 이 곳 무덤에 오시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그 무덤속에 없을 거예요. 이미 하나님 품에 안겨 있을 거예요>
이것이 부활입니다.

2. 아름다움의 회복
우리가 부활후 살 곳 천국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으로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름답다고 하는 표현이 몇 곳 등장하고 있습니다.

< 새 하늘과 새 땅>
새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나는 딸 라미를 예쁘다고 느껴 본 적이 그 동안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딸이지만 참 예쁘다고 느낀 적이 꼭 한번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에서였습니다. 결혼식은 저녁 5시인데 아침부터 온 종일 미장원에 가서 단장하고 결혼식장으로 왔습니다. 부활하고 나면 모두가 단장한 신부같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이들이 천국에 가면 새롭고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단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영생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부활은 아름다움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1683 년 영국의 정치가 윌리암 럿셀경이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정적들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형당하기 직전에 럿셀경은 차고 있던 시계를 빼어 동석한 의사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제 죽으면 나는 곧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것입니다. 이런 시계는 그 곳에 필요없습니다>
부활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부가 정답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늘 말했습니다.
< 이 결혼반지 안 쪽에 나는 글을 새겨 넣었어요. 때가 되면 보여드릴께요>
그리고 항상 끼고 있으면서 부인에게 한번도 보여 분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어가며 싸늘하게 시체가 되어 가고 있을 때 차가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어 아내에게 주며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평생 궁금해 하던 반지 뒤에 남편이 쓴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오. 천국에서 만나요. 그리고 더 사랑해요>
이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과학자요, 목사였던 우찌무라 간죠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에게 대학생 한 명이 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 선생님! 저는 성경 믿고 싶은데요.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가 물 위를 걸어갔다는 이야기, 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들은 빼놓고 믿으면 안됩니까? 왜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을 믿도록 강요하십니까?>
이 때 우찌무라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 학생! 창세기 1장 1절 아나? 성경에 첫 장 첫째 줄을 알고 있나?>
그 학생은 대답하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말 아닙니까?>
< 맞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것 기적이 아닌가? 기적? 무에서부터 유를 창조했다. 그것 기적이야. 성경은 기적으로 시작된다네. 그리고 자네, 성경에 마지막 장 마지막 줄을 아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은 안다면 첫 말씀과 마지막 말씀은 알아야지. 알파와 오메가를 알고 있는가? 중간은 몰라도 마지막이라도 알아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께서는 영광 가운데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으로 성경은 끝나지 않아. 승천으로 예수의 생애가 마감된 것은 아니야. 그 분은 역사 속에 다시 오실 거야. 그리고 만물을 심판하실 거야. 이것이 기적이 아닌가? 초자연적인 사건 아닌가? 성경에서 기적을 다 빼고서 믿는 다면 성경에 뭐가 남는 줄 아는가? 요쪽 뚜껑하고, 요쪽 뚜껑이 남는다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영생을 회복시키시고 아름다움을 회복시키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3. 완전함의 회복
이 세상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불완전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부활은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부활후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부활후에는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없습니다.
처음 것들, 지금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완전한 것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런 유모어를 발견하였습니다.
제목은 <구기자의 전설>이었습니다. 한국 남자들이 지금 다 무력해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약을 잘못 대려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넣지 말아야 할 구기자를 넣어서 끓여 먹어서 남자들이 다 구기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기도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겨진 남편을 펼 수 있을 가라고 곰곰이 연구하며 기도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것을 사다 먹였더니 남편이 활기찬 남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 가요?
< 피자>
에덴동산에서 구겨진 인생 예수님 부활로 완전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마귀는 구기자를 먹였지만 예수님은 피자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회복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세 가지 회복입니다.
1. 부활은 영생의 회복입니다.
2. 부활은 아름다움의 회복입니다.
3. 부활은 완전함의 회복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림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냈던 척 콜슨이 쓴 책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대변할 것인가?>(Who speaks for GOD)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드리려고 합니다.
인디아나주 출신 대법관 윌리엄 본 트레이저는 늦게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나 나중된 사람이 먼저 된다고 하는 말씀대로 구원의 체험을 분명히 한 거듭난 분이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날마다 감격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사건을 맡았는 데 죄질이 아주 나쁜 헤리팔머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악독한 강도질을 한 범죄자였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본 트레이저는 그를 사랑하고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상적인 판결은 10년 정도 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금식기도후에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파격적으로 1년 형을 언도하였습니다. 부당한 판결이라는 여론이 사회는 물론 매스컴, 법원 내부에서까지 들끓었습니다. 윌리엄 본 트레이저는 예상하였던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법적인 제재를 맡고 부당한 재판을 검사하는 위원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표를 내고 대법관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1 년 후 헤리팔머가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오던 그 날 그는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가 교도소를 걸어나올 때, 트레이저는 헤리팔머 죄수를 끌어 안았습니다. 죄수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본 트레이져 판사앞에 엎그리면서 말했습니다.
<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판사님!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이 말을 듣고 트레이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 이렇게 까지라니요. 주님은 형제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주셨는데요. 그것은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헤리팔머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말했습니다.
<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그는 지금도 약속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십자가 앞에서 <주님!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 데요...> 라고 말하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강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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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하셨네

본문: 마28:1-17

서 론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갔지만 갔다가 다시 온 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무덤을 활짝 여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여 영원히 무덤에 가두려고 했지만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 영원히는 고사하고 일주일도 가두지 못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타 종교에 없는 자랑스럽고 뜻 깊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

1)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가 목격을 하였습니다.
마28:1-2, 5-8.
2).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목격을 하였습니다.
마28:4, 11.
3). 공회원들은 무덤을 지키던 자들로부터 부활소식을 보고받았습니다.
마28:11-15
4).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마28:16-17.
5).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눅24:31"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6).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7)500 명의 무리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고전15:6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상태
신령체로 부활하셨습니다.
신령체는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하고 만져볼 수도 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눅24:31"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
1)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27:54에 보면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면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2)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3) 믿는 자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요20:19, 21,26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4)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롬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5) 죄인들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6)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셔서 많은 자에게 보이셨으로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하여 나의 주로 모실 때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으며 평강의 삶을 살게 되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저주에서 해방 받아 복된 삶도 살 수 있습니다.
/ 이훈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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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고전 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막 14:28)과 예수의 미리 말씀하심의 성취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 것이나 또한 반드시 살아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 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떠한 소망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합니다. 예수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예수와 연합한 성도들을 살리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까?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고전 15장 51∼54절을 보면 썩지 아니할 몸,신령한 몸,결국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부활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의 부활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울음을 해결해 주었습니다(요 20:15). 안식 후 첫날 주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때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눈물을 멈추게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모르는 아픈 상처로 인해 고통과 아픔의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 모든 눈물이 멈추어질 것입니다.
셋째, 부활 사건에는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빈 무덤이 바로 부활을 증거해 줍니다. 무덤은 패배와 절망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빈 무덤을 통해서 사망 권세를 진멸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심으로써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에게,베드로,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마,500여 성도 등에게 나타나셔서 사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더 이상 사망 권세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부활사건의 산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동석 목사(목동능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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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왕중의 왕'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기구였습니다. 가장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그 형틀을 자기 등에 메고 가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자기 십자가를 세웁니다. 그리고 거기 못 박혀 피를 흘리다가 죽어갑니다. 십자가에서 겪는 육체적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오랜 시간을 폭염 속에 시달리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잔인한 사형제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형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는 이미 고통을 많이 받으셔서 너무 힘들어 하셨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예수님을 백부장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골고다에 이르자 그 십자가는 구덩이에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명패가 붙여졌습니다. 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뜻으로 그렇게 썼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거기에 '자칭'이라는 말을 덧붙이라고 더욱 조롱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다 썼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그대로 정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을 참칭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로 모두 썼습니다.
라틴어와 헬라어,히브리어는 당시의 세계어입니다. 히브리어는 종교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언어요,라틴어는 당시 온 세계를 통치하던 정치의 세계어요,헬라어는 당대의 문명을 대표하는 문화적 세계어였습니다. 빌라도는 한 나라 말로만 써도 되는 것을 세계적인 언어로 모두 표기하였습니다. 빌라도의 의도는 로마에 대한 반역을 경계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이 참으로 세계를 다스릴 왕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시하려던 뜻이었습니다. 쓰기는 빌라도의 손을 빌려 쓰여졌지만 예수님을 왕 중의 왕으로 고백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이 온 세계의 왕이십니다. 모든 나라의 왕이십니다. 정치 문화 종교 등 온 세계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빌라도가 쓴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천지만물과 인류의 역사를 친히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인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세계사의 연대를 BC와 AD로 가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권세를 지닌 이들이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남들 위에 군림하는 자를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호의호식하며 큰소리로 호령하는 것이 왕이라고 봅니다. 구중궁궐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끌려가시는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가장 비참하고 약한 모습으로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조롱을 당하면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스스로 가난해지시며 모든 이들의 아픔과 고통과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은 남을 짓밟고,빼앗고 죄인으로 만들어 죽임으로써 왕이 되지만 예수님은 짓밟히고,빼앗기고 스스로 죄인이 되시고,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짓밟히심으로써 사람들은 세움을 받았고,예수님이 빼앗김으로써 사람들은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하늘로 들려올리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왕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매단 시저(카이사르)입니까,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요,주시요,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오늘 우리의 삶을 더욱 낮은 자리로 내려가도록 감동합니다. 누구나 다 높아지려 하고,다스리려 하고,군림하려는 이 세상 속에서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섬기며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것,이것이 부활절을 앞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 이중표 목사(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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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낡은 질서 개혁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희망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일구는 여러분에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혁의 과정입니다.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반복이 진보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왜곡된 역사와 정치는 죽음의 다른 모습이며,역사 발전을 위한 몸부림은 삶의 다른 얼굴입니다.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합시다. 오랜 세월 이 땅의 민중을 억압하고 역사를 유린하던 묵은 질서를 걷어내야만 합니다. 낡은 질서의 개혁은 한국교회가 갈망해왔던 민족의 평화통일과 인류화해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백도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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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

1973 년에 당시 우간다라고 하는 나라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이 독재자로 인해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그 가우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샘판디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무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교회에 막 쳐들어 왔다. 목사님을 죽이려고. 그 분에게 총을 들이댔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 그러시죠 뭐. 하지만 내가 이제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이세요."
마지막이니 그러라고 했다. 목사님은 조용히 기도를 했다. 그런데 아무 다른 기도가 없고, 예수님께서 하시던 기도 그대로 했다.
" 여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아멘"했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기도해줘서 고맙습니다"하고는 그냥 가더란다.
그 분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 금방 죽는다고 하지만 아무 두려움도 없다. 왜? 부활절 아침이니까.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고 부활 신앙으로 충만해 가지고 있는 시간이라 죽음에 대한 문제가 조금도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세상을 변화시킨 기독교 역동성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없는 박해와 도전을 만났지만 언제나 위기를 갱신의 계기로 삼아 스스로를 정화하며 세상을 압도하는 생명력으로 변화의 주체가 됐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신앙의 초석이며 변화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 어떤 슬픔과 공포,회의와 실망,고통과 상처도 부활의 사실을 믿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며 부활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감격의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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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신 예수

본문: 고전 15:1-26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 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다.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 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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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부활을 바라는 자

성경: 요5:29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감리교의 시조 죤 웨슬레에게 어느 사람이 묻기를 "당신이 내일 밤12시에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예! 저는 그 남은 시간을 작정한 대로 보내겠습니다. 오늘밤과 내일 아침은 글로체스테에서 설교하고, 오후에는 툭스버리로 차를 타고 가서 설교할 것 이고, 밤에는 회의를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 마틴 집을 방문하여 즐길 것입니다. 그런후 10시엔 잠자리에 들 것이고 12시엔 영광 중에 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미래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의 담대함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생명의 삶

사랑에의 응답

당시 이스라엘에는사람이 죽은 후에 그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향품을 넣어 두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 내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넣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조바심 내며 다음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무덤에 도착해서 보니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함께 달려갔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빈 무덤을 멍하게 바라보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마리아는 홀로 남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자들은 사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누구보다도 먼저 부르신 사람들로, 무엇으로 따져 보든지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보다 대선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이들 앞에 드러내지 않으시고, 죄 많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던 여자였습니다. 소망도 가치도 없었던 미천하고 가엾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시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와 조건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일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 「새벽 기도」/ 김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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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하나님

제 친구인수잔 베그너는 두 살 때 류마티스성 관절염에 걸렸다고 진단 받았습니다. 관절염의 치료를 위해 코티손(관절염 치료약으로서 부신피질 호르몬의 일종)을 복용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인해 발육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신장이 겨우 128cm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수잔은 아동기의 질병이 가져다 준 심한 증상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 약하게 부딪혀도 타박상을 입었고 심한 상처와 흉터를 남겼습니다. 그녀의 지난 35년간은 육체적으로 악몽의 기간이었습니다.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자리에서 몸을 뒤집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굳건히 잡았습니다.
제가 수잔을 그 나라에서 만나게 될 때, 혹은 여러분이 여러분보다 앞서 천국으로 간 친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즉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것이었던 모든 것은 완전하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거룩하게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개성, 그들의 재치와 그들의 매력과 그들의 참을성과 그들의 사랑은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그들은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왕같이 될 것입니다. 수잔과 저,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살아 있는 사람들과 영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 「종과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켄트 휴즈

▧ 묵상
ㅇ. 남의 생각을 무시한 채 내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추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습니까?
ㅇ. 나에게는 부활에의 확신과 소망이 있습니까?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기도
저의 얕은 지식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해 왔음을 회개합니다. 저로 하여금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임재를 늘 느끼게 하소서.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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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본문: 빌 3;10∼12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0∼11절).

사도 바울에게는 일생을 다해 직접 체험함으로써 알려고 했던 세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둘째는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셋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세 가지를 알기 위해 바울 사도가 실천했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나옵니다(10∼11절).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위에 말한 세 가지를 경험적으로 알기 위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대로 나도 죽음으로써 어찌하든지 나도 주님처럼 부활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했다"고 합니다. 주님처럼 나도 역시 먼저 내가 죽는 생활을 실천했다는 말입니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으며 고난 없이 영광은 없습니다. 주님이 재림할 때 우리는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때 부활하려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먼저 죽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때가 되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의 부활만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했던 그 능력을 자신의 삶속에 체험하려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삶을 최선을 다해 실천했습니다.
자연적으로 되는 것은 목사입니다. 그러나 신학교 시절 하나님의 소명 앞에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가 됩니다. 시간이 흘러 되는 것은 목사요,자기가 죽어서 되는 것은 목자입니다. 시간이 흘러 평신도가 집사로,집사가 권사로,권사가 장로로 그렇게 되는 것은 교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성도가 됩니다. 시간이 흘러 되는 것은 교인이요,죽어서 되는 것은 성도입니다. 목사가 되느냐 목자가 되느냐,교인이 되느냐 성도가 되느냐는 그가 자신의 인격 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그 고난에 함께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부활은 때가 되면 하겠지만 내가 진정 눈물겹게 돈을 벌어봐야 돈의 참의미와 가치를 알듯이 종말의 부활이 진정 감격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생활을 애써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 기도: 일생을 다해 주님의 부활을 자신의 삶과 인격속에 체험하기 위해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려 했던 바울 사도처럼 저희도 먼저 죽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적극적인 시간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유원철 목사(코스모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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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있기에 소망이 있다

1967 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 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존 스토트
▧ 묵상
ㅇ. 나는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내 삶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마지막 날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떠하기를 바랍니까?
ㅇ. 내가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 기도
제 삶에 푯대 되신 주님, 이 믿음의 경주를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을 알아 가기 원합니다. 저의 완주에 함께해 주소서. 제가 땅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위엣 것을 구하며 살아가게 인도하소서.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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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님

본문: 요11:38-44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세 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누구나 처음 태어날 때 웁니다. 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웁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웁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짧은 말씀에는 기가 막힌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크게 웃기는 쉽지만, 잔잔한 미소를 짓기는 쉽지 않습니다. 잘못 미소를 지으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뜻하고 온화한 사랑의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의 웃음도 미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다시 11장 35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말씀은 우리말로 세 단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그러나 영문에는 두 단어(Jesus wept)로 구성돼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가장 짧은 문장이지만 가장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눈물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왜 무소불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셨을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고통스러워 흘리는 것과 사랑해서 흘리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울 줄도, 웃을 줄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정이 없는 돌멩이가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와 공의만 내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된 구원에는 구원하시는 분의 눈물이 있고, 구원받는 자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눈물을 흘리시고, 구원받는 우리도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의 의미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주제는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집에 있는 벌레가 죽었을 때 통곡하며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는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깨어진 항아리, 버려진 옷과 구두, 폐기된 자동차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쓰레기를 보고 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를 잃었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끼고 애착을 느끼는 물건이 깨어지거나 없어졌을 때 속상해 합니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가치는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물은 드라마를 보고 흐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으로 인해 불쌍히 여기는 감정으로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우신 이유는 나사로가 눈물을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특별하고 보배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할까요? 자신이 특별한 존재요, 의미 있는 존재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있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주검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능력자의 눈물이요, 절대 구원자의 눈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의미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물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은 동물에 비유하는 일입니다. 소띠, 말띠, 개띠 등 띠로 사람을 표현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동물의 형상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이 소중한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종노릇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영적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귀한 존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덤으로 가다
본문의 36,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나사로를 '정말 사랑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독하게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도 아파하시고, 우리가 병들면 예수님도 밤잠을 못 주무십니다.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며 감탄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분이라 나사로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질문도, 의문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두 번째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통분'은 곧 '분통'입니다. 여기서 분통은 거룩한 분노의 감정입니다. 33절에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8절에 죽음 앞에서 분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 고통, 저주 등에 대해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분통을 터뜨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아니라 죄, 죽음, 사탄에게 분통을 터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 부조리만 볼 게 아니라, 부조리 안에 있는 구조적인 죄악의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악의 본질에 대해 분노하고 대면하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현상만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통을 터뜨렸다'는 것은 질병, 죽음에 대한 분노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각종 질병, 죽음에 대해 통분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에 분노하시고 무덤과 대결하셨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도착하시니 무겁고 큰 돌이 무덤의 문을 막고 있었습니다.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씀에 재미있는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음과 직면하러 가셨는데,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애물을 직접 치우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아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살리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 놓여 있는 무거운 돌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도록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마르다의 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시자, 순간 마르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저 안의 시체가 3일 지나서 냄새가 날 텐데 예수님께서 왜 저러시나'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편안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지만, 급해지면 잊어버립니다. 그녀는 인간적인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로 부활의 믿음, 생명의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한다고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옛날의 인간적 분노, 생각 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평안해 보이지만 내부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믿음의 불순물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르다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태도나 말하는 것이 달라졌지만, 무덤 앞에서 순간적으로 옛날로 돌아갑니다. 돌을 옮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항거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인간적인 염려와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의 행위를 통해 귀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11장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가끔 인간적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적으로 영적 공식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공식이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을 합니다. 보고 믿겠다는 것은 인간적인 믿음이고 거듭나지 않은 믿음이며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입니다. 우리는 자라온 환경, 교육, 경험 등에 의해 봐야만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번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기다 - 기적의 시작
이런 면에서 믿음은 이성이 아니라 은혜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고 애쓴다고 믿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따지며 노력하고 모든 것을 동원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믿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서로 덕을 끼치고 축복을 나눕니다. 교회에서 봉사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믿음으로 하는 봉사는 시끄럽습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심에는 인간의 의지, 비교, 경쟁, 시기심 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항상 피곤할 뿐입니다. 겸손히 간구한 은혜의 믿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과 축복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혜의 믿음이길 축원합니다. 마르다는 인간적인 믿음으로 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돌아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얼른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무덤의 돌문을 옮깁니다. 41절 말씀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믿음이란 자기 수정이고 결단이며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자, 41절 후반에서 예수님께서 중보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있기 전에 중보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이 있기 전에 믿음의 기도가 있고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42절 말씀을 읽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어서 43, 4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아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수건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여기에 구원의 놀라운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은 자의 수건을 풀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오늘 메시지를 통해 결론을 내릴 것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분명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살리시거나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냥 내버려 두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주님께서 죽을 병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 주님의 기적, 초월적인 역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죽을 병도 고치십니다.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나중에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두 번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죽었다가 언젠가 부활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오래 산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그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에서 머리 숙인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주시고 생명의 신앙을 주시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기적을 믿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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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생명

본문: 요11:17-27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던 나사로는 결국 죽었고 무덤에 삼일동안 갇혔다는 내용이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능력도 있었고 나사로를 사랑했는데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렸을까요?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삼일 후에 오셨을까요? 우리들의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4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의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죽음도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복과 기적을 주기 위해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첫째, 예수님은 나사로를 향하여 '우리 친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친구로 초대합니다. 친구처럼 대해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고 표현합니다. 죽음이란 종말이요 끝입니다. 죽음은 저주이자 심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은 결코 아름다움도 희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저주의 죽음이 부활의 은혜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십니다. 죽은 사람은 깨어날 수 없지만 자는 사람은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시며 발걸음을 옮겨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 이야기가 18절부터 20절까지에 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 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예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가 진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했을 때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었던 것이다'라고 악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절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 죽었습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잔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죽었습니다. 많은 문상객이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나사로와 그 가족이 동네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네의 모든 사람이 와서 문상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품이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두 사람 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척 좋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뛰어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혀 다른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며 개방적인 스타일이었고,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스타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르다가 먼저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솔직한 감정을 예수님께 드러냅니다. 마르다의 말에서 우리는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만약 주님이 일찍 오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라는 말에는 원망과 불평이 섞여 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하는 섭섭함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든 자도 고치신다는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늦게 왔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예수님은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그 말이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을 가만히 보면 굉장한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이 말을 살펴보면 마르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믿음의 한계
마르다의 믿음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믿음이 아니고 한계가 있는, 인간적인,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말에 다 나와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 믿음의 첫 번째 문제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믿음이라고 착각한 점입니다. '주님은 지금이라도 뭔가 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긍정적이고 좋습니다. 희망과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주님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베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한테 잘 해 주실 겁니다'와 같은 마음은 막연한 희망과 기대입니다. 본질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런 기대는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대를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두 번째 문제는 마르다의 말에 있는 허점입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지 예수님이 하실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마르다가 '믿는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압니다' 라고 말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입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한 말입니다. 지식과 정보가 기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해했다고 다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믿습니다'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녀의 믿음의 기초는 이성, 합리성, 지식, 정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은 좋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목마른 믿음, 기대와 희망은 있지만 결정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의 믿음에 쐐기를 박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것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믿음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된 희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에 기초한 사실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성과 합리성, 정보와 지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해 흔들릴 마르다가 아닙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식의 믿음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온누리교회에서 수 없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지만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식으로 바꿔서 재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수준을 결코 뛰어넘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24절에서 마르다가 어떻게 반응하는 지 보십시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기에서 또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지만 부활은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한다고 이성적으로 말합니다. 그녀의 말은 이성과 합리성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마르다는 종말에 모두 부활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지금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러한 구태의연하고 인간적인, 믿음의 관점을 바꾸지 않으려는 마르다에게 두 번째 쐐기를 박습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내가 생명을 주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을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활이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음은 끝, 저주, 심판이 아니라 부활의 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설명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영생'입니다. 주님이 곧 '영생'이요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부활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습니다. 딱 한 사람, 나사로만 살렸습니다. 예수님이 십가자에 못박혀 죽고 난 이후에 부활할 것을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고 마르다에게 기막힌 말을 하십니다. '네가 믿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믿겠냐'고 도전을 합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결단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갈등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결단을 내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에 마르다는 자신의 믿음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이고 제한적이며 합리적 사고에 맞아야만 믿는 믿음이 부활의 믿음, 기적의 믿음, 능력의 믿음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메시아의 부활과 연결되는 기막힌 사건입니다. 이것을 마르다가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멘, 내가 믿나이다 27절에서 마르다가 드디어 '아멘'하기 시작합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주여 그러하외이다'는 '아멘'이라는 뜻입니다. '아멘'은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예수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이십니다. 주님이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기적을 지금 베풀 수가 있습니다.'라고 마르다가 말을 바꾼 것입니다. 믿음이 바뀌면 언어가 바뀝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믿음으로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아는 믿음에서 믿는 믿음으로, 이성의 믿음에서 결단의 믿음으로 변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메시아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도전합니다. '아는 신앙'을 졸업하고 결단하십시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분들은 끊기로 결단하십시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지식으로는 여러분이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의지적으로 믿습니다.' '감정이 동의하지 않아도 믿겠습니다. 결정하겠습니다. 내 평생을 가난한 자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런 고백 위에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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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환상

주전 565년쯤에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신비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나라는 망하고 여호야긴 왕과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땅에서 좌절과 고달픔 속에서 살고 있는 때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역시 포로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다귀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큰 군대로 살아 일어나는 기이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환상의 의미를 친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현재 상태가 골짜기의 마른 뼈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의 회복과 함께 다시 강한 민족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환상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시는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시는 삼단계의 운동명령이 들어있습니다. 즉,어떻게 할 때 한 개인이 영적으로 살고,우리의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다시 부흥하며,민족이 흥하게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첫째로,회개운동을 통해 영적으로 살아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패역한 죄로 인해 바벨론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곧 영적으로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아주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흩어진 뼈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듯 모든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범죄하여 하나님 앞을 떠난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의미로 "회개하라"(마 4:17)고 외치셨습니다.
둘째로, 말씀의 성육화 운동으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겉치레와 형식은 있으나 말씀이 인격화되지 않는 신앙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신앙인인 뼈만 앙상한 몸 같습니다(계 3:1). 그러나 힘줄이 생기고, 살이 돋아나고,가죽이 입히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고 뚜렷한 가치관,거룩한 사랑의 두터운 정서, 굳센 신앙의 의지를 회복할 때 신앙은 아름답고 튼튼한 모습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을 말씀의 인격화,곧 우리 속에 이루어야할 말씀의 성육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의 생기운동으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적을 물리치고, 선한 일을 이루는데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없는 자는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남에게 짐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고 증거합니다. 진정한 신앙과 삶의 능력은 하나님과 사람의 영혼을 향한 불붙는 사랑의 능력이요,모든 영적 대적과 시험을 향한 담대한 용기의 능력이며 주께서 맡기시는 일에 대한 헌신적 사명의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은 인위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 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능력입니다. 뼈위에 힘줄 살 가죽이 덮혔으나 생기가 없던 몸속에 생기가 들어가니 일어나 큰 군대가 된 것같이 성령의 능력은 우리 모든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여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 위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살아나는 자가 될것입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살리는 환상, 이것은 오늘 참으로 그냥 두어서는 아니될 어지럽고 절망스런 우리의 교계, 우리의 사회, 우리 민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이 살리는 환상을 믿음으로 자기 속에 품는 자는 영적으로 반드시 살아날 것이요,또 이 환상을 가지고 공동체 속으로 나아가는 자는 그 공동체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살리는 환상을 품고 이 시대의 에스겔같은 선지가가 되어 자신도 살고 가정과 이 사회를 살리는 하나님의 담대한 대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 이병부 목사(새화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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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룩하신 세번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서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다 속죄함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엡 2:16,골 1:20). 넷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주님의 속죄의 십자가는 질 수 없지만 각자 자기 몫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라가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마 16:24).
다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이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원문에는 "장사한 후에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ie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이란 말씀이 있는데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생략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근거한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요 기초이다. 십자가가 의미있는 사건이지만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것은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다. 따라서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다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고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다.
그러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은 크게 5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헛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죄의 의미가 있으며 우리도 믿으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준다. 둘째로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 준다(롬 1:3∼4).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임을 증거해 준다. 넷째로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약속하신 대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다섯째로 주님은 만물의 정복자인 것을 말해 준다(요 16:33).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부활의 신앙을 갖기를 원하신다(요 20:27). 기독교 신앙은 창조신앙 부활신앙 재림신앙의 세 기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둘째는 부활의 능력을 갖기를 원하신다(빌 3:10∼11). 우리가 날마다 승리하려면 이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막 16:15).
/ 신성종 목사<대전월평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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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노래

지난 겨울
얼어죽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초목들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치신
부활의 증거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믿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앞에
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해마다 기적의
증거되고 싶습니다.
- 유안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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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은 전도의 원동력

전도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에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신앙이 주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incarnation)하시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이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고전 15:3∼6)
그러면 우리 전도자가 확신해야 할 구원의 근거를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찾아보자. 첫째,우리의 죄사함의 근거인 주님의 보혈도 부활로만 증명된다. 물론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시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시며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의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다. 그러나 보혈의 공로도 예수 부활로만 확증된다. 만약에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 개인의 죄의 대가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가장 큰 적인 사망 권세에서 승리하신 것이며 예수 부활을 믿는 자는 사망 권세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다. 죽은 지 4일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내셨고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도 장사 행렬 속에서 살려 일으켜 세우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달리다쿰'이라 명령해 소생케 하셨다. 주님은 스스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을 십자가에 달려 채찍에 맞음으로써 담당하신 후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하시어 우리 육체의 연약함과 질병을 대속하셨다(마 8:17,사 53:5). 넷째로 성경은 주님이 가난케 되심은 믿는 자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애초부터 부요하신 분이지만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셨다. 그러나 그 가난과 궁핍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끝을 맺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영과 육을 부요케 하셨다. 우리 기독교의 축복은 원칙적으로 말하면 우리 주님의 고난의 대가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 분은 지금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간접, 혹은 직접으로 이 우주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님의 부활로 믿을 때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이 진리 즉,예수 부활의 확신과 인간 구원의 근거를 가르쳐주고 믿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우리가 믿고 전하려고 할 때 전도의 원동력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전도의 원동력은 부활 신앙에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 민경설 목사<광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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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새로운 역사

본문 : 누가복음 24:36~49

한 역사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실 세계는 그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지금도 인정을 합니다. 우리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지금은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이 2003년이라고 하는 날짜 계산을 온 세상이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사건도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는 흉악하고 소름을 끼치는 사형 집행 기구로 누구도 보지 아니하려고 하는 괴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 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변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오늘 온 세계 인류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작은 나라에만도 50,000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온 세계 지구 전체는 오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인류의 대 축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이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
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이 됩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누가복음의 마지막 결론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서 출현의 장면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실적 출현은 매우 뜻깊은 의미를 몇 가지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 아침에 주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역사의 발견을 말씀의 중심으로 한번 생각하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이 사건은 인류 초유의 사건을 통한 예수의 영광이 조명되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에 걸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그 영광의 때가 언제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한 복음 17장은 1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 전 장이 예수님의 기도문으로 되어 있는데, 1절에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하십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끝없는 노력을 나름대로 해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철학으로 죽음을 초월하는 문제를 시도
해 보았으나 누구도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의학으로 해결해 보려고 우리 가까운 나라의 역사의 진시황은 이 문제를 의학으로 한번 해결해 보려고 불로초, 불사약 이런 것을 구해오라고 먹고 불로장생하리라고 하는 그런 역사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인간에게 유익을 남겨준 몇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그들을 성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서 존경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라든가 공자라든가 석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평생을 통해서 말한 진리성이 몇 가지 특징이 있는 것을 우리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자신의 문제 "내가 누구인가?" 그래서 너 자신을 아는 것이 진리라고 그렇게 인간의 혼을 깨우쳤는데, 그가 가르쳐 내면 철학의 시조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철학에서는 그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이 내면 철학이란 곧 영혼의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역설관 진리는 혼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공자의 경우는 인간 삶의 제일 중요한 것이 인간의 관계성이라 해서 도덕률을 만들어서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정립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 나라 같은 사람들은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석가는 인간 고뇌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서 이 고뇌를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을 하나의 구원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삶의 부분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근대 사람으로는 칼 막스를 들 수가 있는데 그는 인간의 해방이 무엇인가? 빈곤에서의 탈피와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인간구원의 문제로 취급을 한 적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무엇이냐? 지금 그분들이 말한 모든 진리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포함이 되어 있으며, 아울러 그분들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생명 불멸의 진리, 즉 영생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사랑으로 맺으며 고통은 십자가로 해석을 하고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빈곤과 평등의 문제는 하나님의 복 안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이 더하여질 것이라는,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인간이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평등법을 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창조이후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사람이 인간 죽음과 영생의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누구도 할 수 없는 이 일에 대한 초능력적 성취 부활은 곧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여 주는 사건
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 안에는 이렇듯 예수 믿는 기독교 신자가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것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당시를 생각해 본다면, 가장 가깝게 예수 곁에 존재했던 제자들마저도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일은 모두 허무했고 꿈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도 이 예수님의 영생의 진리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은 후에 삼일만에 부활하리라고 수차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설교해 주셨지만 그 예
언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믿지 아니하였는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 사람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난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믿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이 부활의 사건은 영광된 예수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인간은 과연 어떻게 되는가 라고 하는 인간의 가장 궁금한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현실적인 대답을 하고 계신 것이 바로 부활의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아마도 히브리 민족
사이에 이야깃거리로만 남는 전설의 고향 정도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과 함께 복음이 살아나서 구원의 산 역사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난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닌 영광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 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초이성적, 초자연적 사건을 접하는 제자들의 갈등이 생겨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로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안한 사람입니다. 다만 유대 나라에서 흔히 하는 일인 죽은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지난 후 새벽같이 향품을 준비하여 갔을 뿐입니다. 유대 나라 무덤의 문화는 한 무덤 안에 수십 명이 함께 있고, 또 혼자 있다 하여도 우리 나라와 같은 그런 무덤 문화가 아닌, 납골당 형식의 굴 안에 안치되어 무덤 문만 열면 들어가서 시신을 볼 수 있는 그런 무덤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 복음에는 살로메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향품을 준비하여 가지고 가면서 걱정하는 말의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살아나신 예수를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는 제자들은 그때부터 심각한 갈등을 갖게 됩니다. 그 갈등이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초이성적 사건이 현실적으로 자기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건은 믿을 수도 없으며 안 믿을 수 없는 갈등의 부분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러한 제자들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과 지난 3년 동안 같이 사셨던 그 나사렛 예수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바로 그 예수가 자기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
에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 과학을 초월하는 이 사건 앞에서 최대한 이 사건을 이성적 판단으로 해결해 보려고 말들을 합니다. 37절에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으로서의 출현은 예수님 아니고라도 어느 사회나 많이 있어온 이야기들입니다. 제자들의 이성적 판단은 영의 출현까지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일은 더러 있었다고 우리가 들어온 이야기가 있으니까 제자들의 이성적 지식은 아마 지금 나타난 이 예수도 영의 출현일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자기들이 가지는 평소 지식으로 잠재워 보려고 하는 이성적 노력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무엇인가?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있느냐?" 39절에 보면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은 "영은 물질이 아니라서 만질 수 없으나 나는 인간됨의 육체적 물질인 육체를 만질 수 있는 물체로 너희 앞에 섰으므로 만져서 물질인 나를 확인하라." 최대한의 자신들의 지식을 살려 영의 출현까지 생각해본 제자들에게 육신이 살아있는 영과 육체의 구별을 예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확인시켜주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성과 초이성의 갈등이 오고가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만져보고 믿겠노라!" 이런 말을 합니다. 이성적으로 믿겠다는 말입니다. 만져서 확인된 물질은 이성적
판단 안에 들어오는 지식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지식을 믿겠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이 사건을 믿어야 옳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이 도깨비에게 홀린 것인가? 이런 갈등 속에 지금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은 초이성적, 초자연적 사건을 접하는 제자들의 갈등을 가져왔다는 사건입니다. 물질적 육체의 예수를 확인한 제자들은 기뻐했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믿지 못하고 갈등함이 오늘 41절에 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가지 증거를 더 확인시켜 주는 작업을 하십니다. "혹시 여기 먹을 것이 있느냐?"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영은 먹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에 구운 생선과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렇게 확인시켜주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 일을 마친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부활에 대한 성서적 기초를 확인시켜 줌으로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역사화 하시는 것입니다. 44절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 예언된 모든 나에 대한 예언의 초점이 여기다! 영생의 길이요 인간 구원의 길이요 죽음 이후의 인간의 확실한 실체는 이것이다! 부활이다! 여기서 인간 구원이 완성된 것이다! 지금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 참으로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간은 한 나라 안에서 그들의 위치가 가장 비참한 자리에 떨어져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천지를 뒤집는 듯한 환호성의 승리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최대의 희망의 얼굴들로 군중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갈보리 사건은 제자들에게 최대의 절망적 상실을 갖다 주었습니다. 이제는 살아남을지도 확실하지 아니한 불안감이 가득한 때입니다. 이제는 절망과 상실의 자리에서 인생의 최대의 수확과 희망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다시 생겨지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이렇게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자기의 육체를 Body touch를 시키면서 구운 생선을 잡수시는 이것이 정말 현실인가? 이성적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초이성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접하면서 갖는 갈등이 지금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3년 동안 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모든 이야기는 확실한 현실로 우리 인생에게 주어지는 초자연적, 초이성적 세계가 확실하지 아니한가?' 그 믿음이 이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8절에 "그렇다. 너희
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고 영생을 얻으며 무덤에서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고 하는 이런 문제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는 초이성적,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그것이 너무나 이성적 판단으로 믿기 어려운 초능력의 세계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구원은 믿는 자만이 소유하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앞으로의 사역에 대한 마지막 결단이 필요한 때를 만나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은 이제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제자들이 그 일을 맡아서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이 열심히 해온 일을 분석하여 보면, 예수님의 목회는 축제적 성격의 목회였다는 것입니다. 거의가 군중 집회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적어도 수천 명씩 모여드는 집회를 통해서 부흥회 성격의 사역으로 지금까지 일관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기적의 사역도 군중 집회적 성격을 띄우고 있어서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000명 이상이 먹었다! 하도 사람이 많이 몰려와서 군중 집회적 성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또, 집회 일정도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할 만큼 분주했다고 그랬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든 군중들이 예루살렘을 가득하게 메워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몰려들고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아야 되는 축제적 성격의 목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치 부활하신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몰래 몰래 다니는 인상을 깊이 심어주고 있습니다. 부활 후에 만나준 사람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죽었던 예수가 살아났다면 한번 예루살렘 복판에 나타나셔서 옛날같이 예루살렘 거민을 다 모아놓고 군중 집회를 열고 "보아라! 너희들이 나를 죽였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나지 아니했느냐?"
빌라도 법정에 가서 한번 큰 소리를 치시고 "네가 사형 집행을 선언한 내가 이렇게 살아났다!" 그러면 훨씬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우리들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의 차이입니다. 한번 보기 좋게 복수도 좀 하고 "이제부터 나는 가지만 내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도 다 멸망 받을 것이다!" 뭐, 이렇게 제자들도 좀 튼튼하게 해주시고 힘을 좀 주고 그랬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합니다. 로마 정부는 말
한마디로 다 쓰러뜨려 버리고 대제사장이라든가 서기관을 비롯한 예수를 죽이라고 판결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쳤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다 엎드려서 회개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제자들은 반대로 힘있는 실세가 되고 그러면 선교에 더욱 놀라운 효과가 오지 않았을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반대로 행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이제 이 앞으로 내 제자들의 사역은 고난의 목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
에, 조용히 뒷골목을 다니며 낙심된 자를 찾아서 용기를 주고 축제적 분위기의 기적적 사건을 연출하는 신나는 선교가 아닌 고난의 목회적 차원의 가시밭길을 조용히 이루어 가는 사명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긴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까? 심방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믿을 수 있도록 나타나서 자세한 설명을 그에게 주십니다. 상담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이야기를 시편에서부터 풀고 계십니다. 설교입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이제 내
가 간 이후의 너희들의 사역은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렇게 하라! 추후라도 내가 있을 때 예루살렘 군중이 다 모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영광된 것을 생각하면 목회에 실패할 것이다!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목회 사역,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제자들의 사역은 별안간 죽은 사람이 기도해 주었다고 살아난다든지, 무슨 불치의 환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걸어간다든지, 먹을 것이 없을 때 오병이어로 5,000명이 먹을 수 있다든지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부활은 제자들의 목회 사역을 새롭게 하는 새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제는 한가지 길 밖에 인류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던가 말던가 … 믿는 자는 예수와 같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반대의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마지막 부분인 부활 이후의 이 사건이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혼의 선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 갈보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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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

본문: 고전 15장 3~11절

사도행전적 교회란 안디옥교회처럼 비전을 나누는 교회입니다. 목사, 장로, 평신도 리더십들이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축복과 부흥을 나눌 때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이 영원히 안고 가야 하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런 부활의 축복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대에 지성의 대표였던 사도 바울입니다. 그를 통해 놀라운 부활의 은혜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부활 신앙이 학문이나 철학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한 엄청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죄로 인해 절망하여 죽어 가는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3 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말하면 설득력이 강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은 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들이 사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2천년 전에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갇혔다가 부활하셔서 이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이십니다.
4 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바울은 성경에 근거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성경의 예언은 창세부터 종말까지 일 점, 일 획도 어김없이 그대로 이뤄집니다. 성경은 영원히 변함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활한 예수님 만난 사람들
맨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은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어서가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난 이른 새벽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4절 말씀에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러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져 있었고, 무덤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울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천사가 나타나 '너희가 찾고 있는 예수님은 성경의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지금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열두 제자들에게 전해 모두 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목격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절에서 10절까지 말씀에서 예수님의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이 굴러졌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여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즉시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정말 돌문은 굴러졌고 주님의 시신은 오간 데 없이 수의만 곱게 개켜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3절까지 말씀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시고 못 자국난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은 제자 도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열심히 증언했지만,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못 자국이 선명한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절망한 나머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분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말할 수 없는 비애와 좌절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시고 성경도 가르쳐 주셨는데, 나중에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비애를 안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돌이켜 기쁨과 희망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섯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4복음서에 없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500여 형제들이 한꺼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를 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5, 6절 말씀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일곱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인간 같지 않은 자신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바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9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곧 사울에서 바울로 개명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사울은 누구보다 박식하고 지성이 탁월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란
이런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찾아온 여인들에게 '제자들을 갈리리에 모이라고 전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중요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 ~ 20).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옮기셨습니다. 제자들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4 ~ 8).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고, 허다한 무리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받은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갈릴리에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세례를 기다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명령을 받고 시작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교회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모여 성령의 권능을 받아 기적을 일으켰으며 로마를 바꿨고 세상을 바꿨던 것이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여 세웠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는 명령을 품은 사람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 조직했던 것입니다.

주님 함께하시는 온누리교회
지금부터 18년 전에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를 세워주실 때 사도행전적 교회의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찬송, 환희, 비전, 믿음을 가진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는 부활의 비전, 희망, 믿음, 기쁨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온누리교회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수많은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만났던 부활의 예수님을 또 한 사람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저입니다. 37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회심하고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던 그 날 밤이었습니다. 당시에 잘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그 밤에 찾아오신 주님은 흰 옷을 입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셨으며 두 손에 상처가 있고 옆구리가 상하신 분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2천년 동안 기다려 왔다'고 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저는 요즘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3 년 후, 저는 폐결핵에 걸려 휴학을 하고 병원에서 요양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1시쯤 제가 처음 만났던 그분과 똑같은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제게 목사가 되지 않겠느냐, '나'를 위해 살지 않겠느냐며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이후로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온누리교회를 주셨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가 주님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2천년 전에 가시면류관을 쓰신 채 두 손에 못 박히고 허리에 창을 찔리신 후 죽으셔서 무덤에 갇히신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의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이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온누리교회는 큰 부흥을 이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흥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교회가 비정상적으로 급성장한 것과 똑같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후에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하루에 3천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4절 말씀에 남자만 5천명이 모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2만에서 3만의 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장 7절 말씀에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계속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 말씀부터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시작됩니다. 교회 리더들은 붙잡혀서 감옥으로 가고, 성도들은 순교하기 시작합니다. 이 핍박의 정점에 바로 사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안디옥교회입니다.
회심한 바울은 자진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에 가서 목회했습니다. 그런 중에 성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 2, 3차에 걸쳐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그의 전도 여행의 사령탑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한국의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추구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먼저 예루살렘에 대형 교회가 있었고, 다음으로 안디옥에 중·소형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목회 중심이었고, 안디옥교회는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는 저는 요즘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누리교회는 목회의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양재와 서빙고에 큰 공간을 주셔서 주일에 3만 명이 넘는 성도들이 찾아와 예배합니다. 온누리교회에는 잘 훈련된 좋은 일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헌금이나 다른 자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각종 사역과 프로그램의 소프트웨어는 막강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에 이런 축복을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교회에 3천, 5천, 3만 명을 보내주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왕국을 만들어 기득권을 갖고 안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편하게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핍박을 가해 성도들을 각지로 흩으십니다.

희생과 헌신으로 비전교회 세워야
여기서 우리가 큰 교회로 만족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진 않습니다. 편안하게 누리면 될 것을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지를 정탐하고 선교사를 보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란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누리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평신도 리더십들이 스스로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속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에 대한 꿈이 마음속에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 자녀, 직장 을 통해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꿈을 이뤄 드릴 수 있습니다.
* 기도: 주님!
부활 주일 아침을 맞아 주님의 축복, 감격, 기쁨, 희망,
부활의 빛이 임하게 하옵소서. 모든 슬픔, 좌절, 고통, 절망이 떠나고 부활의 환희를 노래하게 하옵소서. 온누리교회는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저희들을 채워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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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부활

본문: 요한복음 6장 39~40, 44절

사형집행장에서 근무했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책을 보면, 유두영이란 사람은 아주 잔인한 살인범인데 새까만 눈썹이 맞닿은 듯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것이 마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는데, 어느 날 불러다가 상담을 하는데 살기가 등등해서 냉소적인 태도로 쳐다보고 있더랍니다. 기도하자고 하니까 눈을 빤히 뜨고 째려보더랍니다. 그래도 얼음이 언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역사로 유두영의 얼굴을 얼싸안고 울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완악한 유두영도 마음문을 열고 울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형집행 날이 되면 사형수들 대부분이 "난 안가, 죽기 싫어." 한다던지 "어머니, 엄마" 하며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을 치거나, 바지에 대소변을 보며 벌벌 떨기도 하고 별별 사람이 다 있는데 유두영은 예수님 믿고 거듭난 후부터는 만나는 죄수들마다 "죽을 준비 돼 있어?" 하며 열심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사형집행 날이 되어 유두영이도 끌려가는데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연발하더랍니다. 그래서 "유두영이 겁이 나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마침 박 장로님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두영아, 잘 가. 먼저 가."하면서 더듬거렸더니 도리어 "예, 장로님 먼저 갑니다." 하고 힘차게 말하더랍니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영적 권위와 능력 때문에 흠칫 물러서게 되더랍니다. 사형장에 도착해서 소장님이 "오늘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 유두영 씨의 사형을 집행합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집행 선고를 했더니 유두영은 "아멘" 하더랍니다. 소장이 이름, 생년월일 등 인정 신문을 끝내고 끔찍한 죄상을 요약해 읽어 가는데 유두영이 손을 쳐들더니 "소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하니까 모두 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소장님, 지금 읽으시는 그 죄를 제가 다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제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지은 죄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런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이와 같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늦게나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제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기억도 아니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고 말할 때에 형장 안이 숙연해지더랍니다. "이제 예수님 믿고 8년이란 긴 세월을 살다가 아버지 나라도 가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고 기억도 아니하시는 그 더러운 죄를 다시 듣고 가기가 싫습니다. 용서 받은 깨끗한 영과 몸 그대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그 부끄러운 죄를 읽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단아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소장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눈에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임종 예배를 드리는데, 유두영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고 자기의 온몸을 장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다 기증한다고 하더랍니다. "유언을 남기겠느냐."고 물으니까 잠시 있더니 "소장님, 그리고 검사님, 제 마지막 부탁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제가 믿는 예수님을 믿으시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밧줄 올가미를 목에 거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오는데 누가 부르나 하고 살펴보니까 바로 유두영이 부르더랍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찬송을 부른 뒤 "덜커덩" 하고 지하실로 떨어지더랍니다.

1.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을 보증하셨습니다.
유두영 같은 잔인무도한 죄인이 죄사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3일 만에 무덤 문을 박차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오늘, 3일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보다 더 큰 기쁨의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도 없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의미를 찾자는 게 아닙니다.
① 부활은 신약 성경의 중심 교리이며 초대교회 설교의 중심이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부활 사건은 당연한 사건입니다.
② 부활은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믿는 자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 즉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40절에도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었다가 마지막 날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란 말씀입니다. 44절에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 끝 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을 성경에서 빼 버리면 계란에서 노른자를 빼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부활은 사도 바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뒤부터는 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이 기나긴 장 전체를 통해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봄에 옥수수나 콩을 심으면 죽어 없어지고 맙니까? 다시 수십 배, 수백 배로 다시 사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사람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느냐, 어리석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카이로에서는 3,000년 된 완두콩이 살아나서 열매를 맺었고, 불란서에서는 2,000년 된 무덤에서 찾아낸 꽃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서 꽃이 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고, 15절에서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고, 17~18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또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부활과 내세가 없다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고 영생,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희생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을지라도 재림 나팔소리가 들릴 때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던 자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홀연히 부활의 몸과 같이 변화되어 들림 받게 된다고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 메시지의 중심은 부활과 영원한 천국입니다.
④ 부활은 수제자 베드로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전 제자들의 설교 중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사도행전 2장 23~24절에도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했고, 사도행전 2장 31~32절에도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했고, 사도행전 3장 14~15절에"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제자들은 겁에 질려 다 도망가 숨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환희에 차서 순교했습니다. 유대인 학자, 핀카스 라피데(Pinchas Lapide)라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이란 책에서 "골고다의 죽음 직후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부활이 없고 영생, 천국이 없다면 고생하며 핍박을 받으며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4세기 경의 그레고리 나지안첸(Gregory Nagiangen)은 "인간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돌아가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2. 부활은 거듭난 자(重生)에게만 일어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고 건성으로 교회에 다닌 사람이 부활을 기대하는 것은 무정란을 부화기에 넣고 병아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계란에는 무정란, 유정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정란은 수탉이 없이 암탉만 가두어 키워서 낳게 한 계란입니다. 유정란은 암탉이 수탉과 함께 살면서 낳은 알입니다. 깨뜨려 보면 그 안에는 생명의 끈이 있습니다. 이런 알은 건강에 좋기 때문에 값도 비쌉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되는 것은 반드시 유정란이어야 됩니다. 무정란은 그 안에 생명의 씨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병아리로 부화하지 않습니다.
계란이 한 번 태어나서 닭이 될 수 없고, 따뜻한 열을 가해서 다시 한 번 태어나야 닭이 되듯이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하나님도 볼 수 있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실 때,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육신이 한 번 태어나고, 성령의 역사로 영혼이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에베소서 2장 1~3절, 로마서 1장 18~32절), 마귀를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고(에베소서 2장 2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장 3절). 또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장 3절, 예레미아 17장 9~10절, 예레미아 13장 23절). 육신이 태어날 때는 세상에서만 살 수 있는 육신의 생명을 갖게 되고, 영혼이 태어날 때는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부활을 알 수 없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요사이 복제동물, 복제인간을 만들 때 그 사람 혹은 동물에서 DNA를 떼어 접합시키듯이 영적으로 기독교의 신적 DNA를 심령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신의 성품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고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예수님과 같이 신의 성품을 갖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고 영접하며 입으로 고백하면 됩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전체가 기록된 목적, 특히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멸망할 죄인들이 거듭나서 영생을 얻었다가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거듭나는 역사는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 선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을 묵살해 버리면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김홍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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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권능과 신비

본 문 : 빌립보서 3 : 7 ∼ 12

6.25 한국 전쟁 때에 유엔군들은 국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그렇게 올라갔던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동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유엔군은 부득이 후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퇴작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참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후퇴하는 중에 해병대 한 중대가 그만 조난되면서 산골짜기로 피신을 하게 됐고 마침 중동 군이 그 골짜기를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었습니다. 멀지 않아 모두가 다 어려움을 겪어야 될 하는 그런 순간에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모두가 낙심하고 있었는데 해병대 젊은 군인하나가 앉아서 캔으로 만든 그 콩 요리를 이렇게 뜯어 먹으면서 시장기를 끄고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종군 기자가 너무나도 측은하고 또 안돼서 그에게 위로 겸 이렇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소원이 뭐요?" 지금 당신의 소원이 뭐냐고……. 그때에 병사가 하는 말은 너무나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십시오……. 내일, Give me tomorrow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만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 맹랑한 생각입니다. '나만 죽으면 끝이다.' 이 사람 무서운 사람이에요. 이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나를 괴롭히는 저 사람을 죽이면 그만이다.' 이건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죽여서 해결하려는 겁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역사에 인류역사에 많은 독재자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지구촌에 여기저기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독재자의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 독재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적을 숙연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누구든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숙청해버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제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잘 믿거나 못 믿거나 간에 부활 신앙이 없는 철학, 저 부활 신앙이 없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종교, 선과 의와 사랑 이 모든 것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활신앙이 없고 내세가 없다면 그 많은 의로운 고난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의 뼈아픈 인내와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그 희생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 것입니까? 그런 거로 임마누엘 칸트의 말처럼 부득불 이런 내세의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고는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고 마니깐 요. 여러분 생명문제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올시다. 우리가 수없이 장례식을 치룹니다. 또 임종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죽음이 뭔지를 모르겠어요. 내가 죽어보지 못했으니까……. 내가 죽을 때 까지는 죽음의 문제에 알 수가 없어요. 그런가 하면 더더욱 사후에 문제 항상 신비롭게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부활 사건과 부활 신앙은 같지 않습니다. 부활 사건이란 역사적 사건, 주께서 이루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엄연한 사건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내가 믿을 때 까지는 이 사건의 의미가 그 능력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초대교회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도 제자들은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비겁한 자가 됐습니다. 오순절 성경 강림함으로써 비로소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될 때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그리고 순교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위대한 부활의 증인들이 됐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 거로 부활 사건에 따르는 부활 신앙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시 부활은 생명의 문제요. 신비로운 것입니다.
2003 년 금년 4월호에 나온 '가이드 포스트'에 이런 재미있는 목사님의 경험이 거기에 실려 있습니다. 조지 몰건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데, 교인이 그리 많지 않은데 어린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부활절 전 주일에 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된 계란, 계란은 계란인데 속이 텅 빈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예쁜 계란을 하나씩 줬어요. 아이들에게 주면서 여기에다가 "생명을 담아오너라."그랬어요. 애들은 집에 돌아가서 나름대로 궁리했습니다. 생명이 뭘까……. 생명을 여기다 넣어가지고 오라는데 그래서 곤충도 잡아가지고 하고 어떤 아이는 꽃을 따서 꽃을 꺾어서 거기다가 몇 개 놓고 이래저래 모두가 나름대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근데 그 어린아이 중에 너무 몸이 약해서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나오는 그런 허약한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 어린아이에게도 같은 숙제를 주었는데 그날 플라스틱 그 계란 텅 빈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더랍니다. 목사님은 안쓰럽게 생각해서 이 애가 몸이 약하니깐 그만 곤충채집도 못하고 이렇게 빈 것을 가지고 왔구나 생각을 해서 "너는 숙제를 못했구나. 그러나 괜찮다. 못 할 수도 있지 뭐……." 하고 위로 하려고 했더니 애가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 "아니오. 나는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아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이 꼼짝을 못하고 이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명 자체를 본 일이 있습니까? 생명을 무엇으로 말할 것입니까? 생명은 볼 수 없는 거예요. 의사가 핀셋으로 집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누구도 이것이 생명이라고 말을 아무도 못합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 속에 있어서 오늘도 우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올시다.
생명, 아주 중요합니다. 생명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식물적 생명이 있습니다. 식물이 자라나는 것, 말라빠지고 죽은 것 같은 나뭇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 신기합니다. 어쨌든 식물적 생명의 단계가 있고, 더 높은 차원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동물적 생명이 있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 다 생명입니다. 신비로운 더 놀라운 것은 인간적 생명입니다. 우리는 식물도 아니오. 동물도 아니오. 또 높은 차원에 만물의 영장, 인간이라고 하는 생명체를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설명은 다 할 수도 없고 여전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 단계 높은 차원이 틀리는 또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적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적 생명의 단계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의미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첫 열매가 되셔서 사람이 죽고 사는 인간적 생명 이 차원 다음의 세계를 우리에게 환하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절입니다. 예수 부활 생명의 단계 이것을 바로 이해해야합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부활이라는 것은 결코 자연현상이 아니요. 윤회적 현상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부활은 옛것의 발전이나 옛것의 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것의 죽음에서 다시 나오는 새 생명의 세계를 말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잊지 마십니다. 부활생명이란 진화적 생명이 아닙니다. 변죽법적으로 설명되는 진화적 생명이 아니라고요. 이 부활 생명은 하나의 생명의 변화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기에 계속 변화합니다. 부지런히 변화 합니다. 근데 먼저는 죽음 지향적 사망 지향적 변화가 있습니다. 여기 꽃이 있습니다. 곧 시들어요. 시들어서 죽어버려요. 또한 썩어져요. 모든 생명이 죽어 썩어 없어져요. 계속 죽음으로 지향하고 있어요. 그런가하면 역술적으로 이 죽음에 거름더미에서 다시 나오는 장미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거 같은데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다 죽은 시체 같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봅니다. 생명 지향적 변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고요. 한단 더 높은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부활 생명 지향적 변화 그래서 성경은 부활이라는 말과 변화라고 하는 말을 거의 같은 말로 같은 수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할 것이다. 부활변화, 생명의 변화, 부활 신앙적 변화, 부활 지향적 생명의 변화 여기에 부활의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란? 부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활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부활케 하시는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증언 중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윤해가 아닙니다.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진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리셨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36절에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거기에 주도권이 있어요. 또한 3장 12절에 보면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가 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하나님이 그의 창조적 역사 그것이 부활 생명의 근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그 부활의 권능 그것을 알려 하여……. 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진실하게 말합니다. 그 고난의 참여,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의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 고난의 부활의 의미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의로운 고난 거기에 부활로 이어집니다. 자원적인 희생에서 이어집니다.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는 아가페적인 뜨거운 사랑이 있고, 그리고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이 신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의 문제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부활 했다는 것은 우리가 죄 사함 받음을 말하는 것이요. 우리의 의의가 살아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요. 그의 사심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확증하는 증거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런 거로 부활은 생명일 뿐만 아니라 의롭다하심에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이올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았습니다. 더 확실하게 알려고 힘썼습니다. 인도에 산다씽이라고 하는 유명한 성자가 있죠. 그가 어느 때 영국을 방문 했을 때 영국에서 연선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교수가 그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에 유능한 학자인데 또 힌두교인 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까?" 산다씽은 아주 중요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부활 때문에…….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오. 힌두교나 불교나 인생무상 끝이요. 기독교만이 생명의 종교요. 예수 부활……."
제가 언젠가 장례식을 가졌어요. 거기서 하관 식 할 때 여기서 이젠 묻어 버리지마는 예수님 오실 때 재림 할 것입니다. 다같이 부활 할 것입니다. 아 이제 이렇게 설교를 하고 내려오는데 아주 점잖은 양반이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날더러 하고 쿡 찌르더니 "목사님, 나 하나 물어봅시다." "뭔데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 부활을 믿는 구만요." "그럼? 정말 믿지 가짜로 믿나요?" 심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아 그럼 부활을 믿지……. 그 다음에 보니깐 교회 나왔더라고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부활에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이 신비로운 능력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죽으심을 본 받아…….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그리스도 살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어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외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랬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요. 그리하여 부활에 이르는 것이올시다.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러분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확실한 믿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자세히 더듬어 보세요. 아직도 덜 죽어서 그래요. 예수 때문에 죽어야 되요. 내 욕심도 내 명예도 내 지식도 내 체면도 죽어버려야 되요. 내가 이것에 가끔 느낍니다. 훌륭한 학자들이고 아주 상당하던 분들이 나이 좀 들었다고 치매 걸려 가지고 딴 소리 하는 걸 볼 때마다 그 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그게……. 하찮은 거요. 뭘 내세우겠다는 거요 도대체가……. 죽어버려. 죽여지는 것과 죽이는 거 하고는 다른 거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버려 다 십자가 앞에 죽어버려. 그럴 때에 부활의 능력을 신비롭게 오늘도 체험할 수가 있는 거지요.
조 모르스 웨어라고 하는 분이 "If I should die be for I live"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부활절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문장 풍으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부활절은 쉼표다. 모든 일을 쉬게 한다. 둘째, 이건 마침표다.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끝내 버리는 거다. 마침표다. 부활절은 의문표다. 끝까지 의문이 남는다. 그렇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LA에 있는 폴게티라고 하는 박물관에 한번 구경을 갔습니다. 그거 생긴지 얼마 안됐습니다. 갔는데 새로 만든 박물관인데 아주 큰 박물관. 가서 거기에 소장된 그림을 보는데 제가 구라파나 어디 가서 유명한 박물관을 제가 다 대체로 박물관을 즐겨 보는 편인데 거기서 그런 그림은 처음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도마가 만나는 장면인데 오백년 전에 그린 그림인데요. 그건 좀 너무 실감 리얼하게 그렸더라고요.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고 옆구리를 보여주면서 자 손을 만져보라.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랬잖아요. 다른데서 그림 그린 거는 그 말을 하자마자 그냥 주여! 하고 이렇게 되는데……. 여기서는 요러고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그냥 구멍에다가 넣어버려…… 그러더라고요. 도마하면 지독한 사람인데 딱 손가락에다가 옆구리 구멍에다가 손가락 넣는 그런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생각 했습니다. 저렇게 손가락에다 구멍에다 손가락을 넣었다고 믿음이 생길까? 여러분 부활은 신비로운 겁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는 계속 의심은 남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 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경배 합니다. 눈앞에 예수님을 보면서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신비로운 의심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느낌표다. 여러분 쉼표,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감사 감격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요. 그것이 부활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있어서 내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이 있기에 오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서 부활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부활이 있기에 오늘을 살고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 그것을 알고 좋아하십니까?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죽으심을 본 받을 때 만에 하나라도 본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엄청난 생명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의 사랑, 그의 용서, 그의 능력, 그의 승리 그리고 저 부활의 아침. 오늘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늘 해마다 부활절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한 부활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에 오늘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근심하며 두려워하며 떨며 낙심하며 살아갑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며 금년 부활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 받아 부활에 이르면서 참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참 생명을 수용하게 하시고 부활의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며 감사 감격한 그리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곽선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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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문을 열고 승리의 노래 부르자


본문: 마 28:1∼10, 겔 37:1∼6

우리는 어느 곳 한군데 둘러보아도 희망이 없는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 서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은 날로 더해가고 모든 존재는 생명과 자유의 기쁨을 잃어버린 채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과 염려와 절망 속에 서 있는 저희에게 주님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6∼5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죄의 결박을 풀어버리고 사망권세를 이겼노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절망중에 있는 사람에게 큰 소망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희망과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에게 승리와 희망으로 나타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문이 열렸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존재의 내용을 닫아버립니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킵니다. 오직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 말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우리에게 절망이고 슬픔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러한 죽음의 상징인 무덤의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문을 열고 부활하시어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힘차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절망과 죄와 죽음의 돌문을 옮겨 놓읍시다. 모든 교파와 계층간의 갈등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으로 우리 앞에 높여 있는 모든 죄와 죽음의 돌문을 옮겨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생명과 자유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만들어 나갑시다.
둘째,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 주님의 길은 무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스스로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갈릴리의 길을 부활하시어 먼저 가셨습니다. 부활하여 다시 갈 수 없던 모든 길을 앞서 가시어 열어 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막힌 길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절망하지 맙시다. 복음 전파의 길을 만듭시다. 나눔의 길을 만듭시다. 평화의 길을 만듭시다. 용서와 화해의 길을 만듭시다. 관용의 길을 만듭시다. 정의의 길을 만듭시다. 치유의 길을 만듭시다. 절제와 자족의 길을 만듭시다. 부활의 주님의 이름으로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연결합시다. 막힌 하늘과 땅의 모든 길을 부활의 주님으로 만들어 나갑시다.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길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갑시다.
셋째, 만남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님과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이 단절되었습니다. 주님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여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생생한 음성으로 평안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이 죽음으로 인하여 단절된 주님과의 만남과 대화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무기를 삼고,지혜를 삼고,미래를 삼을 때 모든 문이 열릴 것입니다. 모든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스리고 함께 하시는 역사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부활의 능력을 주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가 있는 저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달려나갑시다. 주님의 승리의 약속을 믿으며 승리의 노래가 우리것이 될 수 있음을 믿으며 힘차게 달려나갑시다. 분명 하나님 나라와 의의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최병두 목사(상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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