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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 安 씨 원문보기 글쓴이: 안재구
‘청백리가 되기는 쉬우나 그 말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
고려왕조의 신하로서 살기로 하신 기우자 강(崗)자 할아버지 대에 조선 왕조의 성군이라고 하는 세종의 시대에 이르자 세상이 바뀔 때의 혼란도 가시고 나라의 기틀이 잡히었습니다. 새 왕조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인재를 뽑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의 시대에 기우자 할아버지의 아들 숙(叔)자 량(良)자 할아버지께서 새 조선 왕조의 신하로 세종 2년 식년시(式年試)*에 응시하여 진사로 합격하셨습니다. 전조의 신하인 선대 기우자 할아버지에 대한 효행으로 문종 때 동궁시직(東宮侍直)의 벼슬을 받아 그때의 동궁이신 단종의 시위를 맡았습니다. 그러다가 품계가 올라 전옥서(典獄署) 주부(主簿)로 되셨는데, 모셨던 단종이 등극하자 곧 상주가 되어 시묘 살이 하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 조선시대 과거제도로 정기시를 말한다. 12지 가운데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式年)이라고 칭하며, 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해에 정기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정기 시험인 식년시 외에 부정기적으로 보는 시험으로는 증광시(增廣試, 임금의 즉위 시에 실시했으나 점차 확대) ·별시(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 ·알성시(謁聖試, 임금이 문묘를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 등이 있었다.
연이은 상으로 6년을 시묘 살이 하시던 중 동궁시직 때 모셨던 단종이 그의 왕위를 숙부에게 빼앗겼고 그 과정에서 이조왕조 초에 있었던 피바람이 다시 일어 북변의 튼튼한 방비로 이름을 떨쳤던 김종서가 척살당하고 사육신을 비롯해서 많은 의로운 분이 단종의 퇴진을 반대하다가, 또는 복위를 위하다가 참화를 당해 피를 흘렸다는 역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의 세월을 맞아 숙(叔)자 량(良)자 할아버지는 다시는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으시고 고향 함안에서 부모의 시묘를 사시면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다음 대에 보(普)자 문(文)자 할아버지께서는 성종 왕조 때 현량 천거에 뽑혀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 벼슬을 내렸으나 그 선대께서 세조 왕의 피바람으로 벼슬을 그만 둔지라 취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왕조에서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로 벼슬을 올려주었으나 역시 취임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인의공 할아버지께서는 두 아들을 두셨는데 맏이는 구(覯)자 할아버지로 호를 태만(苔巒)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태만공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밀양의 금포와 성만 그리고 영천의 도동의 일가와 멀리 화순(和順)의 일가가 모두 이 할아버지의 자손입니다.
태만공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 보자 문자(普文)와 어머니 토산정씨(兎山鄭氏 - 司直 鄭至周의 딸)에서 1458년 3월에 태어나셔서, 당시 같은 밀양 출신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의 문인으로 사림의 중심에서 학문적으로 성장하셨습니다.
김종직은 당대의 거유로 사림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는 고려 말기의 유학자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그 학문의 학통을 이은 길재(吉再)으로부터 그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를 통해 사림의 계보를 이어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성종은 개국공신과 태종의 왕권찬탈을 위한 왕자의 난에서 생겨난 공신 그리고 조카의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의 정변에서 나온 이른바 정난공신 등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 관료집단으로 둘러싸여 성현의 도학정치를 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조 고려유신으로 산림에 묻혀 지냈던 길재를 비롯한 유림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해오던 중 김종직에 의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과거를 통해 조정 관직으로 들어와 정치에 커다란 세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훈구파에 대해 이 세력을 사림파라 일컬었습니다. 이 사림파의 학통은 다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져 조선왕조의 봉건통치의 기조(基調)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숭유억불(崇儒抑佛)하고 성현의 도학정치를 지향하던 성종은 이 사림파에 힘을 실어주게 되어 훈구파세력은 크게 견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림파세력의 중심에 김종직이 서 있었고 그의 문인들이 여러 관직에 포진되고 있었습니다.
성종의 뜻은 훈구파세력에 대한 견제였으나, 그것은 훈구파세력과 대등한 힘을 가지고 왕으로 하여금 도학정치가 베풀어지도록 하려는 김종직과 그의 사림파세력의 목표와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사림파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었던 훈구파세력은 세력을 만회하려는 기회를 엿보던 중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기회로 잡고 사림파의 총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을 류자광(柳子光)이 들춰내고 김일손(金馹孫)의 훈구파의 비행을 기록한 사초를 문제 삼아 김종직의 제자들을 연루시켜 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파세력을 선왕무록(先王誣錄)으로 죽이고, 다른 제자들은 불고지죄(不告知罪)와 붕당을 이룬 죄로 해서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신 태만공 할아버지는 이미 7세에 문장을 읽고 짓기도 잘 했습니다. 점필재 문하에서 수업하시던 중 성종 1504년에 과거에 등제하셨고, 연산조 때 ‘예조좌랑’에 배명 받았으나 사양하시고 취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김종직의 문인이지만 무오년 사화를 면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령(開寧)현감’으로 부임하는 중에 갑자사화가 점차 격렬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즉시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다시 사림파의 도학정치가 부활되어 ‘헌납문학지제교’(獻納文學知製敎)*의 벼슬을 받으시고 계시던 중, 신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내직을 사양하셔서 청도군수로 보임 받으셨습니다.
*헌납문학지제교(獻納文學知製敎)
헌납: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벼슬
문학: 세자(世子)에게 글을 가르치는 벼슬, 조선초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좌문학, 우문학 각 1명을 두었으나 중종 때는 정5품 관원이 겸직으로 하였다.
지제교: 조선시대 국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
세종 때는 집현전의 녹관(祿官)을 내지제교, 다른 문관 10명을 외지제교로 삼았는데, 그뒤 집현전을 폐지하고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면서 정3품의 부제학(副提學) 이하 종6품의 부수찬(副修撰)까지의 관원으로써 지제교를 겸하도록 하기도 하고, 따로 6품 이상의 문관을 뽑아 지제교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청도군수의 시정을 잘 하신다는 소문을 들은 왕은 직급을 특진시키고 염리(廉吏 - 청렴하고 곧은 정사를 펴는 관리)로 기록하도록 했으며 사간(司諫)으로 건너 올랐습니다. 취임한 지 수개월이 지나, 전형과 선발에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무고를 받고 왕이 좋지 않은 낯빛을 함에도 말이 곧았다는 죄로 하여금 좌천되어 사섬시 부정(司贍寺 副正)*으로 좌천되셨습니다.
* 사섬시(司贍寺): 조선시대 저화(楮貨: 닥나무 원료의 종이로 만든 紙幣)의 발행과 노비가 공납하는 면포를 관장한 관청인데 정(正) 정3품 1명이고, 부정(副正) 종4품 1명이다.
1512년부터 5년동안 부모님의 병환으로 고향 금포로 돌아오셔서 병구완을 하시고 그 사이 두 번의 친상과 시묘로 보내시다가, 1517년에 집의(執義)*로 임명 받고 곧 사간으로 옮기셨는데 심정(沈貞)**과 다투어 외직으로 나가시어 남원부사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집의(執義):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 잡던 사헌부 소속 종3품 직제
*심정은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훈구파세력의 우두머리로서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권세를 부렸다. 1518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에 올랐다가 신진 사류(士類)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고, 정국공신도 삭탈되자 원한을 품고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1527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강서(江西)에 유배, 다시 경빈박씨(敬嬪朴氏)와 통정하였다는 죄로 사사되었다.
태만공 할아버지께서 남원부사로 계실 때 형벌이 공정하고 덕으로 다스리셔서 남원의 인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왕으로부터 은전을 받으시기도 했습니다.
태만공 할아버지께서 과만(瓜滿 - 임기만료)이 되시어 내직으로 들어가시어 종부시정(宗簿寺正)*의 벼슬을 받으셨는데 1522년 3월 3일에 서울 저택에서 향년 65로 돌아가셨습니다.
*종부시(宗簿寺):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를 만들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
태만공 할아버지는 남원부사 시절의 선정으로 청백리로 표록(表錄) 되셨는데 거기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만공 할아버지가 남원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그 선정으로 나라에서 청백리로 표록 한다면서 대상자로 추천받았습니다. 당시 청백리는 고을 수령을 살았던 사람에 대해서 1차적으로 고을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정부 관리가 직접 수령으로 있던 고을과 고향에 직접 가서 조사했습니다.
조사관이 할아버지의 집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를 세밀히 살폈습니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가 쓰고 있는 종이를 보고는 남원에서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남원부사를 한 사람이 남원종이를 가져와서 쓰고 있다면 이것은 청백리의 결격사유로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조사관이 돌아가
“안모는 집에서 남원종이를 가지고 와 쓰고 있습니다. 남원 소산을 무단히 가지고 쓰는 것입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수령은 처자도 거느리지 않고 단신으로 임지에 가서 근무해야 하고 퇴임할 때는 그곳 소산물은 일체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하며 빈 몸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법으로 정해놓았지만 이를 지키는 관리는 드물었습니다. 참으로 청렴한 수령이라야 이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관이 가서 남원종이라고 보고한 종이는 밀양고을의 무안면(武安面)에서 스님들이 생산하는 종이로 꼭 지질이 남원종이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밀양 사람들은 고을 사람이 청백리 대상자로 심사를 받고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인데, 장차 청백리가 된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온 고을 선비들의 영광이라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때문에 낙천된다는 소식을 듣자 선비들이 야단이 나서 몰려왔습니다. 왜 변명도 안하고 가만히 있느냐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냥 조용히 웃기만 하다가 선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남원고을에 살면서 그곳 물산을 하나도 안 가져왔으면 된 것 아닌가. 그 종이가 남원종이가 아니라고 굳이 밝힌다는 것은 바로 ‘나를 청백리로 해주시오.’라는 소리밖에 더되겠는가?”
그러나 밀양고을의 선비들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연명으로 나라에 상소를 올렸습니다. 조사관이 보고 간 종이는 남원종이가 아니라 밀양고을 무안에서 소산되는 종이라는 내용과 할아버지가 고을선비들에게 한 말도 함께.
임금이 이 상소를 보고
“청백리가 되기는 쉬우나 안모의 말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다.”
라고 하고서 다시 심사하도록 하교했습니다. 결국 태만공 할아버지는 왕의 재가를 받아 청백리에 표록 되셨습니다.
우리는 청렴하시고 형벌에 공정하며 덕으로 다스리셨던 태만공 할아버지의 행적을 생각하시어 공사를 맡으실 때는 항상 이 태만공 할아버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이 글은 저의 광주안씨의 홈페이지에 일가 청년들을 위해 훌륭한 조상 이야기를 써달라는 요청으로 쓴 글입니다. 태만선생은 저에게는 17대조 할아버지이며 초동면 금포리 출신으로 그 자손이 초동면 금포, 성만과 영천의 도동, 전라 승주의 화순으로 있습니다. 글 내용이 밀양 향토사에 관련이 있을 듯 해서 감히 올립니다. 글은 선생의 문집 苔巒集에 있는 행장과 묘지 그리고 저의 집안 유사지에 있는 내용에서 엮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잘 올려 주셨습니다. 역사에 벗어난 내용이 아니면야 당연히 올려도 상관 없습니다. 많은 것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