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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07.3.3일
팀 명 : 큰뫼사랑 종주대
참가대원 : 최성우(대장), 유승철(대원),김승만(대원),신희선(대원)
종주구간 : 제40구간(싸리재 - 건의령)
종주거리 : 총 16km
2007.3. 3(토)
07: 20분<양재역 7번 출구 출발>
최근 큰뫼사랑종주대의 실적이 대단히 저조하여 대안으로서 인터넷에서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산악회를 찾던 중 우리하고 대부분 산행일정이 일치하는 “산정산악회’를 택하였다. 이 산악회는 매주 토요일 팀과 매월 1,3주 일요일 팀으로 운영되는데 이팀들의 일정을 우리 일정과 잘 조합하면 많은 구간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되었다.
비용은 1일 1인당 25,000원이고 하산후에 식사도 제공되며, 왕복 8시간 정도의 운전을 안해도 되므로 운전을 하는 김대원과 나에게는 최상의 대안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산행 후 에 특히 저녁식사까지 한 상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운전은 가끔 무서울 정도로 위험했었다. 또한 산행 후 산행지점까지 이동시켜주는 택시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니 왜 이런 방법은 이제나 알았는지 안타까웠다.
11: 19분<싸리재(두문동재) 도착:1,268m>
나와 유대원은 양재동에서 7:20분 엘리트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김대원은 복정역에서 7:40분에 승차했다. 차에 올랐을 때 차안은 빈자리가 없이 만원이었고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1년 이상을 매주 산행한 사이라 몹시 친해 보였다.
다행히도 3.1일 덕유산 산행시 안내대장이었던 편대장이 이번 산행을 다시 맡고 있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늘 구간은 싸리재 - 건의령 구간으로서 약 6시간 소요 예정이고 날씨는 맑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동서울 만남의 광장에서 몇 명을 더 태운 버스는 중부고속도로 호법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여주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린 후 감곡 IC에서 빠져 나갔다. 제천방향으로 달리다가 박달령 휴게소에서 30분간의 긴 휴식을 취한다.
승용차로 달릴 때에는 도상 공부를 했기 때문에 현재 위치를 알고 있어 알아 지루하지 않았는데 대형버스로 이동하다 보니 시야확보에 한계가 있어 이동기간 동안 좀 지루한 단점이 있다.
박달령 휴게소를 출발하여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버스는 싸리재에 도착하고 있고 부지런한 등산객들은 벌써 등산화 끈을 조이고 스틱 길이 조정까지 완료하였다. 뭐 그리 급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우리는 여유를 부렸고 차에 내려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착한 싸리재는 포장도로로서 남한 땅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서 두문동재(1,268m)라고 더 잘 알려져 있고 고개마루에도 “백두대간 두문동재”라는 거대한 표석이 서 있다.
<두문동에 대한 사연 :퍼옴>
고한읍에서 20리, 다시 두문동재 정상에서 태백까지 30리에 위치한 두문동재는 그렇게 험준한 50리 길을 38번 국도가 되어 넘는다. 두문동으로 오르는 길은 온통 버려진 탄더미가 그대로 산을 이루고 광부 일가들이 두고 간 빈집들이 초췌한 몰골로 즐비하다. 그래도 누군가의 손길이 탄더미가 쌓인 산비탈마다 애써 나무라도 심은 듯 듬성듬성 자라는 초목들이 반갑고 더러 길가에 손 흔드는 갈꽃들은 그 어느 땅보다도 한결 어여쁘다.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를 들추어보니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 한다. 전설을 따르자면, 회유에 지친 조선의 태조는 끝내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두문동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대성초등학교는 월요일 오전인데도 아이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실마다 가득했던 아이들은 이제 고작 10명뿐이란다. 광부인 듯한 중년의 사내 하나가 벌써부터 벌겋게 낮술이 올라 운동장을 서성이며 아무렇게나 삿대질을 해대고 골짜기에는 시커먼 폐수와 함께 버려진 기계에서 흘러내린 녹물이 벌겋게 고였다. 끼니를 걸렀는지 쓰레기 더미를 뒤집는 동네 강아지들을 쫓으며 한 집을 지나면 대여섯 집은 빈집이다. 아뿔싸, 두문동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삶터가 아니었다.
11: 42분<금대봉 도착:1,418m>
버스에서 내린 40여명의 대원들이 마라톤 출발선을 떠나듯 경쟁적으로 앞서 나아가는데 이것을 감지하지 못한 우리 일행이 이제서야 등산화 끈 조이고 스틱 길이 조정하고 배낭 정리를 하고 나니 몇 명을 제외한 모두들 산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꼴찌이지만 그래도 출발사진을 찍고 금대봉을 향하는데 눈이 녹는 중인 산길이 너무 미끄럽고 질척거렸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면 산악회에서 준비한 식사가 모자라 굶어야 한다고 두 대원에게 말했어니 갑자기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기 시작한다.
싸리재에서 800m 정도를 올라가면 “백두대간 싸리재- 매봉산구간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고 작은 공터도 있다. 뒤로는 은대봉이 서서히 머리의 흰 머리카락을 들어내고 있고 여기서부터 피재(삼수령)까지는 8.1Km, 금대봉까지는 0.5Km 남았다고 이정표는 설명하고 있다.
앞 사람을 한명씩 추월하며 숨이 목에까지 차 오르도록 뛰다시피 10분 올라가면 금대봉 정상에 다다른다. 금배봉 정상에는 정상표석과 금대봉 전망 안내도, 그리고 양강발원봉이라는 나무 표시가 서 있다.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용소, 제당굼샘을 안고 있는 의미 깊은 산으로 금대라는 말은 검대로, 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고 또한 금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 기슭에 있는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굼터의 석간수에서 솟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 나와 514km의 한강발원지가 된다. 지금까지 오대산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오대천과 창죽천의 합수지점인 정선군 북면 나전리에서 도상실측을 한 결과 창죽천이 약 32km나 더 긴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국립지리원에서 한강의 발원은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이라는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룡소는 석회 암반을 뚫고 올라오는 지하수가 하루 5천 톤 가량 용출하고 있으며 솟아 나온 물이 곧바로 20여m의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광경은 장관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12: 39분<비단봉 도착: 1,279m)
금대봉에서 북동쪽으로 휘어지는 대간길은 길게 허리를 낮춘다. 금대봉 내려가는 길은 채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 몹시 미끄럽고 넘어지면 실례한 모습이 될 것 같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과 여성 분들을 쉽게 보았는데 한명씩 추월하기는 했지만 모두두 프로급 수준이다. 이 구간은 이정표가 상세하게 자주 설치되어 있어 지루하지는 않았고 1265봉과 1233봉을 지나면 비단봉을 이르기 전에 수화밭령에 도착하는데(12: 19). 태백시의 화전과 창죽을 잇는 고개로 쑤아밭골로 통하는 고개다. 그런데 이 특이한 이름의 내력은 한자로 적어보면 쉽게 이해되는데 水禾田(수화전). 벼를 키우는 밭이라는 얘기다. 산비탈에 간신히 밭을 일구던 곳에서 논작물인 벼를 키우게 된 일은 동네 이름으로 삼을 만큼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비단봉 오름길은 숨이 턱에 닿게 하는 오르막이다. 정상 직전 바위에 “비단봉 전망 안내도”가 있고 멀리 함백산,은대봉,두문동재,금대봉이 한눈에 들어 온다. 아침을 일찍 먹은 탓고 있고 거이 뛰다시피 달려온 덕분에 다리에는 피로가 몰려오고 배가 고파 어지럽다. 비단봉 정산 조금전 전망바위에서 준비한 시루떡과 김밥으로 간단히 허기를 해결 했다.
13: 36분<매봉산 도착: 1,303m>
비단봉 정상을 넘으면 시원하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과 매봉산의 풍력발전기, 그리고 매봉산 정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양쪽 산 정상 부분만 남기고 모두 고랭지 채소 밭인 셈이다. 비단봉을 내려가자마자 눈이 녹아 질척질척한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으로 연결되고 밭과 경계를 이루는 주능선으로 가든, 밭을 가로지르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면 된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길이 없는곳은 밭을, 길이 있는곳은 좀 우회하더라도 임도를 따라 걸었다. 밭을 지날때는 등산화에 흙이 붙어 무게가 제법 나갔다. 거의 내려온 지점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다시 흙길로 점어든다. 왼쪽 산골짜기에는 운해가 저수지에 우유를 담아 놓은 모습을 있고 매봉산을 넘어오는 구름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듯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고 있다.
고랭지 채소밭을 통과하여 매봉산 숲으로 들어가면 중간부분에 태백시에서 설치한 여러기의 풍력 발전기가 돌고 있는데 약 2RPM 정도의 회전 속도로 추측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온다. 서 있는 방향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놈과 멀건히 서서 노는 놈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놀고 있지만 언젠가는 저놈이 먹여 살릴때가 있겠지….
다시 정상을 향한 마지막 숲 눈길을 10여분 오르면 매봉산 정상에 다다르는데 앞에는 천의봉 뒤에는 매봉산으로 적혀 있는 표석이 있고 산불감시초소와 유선방송 안테나가 서 있다.
14: 10분<피재(삼수령)도착: 920m>
매봉산 정상에서 올라온 길을 따라 30m 정도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 길을 택하여야 피재로 향하게 된다.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다시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매봉산을 넘으면서 기후가 완전히 바뀌어 10m 거리도 안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사진을 몇장 찍다보니 일행이 안개속으로 다 사라져 버려 갈림길에서 헷갈렸다. 바닥이 미끄러워 뛸 수도 없고 해서 선두를 향해 기다리라고 소리쳐 보았지만 대답이 없다. 설마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니겟지…. 혼자서 안개속을 헤치고 지나가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그때서야 앞사람들 발자국 소리와 스틱 끄는 소리가 들려 가까히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산으로 들어가면 매봉산과 피재 사이의 1,145m봉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곳이 낙동정맥이 갈래 치는 곳임을 기억해 둘 만하다.
우리가 흔히 매봉산 위쪽의 백두대간 일부와 한 줄로 그어 태백산맥이라 잘못 부르는 그 낙동정맥은 여기서부터 부산 땅 몰운대까지의 천리 길을 떠나간다. 그 낙동정맥과 내륙으로 지리산까지 내달리는 백두대간이 벌린 품안이 바로 낙동강 수계의 경상도 땅이다
산과 도로를 번갈아 갈아타며 매봉산에서 40분 정도 내려가면 피재에 도착하게 되는데
안개에 휩싸인 피재에는 다른 산악회에서 풀어 놓은 수십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있다.
피재는 해발 920m로서 삼수령(三水嶺)이라고도 불리우며 그래서인지 삼수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분기점이며 삼강(三江:한강·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이다. 하늘에서 이곳에 떨어진 빗방울 가족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따라 황해로, 동쪽으로 흘러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르는 분수령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의 이름이 전하는데, 삼척 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는 정자각과 조형물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커다란 황금돼지가 있다.
16: 03분<건의령 도착>
피재를 떠나 산길을 조금 지나면 임도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을 조심하여야 한다.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임도를 가로 건너지 말고 임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다음 내려가면 그제서야 왼쪽으로 입산하게 되어 있다. 나중에 차안에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어떤 사람을 여기서 길을 잃고 30분 이상 소비했다고 한다. 944.8봉과 돌밭을 지나면 서서히 차소리가 들리면서 건의령에 다다르게 된다.
산행 도중 66세의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언덕에서만 차이가 날 뿐 평지를 걷는 속도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다.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 할아버지는 77세 할아버지와 백두대간 산행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도착한 건의령은 차소리와는 무관하게 공사중인 비포장 흙길이며 “한의령”이라고 쓰려진 안내도가 서 있다. 이곳에서는 건의령 보다 한의령이라고 더 많아 부르는 모양이다.
건의령(巾衣嶺;蹇衣嶺)은 상사미에서 삼척시 도계읍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삼척 육백산 기슭 마읍(馬泣)의 궁터에 유배와 근덕 궁총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그를 배알하고 돌아 오면서 이 고갯마루에 이르러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하겠다고 하였기에 고개 이름이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관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 됐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도 분명히 건의령이라고 적혀 있고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분의 1 지도에는 한의령(寒衣嶺)이라고 표기돼 있다.
지금도 건의령 아래에는 정승터라고 하여 고려 정승이 살던 터가 있고 건의령 동쪽 산언덕 육백산이 보이는 곳을 향해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17:00분<서울로 출발>
건의령에서 왼쪽의 비포장 도로를 내려가면 35번 국도가 나오고 도로변 산골 가게에서 김치와 막걸리 한잔으로 갈증을 풀었다. 아침에 탔던 버스로 가니 먼저 도착한 10여명의 사람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신김치와 돼지고기를 크게 썰어 넣고 끓인 김치 찌게이다. 살빼느라 고생한 것이 아까와 조금 먹어야 했지만 조절을 못하고 엄청 많이 먹었다.
올라오는 길에 운전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오늘도 고생하셨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진부령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안전을 빌며…. 우리 종주대원 파이팅~
온세통신 종주내역
2004년 종주팀(함백산 - 건의령): 개발사업부(황순경,김재두,장영춘,임재우,유석희,이재경)
세상 문 닫고 돌아앉은 아라리 고개
길은 어디에나 있다. 길을 잃은 곳, 그 곳에도 길은 있다. 사람이란 으레 크고 밝은 길에 모여 저마다의 삶을 다투는 법이지만 더러는 저 아주 좁고 어두운 세상의 뒤안길로 슬며시 등을 돌려 세상과는 아예 몇 겹 담을 쌓고 살기도 한다. 어느 길이든 그저 모두 변함없는 세상의 날들이다. 아! 누가 함부로 길을 잃었다 하는가? 까마득한 무렵, 산과 들에 짐승들이 먼저 길을 내고 사람들 또한 생각 많은 짐승으로 사는 동안, 길은 그렇게 어디에나 있었다. 그리하여 길이란 잃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버리는 것이다. 시절이 가고 바람이 차가워져 가지 끝에 걸린 나뭇잎 하나 홀연 몸을 던지듯이.
오랜 옛날, 그렇게 길을 떠난 이들이 있었다. 속절없이 버리고 떠난 뒤에야 다시 얻는 세상의 길을 따라 기약도 희망도 없이 그렇게 시나브로 잊혀져 간 이들이 있었다. 훗날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듯 어디 닿을 바 없이 멀리 흘러가 버린 그들의 길을 세상에서 가장 사무치는 길이라 믿었다. 생각 같아서는 어찌 그 길만이 또한 외길이랴 묻고 싶지만은 다만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길이라면 대체 무엇이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으랴. 지나왔으므로 돌아보면 더러 아련하고 가고 있으므로 끝내 멈출 수 없는 길. 정선 땅에 가면 길은 모두 하나같이 그렇게 속 깊은 아라리 가락을 탄다.
높이 자란 열대우림을 보면서 나는 생명에 대한 끝없는 경외와 존경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비록 검고 숨막히는 땅. 틀림없이 저 황폐한, 가도 가도 탄가루뿐인 산천에도 생명의 나무가 다시 자라고 들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날은 꼭 오리니, 서러워 말라 두문동이여! 지난 날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우리들의 시린 등을 덥혀주던 참으로 따듯했던 한 시대의 온돌이여!
첫댓글 한번도 디뎌보지 못한 싸리재-건의령, 질퍽이는 밭,등산화에 붙어버린 진흙덩이,눈덩이보다 더 무거웠을듯,^^실감나는 후기글 감동 잘보고 갑니다.^^오래전 안내산악회 따라갓을때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우리 신기자님의 후기글은 언제 읽어봐도 감동적이야!! 자가차량보다 버스를 이용하니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본 대간종주대를 이용해서 아직 남아있는 구간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 좋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