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전쟁영화로 포장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같군.
[에너미 라인스]에서 중요한 것은 감독의 기교와 스타일이다.
주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된 영웅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종청소라는 명분으로 여자와 어린이에게 총구를 겨냥해서
가장 악마적인 전쟁이라고 불리웠던 보스니아 내전.
그러나 [에너미 라인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답게
같은 미국영화지만, 전쟁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은 테렌스 멜릭 감독의 [씬레드라인]이나
스탠리 큐브릭이 [풀 메탈 자켓]에서 제기한
존재론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피해나간다.
사상 논쟁에 휘말렸지만 뛰어난 유머로 비극적 세계관을 담보한
칸느 그랑프리 수상작 에밀 쿠스리차의 [언더 그라운드]
가슴 적시는 사랑으로 전쟁의 한복판을 관통한 서정시,
밀코 만체브스키의 [비포 더 레인].
그리고 그리스의 영화시인 테오 앙케로폴리스 감독의 대하서사시
[율리시즈의 시선]이나
국내 미공개작 마이클 윈터버텀의 [웰컴 투 사라예보] 등
보스니아 내전을 소재로 한 영화는 무수히 많다.
[에너미 라인스]는 이런 보스니아 전쟁영화와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여기에서 보스니아는 하나의 전쟁공간에 불과하다.
보스니아 전쟁이 갖고 있는 비극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화려한 개인기로 관객들의 오감을 충족시킨다.
세가의 비디오 게임 CF를 만들었던 존 무어 감독은
확실히 이전의 전쟁영화와는 스타일이 다른
자신의 개인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적진에 홀로 떨어진 비행기 조종사 구출작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
미국식 영웅주의와 애국심 등이 비빔밥 된 상투적 줄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그렇지만,
세계 최강국 미국의 인도주의와 우월감이 강조된
이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문화제국주의적 침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에너미 라인스]를 볼만하게 만드는 것은
존 무어 감독의 개인기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화려한 편집이다. 극단적인 느림과
빠름의 속도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시각적 흡인력은 놀라운 것이다.
특히 위기에 빠진 비행기 안에서
조종사가 탈출하는 장면을 수많은 카메라로 정교하게
셔터의 스피드와 프레임 비율을 계산하여 연속 촬영한 것이라든가
저격수의 총을 피해 발목 높이에서
부비 트랩으로 연결되게 설치된 수많은줄을 피해가며
도망치는 씬의 완급조절은 탁월하다.
[에너미 라인]이 갖고 있는 미국식 영웅주의의
한심한 결말과 그 정치적 몰지각함에도 불구하고,
또 진 해크만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평범한 모습과
[아마겟돈]의 우주조종사, [상하이눈]의 카우보이 출신 오웬 웰슨의
미끈한 외모가 내면연기로 이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전쟁영화의 장르적 공식 안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돈 데이비슨의 음악도 좋다.
CNN 라이브로 전쟁의 한 복판을 들여다보는듯한
다큐멘타리적 기법과 기교적으로 과장된 스타일을
극대화시킨 [에너미 라인스]는
그 기교의 아름다움으로 공허한 주제를 메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