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졸업식
김춘옥(이공숙처)
지난 2월 25일이 일이었다.
마침 아이들 도시락 걱정 안해도 되는 학년말 방학이기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말로만 듣던 사학의 명문 고려대학교를 구경하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이날은 문민정부가 출범하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식날인데도, 안암동 개운사 입궹서부터 졸업식이 열리는 고려대 녹지켐퍼스 노천극장으로 가는 긴 연도에는 학사, 석사, 박사모와 각기 다른 까운을 입은 4,000여명의 졸업생들과 그 가족들로 길을 가득 메웠다.
20대에서부터 50대에 이르는 졸업ㅂ생들이 꽃다발 물결과 함께 온 가족들에게 둘러 싸이거나 손을 잡고 밝은 표정으로 식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동안 수학과정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는 남김없이 씻어버리고 희망에 부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장한 모습들 뿐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감하면서 작년 한 해에 여러 가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던 고비를 넘기고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만학의 기쁨을 느끼는 그이에게도 서울 사는 언니와 그이의 서울 친구들이 여럿이 오셔서 축하해 준 데 대하여 한없이 고마울 뿐이다.
식이 열리어 축하연주가 은은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고려대 충장님과 교육대학원장이 주는 학위 수여식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거리만 가까왔다면 우리 아이들도 이 자리에 함께 하여 이 성대한 졸업식장에서 아빠의 석사학위를 받는 장한 모습을 보고 그들 나름대로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직 대학에 안 들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자녀들도 이와 같이 훌륭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으면 하는 부질없는 욕심도 부려본다.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그이가 사범학교를 졸업한지 14년만에 방통대 2년의 전문과정 졸업, 24년만에 방통대 3학년에 편입하여 3년만에 학사과정 졸업, 32년만에 나이 쉰에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명문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영예로운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결 자랑스럽기만 하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3년전만 해도 5남매가 제 각각 국,중,고,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실정으로 그이까지 대학원에 간다면 유치원을 빼면 우리 집에서 학교란 학교는 모두 다니게 되는 셈이어서, 5남매가 모두 대학에 갈 경우 그 뒷바라지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여 그이의 대학원 입학에 선뜻 동의를 못한 일은 지금와서는 미안한 생각뿐이다.
대학원에 다니는 3년동안은 레포트를 작성하느라 밤을 새는 날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방학 때만 되면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형편인데도 출석수업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학위논문을 쓰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쁠 때에도 별 도움을 드리지 못해 안스럽기도 했지만 이젠 모두 마치고 나니 즐거운 추억이 되어 가슴 뿌듯하기만 하다.
어느 졸업식에서와 마친가지로 여기서도 식이 끝나자 인촌동상 등 여기저기서 졸업기념촬영하느라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다니는 인파들....... 우리도 그들 틈에 끼어 카메라 셔터를 수 없이 눌렀다. 그이의 권유에 따라 석사까운을 바꿔입고 사진을 찍으며 행복감에 젖어 보았다.
인간의 행복이란 물질적인 풍족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진실한 신뢰와 사랑이 넘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오직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달려있다고 새삼 느껴진다. 그 사이 쌓였던 크고 작은 불만들이 모두 사라지고 마냥 그이에게 신뢰와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걸 어찌하랴. 앞으론 이런 마음을 오래오래 가슴 깊이 간직해야지.
나도 나이는 들었지만 그이처럼 만학도 하고 싶지만 이젠 내 아이들에게나 기대를 절어 봐야겠다. 비록 명문대학에는 못 갈망정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고 빌어본다.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분들 특히 CNE 친구분들 모두의 성원과 격려에 힘 입은 바 매우 크며 그 사이 도움을 준 모든 분들에게 거듭 감사를 드린다.
ㅡ 1993. 10. 9. CNE소식 제30호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