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신뢰할 수 있는 텍스트(역사비판본)를 토대로 한다. 신빙성있는 텍스트편찬은 따라서 문헌학/문예학의 핵심을 이룬다. 올바른 작품해석도 믿을 수 있는 텍스트가 주어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때에 따라서 왜곡과 조작이 난무하기 일쑤인 편리한 시중의 상업적 대중본에 의존할 경우 자칫 그 연구작업은 도로에 그칠 위험이 많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의 생성과 전승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특히 필사본이 유일한 전승수단이었던 중세문학의 경우 문예학적 접근의 출발점을 형성하며, 문헌학이라는 학문의 본령도 역시 그런 연구작업들을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다. 문헌학과 관련하여 필수적이기 마련인 이러한 학문적 시각을 일찍이 유학시절에 나에게 심어준 은사요 스승인 양 응주 교수께서 정년을 맞이하게 되셨다니, 이제 지난 날 베풀어준 고마움을 상기하면서 본고를 통해 중세독일어를 매개로 한 학연과 인연을 다시 한번 기리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를 실례로 하여 주어진 논점들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선 이 작품의 실존에 관한 외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노래>>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 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승되었는지 등 기초적인 문예학적 물음들을 짚어보기로 한다.
1. 생성장소와의 관련문제들
무릇 중세의 영웅서사시들이 항용 그렇듯이 ≪니벨룽겐의 노래≫의 저자도 역시 익명성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함구한다. 그는 이 작품을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독일 중세문학의 연구는 지금까지 이 작품과 관련해서 그런 물음에 대한 확실한 입증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할 경우 해당연구는 오직 간접적인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발생시점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해명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이 작품의 韻구사법(Reimtechnik)과 볼프람 폰 에셴바하(Wolfram von Eschenbach)의 ≪파르치팔 Parzival≫에 나오는 한 인용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韻결합의 순수성을 고집하고 있는 이 영웅서사시의 운구사법은 중고독일어 문학의 경우 대체로 13세기의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한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르치팔≫의 시행 420,25ff.에서는 ≪니벨룽겐의 노래≫의 詩聯 1465ff.(혹은 *C-본의 1493ff.)에서 등장하는 루몰트(Rumolt)의 충고가 암시되어 있기에 볼프람이 이 대목을 작시한 때는 1204/1205년이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얼마간의 자신감을 갖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니벨룽겐의 노래≫는 대충 1190년 이후와 1205년 이전 사이의 어느 한 시점에 지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작가가 구사하는 중고독일어 방언은 바이에른-오스트리아의 공간을 지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의 문학사회적 콘텍스트를 감안하면서 천착해본다면 문제 접근이 보다 시사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총 2379연(=9518행)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니벨룽겐의 노래≫ 류의 책이라면 당시로서는 한 작가의 임의적인 기분에 따라 지어질 수 있는 것이 못된다. 당시의 사정으로는 생산가가 매우 높았고 아직은 종이가 발견되지 않은 때에 유일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기록재료로서 양피지는 엄청나게 고가였다. 또 자유창작 예술가로서 서사시인이 운신할 수 있을 만한 문학시장도 그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작가는 교회의 제도적 틀 내에서 -- 이를테면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승으로서 -- 활동하든지 아니면 막강한 재력을 가진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하든지, 이 두 가지의 가능성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니벨룽겐의 노래≫를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틀림없이 우리의 작가가 이야기의 서술에서는 전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한 인물, 즉 파사우의 주교 필그림(Pilgrim)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인물은 크림힐트와 그녀 오라버니들에게 외숙부라는 친척관계로 등장한다. 훈국으로 들어가는 행차시에 크림힐트는(1295ff.) 그 숙부한테서 체류하게 되며 그 다음엔 니벨룽겐족이(1627ff.), 그리고 에첼의 사자 베르벨과 슈베멜도(1427ff.;1495) 보름스성으로 왕복여행시에 마찬가지로 필그림에게서 체류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파사우(Passau)市를 지리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음이 눈에 띄며(1295), 인(Inn)江이 파사우를 경유해서 도나우강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 그것도 그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명백하고도 정확히 "급류를 형성하면서 mit fluzze" 흐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그곳에는 한 수도원이 있음도 알고 있다(그것은 유명한 분도회 여수도원 니덴부르크이다).
이러한 숙고와 관찰에서 귀결되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만약 그곳에 문제의 작품제작에 필요한 상기한 조건들이 존재했음이 입증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니벨룽겐의 노래≫의 생성장소를 파사우로 가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정도 역시 이를 확인해주고 있다. 1191년부터 1204년까지 -- 이는 정확히 문제가 되고 있는 생성기간이다 -- 파사우의 주교좌는 예술애호적이며 또한 영향력이 막강했던 한 인물, 즉 주교 볼프거 폰 에으라(Wolfger von Erla)가 맡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가 독일문학에 관심을 가졌었고 또 그것을 장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람 덕택으로, 더 정확히 말해서 꼼꼼하게 기록한 그의 簿記덕택으로 우리는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의 문학외적 삶의 증거물을 얻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계산서 기록인데, 이에 따르면 歌人 발터는 1203년 11월12일 주교금고로부터 모피외투를 한 벌 구입할 수 있는 사례금을 지불받은 것이다. 이 볼프거 주교는 파사우에서 다시 아킬레야의 대주교좌로 부름을 받았고 거기서도 그는 역시 문학의 후원자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유명한 수사학자 봉콤파뇨 다 시냐(Boncompagno da Signa)는 그 대주교의 관대함을 칭찬하고 있는데, 그의 후견 아래 또한 주교좌성당의 교회참사원 토마진 폰 체어클레레(Thomasin von Zerklaere)도 자신의 大교훈시 ≪외국 손님 Der welsche Gast≫을 지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되고 있다.
파사우의 흔적은 그밖에도 더 추적될 수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가 필사본으로 전승된 것에 첨부되어 있는 한 작품이 있는데, 그것은 규칙적이며 또한 명백하게 처음서부터 압운2행聯句로 된, 스스로 ≪비탄가 Die Klage≫라 칭하면서 ≪니벨룽겐의 노래≫에 한 속편의 형식으로 주해를 제공하고 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의미는 별로 신통치 않지만 문학사적인 증거물로서는 매우 가치있는 이 작품은 처참한 사건들이 어떻게 해서 문학적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는지를 보고하고 있다.
Von Pazowe der biscof Pilger n ern liez es niht bel ben,
durh liebe der neven s n wand im seit der videlaere
hiez scr ben ditze maere, diu kuntl chen maere,
wie ez ergangen waere, wie ez ergie und gescach;
in lat nischen buochstaben, wand erz h rte unde sach,
daz manz f r w r solde haben, er unde manec ander man.
swerz dar n h erfunde, daz maere prieven d began
von der alr rsten stunde, s n schr ber, meister Kuonr t.
wie ez sih huob und ouh began, getihtet man ez s t h t
und wie ez ende gewan, dicke in tiuscher zungen.
umbe der guoten knehte n t,
und wie si alle gel gen t t.
daz hiez er allez schr ben.
("파사우의 주교 필그림은 자기 조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경위를 기록하도록 명한 것이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 모두에게 그것이 사실임을 보장하도록 라틴어로 기록하도록 한 것이다. 내용인 즉 그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개되었는지, 그 시초와 종말, 용감한 영웅들의 고통과 죽음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기록하도록 했다. 아무것도 지나쳐버리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음유시인 [슈베멜]이 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또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관해서 자기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슈베멜과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듣기도 했고 목격도 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필사자 콘라트 선생에 의해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종종 독일어로 작시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가정한 것처럼 만약 ≪비탄가≫가 ≪니벨룽겐의 노래≫와 직접적인 연관관계에서 지어졌다면, 위의 구절은 ≪니벨룽겐의 노래≫의 진실성에 대한 한 증거가 되며, 또 그 제보내용은 역사적으로 사실임을 입증하게 된다. 영웅전설의 경우 일반적으로 그것의 특징이 되고 있는 '진리요구'가 여기서도 문제시되고 있기에,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며, 또 중세의 학술적 문헌에서 자주 발견될 수 있는 한 상투어구의 도움으로, 즉 목격자의 보고에 의한 기록을 인증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의 진리요구가 충족되고 있다. 이 때 주목할 만한 것은 그 기록이 라틴어로 적혀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지적을 통해서 학문적 영역에서는 확실히 의심을 받고 있는 민중어적 전승에 진지한 사료적 가치의 축성을 내리는 데 기여하게 된다. 만약 그 장소에 주교가 없었다고 한다면, 필경 그 모든 것은 허구로서 치부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주교는 실제로 한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사우의 주교 필그림은 971년에서 991년까지 착좌했었다. 그 당시 위대한 교회제후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의 교구가 정치적, 경제적 및 문화적 전승기를 누리도록 배려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분이 높은 바이에른의 귀족가문 출신이었고 그 가문을 위해서는 주어진 이름을 토대로 상기한 의미에서의 니벨룽겐적 가문전승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주교는 필경 니벨룽겐의 전설을 파사우로 가져왔을 것이고 자기 이름과 관련이 있는 한 전통을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의 벽두에 ≪비탄가≫가 주장하고 있듯이 라틴어로 기록된 한 작품이 있었는지 그 여부는 오히려 불투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그 후로 "그것에 관해 종종 독일어로 작시되었다"는 보고는 믿어도 좋을 것이다. 이는 명백히 독일어로 된 니벨룽겐문학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전통을 지목하는 것이다. 그 전통의 기반 위에서 ≪니벨룽겐의 노래≫의 시인은 그것의 전설사적 분석이 보여주고 있듯이 자신의 '건축물'을 축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니벨룽겐의 노래≫의 저작 장소로서 파사우를, 그리고 그 시인의 후원자로서 볼프거 주교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볼르거 주교는 위대한 그 선배를 후계하는 자리에 자신의 위치를 정했을 것이다. 그 선배가 ≪니벨룽겐의 노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라틴어로 작성하도록 주선했듯이, 그도 필경 표본이 되는 독일어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야심만만하고도 또한 앞으로 드러나게 될 성공적인 사업을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필그림 주교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킨 점은 아무튼 파사우 교회의 아주 실질적인 이해관계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 교회는 그 당시 외부적로 들어나듯이 일종의 순례 의식을 선전하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었는데, 그 의식은 신자들을 끌어들여서 헌금을 내도록 권유하는 데 적격이었다(그래서 대사원이 화재로 불타버리고 난 뒤로 교회가 신축을 위한 수단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 때인 1181년에는 필그림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니벨룽겐의 노래≫는 그 주교에 대한 숭배를 대중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제일 먼저 주교 볼프거의 주변 출신의 한 성직자로서 상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가 한 사람의 성직자라고 -- 이 말의 중세적 의미에서 그런 사람은 종교적으로 교양이 있으며, 따라서 글을 쓸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있는 자로서 반드시 사제일 필요는 없다 -- 생각할 수 있는 이유로 말하자면 그는 작품 속에서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교양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주교의 궁정에서 일하는 한 관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파사우 주변지역에서 출발하여 도나우강을 따라 아래로 빈에 이르는 땅은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반면에, 그밖의 다른 활동무대, 특히 보름스 주변지역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있는 것이 없음은 그 점을 시사해줄 수 있다. 말하자면 도나우 유역은 당시 파사우 주교령에 속했고 또 그것을 관통해서 파사우의 소유권이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아마도 ≪비탄가≫에 나오는 두 사람이 한 쌍을 이룬 필그림 주교와 콘라드 서기는 다른 한 쌍인 볼프거 주교와 ≪니벨룽겐의 노래≫의 저자에 상응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서기의 이름을 지칭함으로써 우리의 시인 이름이 말하자면 전승 속으로 몰래 유입되었을 가능성조차 있는 것이다(이는 물론 볼프거의 주변에서 문제시될 수도 있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수의 콘라드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 작가의 인물을 찾는 일에는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는 당시 궁정적 서사문학 작가들이 떳떳이 자기이름을 밝히는 관행과는 달리 자기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 오토 회플러(Otto H fler)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 이유는 하나의 장르법칙에 있는지도 모른다. 무릇 영웅문학은 언제나 익명적인 것이 사실이다. 시인들은 존경스러운 옛 진실을 전승하는 연결고리 중 한 고리로서만, 그러니까 초개인적인 자료의 단순한 매개자로서만 자신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해야만 한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니벨룽겐의 노래≫의 시인이 교양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그에게는 그에 덧붙여 자신이 의존할 수 있고 또 필요시에 언제나 스스로 위안받을 수 있는 학술적 문학권에서 나온 한 본보기가 있었던 셈이다. 즉 그것은 로마의 국민서사시 ≪에네아스≫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위대한 베르길리우스였던 것이다.
2. 필사본들과 원본
≪니벨룽겐의 노래≫를 전승하고 있는 텍스트증거물로는 현재 34종이나 존재한다. 그 중에는 완전한 필사본도 있고 다소 규모가 큰 필사본 斷篇들도 있다. 독일의 전승에 추가해서 보충적으로는 13세기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한 단편이 있다. 가장 오래된 증거물로 통하는 것은 단편 Z이다((Klagenfurt 대학도서관 Perg.Hs.46 참조). 사람들은 그것의 추정연대를 관행적으로 충분한 고증도 없이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로 잡고 있다. 반면에 연대가 가장 근세적인 증거물은 그 유명한 ≪암브라저 영웅서≫인 필사본 d인데, 이는 1504년과 1515/16년 사이에 황제 막시밀리안 I세를 위해 제작된 중고독일어 서사문학의 규모가 크고 화려한 장정의 필사본집이다(Wien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Ser.nova 2663 참조). 아무튼 가장 중요한 필사본집들은 뭐라 해도 다음과 같다.
A; 호엔엠스-뮌헨 필사본집(1779년 브레그렌츠에 있는 호엔엠스 백작의 성에서 발견, 1810년 뮌헨 왕립도서관이 구입, 오늘날엔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도서관의 Cod.germ.34로 보존됨). 이의 생성은 아마 13세기 후반으로 잡고 있다.
B; 聖 갈렌 필사본집(1768년 성 갈렌 수도원도서관이 구입, 오늘날엔 그곳에 Ms.857로 보존됨). 이의 생성은 13세기 중엽으로 간주되고 있다.
C; 호엔엠스-라스베르그 혹은 도나우에슁엔 필사본집(1755년 마찬가지로 호엔엠스城에서 발견. 1815년 요젭 폰 라스베르크 남작이 구입했고 1855년 그의 사망 후 도나우에슁엔 소재의 제후 퓌르스텐베르그 궁정도서관에 흘러들어와 현재 그곳에 Ms.63으로 보존됨). 이의 생성은 이미 13세기 초반으로 잡고 있다.
상이한 필사본들은 그 작품을 통일적으로 전승하고 있지 않다. 해당 필사본들이 제시하는 텍스트들은 단어音의 세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聯들의 수자와 순서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는 서로 매우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19세기에는 필사본들 중 어느 것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가에 대해 사람들은 논쟁을 벌였다. 칼 라흐만(Karl Lachmann)이 A를 옹호하고 나선 후, 홀츠만(Adolf Holtzmann)과 차른케(Friedrich Zarncke)는 C에 우위를 부여했고 바르취(Karl Bartsch)와 브라우네(Wilhelm Braune)는 B를 우선시했다(이 알파벳 약자는 라흐만에게서 유래하며, A,B,C, 순서는 그렇게 표시된 필사본들의 텍스트비평적 가치에 대한 라흐만의 평가를 나타낸다). 1900년 한 방대한 논문에서 규명하고 있는 전승관계에 대한 브라우네의 판정은 호이슬러의 설화 계통수처럼 수십년을 통해서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것이 흔들리게 된 것은 1963년 헬무트 브라커르트(Helmut Brackert)의 ≪니벨룽겐의 노래의 필사본비평을 위한 기고 Beitr ge zur Handschriftenkritik des Nibelungenliedes≫에 의해서 였다.
브라커르트의 비판은 브라우네의 개별적인 조처와 논증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원본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텍스트증거물들의 친족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텍스트비평의 방법을 겨냥한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니벨룽겐의 노래≫의 전승의 경우 그러한 방법의 적용가능성을 노린 셈이다. 핵심에 있어서 이 비판은 개인적 시문학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전승 전체가 소급하고 있는 하나의 원본은 이 경우 존재한 적이 없다는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전승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공통의 텍스트는 -- 그것의 존재는 브라커르트도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 그의 견해에 의하면 단지 여러 판본들 중 한 판본으로서, 어쩌면 어느 한 "파사우의 비평본"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른다(S.170 Anm.27 참조). 그 판본의 저작자를 브라커르트는 일종의 편찬자로 상정하고 있는데, 그 편찬자는 여러 상이한 필사본들의 서로 차이지는 텍스트본을 만든 다른 편찬자들과 범주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며, 또 그들은 독자적으로 항상 반복해서 역시 그 공통 텍스트가 단지 길어오기만 했던 다양하고도 생생한 전설의 전통으로 되돌아간다고 브라커르트는 가정한다.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양한 편찬본들을 만든 저작자들은 변변찮은 재능의 소유자들로서 그 공통 텍스트를 만든 작가와 원칙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 이 공통 텍스트가 형성되어 나오는 데 함께 참여한 상이한 여러 시인들 중에는 다른 모든 시인들보다 더 훌륭한 한 사람이 존재했을 것이며 -- 그 공통 텍스트가 누린 비교적 높은 명성이 그러한 견해에 대한 지주로서 공헌할 수 있다 -- 원칙적으로는 비록 다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 사람 이상의 (혹은 그들이 어떻게 불리고싶어하든지 간에) 가인들이 이 공통 텍스트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동일한 시적 기법에 정통했으며, 동일한 소재를 숙지하고 있어서 바로 그 텍스트의 형상화에 함께 참여한 것이다."(S.170) "개별 편찬자는 대체로 고정된 한 텍스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그 텍스트에 자신의 고유한 독자성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이 텍스트는 단지 해당 장르의 매우 느슨한 법칙들 속에 구상되어 있는 다양한 충족가능성들 중의 하나를 매번 실현할 뿐이라는 안정적인 기분 속에서 그는 -- 비록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 다른 한 가능성이 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그것이 또한 단지 더 유창했던 경우에는 어디서나 고유한 길을 걸었던 것이다."(S.169 Anm.26)
독일에서는 여전히 중세 전체를 관통해서 ≪니벨룽겐의 노래≫와 나란히 하나의 니벨룽겐 전승이 생생히 살아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에첼의 아들이 살해되는 예에서 볼 수 있었다. 거기서는 ≪니벨룽겐의 노래≫보다도 더 오래되지만, 그 작품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한 별형이 300년이 흐른 후 '산문-영웅서'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병행전승은 본질적인 면에서 일종의 구비전승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우리는 ≪니벨룽겐의 노래≫ 외에 이렇다 할 만한 규모의 문자로 된 니벨룽겐문학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 병행전승이 상당한 부분 가요들로서 존속했다는 것은 가정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그것들의 형태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다는 점이고 또 엄격한 의미에서 아직은 그것들의 존재가 입증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실로 우리는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빠져 있으나 북구의 텍스트들에서는 그 존재가 입증된, 부분적으로 매우 오래된 전설-모티프들을 지니고 있는 ≪角皮의 자이프리트≫의 노래(Lied vom 'H rnen Seyfrid') 한 부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인쇄본으로서만 전승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오래된 판본들에 대해서는 확실한 소급추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시되고 있는 13세기의 가요-격언작가 마르너 출신자(Der Marner)의 한 시연의 증거물도 역시 쓸모가 없다. 그 시인은 거기서 자신이 등장할 때 낭독할 것을 미리 자신에게 지정해주곤 하던 일련의 '청중희망곡목'을 지칭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크림힐트가 누구를 배반했는가 wen Kriemhilt verriet>, <지크프리트의 ... 죽음 Sigfrides...t t> 및 <니벨룽겐의 보물 der Nibelunge hort>"(Der Marner, hg. von Philipp Strauch[Quellen und Forschungen zur Sprach- und Culturgeschichte der germanischen V lker.14], Stra burg 1876,XV 14) 등이 있다. 이 경우 구비적인 병행전승에서 나온 시가들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마르너출신자가 부적절하다고 거부해버리는 청중의 희망사항들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텍스트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소재나 테마들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니벨룽겐의 노래≫에 등장하는, 마찬가지로 애호받았던 대목들 그 자체를 의미한 것일 수 있다(예컨대 보물에 관한 이야기[87-99연에서의 하겐의 보고]는 작품으로부터 훌륭하게 분리될 수가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튼 간에 하나의 구비적 병행전승은 존재했으며 또 이것은 실제로 ≪니벨룽겐의 노래≫의 전승에 영향을 끼쳤음이 입증되고 있다. 브라커르트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병행전승("특수자산")으로부터 모티프를 받아들였다는 추정의 경우들 중 아무튼 그가 제시하는 명제의 의미에서 납득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한 예는 군터가 샘물에서 물을 마신 후에 지크프리트가 살해되는 장면이다(Brackert S.141f. 참조). 필사본 A와 B에서 밝혀질 수 있는 판본(*AB)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979,2ff.).
Gunther sich d neicte nider zuo der fluot.
als er het' getrunken, d riht er sich von dan.
alsam het ouch gerne der k ene S fr t get n.
("군터는 샘물쪽으로 몸을 굽혔다. 물을 마시고 났을 때, 그는 몸을 일으켜 옆으로 비켜섰다. 용감한 지크프리트도 기꺼이 그렇게 했으면 했다.")
이에 반해서 필사본 C에 의거해 재현된 판본(*C)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Gunther sich d legete nider zuo der fluot:
das wazzer mit dem munde er von der fluote nam.
si ged hten, daz ouch S vrit n ch im m ese tuon alsam.
("군터는 샘물에 엎드렸다: 그는 입으로 샘물을 마셨다. 그들은 지크프리트도 역시 그를 뒤따라 같은 행위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브라커르트는 이제 *C-본과 ≪디드렉스사가 Thidrekssaga≫를 비교한다(Bertelsen, Bd.2,S.266): ocda koma daeir dar sem flytr aleinn baeckr oc Gunnarr konungr slaer ser nithr oc drekkr oc adrum megom hans brothir haugni oc da kemr at Sigurthr svaeinn oc slaezt daegar nithr at baeckinom sem athrer daeir(Erichsen S.375)("그후 그들은 한 개천에 당도했으며, 군나르왕은 몸을 엎드려 물을 마셨고, 그의 동생 회그니는 반대편에서 그렇게 했다. 그러자 젊은 지구르트도 달려와, 다른 이들처럼 몸을 엎드려 물을 마셨다.")
브라커르트의 가정에 따르면 *C-본은 우리에게 ≪디드렉스사가≫에서 파악될 수 있듯이 병행전승에 소급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엎드려서 물을 마신다는 표상이 산출되며, 또 이것은 군터가 샘물 위로 허리를 굽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손으로" 물을 뜨서 마시게 되는 *AB-본의 표상보다 더 비궁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C는 통례적으로 바로 비궁정적인 것을 삭제하거나 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C는 여기서 *AB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증이 논리에 합당치 못다는 점은 이미 붐케(Joachim Bumke)가 보여준 바 있다(Rez.Brackert S.434f.). 즉 *AB-본은 군터가 손으로 물을 마신다는 점을 인식시켜주지는 않으며 또 ≪디드렉스사가≫도 군터가 물을 *C에서처럼 직접 입으로 마신다는 점을 인식시켜주지 않는 것이다. 비록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서 *C와 ≪디드렉스사가≫가 공통적으로 하나의 오래된 모티프를 증거한다 할 경우라도 *C에서 그 모티프가 꼭 병행전승으로부터 취해졌을 필요는 없으며, 역시 그것은 ≪니벨룽겐의 노래≫의 원본으로부터 나와서 *AB에서 변경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특별자산"이 증명될 수는 없다. 이것을 만약 철저히 연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15세기의 필사본들을 참조해야만 할 것이다.
소위 ≪Darmst dter Aventiurenverzeichnis≫라는 15세기 초의 필사본 m (Hessische Landes- und Hochschulbibliothek Darmstadt, Hs.3249)은 처음 28개의 이야기단락들의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에 귀속하는 텍스트는 유감스럽게도 보존되지 않고 있지만, 그 표제로부터 우리는 지크프리트의 젊었을 적 행적과 한 마리 용에 의한 크림힐트의 유괴 및 지크프리트에 의한 그녀의 구출에 관한 이야기들이 ≪각피의 자이프리트≫의 노래에서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 속으로 유입.편성된 ≪니벨룽겐의 노래≫의 한 판본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15세기 다름슈타트 필사본의 두번째 것인(Hs.4257) n은 20연에 걸쳐서 제1부의 개요가 선취되고 있는 ≪니벨룽겐의 노래≫ 제2부를 포함하고 있다. 역시 이 개요 속에는 지크프리트에 의한 크림힐트의 구출이 한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지크프리트가 자신을 용으로부터 구출했다는 사실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정당화하고 있다. 끝으로 15세기 말의 필사본 k는 처음 소유주에 따라 ≪리엔하르트 쇼이벨의 영웅서 Lienhart Scheubels Heldenbuch≫로나 또는 그것의 발견장소인 빈 소재 피아리스텐 수도원의 이름을 따서 ≪피아리스텐 필사본≫이라 불린다( 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Wien, Ms.15478). 이것으로부터 전승된 ≪니벨룽겐의 노래≫의 후기중세 개작 속에는 크림힐트와 그 오라버니들의 부친이 "진짜" 옛이름인 <기비히 Gibich>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전거들이 물론 브라커르트의 명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것을 반증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것들이 병행전승의 유입은 브라커르트가 생각한 것처럼 규칙적인 경우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외적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한에서 필사본 m, n 및 k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텍스트가 보다 심도있는 새로운 개편작업을 받았을 경우에는 분명히 그러한 예외를 감안해야만 하는 것이다. ≪니벨룽겐의 노래≫의 전승에 있어서 특징적이고 각별히 눈에 드러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병행전승으로 소급한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단지 드물게만 예외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다음을 추론해야만 할 것이다. 즉 니벨룽겐 소재의 구비적 전승과 문자적 전승은 구비적 전설전통과 가요전통이 서책문학으로 결정적인 걸음을 내디딘 후로는 본질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후기의 필사본을 기록한 자들은 '편찬자의 자유'를 별로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문자로 고착된 텍스트를 수백년 동안 놀랄 정도의 폐쇄성으로 계승했던 것이다."(Joachim Bumke, Rez.Brackert S.435f.)
결국 전체적인 전승이 소급하고 있고, 문자적으로 고착된 이 텍스트를 우리는 개별적 특징의 폐쇄적인 서책이 문제된다는 의미에서 자신있게 ≪원본 Original≫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얼마 만큼 우리가 그것의 개성과 독창성을 -- 그것은 역시 그 작가의 업적을 뜻하는 것으로서 --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아무튼 회의적이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원본이나 혹은 이 원본과 구별될 수 있는 전승의 지주필사본("원형 Archetypus")의 판본만이라도 그 원래적인 형태로 다시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브라커르트의 숙고가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오늘의 실상에 따르면 우리는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이 A-텍스트인지 아니면 B-텍스트인지의 여부를 말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또한 *C-본에서도 *AB-본과는 달리 곳곳에 원래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대체로 이 판본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개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3. 개작품 *C-본
개작은 또한 '리트-본'(liet-Fassung)이라 칭해지기도 하며 *AB에 의해 대변되는 텍스트인 '노트-본'(n t-Fassung)에 맞세워지기도 한다. 이런 언어사용은 ≪니벨룽겐의 노래≫의 마지막 연의 마지막 시행에 나오는 각각의 언표에 관련지워진다. 즉 *C에서의 "daz ist der Nibelunge liet"(그것이 니벨룽겐의 노래이다)과 *AB에서의 "daz ist der Nibelunge n t"(그것이 니벨룽겐의 몰락이다)라는 표현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새 형상화는 물론 *AB에 근거한다기 보다는 직접 원형(이는 따라서 우리가 원본과 구별해야만 하는 그 전승 전체의 지주필사본이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미 말했듯이 *C도 *AB의 증거에 반해서 원래적인 텍스트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C가 하나의 이차적인 판본이라는 사실은 전혀 입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실로 원칙에 있어서 도대체 기본텍스트와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확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실제로도 최근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반복해서 '리트-본'은 전체적으로 볼 때 '노트-본'이 파생되어 나왔다는 원천적 텍스트를 나타낸다는 견해가 주장되었다). 하지만 각별히 눈에 드러나는 *C의 특수성들은 개정작업의 성격을 너무나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작이 문제되고 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개작자는 텍스트를 형식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근대화시켰고 내용적으로는 보완하고 개선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소름끼치는 사건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해석해내었다.
그 해석은 급기야 하겐이 모든 불행의 원인자로서, 야비하고 형편없는 살인자로서 드러나는 반면에 크림힐트는 그 사람의 무구한 희생자로서 설정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즉 고통을 받는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크림힐트는 그녀의 행동이 그토록 가공스러운 결과를 초래한다 할지라도 역시 그녀는 오로지 철저한 기독교적 미덕인 정절(triuwe), 즉 자신의 첫 남편인 지크프리트에 대한 성실한 사랑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개작자는 한편으로 하겐을 단죄하고 비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크림힐트의 죄를 면제해줌으로써 텍스트에 그와 같은 사물관을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하겐은 '노트-본'(n t-Fassung)이 중립적인 진술을 제공하고 있는 곳에서 거듭하여 '불충한'(ungetriuwe) 자로 칭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903,1: D sprach von Tronege Hagene:/ ' f daz s n gewant/ naet ir ein kleinez zeichen...'("트론예의 하겐은 말했다. '그대는 그(지크프리트)의 의상에 작은 표시를 하나 수놓도록 하시오...'")을 상응하는 *C 910,1: D sprach der ungetriuwe:/ ' f daz s n gewant/ naet ir ein kleinez zeichen...'과 비교하거나 혹은 984,4: d ne kunde im niht entrinnen/ des k nic Guntheres man ("군터의 종신(하겐)은 그(죽어가는 지크프리트)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을 *C 993,4: d ne kunde im niht entrinnen/ der vil ungetriuwe man 과 비교해보고 또 1001,1: D sprach von Tronege Hagene:/'ich bring' in in daz lant...'("트론예의 하겐은 말했다: '나는 그(지크프리트의 시신)를 고향(보름스)으로 운반할 것이오...'")를 *C 1012,1: D sprach der ungetriuwe:/ 'ich f eren in daz lant...'과 비교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겐이 무엇때문에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와 화해하도록 부르군트의 왕들에게 조언을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두 개의 완전히 변형된 시행에서도 역시 그러한 특징이 발견된다(*C 1127,3f.):
durch des hordes liebe was der r t get n;
dar umbe riet die suone der vil ungetriuwe man.
("보물에 대한 탐욕때문에 그 조언은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불충한 사람은 화해하도록 충고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하겐이 도나우강을 도하할 때 강물 속에 던져버렸던 그 사제가 그를 '불충한 살인자'(*C 1621,3: morder ungetriuwer)라 부르고 있는 한 추가연에서 계속 유지된다. 하겐에 대한 도덕적인 폄하는 그와 같은 일련의 예시들을 뛰어넘어 폭넓게 입증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그럴 때는 크림힐트의 죄를 면제해주는 전략을 공부할 기회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단지 두 가지 예만 제시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짐짓 '잘못 배달된 우편물'을 상징하는 의미의 연(1912)에 관한 것인데, 그에 따르면 크림힐트는 자신의 아이를 복수를 위해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 연은 크림힐트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 평가 때문에서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텍스트에 도입하고 있는 모순 때문에서도 개작자의 의도에는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는 그러한 모순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 연은 전혀 다르게 형상화된다(*C 1963):
D die f rsten gesezzen w ren beral
und nu begunden ezzen, d wart in den sal
getragen zuo den f rsten daz Ezelen kint.
d von der k nec r che gewan vil starken j mer sint.
("군주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을 때, 에첼의 아들이 그들의 연회장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이 그 막강한 왕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었다"). 두번째 예로서는 크림힐트가 그 엄청난 피흘림을 원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추가연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C 2143):
Sine het der gr zen slahte als niht ged ht.
si het ez in ir ahte vil gerne dar zuo br ht,
daz niwan Hagen aleine den l p d hete l n.
d geschuof der bel tiufel, deiz ber si alle muose g n.
("그러한 대살육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하겐만이 죽임을 당하도록 주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약한 악마는 그 불운을 그들 모두가 당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개작자는 자신의 모든 형식상의 개정작업이나 내용상의 개정작업을 통해서 전적으로 시종일관되게 일을 처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쳐야만 했을 많은 것을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는가 하면, 또 대체로 우리가 명백히 결정할 수 있는, 그의 개작의도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변경까지도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은 그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옛 텍스트에 이어서 얼마되지 않는 시간간격으로 생겨났음에 틀림없는 그 개작은 이 텍스트를 우선 수십년 간 배제시킨 것처럼 보인다. 볼프람의 ≪파르치팔≫에 나오는 인용은 이 개작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또 가장 오래된 필사본 Z는 이미 그 개작 텍스트를 보여주고 있다. 또 필사본 C 자체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니벨룽겐의 노래≫의 가장 오래된 (거의) 완벽한 필사본에 해당한다. '노트-본'의 전승은 1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생겨났고 전반적으로는 '리트-본'의 영향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텍스트로서 아무튼 개작의 손이 닿지 않은 ≪니벨룽겐의 노래≫의 필사본은 아마 없을 것이다.
4. 수용사에 대한 이데올로기비판적 관점
아무튼 이토록 복잡한 작품의 생성과 전승에 따른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독일문학의 한 고전으로서 평가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영향사와는 달리 이 작품의 수용사에 있어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적 수취(收取)와 독점은 간과할 수 없는 측면들이다. 이러한 맹점들을 유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독자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자신을 무비판적으로 직접 동일시하는 자세이다. 독자뿐 아니라 심지어 문예학자들도 마치 이것이 자신의 문화적 유산인양 처음부터 가치내포적으로 간주하고 아무런 시간적 간격을 의식하지 않은 채 천진하게 자발적인 열광 속에서 감정이입에 입각한 전통적인 문학관을 최근까지도 고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태도는 지난 60년대 이전의 독일문헌학자 세대가 문학적 전통과 대상에 대해 유지했던 관계에서 특징적이었다. 문화의 계속성이라는 교양시민적 의식 속에서 주어진 대상과 직접적인 일치감을 느끼면서 전통을 미리부터 문화유산적 가치와 동일시하고 계속 재현하는 결과를 낳았던 셈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그러한 동일시의 표본이 형성된, 매우 영향력있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따라서 ≪니벨룽겐의 노래≫의 경우에도 몇 가지 이유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 첫째 이유로서 이 영웅서사시는 독일국가 형성에 귀중한 자산으로 여겨진 문학적 전통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실로 독일문헌학이 존재한 이래 줄곧 관심의 중심대상이 되어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로서는 이러한 수용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고착된 교양전통의 함의들을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비교적 더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 이러한 수용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특정 지도자상이나 상투적 전형을 형성해냄으로써 19세기와 20세기초 비록 독일역사에서는 유해하게 작용하긴 했어도 역시 그것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1755년 의사인 오버라이트(Jakob Hermann Obereit)는 포어알베르크(Voralberg)에 있는 호엔엠스(Hohenems)의 백작소유 서재에서 수백년 동안 무관심 속에 파묻혀 있었던 ≪니벨룽겐의 노래≫의 중세 필사본 한 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재발견과 첫 출판(1757년에는 보더머(Bodmer)에 의해, 1782년에는 밀러(Myller)에 의해서)은 그리스에 심취해 있었던 빈켈만(Winkelmann)의 시대만 하더라도 아직은 폭넓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고, 단지 몇몇 사람들만이 그래도 이 서사시를 고대 독일의 한 진품(珍品) 이상으로 벌써 높게 평가하였다. 즉, 스위스의 역사가인 폰 뮐러(Johannes von M ller)는 이 작품이 '독일의 일리아스'가 될 수 있다는 그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운 기대를 표명하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 ≪니벨룽겐의 노래≫를 감명깊게 다시 끄집어 내어, 이 작품에서 독일의 국민시, 즉 "그토록 오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민족시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모범적인 기념비적 존재"(von der Hagen)를 발견했다고 말하게 된다. 문제는 하나의 국민서사시를 소유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가 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세기 초의 독일정치사와 관련지을 때 쉽게 얻어질 수 있다. 1805년에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발발했고,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는 小國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결국 왕은 도피해버렸고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베를린에 입성한다. 이 역사적 상황이 초래한 결과는 그때의 사정을 일반적으로 고찰해 볼 때, 강렬한 애국적 정렬의 축적으로 나타났으며, 또 단지 독문학 영역에만 국한시킨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훗날 다시는 불가능했던 활기찬 고대독일에 관한 연구였다. 이 때 연구의 핵심에는 ≪니벨룽겐의 노래≫가 자리잡게 되었고 그 사정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낭만주의의 회고적 변용이라는 시각에서 이 서사시는 강력한 중세독일의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전 시대를 반영하는 국가의 옛 명성과 품위 및 자유의 표상을 앞세우고 국민감정의 불꽃을 부추기는 것은"(F. Schlegel) 붕괴된 국가를 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설정은 그 당시에 벌써 거치른 왜곡과 그릇된 해석을 낳게 된다. 1807년 슐레겔(F. Schlegel)의 제자인 폰 데어 하겐(Friedrich Heinrich von der Hagen)은 이 작품의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인 훈족의 궁정에서 벌어진 부르군트족의 처절한 몰락을 단순히 무시함으로써 이와 같은 문학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신뢰와 긍지를 갖게 할 것이며, 장차 독일의 영광과 세속적 영화를 언젠가는 다시 회복시키리라는 희망으로 독자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중세문학을 고유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규정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애국주의적인 낭만주의자들은 비역사적인 방법으로, 즉 스스로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인 그들 고유의 해석의 틀 속으로 이 작품을 편입시킨 것이다. 민중서사시와 민족서사시 같은 개념들이 이 시기에는 특별한 내용을 지닌다. 이 서사시들은 한편으로 절대주의와 소국 분권주의 및 신분질서에 대한 시민계급의 해방적 저항자세를 수용하여 통일된 국가를 준비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진보적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터무니없이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흔히 중세적인 것으로 규정된, 이미 오래 전에 그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이상들로부터 어떤 혁신을 기대하도록 하고 산업화 초기의 실제 독일상황을 은폐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서사시의 내용인 충성, 명예, 정직, 믿음 같은 소위 고대 독일의 덕목들을 통해 당시에 이미 반동적으로 이용되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 당시 개발된 표본들은 그후, 특히 1848년의 혁명 실패 이후로는 더욱 더 시민계급이 국가 및 봉건주의적 국가의 우두머리에 대한 자신들의 무력감을 보상하는 수단으로서 다음과 같이 판에 박힌 소도구들로 전락하게 된다. 즉 "진실로 순수한 독일성의 원형, 충성의 복음, 여전히 존엄한 예절의 표본, 독일영웅의 형상인 지크프리트, 침몰해버렸지만 아직도 구제할 만한 독일성으로서의 니벨룽겐의 보물"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이제 ≪니벨룽겐의 노래≫는 국민교육을 통해 독특하게 이용되기 시작했고, 낭만주의자들의 퇴행적 유토피아는 더욱 더 '민중성'이라는 비이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개념의 이름으로 시민들을 의무적으로 국가에 복종시키고 이들 사이에 왕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환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에 이른다.
마침내 독일제국의 수립으로 통일국가가 실현되었을 때 -- 비록 진보적인 자유사상이 소망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타나긴 했지만 -- 민족문학의 핵심으로서 ≪니벨룽겐의 노래≫는 자신의 전통적 내용을 가지고 새로이 형성된 국가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거나, 1918년 이후에는 옛 영화를 부활시키는 과제를 떠맡게 된다.
군주제의 붕괴가 민족 이데올로기까지 붕괴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 내부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요인들 때문이었다. 민족적인 것을 가차없이 좀 더 나은 것으로, 반면에 외국적인 것은 좀 더 나쁜 것으로 전제하는 이데올로기는 붕괴의 실재 원인인 산업의 힘과 정치사회적 현실 사이의 불일치 현상을 반성하는 일을 처음서부터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는 반대로 단지 비합리적인 동일시와 자기확인에 대한 욕구만이 강화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김없이 교안(敎案)과 교육계획이 민족적인 내용을 강화하는 쪽으로 치닫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년 동안 "독일정신을 위한 교육"이라는 애매한 규정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 국가사회주의의 지배 하에서는 모든 교육과정이 국가적인 개혁에 봉사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거역할 수 없는 요구로 변질되었다. 이로써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형태와 게르만적-독일적 이념의 본질, 바꾸어 말해 지도자와 민중이, 의도했던 대로 완전히 합치되어 버린 셈이다. 이 시기엔 통치자를 위한 무조건적인 헌신이 ≪니벨룽겐의 노래≫의 복음으로서 전파되고, 영웅전설의 고귀한 인물들과 굳건한 복종심 및 목숨을 건 저항 등이 장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문학작품을 한 번만 훑어봐도 이러한 해석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즉 이러한 해석은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구상은 되어 있지만 결코 지배적이지는 못한 특정요소를 절대화함으로써 자신을 상대화하거나 지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만다. 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민족-교육운동의 시기에는 니벨룽겐-텍스트가 "충성의 雅歌"로 해석되고 나치시대에는 "맹목적 충성숭배의 예찬"으로 해석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텍스트는 또한 지크프리트에 대한 악의적이고 기만적인, 믿을 수 없는 배신으로서 역시 일면적으로만 읽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니벨룽겐의 노래≫가 나치시대에 겪었던 왜곡이 이 작품이 처음 전승되면서부터 점차 증가해 왔던 텍스트 왜곡의 최고치를 표현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필사본 문제와 전설의 단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지난 십여년 간의 격렬한 논쟁에 열중했던 그밖의 다른 니벨룽겐-연구는 나치사상을 찬미했던 개별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역시 이러한 왜곡에 전혀 주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 이렇게 비교적 한정되어서 엘리트적-학문적으로 전승되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적으로 그릇된 교육을 받은 고등학교 교사에 의해서 뿐 아니라 더욱 본질적으로는 대학교수들에 의해서 영향력있게 널리 퍼져 수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예컨대 판처(F.Panzer)같은 연구자들이 ≪니벨룽겐의 노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특정부분에서 전적으로 국수주의적 해석의 전범을 드러냈다는 비난을 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일련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독문학연구에서 바로 이 애국적인 시민적 독어독문학의 전통 속에서 독일어 수업의 국가적 수행을 촉구하는 입장을 대변했으며, 이로써 ≪니벨룽겐의 노래≫를 왜곡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와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데올로기비판적 단초는 단지 암시만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상세하고도 포괄적인 연구와 기록문서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의 생성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에 근거해서 ≪니벨룽겐의 노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잘못 기록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유사관계는 보다 비판적으로 철저히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Helmut Brackert(Hg.), Das Nibelungenlied. Mittelhochdeutscher Text und bertragung, 2 Bde., Frankfurt a.M. 1970.
Helmut de Boor(Hg.), Das Nibelungenlied, Wiesbaden 1979(Deutsche Klassiker des Mittelalters), 21.Aufl.(nach der Ausgabe von Karl Bartsch).
한국어 역본:
허창운 역, ≪니벨룽겐의 노래≫, 서울:범우사 1990.
...............................................................
Karl Bartsch(Hg.), Diu Klage. Mit den Lesarten s mtlicher Handschriften. Leipzig 1875. Neudruck Darmstadt 1964.
Helmut Brackert, Beitr ge zur Handschriftenkritik des Nibelungenliedes(Quellen und Forschungen zur Sprach- und Kulturgeschichte der germanischen V lker N.F.11), Berlin 1963.
Helmut Brackert, "Heldische Treue, heldische Tapferkeit, heldisches Schicksal", in: Literatur in der Schule 1, Mittelalterliche Texte im Unterricht, M nchen 1973, S.71-111.
Joachim Bumke, Euphorion 58(1964),(Die Rezension von Brackert), S.428-438 참조.
Joachim Heinzle, Das Nibelungenlied, M nchen 1987.
P.V.Zima, Ideologie und Theorie, T bingen 1989, Kap.12.
--------, Literarische sthetik, T bingen 1991, S.38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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