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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22 구간(노고치 - 미사치)
1. 산행일자 : 2009년 6월 27(토)
2. 산 행 지 : 순천 문유산, 바랑산, 갓걸이봉
3. 출발일시 : 6월 27일(토) 04 : 00시
4. 출발장소 : 수원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
5. 산행개요
[순천의 지형과 산지]
순천시의 모양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길쭉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북서쪽으로 주암면 운룡리 용두마을과 황전면 비촌리 칠안마을이 소의 두 뿔처럼 뾰족하게 돌출되어 있다.
순천시의 지형과 지세는 대체로 북쪽과 서쪽이 높고 기복이 심하며, 남동쪽이 낮다. 따라서 순천만과 광양만에 접해 있는 남동쪽에 다소의 평야지대가 분포하고 있을 뿐 시의 대부분은 산악이 중첩해 있다. 소백산맥이 태백산맥에서 힘차게 뻗어나와 남으로 향하다 남해를 맞아 웅크린 형상의 지리산 지맥이 이 지역에 이르고 있다. 또한 소백산맥의 말단부에 해당되어 크고 작은 많은 산들이 자리하고 있고, 산수의 경관이 수려하다. 특히 조계산은 송광사와 선암사 등의 대사찰을 안고 있는 이름난 산으로, 명승 제5호 및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산지의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대소 하천의 유역과 해안지역에 발달한 평야는 비옥하며 토심이 깊고 잘 가꾸어져 있어서, 각종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축산․잠업 등이 활발하며, 이 지역 주민들의 주활 동무대가 되고 있다. 한편 순천만에 접해 있는 별량면과 광양만에 접해 있는 해룡면 해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다. 바다가 잔잔하며, 포구가 발달되어 있고, 조수간만의 차도 심하지 않으나 수심이 얕기 때문에 큰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은 갖추지 못하여 소형 어선만이 출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패류양식과 소금생산의 적지이고, 지형적 여건에 따라 간척사업이 해방 이후에 활발히 추진되어 넓은 바다가 육지로 변하였으며, 앞으로도 간척․매립사업의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순천시의 산지는 한반도의 척량산맥인 태백산맥에서 분기한 소백산맥의 본줄기가 서부로 노령산맥을 다시 분기하고 남으로 곧게 뻗어 내려와 천황봉에 이어지면서 발달되었다. 순천시역에 발달된 산맥과 능선의 방향을 살펴보면 남북과 동서로 발달되어 있다. 즉, 소백산 말단부인 조계산을 비롯하여 서북쪽에는 시루산이 있고 남쪽에는 장안사가 있다. 남북방향이 조계산과 장안사를 잇는 능선인데 이 능선은 조계산을 지나 북쪽으로 달린다. 동서의 산릉은 전기한 남북방향 능선의 가운데쯤에서 좌측으로 달리다가 다시 남북방향으로 구부러져 오두치를 거쳐 시루산과 연결된다.
순천시에서 가장 높은 산은 전라남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모후산(母后山, 919m)이며, 그 다음은 도내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조계산(887m)이다. 이들 두 산을 주축으로 하여 각지로 산릉을 이루어 산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끝은 해안선까지 이어져 있다.
그밖에 주요 산으로는 히아산(763m, 월등면)․봉두산(753m, 황전면)․계족산(726m, 서면)․고동산(709m, 낙안면․송광면 경계)․서롱산(690m, 황전면)․문유산(688m, 월등면)․갓꼬리봉(688m, 서면․황전면 경계)․운월봉(683m, 주암면)․천황봉(652m, 황전면)․망일봉(652m, 송광면․보성군 문덕면 경계) 등이 있다.
6. 산행 참가자 : 노승애, 박봉하, 이용준, 윤희원, 장현옥(5명)
7. 날 씨 : 흐림
8. 총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 총 산행 약 21km, 10시간 30분 정도 소요
9. 일정 및 소요시간
[1] 구간별 거리 및 주요 산 높이
노고치(340m,857번도로)--1.0km--611m봉--2.0km--문유산(688m)--4.0km--바랑산(618.9m)--2.0km--송치(280m)--3.5km--농암산(476.2km)--1.5km--장사굴재(330m)--1.1km--죽청치(390m)--2.5km--수리봉(508.2m)--마당재(430m)--1.5km--갓꼬리봉(689m)--2.0km--708m봉--미사치(450m)
[2] 산행일정
① 산행 출발지(오도치) 가는 길
수원(04:0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승주IC ∼ 승주(07:30/아침/08:10) ∼ 22번, 857번도로 ∼ 노고치(08:40)
②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노고치(08:50) → 590봉(09:20) → 670봉/묘(09:50/10:00) → 문유산분기점(10:15) → 문유산(10:20) → 도목목장 임도(10:45/10:55) → 바랑산(12:00/12:10) → 송치(12:50/점심/13:30) → 병풍산분기(14:10) → 농암산(14:45/14:55) → 장사굴재(15:20/15:30) → 죽청치(16:25/16:35) → 갈매봉(16:55) → 마당재(17:25/17:35) → 갓꼬리봉(18:25/18:35) → 갓머리봉(19:00) → 미사치(19:20)
③ 산행 후
미사치(19:30) -- 황전터널 -- 840번도로 -- 핑크본가별장, 식사 및 숙박(20:00 ∼ )
[4] 탈출로 및 편의사항
○ 핑크 본가별장,
○ 진일기사식당(061-754-5320),
○ 선창네집(061-763-2113, 장어)
○ 승주 원보산장(061-754-5541, 추어탕),
○ 승주택시(061-754-5858, 011-618-2726)
10. 산 행 기
[1] 산 행 전
[1-1] 장부장 가족 산장에 대한 기대
호남정맥 21구간[빈계재~노고치:고동산(709.4m),조계산(884.3m),오성산(606.2m),유치산(530.2m)]에 이어 이번 산행에도 순천에 있는 산들을 돌아보게 되는데 핑크(장현옥 부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더구나 호남정맥 출발 때부터 은근히 자랑을 했던 순천시 월등면 청소리『계족산(鷄足山)』아래에 있는 「가족산장」에서 유숙을 하기 때문에 어떤 산행 구간보다 기대가 되는 산행이다.
[1-2] 회원들의 動靜
함께 산행을 했던 대원들도 기대가 큰지 대장은 「1박 2식은 "핑크 본가별장"에서 제공합니다.」라고 산행 안내 첫머리에 글을 올려놓았고 윤사장님도 장어구이가 기다리고 있다며 대원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는 글을 올렸다. 그래도 별 반응이 없다.
노부장,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강사장, 박사장 불분명한 응답이고 안교장은 출장으로 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출발 이틀 전(6월 25일), 노부장, 어머님께서 산책을 하다 자동차 사고로 입원을 하여 간호를 해야 한다고 한다.
6월 26일, 카페에 27일(토) 오후부터 비올 확률 7, 80%, 雨中 산행을 대비를 하라는 대장의 글이 올랐다. 이런 경우를 두고 好事多魔라고 하는가?
[1-3] 산행 준비와 출발 전
雨中 山行 걱정을 하며 배낭을 꾸리고 밤 11시를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03 : 00시 기상, 창문을 열고 비가 내리는 가를 획인해 보니 덤덤한 날씨다.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선 것이 03 : 40분, 택시를 타고 출발지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에 내렸다.
어머니 병간호로 참여할 수 없다던 노부장이 보인다. 너무 반갑다. 다른 형제분들이 간호를 대신 하기 때문에 차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사장, 박사장 불참. 다섯 명이 단출한 산행을 하게 되었다.
[2] 소강남(小江南) 順天
07 : 00시경 승주IC를 빠져나와 순천 외곽지대를 지난다. 장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이 어린『順天』을 지나고 있다.
흔히 전라남도를 소개할 때 언급되는 글귀가 있다. 「글 잘하기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고, 예절 바르기로는 보성만한 곳이 없으며, 지세 좋기로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文不如長城 禮不如寶城 地不如順天).」 또 시쳇말로 「여수 가서 돈 자랑 말고, 순천 가서 미인 자랑 말며(순천의 처녀 총각들이 모두 善男善女에서 그런 말이 나왔지만,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인재의 고장이어서 더욱 그런 말이 설득력이 있다.)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듯 순천은 지세 좋고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며 또 순천을 삼산이수(三山二水)가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 때문에 중국의 강남에 버금간다 하여 『소강남(小江南)』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순천 출신 趙顯範이 쓴 『江南樂府』에서도「順天」을「江南」이라고 노래했다.
「빼어난 경치의 호수와 바다사이
한 커다란 고을 하나 있으니 예부터 아름다운 강남이라 했다네
화려한 누각에는
신선의 말소리와 제비의 지저귐이 있고
주막 줄줄이 문을 열어
싱싱한 물고기와 붉은 게가 어우러지니
해물 맛 달기도 하구나.
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곳,
무릇 집은 몇 채인가.
대나무 울타리 즐비한데
복숭아 꽃 어지럽게 날리고
수양버들 늘어졌네.
앵무주 주변 십 여리에 아른아른 비 내리고
푸른 하늘 멀리 점점이 있는 섬은
반쯤 보이는 삼산 같구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매개노인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그때 읊은 풍월이 오늘밤 이야기 거리인 것을」
「江南」이란 본래 중국의 양자강 以南, 좁게는 그 상류의 강소성, 안휘성 남부와 절강성, 호남성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라 한다. 이 지역은 산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하였다. 이에 빗대어 趙顯範은 「강남롱(江南弄)」에서 『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하여, “산천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까닭에 그렇게(강남) 칭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순천의 “고을 지형이 바닷가 굽이에 치우쳐 있어 따로 한 구역을 이루고 있으며, 평상시 백성들의 물산이 부유하고 풍성한 까닭에 호사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정임중은 '강남악부'의 발에서 “산천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인물과 풍속이 번화한 까닭에 이름 하여 소강남이라고 하였다.(山川奇麗人俗繁華故名之曰小江南者也)”고 했으며, 민병승도 '강남악부'의 서에서 역시 “강남이라 한 것은 순천고을의 산천이 아름답고, 풍속이 번화하여서 소강남이라 불리어왔기 때문이다.(江南云者順天之郡山川奇麗俗尙繁華故曰小江南也)”고 하였다.
이로 보면 순천을 밖으로는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안으로는 인속(人俗)이 융성․화려한 까닭에 살기 좋은 고을이라는 의미에서 예로부터 강남 또는 소강남이라 칭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출처> 제 6회 전국 중·고등학생 우리역사 바로 알기 경시대회 연구보고서(작성자 : 최준호/ 지도교사 : 최승연/순천연향중학교, 2008년 6월 10일
http://iyhms.net/menu_iyhms_ms/temp/data89/%C1%A6%C3%E2%BF%EB.h...
※ 趙顯範 : 본관이 옥천(순창)이고 자는 성회(聖晦)이며, 호는 삼효재(三效齋)로 건곡(虔谷) 조유(趙瑜)의 12세손이다. 1784년(정조8) 그의 나이 69세 때 지역의 인물, 기사, 풍속, 지리 등 갖가지 사적을 모아 '강남악부'를 편찬하였다.
※ 강남악부 : 순천지방의 역사, 풍속, 설화, 전기, 성씨, 지리 등 갖가지 내용들을 집성한 저술이다. 이 책은 승평지에서 볼수 없는 기한 사료들이 풍부하게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편년확인이 가능하다는점에서 지방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생각되며, 그 번역본 <국역 강남악부>란 제목으로 남도문화연구자료총서第二(1991년)로 간행되었다
또 順天을 『三山二水』라 하는데 「인제산, 봉화산, 황산」을 三山이라하고(혹은 용당동의 삼산을 말하는 이도 있지만)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옥천」을 이수라고 한다.남도의 부드러운 대지의 기운을 받아 사람들의 인심이 후하고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곳으로 능히 중국의 강남땅과 비견되는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벽산, 장영태」님은 『三山 二水의 順天』이란 詩에서
三山과
二水가 있어
물과 숲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순천
동천의 맑은 물은
장대와 오천을 지나
순천만에 이르니
죽도봉 맴도는 저 철새들
철가는 줄 모르고
오늘도
나는
장대다리 어귀에 서서
오가는 기적과 함께
저기
오리 가족이 되고파라.
라고 노래했다.
[3] 승주 원보산장
승주 IC를 빠져나와 장부장으로부터 순천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담을 들으며 아침 식사 장소인 「승주 원보산장(전남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 28-1 / 월등 삼거리 / ☎ 061-754-5541, H.P 010-9882-5540 / 대표, 서진선 / 추어탕 전문집)」에 도착한 것이 07 : 30분경, 지난 산행 때 점심 식사로 앞면이 있기 때문인지 주인아주머니 반갑게 맞아준다.
자리에 좌정하고 잠시를 기다리니 밥상이 차려지는데 한마디로 珍羞盛饌이다. 찬이 17 ~ 8가지(김치, 깍두기, 더덕, 마늘장아찌, 도토리묵, 고구마줄기 볶음, 실파절임, 북어 졸임, 젓갈 등 ---)에 아욱국과 밥공기를 올리니 상이 비좁다. 추어탕이 전문이라는데 왜 추어탕이 안 나오느냐고 했더니 금방 추어탕도 한 냄비 끓여 내 놓는다. 含哺鼓腹(잔뜩 먹고 배를 두드림)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했는데도 식대가 30,000원이란다. 푸짐한 상차림에 저렴한 가격으로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인 할머니의 넉넉한 인심이 그저 고맙다.
[4] 산행 들머리 『노고치』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한 줄기 내릴 듯 하늘에 먹구름이 잔득 끼었다. 윤사장님, 비가 오면 중도포기를 하겠다고 한다. 애초부터 중간 탈출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은근히 동반자를 구했는데 다행이다. 장부장도 음식중비로 완주를 할 수 없다고 하니 노부장도 오랜만에 하는 산행이라 동참하겠단다. 대장만 홀로 완주를 하게 되었다. 결국 산행 출발부터 중도 탈출(송치)과 완주 팀으로 나눠지고 말았다.
승주 택시를 불러 오늘 산행의 들머리 『노고치』이동했다.
08 : 40분, 이정표((노고치, ↑문유산삼거리3.0km, ↓희아산4.0km,유치산4.6km, ※ 지난 산행 때는 없었음)를 세워 놓은 『노고치』에 도착했다. 오늘 산행은 대장만 완주를 하기 때문에 노고치를 떠나면 장부장 가족 산장에서나 얼굴을 맞댈 수 있다. 그래서 이정표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촬영을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노고치(350m)는 순천시 승주읍 도정리 고산마을과 월등면을 연결시켜주는 고개다. 2차선 포장도로(857번 지방도로)가 나 있으며 고개 마루에 승주읍에서 세워 놓은 『노고치』표지석이 있다.
노고치가 위치해 있는 「고산마을(순천시승주읍 도정리)」은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인 1580년경 도목 군장마을이 생긴 이후에 이루어진 산간 마을로 청송심(沈)씨와 청주한(韓)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동편 높은 산이 소리를 내고 울면 마을에 경사가 있다고 하여 북고(鼓)를 사용하여 「고산(鼓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동편으로는「국사봉」이 우뚝 솟아 있고 청계동(淸溪洞) 계곡이 있으며 서편으로는 노구포손(老嫗抱孫)이라는 명산과 그 아래 맷돌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남쪽으로는 용등(龍嶝)이 있고 그 아래 龍이 목욕을 하였다는 용쏘라는 웅덩이가 있으며 북으로는 문유산(文遊山)이 자리 잡고 있다.
[5] 농장 주인의 하소연
『노고치』를 출발하면 산행이 종료 되어야 모두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단체로 이정표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 후 2차선 포장도로를 횡단하여 대나무 숲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니 등산객출입금지 표지판(등산객 출입 금지 / 농장지역입니다.)이 부착된 차단기가 길을 막는다. 아마도 등산객들 때문에 농작물 피해가 많았던 모양이다.
농장을 통과하지 않고 달리 갈 길이 없어 농장 주인장의 눈총을 받을 각오를 하고 출입금지 시설물을 통과하여 農家를 지나 농로를 따라 진행을 한다. 정맥 표시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5분여를 진행 했는데 매실을 따던 주인, 인기척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문유산』오르는 길을 알려주며 농작물에 손을 대지 말라고 신신 당부다. 말인즉슨 고사리와 산나물, 매실 등을 공들여 재배하고 가꾸는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꺾어가고 따가 농사를 망쳐 놓는다고 한다. 산을 오르기 위해 농장을 잠시 통과하는데 굳이 막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다.
주인장의 당부를 듣고 잠시 더 진행, 농로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다 보니 산비탈 전부가 고사리로 일색을 이루었다. 좀 전의 농장 주인의 당부가 이해가 된다.
[6] 文遊山
[6-1] 590(고산 삼거리)봉
풀과 잡목을 헤치며 농장 가장자리 능선에 올랐다. 정맥 표시기가 눈에 띈다. 농장을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섰다. 급경사 오름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급경사를 오르는 것이 만만치 않다. 숨소리가 거치러지고 금방 모자 창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혀 오르기를 20여분, 힘들게 峰(점터봉?) 마루에 올랐다. 아무런 표시도 없고 마땅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없어 가쁜 숨만 진정시키고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완만한 내림 길로 5분여를 진행하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로 들어서게 된다.
오늘은 초반부터 진을 빼는 것 같다. 습도가 많은 날이라 평소보다 산을 오르는 것이 배가 힘이 든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 더 힘들게 만든다. 출발하면서 비가 쏟아질 것을 걱정했는데 차라리 굵은 소나기라도 한차례 쏟아졌으면 싶다. 비대신 땀을 흘리며 오르기를 6, 7분, 삼각뿔 바위를 지나 590(고산 삼거리)봉에 올랐다. 휴식(09 : 20분).
[6-2] 능선 삼거리에 이정표
오늘은 출발부터 『송치(오늘 산행의 중간 지점)』에서 산행을 종료하기로 했기 때문에 바쁠 이유가 없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출발을 했다. 두 봉(611봉, 590봉)을 힘겹게 오른 보답인가(苦盡甘來), 570봉 이후부터는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따라 진행하기를 약 9분, 성터처럼 쌓은 축대(묘 이장 자리)를 지나 또 한 차례 땀을 흘리며 능선 삼거리 670봉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09 : 50분이다. 쉬엄쉬엄 간다고 가는데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
능선 삼거리에 이정표(노고치 3.0km← [문유산] → 바랑산 5.3km / 문유산 정상 0.1km / 군장마을 <1.0km>km)를 최근에 세워 놓았는데 『문유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노고치 방향 표지판은 떼어 소나무에 걸쳐 놓았는데 무슨 연유로 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방향 표시가 잘못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6-3] 군장(軍將)마을
진행 방향 우측 1km 아래 위치한 승주읍 도목리 「군장(軍將)마을」은 해발 380m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마을로 1480년경 達成 裵氏와 全州 李氏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達成 裵氏는 군장에서 머물러 살고 있으며 全州李氏는 도목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지명유래는 주변의 산들이 군사같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하여 군장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군장마을에는 장군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매몰되어 없어졌으며, 장군바위가 없어진 이유는 마을 청년들이 모두 힘이 세어 장사라 전하여 지고 있는데 그때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으로 서로 겨루면서 장군바위를 아래로 밀어뜨려 매몰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부터 마을 청장년들의 장사 같은 힘이 없어졌다고 한다.
군장마을은 일제 침략 후 수많은 탄압 속에서도 군장 마을 名을 바꾸라 하였음에도 끝내 바꾸지 않았으며 그렇다해서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 다니지도 않은 평온한 마을이었다 하며 마을이 이루어진 후에도 호랑이가 있었지만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당산나무 밖으로 돌아다니며 살면서도 마을 안으로 들어와 가축에 피해를 주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당산나무는 수령이 몇 년이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1,000년 이상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매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산제를 지내는데 祭主는 1년 동안 깨끗하고 부정이 없는 집안에서 祭를 드리며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다.
고산 도목마을의 물은 이사천을 향하여 흐르지만 장군마을에서 흐르는 물은 섬진강을 향하여 흐르고 있다. 누에머리산 중턱에는 반석이 있는데 반석 위에는 옛 장수의 말 자국이 반석위에 찍혀 있으며 동일방향으로 직선거리 200m되는 마을 앞 반석에도 龍馬 발자국이 찍혀 있다고 한다.
[6-4] 문유산 삼거리
『문유산(文遊山)』이정표가 세워진 곳에서 느긋한 휴식을 취한 후 좌측『바랑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능선 봉(이정표에 문유산 정상 0.1km라 표시된 지점)을 지나면서부터 평지 같은 길로 이어진다.
5분여를 진행하여 Y자 삼거리에 도착했다. 『문유산(文遊山, 688m)』방향을 나타내는 코팅지 표지판을 소나무에 붙여 놓았는데 문유산 정상 0.1km라 되어있고 또 하나의 표지판에는 「해발 662M 호남정맥 /노고치 3.87km / 1시간, ← [문유산 갈림 길] → 바랑산, ↑문유산 / ni8848, 평택」이라 표시되어 있다. 앞서 이정표는 이 지점에 세워야 할 것을 엉뚱한 곳에 세운 것 같다.
[6-5] 문유산을 비커 가는 아쉬움
문유산은 순천시 승주읍 도정리 고산(월등면 소재)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 선비들이 이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놀았다하여 『문유산(文遊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선행자들에 따르면 마루금(문유산 갈림 길)에서 왕복 7, 8분이면 다녀 올 수 있다고 하며 정상에는 순천시에서 설치한 정상 표지석과 삼각점(구례 458 / 1985 복구)이 있으며 공터봉으로 사방이 툭 터져 조망이 뛰어나다고 한다.
산행 시간도 넉넉하고 200여 m, 7, 8분 수고를 하면 되는 데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해 지나친 아쉬움이 남는다.
[7] 문유산방향임도
『文遊山』 삼거리를 뒤로하고 완만하고 편한 길을 따라 걷기를 20여 분, 완만한 봉(600봉)에 올랐다 자갈이 깔린 임도로 내려섰다. (10 : 35분) 이정표를 길 양쪽에 세워 놓았는데 「문유산삼거리1.2km ← [문유산방향임도] → 바랑산3.2km」라 표시되어 있다.
진행방향 우측으로 내려가면 「道亭里 桃木마을」이 된다. 「道亭里」는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里로 문유산, 유치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전형적인 중산간 지역이다. 동쪽에는 고산천이 남류하고 남쪽으로는 도정천이 남류한다. 축내저수지와 두리봉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군장, 도목(복숭아나뭇골), 못골(지동), 백현 등이 있는데 「軍將」은 근처의 산에 將軍大坐形의 명당이 있다하여 붙여졌으며 「桃木」은 복숭아나무가 있다하여 붙여졌고 「못골」은 못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白峴」은 구름고개에 백토가 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출처> 엔싸이버동아백과
[8] 사제사거리
이정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바랑산』을 오르기 위해 林道 절개지로 올라붙었다.
다소 가파른 오름길을 8분여 진행하여 능선이 분기하는 590峰에 올랐다. 좌측 내림 길로 표시기가 여러 개 매달려 있다.
10 : 57분경 좌측은 「군장마을」, 우측은 「구강리」사이의 안부(사제사거리)로 내려섰다. 안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오른 봉이 능선이 분기하는 500봉이다. 峰에 올라(11 : 20분경)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7, 8분을 내려가니 또 하나의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지나 좌측 숲 속으로 진입하여 오늘 산행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고비가 되는『바랑산』을 오르기 위해 다리에 힘을 모은다.
[9] 방랑산(620m)
힘들다, 쉬었다 가자하면서 꾸역꾸역 걸음을 옮겨 오늘 산행 중 모처럼 대하는 바위지대를 지나 평지를 이룬 봉에 올랐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폐 헬기장이다. 헬기장을 뒤로하고 잠시 더 진행하니 묘 하나가 나온다. 산행을 하면서 자주 대했던 山頂 墓다. 높은 산봉에 墓터를 잡은 것은 死後 極樂往生을 바라는 뜻도 있고 富貴榮華를 누리고 싶은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손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묘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묘를 통과하고 삼거리를 지나 『방랑산(620m)』정상에 올랐다.(12 : 14분경) 약간의 바위지대를 이룬 정상에는 『바랑산, 620m, 순천시』라 쓴 정상석과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삼각점(구례 28-1991 재설)이 설치되어 있고 시야가 툭 터져 眺望이 너무 좋은 곳이다. 날씨가 흐려 『바랑산』주변의 山勢와 風景을 살필 수 있는 福을 누리지 못했지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솜사탕보다 더 감미롭다.
『바랑산(620m)』은 「순천시 월등면 계월리 이문마을」뒤에 위치한 산으로 순천시 서면, 승주읍, 월등면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바랑산』은 계월리 이문마을(1 시간), 승주읍 군장마을(40분), 송치재(1 시간)에서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바랑산』의 지명 유래가 궁금하여 산행 후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찾지를 못했다. 국어사전에 「바랑」을 찾아보니 ‘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라 풀이를 해 놓았는데 아마도 산의 생김이 ‘바랑’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10] 바랑산 밑 마을 「계월리(桂月里)」
계월리(桂月里)는 전형적인 중산간 지역으로 동쪽에는 계월천이 흐르고 상좌봉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계월리(계월, 계영), 망월(보름태), 밭똠(외동) 등이 있다. 계월리는 바랑산 밑 골짜기가 된다하여 붙여졌으며, 망월은 보름 재 밑이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밭똠은 계월 바깥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월등면 계월리」는 ‘향매실’로 지난 2007년 「녹색농촌체험마을(순천향매실마을)」로 선정되었으며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매화하면 사람들은 광양의 매화마을을 떠올리지만, 사실 기품 있는 매화는 순천에 더 많다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선정된 선암사의 「선암매」를 비롯해, 송광사의 「송광매」, 금둔사의 「홍매(납월매)」등 순천의 고찰에는 기품 있는 오래된 매화가 많아 봄을 만끽하기에 좋다.
계월리에서 처음으로 매화를 심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일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 동네 주민인 故 「이택종」씨가 매화나무 등 과수묘목을 가지고 1960년대 중반에 영구 귀국해 정착하면서 부터다.
계월리는 앞뒤로 바랑산(620m), 문유산(688m), 병풍산(499.8m)을 껴안고 있는 산촌마을이다 보니 인근 광양이나 해남보다 매화가 10일에서 보름쯤 늦게 피어나 4월초까지 매화를 감상할 수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전국 최대 규모의 매실군락지이지만 아직 홍보 부족으로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호젓하게 매향에 취해 나들이하기에 좋다.
<출처> http://kr.blog.yahoo.com/ptsin1241/3219
[11] 송치재
대장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전화를 해 보니 『송치재』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단다. 우리보다 약 40여분을 앞서가고 있다. 이제 『바랑산』을 내려가면 『송치재』고 『송치재』에서 산행을 접게 되면 장부장 가족 산장에서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원 계획의 반만 하는 산행이라 시간에 쫓길 이유가 없어 넉넉한 휴식을 가진다.
12 : 40분경, 정상을 출발하여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우측 급 내림 길로 들어섰다. 『방랑산』정상을 뒤로한지 약 35분, 벙커가 설치된 봉에 올랐다 로프가 설치된 급 내림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묘 2기를 지나 서면과 월등면의 경계가 되는 『송치재』에 내려섰다.
오늘 우리의 산행은 여기까지다. 나머지 『병풍산, 농암산, 장사굴재, 죽청치, 갈매봉, 마당재, 갓꼬리봉, 갓머리봉, 미사치』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산행 때와 같이 대장을 통해 듣고 선행자들의 산행기를 읽어보는 것으로 대신 해야 할 것 같다.
17번 국도가 가로지르는 송치재는 송치 터널이 뚫린 이래로 거의 차량통행이 없는 도로이다. 도로변에는 「송치재, 해발 280m, 승주군」이라고 쓴 표지석이 있고 그 뒤로 넓은 주차장과 2층으로 된 큰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출발부터 비가 올 것을 걱정했는데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도 피할겸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건물 현관으로 이동을 했다. 출입구 벽면에「야망 연수원」현판이 걸려 있고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순천시청>순천소개>순천시사에 『송치(松峙)』를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해 놓았다.
『송치(松峙)』는 「서면 학구에서 황전면 송치로 넘어가는 재로, 사람들은 ‘소련재’라고 부른다. 소련재 동쪽 산봉우리에서 황전면 쪽으로 내려가자면 묘비가 있는데 거기엔 솔연치(率燕峙)로 새겨 있으며, 재 정상 주유소가 있는 곳엔 송치(松峙)라 새겨놓았고, 황전면의 마을을 송치(촌로들은 산골내기라 부름)라고도 한다. 재는 하나인데 그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난중일기에는 “정유년(1597) 4월 27일에 순천 송원에 이르다.”란 기록이 있으며, 이수광은 승평지에 송현원(松峴院)이라 기록하였다.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 송원리(松元里)와 와요리(瓦要里)가 보인다.
재의 이름이 ‘솔재’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뜻옮김을 해 송치와 송현으로 적었고, 그 재에서 서면 계곡에 나라에서 경영하던 원(院)을 설치하고 송원과 송현원으로 이름했지만, 사람들은 한자대로 부르지 않고 ‘솔원’이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솔원이 있는 재’란 뜻으로 ‘솔원재’라 부르면서 옛 이름인 ‘솔재’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만 문헌에 송치라고 기록되어 있어 도로를 확・포장하며 송치라 새겨 세운 것이다. 그리고 재 아래 마을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
‘솔원재’가 ‘소련재’로 바뀌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어째서 ‘소련재’라고 하였을까? 한국전쟁 때 소련군이 이 재를 넘어왔다고 ‘소련재’라고 하였을까 하고 무척 궁금해 한다.
요컨대 ‘솔재’가 원이름이고 이를 한자로 송치와 송현으로 표기했고, 관리나 나그네가 머물다 가는 원을 설치하고 송원이라 이름했다. 한자대로 부르지 않고 ‘솔원’이라 불러오다가 ‘솔원’이 있는 재란 뜻으로 ‘솔원재’라 불렀고, 거기서 소리가 변해 ‘소련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그곳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 살기 때문에 마을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의 자료에 송원리로 기록된 것이다. <출처> 순천시청>순천소개>순천시사
(http://www.suncheon.go.kr/open_content/about/sisa/politics/politics/)
[12] 다시 「원보산장」으로
옷도 젖지 않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금방 그친다.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는데 오후에 산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 여유도 있어 아침 식사를 하고 주차를 시켜 둔 「원보산장」으로 이동하여 느긋하게 식사를 하자고 했다. 택시를 불렀는데 아침에 우리를 이동시켜 준 기사가 또 왔다. 한나절 안면인데도 반갑다.
「원보산장」도착, 아침 식사상과 마찬가지로 상이 넘치게 찬이 차려지고 메기매운탕에 잎새주를 겹들이니 대낮부터 취기가 오른다. 오후 일정이 비어 식사 후 선암사를 둘러보기로 하고 대장에게 미사치 도착 시간을 확인 해 보니 한 시간 반이면 산행을 종료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한 시간 반이면 선암사를 갈 수도 없다. 그래서 장부장 가족 산장 가는 길목에 『계족산 정혜사』를 둘러보고 산장에 가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13] 鷄足山 定慧寺
「원보산장」에서 10분을 달려 『정혜사』입구 표지판(대한불교 조계종 천년고찰 / 정혜사(定慧寺 / 2km)을 세워 놓은 『청소골』로 들어섰다.
청소골 물소리와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솔바람을 쏘이며 청소골 계곡을 따라 6분여(약 1.5km)를 달려가 우측 시멘트 포장길로 3, 4분을 더 진행하여 『정혜사』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정혜사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석축 돌계단을 20여개를 밟고 올라서니 또 화강암으로 반듯하게 깎아 만든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 좌ㆍ우의 石柱에「鷄足山 / 定慧寺」라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돌계단을 밟고 천천히 올라 사찰 경내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좌우로 石燈이 있고 정면 중앙에 최근에 세운 5층 석탑이 있으며 일직선으로 약 20여m 안쪽으로 國家指定 文化財 寶物第804號인 大雄殿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부속 건물도 있다.
「定慧寺는 지금부터 1600년 전 혜조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일명 「古寺」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계족산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혈이라 절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절에는 국보 제 804호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과 여수반란, 그리고 6.25 동란 때 분실되었다.
「고사」의 원 사찰지는 청소리 323번지로 전해져 있고 옛날에 재물을 걸었던 돌기둥과 주춧돌이 있어, 그의 절터로 전해오고, 이곳의 뒷산에는 노승 승학이란 학이 날아갈 수 있도록 형태가 남아 있다.」라고 ‘승주읍지 청소리 마을’에 소개를 해 놓았다.
「대추쟁이마을 / 불교사찰/사진방(24) / http://blog.daum.net/kkdks660/15090979」에서는「정혜사(定慧寺) 역사(歷史)와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 놓았다.
『계족산(鷄足山) 중턱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大韓佛敎曹溪宗第十九敎區)에 속해 있는 사찰(寺刹)이며 정혜사(定慧寺)는 지금으로 부터 약 1260년 전 신라 경덕왕 1년 서기 742년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제2창건은 혜철 국사(慧哲國寺)가 중창 하였으며 이 지방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찰이란 뜻으로 "고사절" 이라고 이름이 나 있습니다. 또는 1150년 전(前) 통일신라시대 말에 보조국사(普照國師)체징(體澄 : 서기 804년-880년)이 정혜사를 창건 했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없어 확실 하지 않습니다.
한편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圓監國寺) 충지(沖止 : 서기 1226년-1293년)에 그의 스승에 대해 쓴 혜소국사 제문(慧炤國寺祭文) 등에 보면 정혜사는 혜소국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혜소국사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정혜사를 창건 했으나 생시에 완성하지 못하고 제자들이 뒤를 이어서 큰 도량(道場)을 이루었으며. 그 뒤 또다시 절이 황폐화 되었으나 원감국사 충지 대사(圓監國師沖止大師)가 관음기도(觀音祈禱)로서 원력을 세워 다시 절을 부흥시켜 창건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관음기도 도량(觀音祈禱道場0으로 명성이 나 있으며 현재까지도 간절히 기도발원(祈禱發願)하면 꼭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영험(靈驗)있는 도량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연혁(沿革)은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서기 1616년 광해군 10년에 나온 신증승평지(新增昇平誌)에 보면 옛날에는 큰 사찰이었으며 壬辰倭亂과 정유재란 이후 다시 절을 중창하였고 그리고 18세기에 편찬된 가람고(伽濫考)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 무렵까지 계속 법등(法燈)이 이어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순천읍지와 여승람에 본 정혜사에 부처님의 진신치사리(眞身齒砂利)를 봉안 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므로 애고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순 항쟁과 6.25 사변을 겪는 동안 국보급 쾌불 등 귀중한 문화재가 화재로 소실을 당하고 잃어 버렸습니다.
이곳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2칸 단층 팔작으로 각 구간마다 1구씩 공포를 짜 얹은 다포계이며 1984년 11월 30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804호(文化財寶物第804號)로 지정이 되었으며 그 밖에 산내 곳곳에 파손된 탑과 부도탑 등이 있으며 순천에서 넘어 가는 이 길을 옛날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다고 합니다.』
『定慧寺』이모 저모를 살피며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고 주차장으로 나와 내일 오를 『鷄足山』을 둘러보니 千年 古刹을 감싸고 있는 山의 모습이 대웅전에 안치된 불상처럼 온화하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14] 淸所골 장부장 가족 산장
[14-1] 가족 산장의 모습과 가꾼 정성
『定慧寺』를 뒤로하고 차창으로 불어오는 계곡의 맑은 바람을 쏘이며 장부장 가족 산장으로 이동을 했다.
장부장 가족 산장은 순천시 서면 청소리「淸所골」가장 상단, 전주 ~ 광양간 고속도로(공사중) 바로 직전 도로변에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2층 집이 있고 넓은 잔디밭 정원에 또 하나의 단층집이 있으며 집 뒤로 산이 둘러 있어 경관이 너무 수려하다.
우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2층집 현관 앞에 있는 생수로 목을 축인 후 산장을 둘러보았다. 집(2층) 뒤로 돌아가 보니 넓은 공터와 계곡 물이 집 옆으로 흐르고 사진에서 보았던 풀장도 마련되어 있는데 때가 일러 물을 가두어 두지 않았다.
집 주변으로 길을 내고 돌담을 쌓아 운치를 낸 것이며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꾼 정성이 여간 아니다. 대부분 장부장 작은 오빠가 다듬고 가꾸었다고 하며 주말이면 필요한 가족이나 공동으로 이곳에서 즐긴다고 한다. 산장을 가꾸는 정성도 놀랍지만 형제간의 우애가 산장을 에워싸고 있는 한여름의 녹음만큼이나 두텁게 느껴진다.
[14-2] 淸所里 淸所마을과 관풍쟁이(深院마을)
청소리는 원래부터 청소골이라고 불려온 '원 청소'와 미삿재를 오르기 전 고갯마루에 못 미쳐 '관풍쟁이(深院마을)'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청소(淸所)마을」은 해발 350~4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간마을로 지금부터 약 470년 전 김해김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물이 맑고 신선한 곳이라 하여 「청소(淸所)마을」이라 하였으며, 뒤로는 ‘옛날에 한양을 가게 되면 이곳을 거쳐 가는 원님이 쉬어가는 곳’이었다는 「심원(深院)마을 : 관풍쟁이(觀楓亭)」이 있고 닭 발바닥 형상을 한 계족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혈이라 하여 계족산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4-3] 강감찬 장군 전설
전설에 강감찬장군이 서울로 가던 중 날씨가 더워 청소천에서 목욕을 하는데 참게가 당신을 물어 그 게를 잡아 광양쪽으로 던져버린 후 부터는 청소천에는 참게가 생존하지 않고 광양에만 살고 있다고 하며 감감찬 장군이 목욕한 곳을「게소(沼 : 마을 앞)」라 불렀다고 한다.
[14-4] 갓거리봉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도인이 서울을 가던 중 청소마을 뒤 「갈등」이란 산이 있는데 광주 무등산과 연결되어 一名 「괘관산」이라 부른다. 그곳에 가면 노구솥으로 밥을 지어먹었다는 전설도 있고,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며 머리에 쓴 갓이 바람에 날려 산봉우리에 걸려 있었다고 하여 『갓거리봉』이라 불렀다고 한다.<출처> 승주 향리지, 서면 청소마을
『갓거리봉』은 오늘 산행 구간에 포함되어 있는 산인데 송치재에서 산행을 종료했기 때문에 오르지를 못했지만 장부장 가족 산장에서 보면 툭 불거져 나온 있는데 이 산이 『갓거리봉』이라고 한다.
[14-4] 美沙峙와 美草마을
오늘 산행의 종착지가 『미사재』인데 「深院마을」과 황전면「美草마을」 중간에 「미사재」가 있다.
미초마을(전남 승주군 황전면)은 해발 110m로 1600년경 옥천조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 주변의 산세가 아름답고 초목이 아름다워 미초(美草)라 불렀다하며 그 아름다움이 霅峙(비올삽)의 여덟 가지 자랑 중 하나에 든다하여 「霅峙八勝」에 「美草芳原」이라고 했다.
면소재지인 괴목으로부터 동으로 15km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東은 덜림마을과 南은 美沙峙(재)를 사이로 승주군 서면과 西는 와우산을 넘어 각문마을, 北은 회룡마을과 인접하며 깃대봉에서 내려오면 신선봉에 神仙岩이 있고, 그아래 미사재가 있다.
「神仙岩」은 옛적에 신선들이 말을 타고 내려와 놀았다는 곳으로 지금도 바위에는 말발자국의 형상이 남아 있고, 이 바위에 오르면 맑은 날은 여수 앞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미사재는 옛날 서울서 순천을 왕래하는 길목으로 순천부사도 미초마을을 지나 미사재를 통하여 부임하였다고 한다.
마을 뒷산 「마당재」라는 곳이 있는데 그 옆에는 상투 모양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사람머리 상투처럼 생겼다하여 「상투바위」라 한다. 그 옆에 「쉰질바위」가 있으며 정혜사 뒤 1500m를 올라가보면 임진왜란 때 피난민이 살았다는 「피난바위」도 있다. 그 외의 산봉우리는 향노봉, 노적봉, 갓대봉, 바구리봉이 있으며 계곡으로는 영지 압곡(영지암골)이 있다.
[14-5] 深院마을
심원마을은 아을 터를 ‘와우혈’ 즉 ‘방혈’이라고도 한다. 마을 뒤 북쪽으로 50m지점에 가면 우물이 있다. 옛날에는 그 우물이 색깔이 있어 파랗게 흘러나와 원님들의 약수터로 사용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마을 앞 비롱시우쟁이골이 있는데 어느날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데 그곳에서 비를 타고 龍이 昇天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밖에 갈마음수골, 채골, 고장골, 천삽ㅁ박골, 칠부골, 안대미골 등 계곡이 있지만 그의 전설은 잘 알 수가 없다.
여수 반란 사건과 6.25동란 과정에는 산간마을이기 때문에 고통과 어려움을 많이 겪은 마을이 『청소리』라고 한다.
[15] 산장의 밤
여수 반란 사건과 6.25동란에 고통을 겪었던 청소리, 그러나 이제 평온을 되찾고 물이 맑고 신선한 자연을 벗 삼아 하룻밤 휴식을 갖기 위해 한배 산꾼들이 찾았다.
숯불을 피우고 이 고장의 맛인 장어와 왕새우, 맛살 등 해물을 철망에 가득 올리고, 이리 돌리고 저리 굴리며 알맞게 익힌다. 그 사이 대장도 도착했다. 어둠이 슬금슬금 청소골로 떨어지고 잎새주도 자리를 차지했다.
내일 산행 구간은 7월로 연기하고 순천 명승지 관광이다. 푸짐하게 준비한 싱싱한 장어와 새우에 맛살 구이로 잎새주 잔을 돌리며 山行談을 나누다보니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른다. 신선이 따로 있던가. 바로 이런 경우가 신선이 아닌가 싶다.
[16]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16-1] 자연생태공원
6월 28일 늦은(06 : 00시경) 시간에 기상하여 산장 주변을 산책하고 아침 식사. 어제 남긴 흔적을 말끔하게 치우고 산장을 나와 따로 볼일이 있는 장부장은 언니네 APT에 내려주고 우리는『순천만 습지』로 향했다.
10 : 00시경, 갈대의 땅,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인「장산 갯벌 관찰장(전남 순천시 대대동 162-2)」에 도착을 했다. 주차를 시키고 대나무로 만든 담장을 따라 잠시 진행하여 공원 입구로 들어서니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순천만 자연 생태관」이 바로 눈에 띈다. 이곳은 순천만을 대표하는 갯벌, 철새, 갈대 등 순천만의 다양한 생물에 관한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둔 곳으로 악생 및 일반인의 생태 학습장으로 이용되는 곳인데 관람 시간은 10 : 00 ~ 22 : 00시로 어린이 500원, 청소년 1,000원, 성인은 2,0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시간이 넉넉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대신 「갈대열차」승강장으로 이동을 했다.
짧은 시간에 한없이 넓은 갈대밭을 도보로 돌아보는 것이 무리고 생태공원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여 열차를 타고 가면 생태공원에 대한 안내를 밭기 위해 주행 거리 4.8km, 시속 15km, 왕복 60분이 소요되는 열차에 승차료 1,000원을 주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물길 둑을 따라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안내방송이 시작된다.
[16-2] 순천만(順天灣)
순천만에서 가장 인상 깊게 「갯벌이란 무엇인가」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생태공원이란다. 겨울에는 잠들어 짱뚱어가 잠들어 뛰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늦은 봄부터 여름이 되면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마치 개구리처럼 뛰는 짱뚱어와 그와 어울려 노는 게의 생생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며 갯벌 관찰장에 서 있으면 새들의 울음소리와 갈대가 바람에 스치는 정겨운 소리에 마치 자신이 자연 자체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며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허수아비 축제와 갈대의 속삭임과 풀벌레 소리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갈대제」가 이곳에서 펼쳐진단다.
『순천만(順天灣)』은 순천시를 중심으로 동쪽의 여수반도와 서쪽의 고흥반도로 둘러싸인 호수 같은 만으로.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으며 크고 작은 성과 주변의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서해안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지역이다.
간조기에 드러나는 갯벌의 면적만 해도 총면적이 12㎢에 달하며, 갯벌의 전체 면적은 21.6㎢난 된다. 또한 순천의 동천과 이사천의 합류 지점으로부터 순천만의 갯벌 앞부분까지에는 총면적 5.4㎢에 달하는 거대한 갈대 군락이 펼쳐져 있다.
자그마치 5,000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진 순천만은 동천과 이사천의 합류지점으로부터 순천만의 갯벌 앞부분까지 전개되는 갈대군락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으로 가을 무렵 갈대꽃이 피고 칠면초가 붉은 빛을 띠며 흰색의 철새가 날아오르는 광견은 가히 장관이라고 하며 특히 오염원이 적어 잘 발달된 갯벌과 염습지, 갈대군락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질 좋은 수산물이 풍부하고, 천연기념물 제22호인 흑두루미를 비롯하여 검은머리갈매기, 황새, 저어새, 노란부리백로 등 국제적 희귀 조류 200여 종이 월동 및 서식하는 전 세계 습지 중 희귀 조류가 많은 지역으로, 자연관찰과 탐조를 위한 자연학습장과 국제적 학술 연구의 장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6년 1월 20일 연안습지로는 전국 최초로 「람사협약」에 등록이 되었다고 한다.
안내 방송을 들으며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살펴보다보니 어느새 下車 시간이다.
[16-3] 갈대의 땅
「용산 전망대」에 올라 S자로 흐르는 물길과 갈대 습지를 조망하고 가라는 안내방송을 끝으로 하차를 해 「무진교」를 건너 갈대 숲속을 살펴보았다. 갯벌 흙을 잔뜩 바르고 뙤약볕에 일광욕을 즐기는 짱뚱어, 판자 길 삐걱대는 소리에 놀라 굴속으로 잽싸게 숨어버리는 방게와 농게, 그리고 작은 생명들이 수없이 살아 움직인다.
소설 '무진기행'의 무대가 됐던, 15만평의 광활한 갈대밭을 이룬 순천만은 부영양화 원인물질을 40%까지 제거하는 천연 하수 종말 처리장.
생태계를 살아있게 하는 갈대밭과 염습지, 수많은 갯벌생물들의 활동으로 흙이 썩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공간
전 세계에서 만 마리 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 흑두루미의 한국 內 마지막 월동지 순천만.
순천만 갈대숲은 인간의 간섭으로 점점 그 서식처를 잃어가는 생명들의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산행을 접고 순천만 갈대숲을 돌아본 것은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또 하나의 큰 수확이 아니었나 싶다.
[16-4] 갈대숲에는 도요새가 산다.
저기 보라
빛 기진개 너머 갈대숲을 보라
황금 솜꽃술 흔들며
두런두런 무어라 하는지
누군가 그리운 이름 부르는지
가슴을 열고 들어보라
저기 갈대숲길 돌아
갯물 밀물져 들어오는 물목에
깨금질 치며 이 집 저 집 바쁘게 드나드는
넙적개들을 보아라
찔룩찔룩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군가 보고픈 얼굴 왔다고
고샅길 매구치며
얼씨구 신명내는 녀석들
어이 어이 참 좋은 놈
눈부신 아침 햇살보다 더 좋은 놈들
저 멀리
북간도에서
압록강에서
더 멀리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수만 km를 단숨에 날아
여기 순천만 대대포구에 왔다고
저리 좋아 큰 뿔테안경 쓴 채
물텀벙을 치는
알록짱둥이 놈을 보아라
흑두루미 재두루미 저어새, 도요새,
검은머리갈매기가 왔다고
얼쑤 얼쑤 어깨춤을 추다
몸 뒤집어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참숭어떼를 보아라
그래 저 아침 햇살 눈부신 갈대숲에
그리운 이름들이 숨어 있구나
넘적게 짱둥이 댕기물떼새 참숭어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어 저 멀리서
수만 km를 날아 흑두루미 재두루미가 날아오는구나
저 아침 햇살 쏟아지는
황금 갈대숲에 새 생명이 꿈질꿈질 살아있구나
도요새 저어새가 날아와 사는 개펄 위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생명이 넘쳐나는구나
이제 갈대숲을 그대로 두라
내 사랑하는 사람과 거닐던 강둑길
그리운 사람 그리워
내 깊은 정 띄워 보낸 밤바다
뿌리 깊은 갈대숲을 그대로 두라
거기에 그대 사랑이 그대 그리움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아
갈대숲은 그대로 두라
숲 속에 도요새가 살고
덤불해오라기가 살고
알록짱둥이가
사람들과 더불어 대대로 살아가리라
따수운 밥 한 술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아
사람들 살리는 갈대숲을 있는
그대로 그대로 두라.
나종영의 '갈대숲에는 도요새가 산다'
[17] 순천만의 별미 짱뚱어탕
『순천만 자연생태공원』관람을 끝내고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행복해지는 음식’ 순천만의 별미 짱뚱어탕을 맛을 보기 위해 장부장의 소개를 받은 순천시 별량면 학산리에 있는 「전망대 가든(683-3번지, ☎061-742-9496, H.P 011-625-9496, 대표 이의운)」을 찾았다.
점심시간이고 입소문이 난 때문인지 자리 차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많고 종업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우리도 순천만이 훤히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짱뚱어탕(8,000원)과 서대회무침(小 25,000원 / 대 30,000원)에 잎새주 하나를 시켰다. 잠시 후 饌과 주문한 음식을 내 온다. 우선 잎새주 한잔에 서대회무침으로 입맛을 돋우고 뚝배기에서 팔팔 끓고 있는 짱뚱어탕에 밥 한 공기를 말아 입속에 넣으니 얼큰하고 구수한 맛에 수저를 놓지 못한다. 입소문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
일명 잠퉁이로 불리는 짱뚱어는 10월 초에서 이듬해 4월까지 동면을 하는데 이처럼 잠퉁이에서 짱뚱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짱뚱어는 아가미와 폐로 호흡을 한다. 물이 빠진 갯벌을 누비고 다니며 영양을 섭취하며 청정갯벌에서 사는 짱뚱어는 햇볕을 많이 받고 자라 비린내가 없다고 하며 훌치기낚시로 잡는다.
구수한 맛을 내는 탕은 삶은 짱뚱어를 채반에 담아 살살 비벼 뼈를 발라낸 다음 된장에다 고추 다진 것과 갖은양념을 넣어 간이 배어 든 시래기에 갖은양념을 넣고 센 불에서 끓이는데 이 때 매운 고추와 방앗잎을 넣는다. 방앗잎은 짱뚱어의 잡맛을 없애준다고 하며 입맛에 따라 젠피를 넣어 먹으면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순천만을 옆에 끼고 시원한 바람을 쐬며 서대회무침에 밥 한 사발 비비고 잎새주 한 잔 나누며 순천만의 별미 짱뚱어탕에 밥 한 공기를 뚝딱 해 치우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조르던 배도 넉넉하기 한량없다.
[18] 아쉬움이 자꾸 남는다.
비를 빙자하고 집안 정리, 음식 장만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송치재에서 산행을 접고 대장만 나홀로 완주를 하게한 호남정맥 22구간 산행이었지만 그 어느 구간 산행 때보다 기억에 남을 산행이 아니었나 싶다.
오전 4시간 산행에 몸속 노패물 걸러내고 천년 고찰 정혜사에 들려 불심으로 백팔번뇌 걷어내니 하루해가 저물었다. 산자수명 청소골 장부장 가족 산장 마당에 벌겋게 숯불 피우고 석쇠에 장어, 새우, 맛살 올려 앞뒤로 뒤집어 알맞게 구어 내니 잎새주 한 병이 금방 동이 나고 권커니 잡거니 밤 깊어가는 줄 몰랐던 산행 뒤 풀이었다.
산행 없는 다음 날 千載一遇로 얻은 좋은 날, 갈대의 땅, 순천만 기행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짱뚱어가 갯벌에 일광욕 즐기는 모습이며 농개, 방게 이집 저집 나들이하고 팔자걸음으로 먹이를 찾는 흑두루미, 재두루미, 저어새는 풍류를 아는 南道人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멀다. 어렵다. 힘들다.」하면서도 꾸역꾸역 참여한 호남정맥 산행도 세 구간을 남겨 도고 있다. 세 구간 산행이면 끝난다는 후련함 보다 아쉽고 허전한 것은 알게 모르게 쌓인 세월의 情 때문이리라.
2009.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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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기 읽으니 마치 함께 간 듯 구간 구간이 눈에 보입니다. 허나 함께 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걸 어쩌는 수가 없습니다. 이것 저것 맛기행까지... 산행하면서 흘리던 땀방울과 다리의 묵직함, 동료들의 애정이 새삼 그립습니다. 조만간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삼산중학교. 이수중학교가 그래서 붙은 이름인가보군요. 그리고 동천...동천에 가면 있던 장대다리... 소련재의 유래...이제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