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소식]
불기 2550(2006)년 9월 13일 BBS 불교방송 홍승기 신임사장 예방
불기 2550(2006)년 9월 12일
각 지역 포교사단 단장(6개지역 20명), 8재계 실천 수계 대법회 후 총무원장 지관 스님 예방
[종단 소식]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현등사 사리 친견법회 개최
현등사 사리 반환운동 시작
조계종 현등사 사리 제자리찾기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9월 26일(화) 오후 2시, 한남동에 위치한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스님과 신도 등 약 1천 여명이 참여하여 현등사 사리의 조속한 반환을 기원하는 ‘현등사 사리 친견법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19일 개최되는 교구본사주지회의와 관람료사찰주지회의를 통해서 조계종의 법통을 부정한 사법부에 대한 항의와 현등사 사리의 반환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성명서를 채택할 예정이다.
1980년경 도난 된 현등사 사리, 삼성에서 매입
일반적으로 사리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끊임없는 정진과 수행의 공덕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불가에서는 공경과 예배의 대상으로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성물(聖物)이다.
현등사 사리는 1470년 현등사탑에 봉안되어 600여년 가까이 현등사의 역사와 함께 존속되어 왔으나 1980년경 전문 도굴범들에 의해 도난 된 것을 삼성문화재단에서 매입, 삼성 리움미술관에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에 비친 종교]
간화선 대중화 세미나 개최
간화선 대중화 세미나 개최
<연합뉴스 2006/9/13/수>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는 19일 오후 4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실에서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 그는 누구인가?' 를 주제로 제1회 간화선 대중화 세미나를 개최한다.
송나라 때 인물인 대혜종고 선사는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으로 전승돼 온 간화선의 제창자로, 이번 세미나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당시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해 간화선 수행과 현실과의 관계를 정리해보자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세미나에서는 서울대 변희욱 철학과 박사와 이덕진 창원대 교수가 각각 '대혜종고의 생애와 사상의 재조명', '간화선 정립의 대승경전적 배경-대혜의 '서장'을 중심으로' 를 주제로 각각 발제한다.
10월26일과 11월16일에도 '조계종 간화선 수행의 과제와 대안', '간화선의 사회화, 국제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2-3회 세미나가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간화선은 하나의 화두(話頭) 를 가지고 끊임없이 의심을 일으켜 결국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으로 화두의 종류만 '이뭣꼬' '마른 똥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 등 약 1천700개에 달한다.
스님들 사리 찾기 '실력행사' 방침
스님들 사리 찾기 '실력행사' 방침
<연합뉴스 2006/9/13/수>
리움미술관 내에서 '친견법회' 예정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경기 가평 소재 현등사 삼층석탑 사리구(舍利具)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그 현소유주인 삼성문화재단과 원래 소유주라고 주장하는 대한불교조계종 현등사의 공방이 자칫 물리적 충돌로 비화할 조짐이다.
현등사를 주축으로 구성된 조계종 종단 차원의 '사리 제자리 찾기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13일 "현등사 사리의 조속한 반환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26일 오후 2시 사리가 있는 한남동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약 1천여 명의 스님, 신도들과 함께 '친견법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추진위는 "사리는 유해의 일부로 사고파는 물건이 될 수 없음에도 삼성문화재단이 사리를 매매의 물건으로 취급, 불교의 성물을 모독하고 있다"며 항의성 친견 법회를 열게 된 취지를 설명했다.
총공사비 약 1천300억원을 들여 2004년 10월 개관한 리움미술관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도자기, 불화, 금속공예품, 서예 등 시대별 대표작과 국보, 보물 수십여 점이 전시돼 있는 곳.
따라서 미술관측이 경찰에 시설보호를 요청, 추진위의 '친견법회'를 입구에서 원천봉쇄할 경우 자칫 물리적 충돌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
조계종 관계자는 "미술관측이 경찰을 요청해 출입을 차단할 경우 다소 거친 행동이 나올 수도 있다"며 "그러나 물리적 충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리움미술관측은 "현재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관련 대책을 고심 중"이라며 "그러나 아직까지 스님들의 '친견법회'와 관련해 (추진위로부터) 어떤 내용도 전달받은 바는 없다"고 밝혔다.
현등사는 작년 "현등사 3층 석탑에 있어야 할 사리를 삼성문화재단이 보관하고 있다"며 재단에 대해 사리 반환 청구소송을 법원에 냈으나 법원이 7월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삼성문화재단의 손을 들어주자 최근 항소했다.
사리는 현재 리움미술관 수장고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출범
조선왕실의궤 환수위원회 출범
<연합뉴스 2006/9/13/수>
日궁내청 소장 '명성황후국상도감의궤' 등 반환 추진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공동의장 정념 월정사 주지ㆍ철안 봉선사 주지)는 14일 출범식을 갖고 조선왕실의 주요 의식과 행정처리 등을 기록한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공식 추진한다.
이들은 이날 오전 경복궁에서 출범식을 갖고 일본대사관을 항의 방문, 일본 정부와 왕실 관계자에게 조선왕실의궤 반환요청서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환수위 간사인 혜문스님은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 과정에서 오대산 사고에 보관돼 있던 다른 문서의 행방을 조사하던 중 '일본 궁내청 서릉부 왕실도서관'에 '명성황후 국상도감의궤' '보인소의궤'등 조선왕실의궤 72종이 소장돼 있음 확인했다"면서 "25일 일본 궁내청을 방문해 조선왕실의궤를 직접 열람하겠다는 의사를 일본에 이미 전달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는 일본인에게 시해된 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2년 2개월간 유례없이 복잡하게 진행됐던 명성황후 장례에 대한 기록이고, '보인소의궤'는 고종 13년(1876) 경복궁 교태전의 화재로 옥새가 소실되자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서 옥새를 새로 제작한 사실을 기록한 종합보고서다.
이 의궤들은 대정 11년(1922) 조선총독부가 일본 황실에 기증한 것으로 이 같은 사실은 2001년 해외전적문화재연구회(회장 천혜봉 교수)의 조사로 밝혀져 국내 학계에 알려진 바 있다.
'조선왕실의궤'는 왕실 의식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로 정부는 3월 유네스코에 '조선왕실의궤'의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동정] 현각 스님 조계사 영어법회
[동정] 현각 스님 조계사 영어법회
<연합뉴스 2006/9/13/수>
▲현각(玄覺·화계사 국제선원장) 스님은 18일 오후 7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조계종 국제포교사회(회장 김봉래)의 초청을 받아 영어법회를 연다.
미국 출신 현각 스님은 베스트셀러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연합뉴스)
[동정] 홍승기 BBS 불교방송 사장
[동정] 홍승기 BBS 불교방송 사장
<연합뉴스 2006/9/12/화>
▲홍승기 BBS 불교방송 사장은 12일 오전 6시40분 불교방송 이사장 도후 스님과 함께 합천 해인사를 방문해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친견했다.
(서울=연합뉴스)
[작가 임동헌의 우리땅 우리숨결]양평 수종사·아프리카 빌리지
[작가 임동헌의 우리땅 우리숨결]양평 수종사·아프리카 빌리지
<세계일보 2006/9/14/목/기획25면>
|
미력한 인간 해탈을 꿈꾸다
|
|
|
말들이 참 많은 세상이다. 그러니 숨이 턱에 닿도록 가파른 길과 계단을 올라 절집 앞에 다다르는 순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나무에 걸린 묵언(默言) 팻말이다. 영화 ‘달마야 서울 가자’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대봉 스님 역의 이문식은 묵언 수행 중이라 로또복권이 당첨된 사실을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야 했는데, 그걸 해석해야 하는 또 다른 스님네들이 좌충우돌하던 모습은 시쳇말로 ‘대략난감’이었다.
서울로 진출한 스님들에게 묵언이 병이었듯이 도회지 사람들에게도 묵언은 병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수종사에서는 묵언하란다. 부처께서는 산자락에 앉아서도 세상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경내로 들어서 입을 닫고 대웅전 안을 기웃거린다. 회색 양말에 흰 면티 차림의 처자 한 명이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맨 모습으로 부처를 향해 열심히 백팔배를 올리고 있다. 선풍기 두 대가 돌고 있지만 바람개비의 방향은 외람되게도 부처를 등지고 있다. 대웅전 부처께서는 더위를 타지 않으시는가, 묵언을 강요받은 불신자는 불자를 위해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방향을 놓고 짓궂은 반문을 던진다. 카메라 셔터 소리에 백팔배를 올리던 처자가 힐끗 고개를 돌려 매서운 눈초리를 던진다. 불신자는 얼른 카메라를 거두고 대웅전 댓돌 아래로 내려선다. 죄송합니다, 하고 싶지만 불신자는 지금 묵언 중이다.
수종사는 기원으로 치면 1458년 세조가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두물머리에서 하룻밤 유숙한 뒤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오는 경험을 한 뒤 짓게 했다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것은 다산 정약용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와 함께 차를 마시며 교유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말년의 정약용이 수종사까지 오르려면 꽤 고생스러워했겠다는 생각을 거느리며 대웅전을 뒤로하고 나면 진경이 펼쳐진다. 까마득한 저 아래, 들판과 물과 다리가 어우러진 양수리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잡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알겠다. 한 처자가 다실(茶室) 옆 댓돌에 앉아 산 아래쪽으로 하염없는 눈길을 던지고 있던 까닭을. 그 처자는 절집 아래의 풍광에 말을 빼앗기고 도리 없이 묵언 중이었던 것이다.
|
◇모름지기, 말을 줄일 것. 가능하다면 묵언에 가까운 삶을 살 것. 그러고도 삶이 힘겨우면 기도하는 시간을 늘릴 것. 수종사가 하는 말이다. |
|
◇수종사 다실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 전경. 다리는 땅과 땅을 잇지만 사람은 그 다리를 건너 사람을 만난다. |
부처 말씀을 확대 해석하면 ‘세상 모두가 내 손바닥 안에 있다’가 되지만, 수종사는 거짓말 보태서 손바닥만하다. 그러니 해우소와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해탈문 사이의 거리는 스무 걸음 남짓에 불과하다. 짐짓, 해우라고 하지만 그거야 똥 오줌 해결하는 것이고, 해탈은 세상만사를 초월하는 것이니 어깨를 견줄 수 없는 것인데, 막상 해우소에서 급한 볼일을 마치고 이내 해탈문 앞에 서면 왠지 겸연쩍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방금 전까지 동동거리며 해우소를 찾았던 사람이 세상만사 초탈해 보겠다고 해탈문으로 들어서게 되니 소가 웃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텐가. 절집 터가 워낙 좁으니 해우와 해탈이 지척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은 미력한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다.
겸연쩍음을 혼자 감당해 보려고 해우소와 해탈문 사이의 은행나무 아래에 궁둥이를 얹는다. 수령 525년, 높이 39m, 둘레 7m란다. 1100년의 용문사 은행나무 나이에는 못 미쳐도 높이 41m에 버금가니 잠시 의구심이 솟는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용문사보더 더 유명짜한데 수종사 은행나무는 왜 수종사보다 유명하지 않은가. ‘묵언’을 받아들고 내려간 사람들이 종내 입을 닫아 버렸기 때문인가. 그러하든 그렇지 않든, 지금 수종사 은행나무는 해우소와 해탈문을 번갈아 지나는 사람들을 조용히 굽어보고 있는 중이다. 해탈을 하면 뭣하는가, 해우까지 초탈할 수 없는 법이거늘. 은행나무 잎이 흔들거리며 넉장거리를 하는 듯하다.
수종사를 내려오다 보니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자꾸만 언덕길에서 뒷걸음질치고 있다. 가파른 경사를 탄력 있게 치고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타이어는 헛바퀴를 돌고, 땀으로 얼룩진 운전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하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의 아내가 소리친다.
“여보, 그냥 돌아가요. 이러다 사고나겠어요.”
아무렴, 해탈문과 해우소에 들어서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묵언 팻말을 보는 것이 쉬운 일인가. 도리 없이 차를 돌려세우는 승용차 운전자를 보니 슬며시 짓궂은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럼, 수종사 해탈문에 들어서는 것은 배기량 순서가 아니지.
|
◇아프리카 빌리지가 늦여름을 보내고 있는 풍경. 모두 떠났지만 여전히 아프리카 움집의 정감이 살아 있다. |
수종사에서 내려와 대성리 가는 길을 가다가 문득 조안면 삼봉리의 아프리카 빌리지를 떠올린다. 예전에는 얼룩말 무늬를 한 ‘아프리카 빌리지’ 입간판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외할머니 식당 간판이 번듯하게 서 있다. 아프리카 빌리지는 2002년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움집, 조각품 전시와 함께 아프리카 전통공연을 펼쳐 인기를 끌었던 곳인데 운영자와 공연자들 사이에 임금 분쟁이 생겨 문을 닫았다. 하지만 여전히 산마을 아래에는 여러 채의 아프리카 원주민 움집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아프리카 평원을 담은 벽화도 여전하다.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번잡한 대신 오히려 적막한 아프리카의 평원 모습을 연출하고 있으니 그 또한 마음 설레는 풍경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아프리카 빌리지의 연못에는 손바닥만한 수련 잎들이 떠 있고, 벽화 속에서일망정 기린과 얼룩말들이 뛰놀고 있다. 움집 지붕에는 여름 식물 넝쿨이 유유자적 늦여름 땡볕을 즐기고 있다. 연못과 움집 사이를 맴돌다가 움집 뒤편의 오솔길에 들어서니 그 한켠에 국도변에 서 있던 표지판이 처박혀 있는 게 보인다. 조각품이 전시되고, 공연이 열릴 때는 둥둥둥, 운길산 자락 아래를 온통 북소리로 멍멍하게 했던 자리라고 믿기지 않는 흔적이다. 그때는 운길산이 킬리만자로로 불리기도 했지만 모든 영화는 영속적이지 않는 법, 공연자도 떠나고 조각품도 철거된 아프리카 빌리지는 공허함 그대로도 충분히 멋스럽다.
그런데 웬일일까. 예전에는 사람들이 움집 안에 모여앉아 화투장을 내려치곤 했었는데 모두들 더위를 피해 강으로 바다로 떠난 듯 지금은 그런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위도 때가 되면 제풀에 지치는 법, 인적 없는 아프리카 빌리지에서 가을볕을 기다려 보는 것도 나름의 행복이다.
소설가 |
절이 왜 저잣거리로 나왔을까
절이 왜 저잣거리로 나왔을까
<서울신문 2006/9/14/목/종교문화재26면>
은평구 역촌시장 태고종 ‘열린 선원’ |
서울 은평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은 쌀집이며 방앗간, 채소가게, 어물전 등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재래시장. 그런데 이 시장 한쪽 3층짜리 건물 2층에는 ‘열린선원’이란 독특한 절집이 들어서 있다. 지난해 6월 태고종 사회부장 법현(48) 스님이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저잣거리 포교’의 원력을 세워 문을 연 선원. 처음에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 “절 집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무성했지만 차츰 입소문이 번지면서 신도 수가 200여명을 넘어섰다.
‘열린 절’로 통하는 이곳은 아무래도 보통 절집이나 선원과는 사뭇 다르다.60평짜리 법당과 공양간, 요사채를 합쳐 모두 10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찾아드는 신도들의 절에 대한 애정과 신심은 예사롭지가 않다.
‘열린 선원’은 원래 조계종 적문 스님이 전통사찰음식문화연구소를 운영했던 자리. 적문 스님이 평택 수도사 주지로 옮기면서 법현 스님이 참선 포교당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러면 법현 스님은 왜 이곳 저잣거리로 절을 들여왔을까.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 10단계 중 마지막인 입전수수(入廛垂手). 바로 시장거리에 들어가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정신이다. 시장 상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전단과 책자들을 나눠주는 등 발품을 판 때문인지 지금은 시장 상인과 손님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찾아드는 신자가 늘고 있다.
지난해 선원 개원 때부터 매주 빠짐없이 선원을 찾고 있다는 김판수(67·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4동)씨는 “불교의 원 정신과는 한참 동떨어진 채 원형을 잃어가는 요즘 절집들과는 달리 우리 문화의 원형질을 순박하고 진솔하게 찾을 수 있는 분위기가 참신하다.”고 말했다.‘차례상에 술 대신 차 올리기 운동’이나 어린이 생태체험도 대중적인 인기를 더한 프로그램들이다.
‘열린 선원’이란 이름답게 선원의 운영은 비단 불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인근 교회의 목사를 초청해 설교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법현 스님이 교회에 가서 설법을 하기도 한다.‘쉽고 유익하고 재미있는 불교’를 표방하는 선원답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제대로 된 참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3∼6개월 과정의 불교아카데미 코스는 제법 엄격하다. 지금까지 4기에 걸친 아카데미를 거쳐 나간 신자만 해도 80여명. 참선도 간화선뿐만 아니라 묵조선이나 위파사나를 연결해 다양한 이론과 실제를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법현 스님은 “일반인들에게 참선이 널리 번지고 있지만 어렵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며 “기본교리와 수행론을 터득한 뒤 참선을 하면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 말마따나 선원은 3∼6개월 과정의 기본 교육을 거쳐 삼귀의와 오계를 받은 사람만 신도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우리의 불교 포교는 용어도 어렵고 친절하지 못한 측면이 많아 신자이면서도 불교를 잘 모르고 신앙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법현 스님.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효과적인 수행을 통해 평화와 깨달음을 얻도록 돕는 선교방편연구소를 설립할 원력을 세워놓고 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두 ‘거사’의 자유자재한 삶
두 ‘거사’의 자유자재한 삶
<한겨레 2006/9/14/목/종교&수행28면>
|
|
|
|
|
조연현 기자
|
|
|
≫ 〈소동파,선을 말하다〉와 〈방거사어록강설〉 |
| |
|
|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로서 선(禪)을 체득해 대자유의 삶을 누린 중국의 두 기인 소동파와 방(온)거사에 대한 책이 동시에 나왔다. 당송팔대가의 한명으로 대문호인 소동파는 선어록에 수록될 정도로 임제종의 선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도 자신을 ‘불교 재가자’를 일컫는 거사(居士)라고 했다. 방거사는 부처 당시 문수보살과 일합을 겨룬 유마거사를 빗대 중국의 유마거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화두선을 주창한 대혜 선사가 <서장>에서 “다만 온갖 있는 것들을 비우기를 원하고, 결코 없는 것들을 채우지는 말라”는 거사의 임종게(임종할 때 남긴 시)를 인용해 “다만 이 두 글귀만 알면 일생 참선하는 일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 극찬한 대선사다.
■ <소동파,선을 말하다> “다정이 바로 부처의 마음”
소동파는 문장·시·서예·회화·유학·요리 등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최고 수준의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그처럼 다재다능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좌천과 유배로 보냈다. 그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았으며, 결코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도 않고 자기연민에도 빠지지않은채 채 의연하게 살아갔다고 한다. 그가 척박한 유배지에서 낙천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세속적 가치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이 원동력이 됐다.
소동파가 남방의 유배지에서 돌아와 양선에 거주하려고 했으나 돈이 없었다. 이를 안 친구가 백방으로 노력해 집을 구해주었고, 소동파는 전재산을 집값으로 지불했다. 어느 날 소동파가 산책을 하는데, 길가의 어느 집에서 늙은 부인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늙은이는 불효자식이 대대로 내려온 집을 팔아버려서 자신의 거처조차 없어지자 울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소동파는 집계약서를 가져와 즉석에서 불태웠다. 그리고 지불한 집값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불교학자인 저자 스야후이는 “다정(多情)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는 시로 소동파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학문과 선에만 달통했던 게 아니라 동파육, 동파병 등 100가지에 달하는 요리까지 개발했던 대천재의 삶이 바람처럼 달빛처럼 살갗에 다가선다. 김영사 펴냄, 장연 옮김.
■ <방거사어록강설> “재물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방거사는 형양 태수의 아들이었는데, 과거를 보러가던 중 벼슬길에 오르는 것보다 부처가 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귀로에 올랐다. 그는 수만 수레에 이르는 집안의 재산을 배에 싣고 상강에 가져가 전부 물 속에 가라앉혀 버리고, 성 밖의 작은 집을 장만해 대바구니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전한다.
그가 재물을 던지려 할 때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든지, 불사에 쓰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방거사는 “내가 이미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버리면서 어찌 다른 사람에게 주랴, 재물은 심신을 괴롭히는 근원이다”며 단호히 물 속에 던져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중하게 여기지만/나는 순간의 고요함을 귀하게 여긴다/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고요함은 진여의 성품을 나타낸다.’
방거사의 게송엔 무소유의 성품이 드러난다. 또한 방거사 일가족이 열반하는 장면은 도인가족의 자유자재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방거사가 스스로 열반할 때가 됐음을 알고 딸 영조를 불러 자신이 열반할 것임을 전하고 “잠시 나가서 해의 높이를 보아 두어라, 오시가 되거든 알려다오”했다. 영조가 문 밖을 나서자마자 “잠깐 나와 보라”고 아버지를 불렀다. 방거사가 창가로 와 해를 살피는 도중 영조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채 그대로 몸을 벗어버렸다. 방거사는 이를 보고 “딸 녀석이 꽤 민첩하구나”라며 웃었다. 거사도 딸을 화장한 뒤 앉은 채 열반했고, 밭에서 일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은 그대로 서서 열반했다.
‘선우도량’ 공동대표와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혜담지상 스님이 방거사 사후 1200년을 2년 앞두고 선종 본래의 선풍을 되살려는 서원으로 이를 강설했다고 한다. 불광출판사 펴냄.
조연현 기자
|
장애인후원 걷기대회
장애인후원 걷기대회
<한겨레 2006/9/14/목/종교&수행28면>
|
16일 올림픽공원서 열려 |
|
|
|
조연현 기자
|
|
‘종교인평화봉사단’(이사장 백도웅 목사)은 16일 오후 1시30분부터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올림픽공원 88마당에서 ‘장애인 후원을 위한 이웃종교 한마음 걷기대회’를 연다.
걷기대회 참가비는 1천원이며, 이는 전액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를 구입하는 데 사용된다.
‘걷기’ 행사에 이어 가톨릭·성공회 수녀, 불교 비구니 스님, 원불교 여성 교무 등 여성수도자들의 모임인 삼소회원들의 노래 공연과 발달장애아로서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한 최준군의 판소리 공연이 이어진다.
조연현 기자
|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살라바아사나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살라바아사나
<서울신문 2006/9/14/목/WE13면>
|
살라바(Salabha)는 메뚜기이다. 이 자세는 메뚜기가 땅에 있을 때의 모습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슴과 다리를 들어 올려서 쭉 뻗으며 몸 전체를 신장시킨다.
1. 몸 앞쪽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발을 모은다. 발가락을 뒤로 뻗고 두 팔을 몸통 옆에 둔다(사진1).
2. 숨을 내쉬며, 머리, 가슴, 다리를 최대한 높이 동시에 들어올린다. 손과 늑골이 바닥에 닿아서는 안 되고, 복부의 앞부분만을 마루에 대고, 그 위에 체중을 싣는다.
3. 바닥과 평행하게 두 팔을 들어 뒤로 쭉 뻗는다. 엉덩이 근육을 수축시키고 천골을 아래로 누르며 넓적다리 근육을 쭉 뻗는다. 양 넓적다리, 무릎, 발목을 붙이고, 다리를 쭉 펴서 직선이 되게 한다. 정상 호흡을 하면서 이 자세를 유지한다(사진2).
4. 천천히 몸을 내린다.
5.(변형1) 위의 1번 자세에서 무릎을 굽히고 넓적다리를 서로 떨어지게 하는데, 이때 정강이는 바닥과 수직이다. 숨을 내쉬며 넓적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무릎이 맞닿을 때까지 밀착시킨다. 정강이는 계속해서 수직을 유지한다. 이 자세의 꾸준한 수련은 등 하부의 통증을 경감시켜 준다(사진3).
6.(변형2) 가슴을 바닥에 붙이고,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엎드린다. 팔로 머리를 감싼다.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고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사진4).
효과:소화를 도와 주고, 위장 장애와 가스를 제거해 준다. 척추의 탄력성을 증강시키고, 천골과 허리 부분의 통증을 제거해 주며, 이는 디스크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요가교실: 요가의 8단계 중 1단계 야마(Yama)가 윤리적 계율들을 다룬다면 제2단계에 해당하는 니야마(Niyama)는 개인적인 수행에 적용되는 행동 규율이다. 파탄잘리가 말하는 다섯 가지 니야마는,(1)사우차(Saucha, 신체의 청결),(2)산토사(Santosa, 만족),(3)타파스(Tapas, 고행),(4)스바드야야(Svadhyaya, 성전을 통한 자아 교육),(5)이스바라 프라니다나(Isvara pranidhana, 자재신, 이스바라에의 헌신)이다.
*요가 보조 기구(큰 베개, 벨트 등)는 대구 아헹가 요가 선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자료제공:대구 아헹가 요가 선원 |
‘황금도시-경주’전, 천년의 역사 풍광이 되다
‘황금도시-경주’전, 천년의 역사 풍광이 되다
<경향신문 2006/9/13/수/문화22면>
|
|
|
|
안석준의 ‘경주 남산 마애석가여래좌상’ |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신라 천년의 역사를 그린 작품을 모은 전시회가 지금 경주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지난 5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시작된 ‘천년의 황금도시-경주’전에서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인 경주의 유적지와 풍광을 담은 작품 10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석공들이 돌탑을 만드는 심정으로, 25명의 작가는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부지런히 경주를 드나들며 스케치북에 담고 이를 캔버스와 한지, 목판 위에 옮겨놓았다. 전시를 기획한 북촌미술관의 이승미 부관장은 “조선 중기 이후 경주를 그린 실경산수화는 단 두 점뿐”이라며 “현존하는 역사·도시·풍경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경주가 떠올랐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작가 25명 작품 100여점-
참여 작가의 3분의 2 이상이 한국화가들이다. 이열모, 김동수, 오용길, 박대성, 김대원, 안석준, 김천일, 문봉선, 이호신 등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국화단의 신진작가와 중진작가가 대거 참여했다. 김성호, 장태묵, 이종구, 이재삼, 김종수 등 서양화가들과 판화가 김억씨도 동참했다. 이부관장은 “한국화가 홀대받고 전시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인데, 한국적인 실경에는 한국화가 잘 맞는다는 생각에 한국화 작가들을 주로 섭외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김범석씨의 ‘오래된 미래-경주 남산’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장장 석달에 걸쳐 작업한 이 작품은 길이 10m의 대작으로 남산에서 바라본 경주 풍광을 호분(조개가루)을 바른 한지 위에 먹으로 그렸다. 먼 과거로 떠나는 느낌을 주고 싶어 호분을 재료로 택한 김씨는 “풍경이 갖고 있는 역사성과 시간성에 주목했다”.
캔버스 위에 압축목탄만을 사용해 대숲과 풀 등을 화폭 가득 빽빽하게 그려온 서양화가 이재삼씨는 달이 뜬 분황사 풍경을 그렸다. 작가는 “경주의 역사·유적과 작가가 갖고 있는 생각 사이에서 얼마나 시소를 잘 타느냐가 관건”이라며 분황사 모전석탑의 조형성과 형태감에 매료돼 이를 작품소재로 택했다.
-31일부터 서울 북촌미술관서-
|
장태묵의 ‘여백의 풍경-안압지’ |
낡은 책상과 비료포대, 밥상 위에 농민과 곡식 등을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온 이종구씨는 ‘공양’과 ‘헌화’라는 제목으로 석굴암과 부처를 그린 작품 4점을 내놨다. 그는 “석굴암 자체가 위대하고 완전한 미술품이어서 주제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고 창작의 고통을 토로했다. 고민의 결과 탄생한 ‘공양-석굴암’은 석굴암의 본존불을 중앙에 놓고 좌우에 금강역사상을 배치해 서양의 3단 제단화 양식을 취했다. 본존불 하단에 ‘마음으로 바치는 공양’이라는 뜻에서 설치한 볍씨와 팥, 녹두, 콩, 말린 꽃은 그간 작가가 탐구해온 이 땅의 생명이라는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밖에 경주 남산 삼릉골과 미륵곡, 대왕암, 서출지, 반월성터, 계림, 불국사, 감은사지, 영지 등 경주의 유적과 풍광을 나름의 시각으로 담아낸 작품들이 보는 이들의 눈을 흐뭇하게 한다. 관람을 전후해 작품 소재가 되는 경주의 유적지를 둘러보면 훨씬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이 전시는 28일까지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리고 30일부터는 서울로 자리를 옮겨 11월1일까지 전시된다. 그러나 협소한 공간 때문에 가회동 북촌미술관과 인사동 부남미술관에 나눠서 전시될 예정이다. 미술 작품 감상에서, 작품뿐 아니라 전시 공간구성 또한 관객의 체험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기획력과 작품성이 돋보이는 이 전시를 보다 넓은 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02)741-2296
〈윤민용기자 vista@kyunghyang.com〉
|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⑦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상'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⑦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상'
<세계일보 2006/9/13/수/기획26면>
|
고대 일본 최초의 초상화왕실 '비공개 御物' 보존
|
|
|
일본 최초의 스이코 여왕(推古 592∼628년) 시대를 꽃피운 백제 불교문화가 ‘아스카(飛鳥)문화’다. 이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또 하나의 백제인 문화유산이 있다. 일본 최초의 초상화인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唐形之御影)이 그것이다. 이 초상화는 세 인물이 칼을 허리에 차고 나란히 서 있는 그림으로, 가장 키 큰 쇼토쿠태자(574∼622년)가 가운데 서 있고, 어린 두 왕자가 양 옆에 서 있다. 불후의 명작으로 찬양받는 이 초상화는 현재 일본 왕실(도쿄 궁내청)에 보존되고 있는 비공개품이다.
서기 597년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년 재위)은 아좌(阿佐)태자를 왜 왕실로 보냈다(‘부상략기’, ‘일본서기’). 이 당시 왜 왕실에 건너가서 함께 지내던 아좌태자는 그림 솜씨가 뛰어나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의 전신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쇼토쿠태자와 스이코여왕 등 왕실에서는 모두 기뻐했다.
그런데 일본 학자 마유즈미 히로미치(黛弘道)는 “왕실의 그림인 ‘쇼토쿠태자상’은 아좌태자의 그림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실은 7세기 후반 이후의 작품이다”라고 부인했다. 그의 주장은 일찍이 동양학자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년)의 다음 같은 강연(日本の肖像畵と鎌倉時代史學地理學同攻會 1920년12월)의 주장을 뒤따르고 있다.
“일본 초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한 가장 유명한 것은 본래 호류지에 두었던 것으로, 현재 제실 어물(御物·왕궁 귀중물)인 당본어영(唐本の御影)이라는 ‘쇼토쿠태자상’이다. 그 상은 백제 아좌태자가 그렸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고, 다만 이 그림이 지나(중국)의 육조시대 초상화 화풍을 전하고 있음은 근년이 되어 여러 가지 재료의 발견으로 밝혀지게 되었다”(‘지나회화사’ 1930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부정했을 따름이며, 아좌태자의 그림이 아니라는 확증 제시는 없었다. 더구나 현재 일본 포털 사이트들도 나이토 고난의 글을 인용하고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다. 필자는 지금부터 20여년 전에 “서기 597년 백제 위덕왕 때의 아좌태자가 그린 고대 일본 최초의 인물화이다”라고 적힌 고문서(覺賢 ‘斑鳩古事便覽’)를 나라(奈良) 이카루가 터전 호류지(法隆寺) 사찰에서 발굴한 바 있다. 실제로 7세기 후반 이후에는 아좌태자의 친필 그림을 흉내 낸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 모사 그림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
◇쇼토쿠태자 효양상(17세 때 모습 목조상). 교토 고류지에 있는 중요문화재(왼쪽),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 현재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오늘의 일본 국보 불상이다. |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의 지폐에는 쇼토쿠태자 초상화의 얼굴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쇼토쿠태자의 초상화가 돈의 앞면에 그려진 ‘일본은행권’은 일본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17일 처음으로 발행되어 쇼토쿠태자를 기리게 되었다(大橋義春 ‘일본지폐대계도감’ 1967년). 이 지폐 뒷면에는 호류지 사찰의 ‘금당과 오중탑’이 도안으로 인쇄되어 있으며, 현재도 이 돈은 통용된다고 하나 좀처럼 구경하기는 어렵다.
백제왕자인 아좌태자가 구다라에서 왜나라 왕실에 건너온 시기는 때마침 아스카데라(법흥사)가 8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성대하게 준공(서기 596년 11월)된 그 이듬해 봄 4월의 일이었다. 스이코여왕은 아스카데라가 준공된 것을 매우 기뻐하며 이 사실을 모국 백제와 이웃 신라에까지도 알렸다.
쇼토쿠태자의 친고모인 스이코여왕은 사신 기시노이와카네(吉士磐金·길사반금)를 신라의 제26대 진평왕(579∼632년 재위)에게 보내 아스카데라 준공을 알렸다. 그 당시 진평왕은 축하의 뜻으로 까치 두 쌍을 기시노이와카네의 귀국 길에 보내주니, 스이코여왕은 기뻐하면서 까치를 구다라스(지금의 오사카부)의 나니와 땅 ‘구다라 사당’ 숲에다 풀어주었다. 그 후에 까치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깠다고 ‘일본서기’가 전하고 있다.
실은 신라에 갔던 왜나라 사신 기시노이와카네는 그 당시 나라 땅에 살고 있던 신라인 호족 가문 출신이었다. ‘길사’라는 것은 신라의 17관등 중 14번째 관등 벼슬이다. 왜나라에서도 ‘길사’ 관위의 벼슬아치 여러 사람이 역사 기록에 보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신라계 도래인들이었다. 스이코여왕은 왜나라에 사는 신라인 기시노이와카네를 사신으로 삼아 신라로 보냄으로써 나라 땅 아스카 왕실의 백제인 조정과 신라와의 친선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 신라의 진평왕은 왜나라 왕실로 녹나무 ‘보계(상투) 미륵보살반가사유상’(‘廣隆寺寺傳’)을 보내주었으며, 이는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오늘의 일본 국보 불상이다. 일명 ‘우는 미륵’이라는 애칭이 흥미롭게 붙어 있기도 하다.
지금 고류지에는 너무나도 이름난 신라 적송나무 불상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본국보 제1호·1951년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함)이 있다. 그 밖에 또 하나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호류지 경내의 주쿠지(中宮寺)에 봉안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은 모두 3체의 미륵불상을 서기 603년, 616년, 623년에 각기 아스카의 스이코여왕에게 보내어 신라의 미륵 불교를 왜 왕실에 포교했다.
한편 위덕왕은 아스카데라 준공 축하 사절로서 아좌태자 일행을 직접 스이코여왕에게 보냈다. 본래 아좌태자는 성왕의 제2왕자이며,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서기 538년에 백제의 성왕이 왜나라 아스카 땅에다 불교를 포고한 지 장장 58년 만에 드디어 나라 아스카 땅에는 백제의 7당가람이 우뚝우뚝 섰으니 이 어찌 경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웅장한 칠당가람을 짓도록 위덕왕은 서기 588년에 사찰 건축가 등 다수의 기술진과 승려들을 아스카에 파견했고, 드디어 그 눈부신 큰 열매로서 대가람이 준공된 것이다.
왜 왕실에 간 아좌태자는 쇼토쿠태자와 곧 친숙하게 되었으며, 타고난 그림 솜씨를 발휘해서 마침내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필을 들기에 이른 것이다. 그 초상화가 뒷날 일본 국보가 된 것임은 두말 할 나위 없고, 대대로 일본 왕실이 잘 보존하면서 오늘에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며 일본 초상화의 효시로도 꼽히는 ‘쇼토쿠태자와 두 왕자상’. 이것이 백제 아좌태자의 그림이냐 아니냐를 따져 묻기 위해선 당초 이 그림을 보존하고 있던 호류지 학승의 기록을 도외시할 수 없다고 본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다음주에 계속) |
신심 깨우는 종소리 세월 따라 그윽해지고
신심 깨우는 종소리 세월 따라 그윽해지고
<동아일보 2006/9/14/목/문화A23면>
‘종지기’ 김창근 할아버지가 경남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어구교회의 종을 울리고 있다. 병색이 엿보이는 얼굴이지만 종지기로서의 소명의식만큼은 철저하다. 사진 제공 어구교회 김필주 목사 |
|
‘뎅∼뎅∼뎅∼.’
오전 4시 반. 여명을 깨우는 교회 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부드럽게 포구를 감싼다. 마을을 돌아나온 종소리는 이내 남해바다를 건너 갯내음을 타고 이순신의 섬 한산도까지 뻗어 나간다. 한산도까지는 뱃길로 15분.
바닷가를 따라 70여 호가 옹기종기 몰려 있는 작은 포구 경남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바로 ‘종지기 할아버지’ 김창근(90·은퇴 집사) 옹. 1967년 마을에 어구교회가 들어선 지 39년. 교회를 거쳐간 목사는 10명이 넘지만 종지기만큼은 늘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여기서 문제 하나. 할아버지는 과연 몇 번의 종을 칠까요? 정답은 “할아버지가 50번이라고 생각하는 만큼”이다. 이전에는 매일 정확히 50차례씩 종을 쳤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귀가 어두워지면서 요즘은 70번, 100번을 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없다. 270여 명의 주민 중 교인은 3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교회 종소리만큼은 이미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시계 하나 변변히 없던 가난했던 시절. 보릿고개 넘기기도 힘겨웠던 주민들에게 새벽 종소리는 논밭일의 시작과 출어(出漁)를 알리는 하루의 출발선이었다.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다. 2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함께 살자는 자식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고향, 아니 종탑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몇 해 전 위절제수술을 받았고, 신장이 좋지 않아 아침이면 다리가 더욱 불편하다. 오전 4시 전 잠을 깬 할아버지는 힘이 빠져나간 다리를 주물러 원기를 불러 모은 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집을 나선다. 1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교회지만 할아버지의 지난했던 인생길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진다. 빨간 벽돌로 지은 아담한 어구교회는 입구에 계단이 있다. 그것이 종탑에 이르는 마지막 고비다. 겨울에는 몇 차례 넘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절대 종지기직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지 않았다. “이제 그만 쉬시지요” 하는 권유에도 “내가 살아봐야 얼마 더 살겠어? 기력이 있을 때까지 종을 칠 거야”라며 손사래를 친다.
할아버지는 어구교회의 창립 멤버다. 1967년 그때 할아버지는 종 대신 산소통을 소나무에 매달아 두들겼다. 1999년 새 교회를 지었을 때 종을 철거하려 했으나 할아버지가 자식들이 준 쌈짓돈 70만 원을 내놔 오히려 종탑까지 세웠다.
요즘에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할아버지의 건강 때문이다. 종소리가 없는 날은 주민들이 할아버지를 걱정한다. 그날은 어구교회 김필주 목사가 할아버지 댁을 찾는 날이다.
할아버지가 치는 동그랗던 추는 지금 납작해져 있다. 오랜 세월의 마모로 닳아 버린 종추에는 그의 신심(信心)과 소명의식이 녹아 있다. “종치는 것? 나 개인의 욕심이 아니야. 종소리를 들으면서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우리나라가 잘 살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종을 치는 거야.”
할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종은 머지않아 할아버지와 함께 수명을 다할 것이다. 그를 이을 ‘후계자’도 없다. 하지만 훗날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드렸던 종소리를 주민들은 ‘천국의 소리’로 기억할지 모른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드라마로 부활한 ‘인간 김대건’
드라마로 부활한 ‘인간 김대건’
<동아일보 2006/9/14/목/문화A23면>
평화방송TV,순교160주년 특집
평화방송TV의 3부작 드라마 ‘성 김대건’의 한 장면. 사진 제공 서울대교구 |
|
9월은 가톨릭의 ‘순교자 성월’이다.
특히 올해는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한국의 첫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가톨릭은 순교일인 16일을 중심으로 전국 각 교구에서 현양미사와 도보성지 순례, 학술 발표회 등 대대적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평화방송TV가 마련한 ‘특별기획드라마-성 김대건’ 3부작(각 60분)이다. 케이블 TV로서는 최초로 제작한 사극이다. 영웅적 순교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고뇌하는 ‘인간 김대건’을 집중 조명했다는 점에서 화제를 낳고 있다. 김 신부 역은 탤런트 박형재 씨가 맡았고 심양홍 김지영 임현식 장정국 씨 등 중견 연기자들이 합류했다. 14∼16일 오전 8시, 오후 3시, 오후 10시 세 차례 방영된다.
또 순교자선양회는 2일 가톨릭순교 사적지인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성지에서 출발해 한강 둑길을 거쳐 김 신부가 순교한 서울 용산구 이촌동 새남터성당까지 총 7.5km 구간을 걷는 도보순례 행사를 했다. 새남터성당은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이달 초 ‘새남터 기념관’도 완공했다.
105평 규모의 전시실에는 김 신부의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박해 체험공간 등이 있고, 성인 103인의 성화(聖畵)를 전시해 놨다. 새남터성당은 신유박해(1801년) 때 한국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 밖에 서울대교구는 9월 한 달을 ‘순교적 삶과 생명문화 창조를 위한 대축제’로 보내고 있고, 청주교구는 20일 배티성지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해 최양업 신부 탄생 185주년을 기념한다. 인천교구는 26일 강화도 갑곶순교성지에서 제3회 인천교구 순교자현양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사랑과 자비]우리 삶, 무의미한 순간은 없다
[사랑과 자비]우리 삶, 무의미한 순간은 없다
<동아일보 2006/9/14/목/문화A23면>
사치할 여유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은혜일 때가 있다. 풍요를 복으로 여기는 요즘 시대에 이 말에 동감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얼마 전 미국에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삶을 추적해 보았더니 갑자기 생긴 부와 여유 때문에 대부분 불행해졌다는 결과가 보도된 적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사치할 여유가 없는 것은 분명 복이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사치할 여유가 없는 시기에 나를 통해 뭔가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괴로운 시간을 만난다. 이러한 시간은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구체적으로 다루어 가신다. 우리가 삶에 대해 한탄하고 절망할지라도 그 시간은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된다.
성경에 보면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넣고 죽이려 했던 형들의 이야기가 있다. 후에 형들이 요셉과 만났을 때 그들은 아주 많이 변해 있었다. 형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서로 우애하고,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형들이 이렇게 변하게 되었을까?
요셉을 애굽에 판 이후 형들은 매일 아버지 앞에서 절망과 죄책감, 한숨과 눈물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좌절의 시간이 그들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인생, 어느 순간이라도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 극적인 화해만 있을 뿐이다. 결국 요셉은 고난의 수레바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보았던 것이다.
송태근 목사 강남교회
가난하지만 행복한 미소 나누었죠
가난하지만 행복한 미소 나누었죠
<한겨레 2006/9/14/목/종교&수행28면>
|
|
|
|
|
조연현 기자
|
|
|
≫ 성공회 사제는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김 신부는 독신이다. 사진을 찍으며 “혹 실연당했기 때문 아니냐”고 묻자 김 신부가 쑥스러운 듯 웃고 있다. 김 신부는 빈민촌에 들어간 뒤 독신 사제의 삶을 살기로 했다. |
| |
|
|
20년전 ‘나눔의 집’ 일군 김홍일 신부 /
“상계동에 90년대부터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임대아파트에 비해 민영아파트는 놀이터 시설도 좋았지요. 그래서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민영아파트 놀이터까지 놀러가곤 했는데, 민영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아저씨를 시켜 임대아파트 아이들을 쫓아내게 했지요.”
20년 전 서울 상계동 판자촌에서 ‘나눔의집’의 씨앗을 뿌렸던 김홍일(46)신부의 회고 속엔 가난한 아이들을 가난보다 더욱 더 아프게 하는 박대와 단절에 대한 슬픔이 진하게 묻어난다.
“동사무소의 사회복지요원들도 약자들에게 임대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을 별로 권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주거 여건은 조금 나아질지 모르지만 사회적 배제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아는 때문이겠지요.”
가난보다 아픈 건 박대와 단절 86년 상계동 판자촌 들어가 마을문고·탁아소·야학 등 운영 빈자·약자도 똑같이 존엄,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 꿈꿔…
김 신부가 연세대 신학과에 재학하던 86년부터 상계동 판자촌에 들어가 2002년까지 나눔의집에서 삶을 나누고 싶은 이들은 사람들이 가끔씩 동정하면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기를 원치않고 따돌려 더욱 마음이 아픈 아이들과 약자들이었다.
그런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는 가진 것이 없어도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을 보았다. 맞벌이 하느라 늦은 부모를 기다리며 밤늦게까지 놀 곳 없이 떠돌던 아이들이 나눔의집 마을문고에서 책을 보면서 짓는 행복한 미소를 보았고, 온종일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밤에 야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너무나 행복해 하는 야학생들을 보았다. 자기 방 하나 없이 살아오다 자기 방에 생겼다며 너무도 행복해하는 여고생도 보았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나눔의집 간사가 되고, 다른 아이들을 돕게 되었을 때는 김 신부도 더욱 더 행복해졌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 ‘실과 바늘’이라는 생산자조합을 만들어 자활을 모색해가고,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입주자회를 조직해 방과후공부방을 만들어 스스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삶의 보람을 느꼈다.
“신학적으로 빈곤은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음으로서 생겨난 것이지요.”
김 신부가 나누고자하는 것은 물질 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가 바라는 것은 빈자와 약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존엄한 인간이며,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진 같은 인간임을 분명히 아는 인식에 바탕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7개 나눔의집에서 이런 삶에 동참하는 실무자만도 무려 120명이다. 김 신부는 올해 설립된 나눔의집 교육훈련센터 소장을 맡아 이런 실무자들과 봉사자들에게 나눔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조연현 기자
|
‘나눔의 집’ 20돌…
판자촌 작은 전세방서 시작 지금은 수도권 7곳에 둥지
|
≫ 공부방 아이들의 야외 나들이. 나눔의 집 제공 |
| |
|
| 20여년 전까지 서울 상계동 일대는 빈민촌이었다. 청계촌 일대가 재개발될 당시 빈민들을 강제로 차에 태워 짐짝 부리듯 부려놓아 빈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모여 살고 있었다. 의식주마저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서 소외에 더욱 더 아파하던 곳이었다. 20년 전 이 지역을 찾은 청년들이 있었다. 김홍일, 송경용 등 성공회 성당에 다니는 신학생 등이었다. 6개월 간 예수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공부모임을 해오던 이들이 공부를 실천할 현장에 온 것이다. 1986년 9월이었다.
그 때만해도 빈민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반정부 투쟁쯤으로 여겨 사시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성공회 지도자였던 김성수 주교(현 성공회대총장)와 교무국장이던 박경조 신부(현 성공회주교)는 청년들의 순수한 열정에 가장 큰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6개월 간 현지 상황을 살핀 청년들은 1987년 3월 판자촌의 작은 전세방에서 ‘나눔의 집’이란 문패를 걸고 인근 공장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방치되다시피한 아이들을 위한 탁아소와 방과 후 어린이들을 위한 마을문고도 열었다.
그렇게 판잣집의 전세방에서 시작된 ‘나눔’의 싹이 자라 열매를 맺고 또 다른 싹을 틔운 지 20년. 노원, 성북, 봉천동, 용산, 인천 송림동, 수원, 포천 등 서울·경기 지역에만 7개의 나눔의집이 생겨났고, 각 집에선 3~10개의 센터와 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무의탁 어르신이나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가정 등과 결연을 맺어 생활지원과 의료지원을 하고, 보호받지 못하며 공부할 공간조차 없이 떠도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장소들이다.
성공회는 나눔의집 개원 20돌을 맞아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기념식을 열었고, 오는 16일 오후 3시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노원나눔의집 20돌 기념축제’를 연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 |
LA ‘노숙인들의 마마’
LA ‘노숙인들의 마마’
<동아일보 2006/9/13/수/투데이A35면>
"20년을 하루같이 새벽 4시면 음식싣고 거리로"
미국 노숙인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는 로스앤젤레스 시온복음선교회 김연응 씨. 사진 출처 로스앤젤레스타임스 |
|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한인 여성이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를 닮은 헌신으로 미국 사회에 감동을 던지고 있다.
주인공은 현지에서 시온복음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김연응(미국명 글로리아 김·65) 씨.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11일 현지 노숙인들로부터 ‘어머니’로 불리며 20년 넘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해 온 김 씨의 삶을 2개면에 걸쳐 소개했다.
김 씨는 근 20년 동안 오전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거리 노숙인들에게 나눠줄 음식을 준비한다. 4시면 차를 몰고 나가 다리 밑과 공원, 거리 모퉁이들을 돌면서 노숙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차에는 바나나 2박스, 물 25L, 빵 400개, 200명분의 수프, 포도, 양말과 옷가지들이 실려 있다.
김 씨는 노숙인들이 ‘마마’를 소리치며 달려와 음식을 먹고 주변에 둘러서서 찬송가 ‘놀라운 은총’을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런 그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그 자신은 백내장과 안구건조증을 앓고 있지만 몸을 돌볼 여유도 없다.
어려운 이를 위한 김 씨의 삶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미국으로 이민 온 김 씨는 1978년 간호병으로 입대해 1979년부터 2년간 용산 미군기지의 병원에서 근무했다. 당시 미군이 가난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무료 시술을 곁에서 도와주며 김 씨는 봉사에 눈을 뜨게 됐다.
1982년 제대한 김 씨는 1984년 플로리다 주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겨왔고 1986년부터 노숙인, 범법자들에 대한 봉사를 목적으로 선교회를 설립한 뒤 어머니(1990년 사망)와 함께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성경학교와 퓨리턴대를 졸업한 목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선 티끌만큼의 권위의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김 씨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웃돕기도 그리 오래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누군가가 이 일을 맡아서 하면 곁에서 죽는 날까지 도와줄 수 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 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행복은 아파트 평수보다 마음밭 넓이에
행복은 아파트 평수보다 마음밭 넓이에
<한겨레 2006/9/14/목/문화27면>
|
‘마음일기’·‘선거일기’ 함께 펴낸 정현태 씨
|
|
|
|
조연현 기자
|
|
세상살이에서 선거만큼 마음을 요란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단시일의 승부에서 이기면 남들은 평생 기어도 오를 수 없는 국회의원이나 시장, 군수가 되고, 낙선하면 그야말로 상처만 남게 되기 십상인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누구든 어려움에 처해보아야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선거판과 낙선 뒤 평정을 지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지난 5·31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남 남해군수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정현태(44)씨가 고백록 같은 〈정현태의 마음일기〉와 〈선거일기〉(무진재 펴냄)를 썼다.
‘5·31’ 남해군수 낙선의 쓴맛 아름다운 패배 경험 생생하게
다른 후보의 선거사무실에 들러 물도 얻어마셔가며 선거운동을 했던 정씨는 경남지역 낙선자 중 최다 득표율을 얻어 아쉬운 쓴잔을 마셨다. 〈선거일기〉엔 낙선이 결정된 순간 모든 진기가 다 빠져나간 듯 허탈해졌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살펴 ‘최선을 다한’ 자신을 위로하고, 상대 후보에 대한 모든 고소를 취소함과 동시에 도지사부터 군의원까지 12명의 당선자에게 꽃을 보내 축하한 얘기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그의 〈마음일기〉는 교통사고를 낸 뒤 자신이 유리하도록 거짓말을 했던 고백부터 부부싸움과 잠자리의 심정까지 ‘너무나 진솔하기에’, 마음일기에 익숙지 못한 독자들의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한다. ‘마음일기’란 경계마다 일어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일기로 기재해 ‘본래 마음’과 대조함으로써 본래의 원만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일상생활의 경계에서 마음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내놓은 수행법이다.
초등학교 때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지금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정씨가 마음일기를 대한 것은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한겨레〉에 실린 마음공부 기사를 읽고부터였다. 교내 언론협의회체 의장 겸 총학생회 대변인으로 데모의 선봉에 섰던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교문 앞에서 한 경찰 간부가 “제 몸 하나도 편케 못 닦는 놈들이 무슨 나라 걱정을 한다고 난리들이냐”고 한 호통은 반발심 속에서도 그의 가슴에 화두로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 졸업 뒤 참교육 운동과 지역 운동을 하면서도 내면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한겨레’ 보고 마음공부 시작 3년전부터 인터넷 카페에 일기
그는 2001년 원불교 대안학교인 합천 원경고의 박영훈 교감이 경상대 평생교육원에서 한 ‘마음공부 강좌’를 듣고, 마음공부 카페를 만들어 동호인들끼리 진솔한 마음일기를 써 서로 감정해주었다. 아파트 평수보다 마음 밭을 넓혀야 한다는 열정의 일기쓰기는 2003년부터 올 초까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홍보담당관과 바른역사기획단 기획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정씨는 “예전엔 ‘옳다는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는데, 마음일기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을 좀더 잘 쓸 수 있게 된 뒤부터는 삶의 굴절 속에서도 무엇보다 내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CBS 무가지, 신문·방송 겸영규제 허점 뚫나
CBS 무가지, 신문·방송 겸영규제 허점 뚫나
<한겨레 2006/9/14/목/미디어21면>
|
‘지분 50%미만’ 법규 미비 틈 자회사 통해 추진 문화부 “가능하다” 방송위 “꼼꼼히 검토해봐야”
|
|
|
|
정혁준 기자
|
|
여론의 다양성 보장을 위해 신문-방송의 겸영을 금지한 언론 관계법이 방송사에만 유리하게 적용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문법 안에 서로 모순된 조항들이 들어 있는 탓이다.
발단은 <시비에스(CBS)>가 자회사인 시비에스아이(CBSi)를 통해 10월 무가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롯됐다.
한국신문협회가 문제를 제기했다. 신문협회는 지난 11일 “신문의 방송 진출이 금지돼 있는 상황에서 방송의 신문 창간을 내버려 두는 것은 매체간 균형 발전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신문법 개정 논의가 마무리 될 때까지 시비에스의 무가지 창간을 막아줄 것을 문화관광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시비에스는 “문화부가 이미 오케이 했다”며 느긋한 입장이다. 한준부 시비에스 경영기획부장은 “시비에스 뉴스를 여러 가지 매체에서 보여주기 위해 무가지를 준비하고 있다”며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 관계법은 기본적으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하고 있다. 신문법 15조2항은 “신문과 통신, 방송은 서로 겸영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 6월 헌법재판소도 동아·조선일보사가 “이 조항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에 대해 “언론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방송법 8조도 “신문사가 지상파방송과 뉴스전문채널을 겸영하거나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신문과 방송을 겸영하면서 여론을 독과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제는 신문법이 15조2항에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해 놓고도, 3항에선 “신문사·통신사·방송사 지분을 50% 이상을 소유한 자는 다른 신문사와 통신사의 지분 50%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해 놓은 것이다. 법 취지를 무시하고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방송사 주식 50% 미만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방송사도 신문사를 겸영할 수 있게 된다. 시비에스처럼 자회사를 통해 신문사를 겸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문화부가 현재 이런 논리를 펴고 있다. 문화부는 “시비에스 법인이 아닌 자회사가 출자하는 방식으로 지분 소유가 50%를 넘지 않으면 가능하다”고 유권해석을 했다.
그러나 방송위원회의 생각은 다르다. 양한열 방송위 지상파방송부장은 “문화부가 심플하게 판단했는데,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라며 “시비에스가 무료일간지 지분을 갖게 될 경우 신문·방송을 겸업할 수 없다는 방송법을 위반하게 돼 법률적으로 꼼꼼히 검토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방송위는 이르면 다음 주 안으로 방송법 위반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김주언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은 “언론 관계법의 미비점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정비해, 구멍 뚫린 신문과 방송 겸영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
[수도원 기행] ⑥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
[수도원 기행] ⑥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
<한국경제 2006/9/14/목/문화TVA33면>
침묵과 고독의 신비속으로
"자매님은 정결·순명·청빈의 생활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고 살기를 원합니까?"
"예,원합니다."
"자매님은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돕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를 원합니까?"
"예,원합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수유5동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녀 한 명이 수도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조규만 주교의 물음에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도원에 들어와 1년 반가량의 청원기와 1~2년의 수련기,3년의 유기서원기를 거쳐 평생을 이 수도원에서 살 것을 다짐하는 종신서원식에서다.
종신서원의 주인공은 '성면의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제대를 중심으로 일반 신자들이 들어가는 왼편의 외부성당에는 말가리다 수녀의 부모와 가족,친지,지인 등 15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평소 높은 담장에 굳게 잠겨 있던 이중 철제 대문도 이날만은 활짝 열렸다.
가르멜수도원의 봉쇄구역 안에 사는 수녀들만 들어가는 오른편의 내부성당 맨 앞에 서서 조 주교와 긴 문답을 끝낸 말가리다 수녀는 내부성당 바닥에 꽃으로 장식한 십자가에 부복(俯伏)했다.
가장 낮은 자세로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표시다.
곧 이은 장엄(종신) 서원문 낭독 순서.부복한 자세에서 일어나 수도원장 이명신 마리아 수녀와 마주 앉은 말가리다 수녀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저 성면의 데레사 말가리다 자매는 동정마리아와 함께…." 어렵사리 시작된 서원문 낭독은 첫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또 끊어졌다.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말가리다 수녀는 부복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갈망했던 종신서원의 날,수녀는 왜 눈물을 보였을까.
이미 몇 년의 세월을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보냈고,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수없이 점검하고 다짐했던 서원이 아니었던가.
종신서원을 기점으로 세상과의 마지막 접점마저 지워버려야 한 탓일까,갈망하던 꿈이 이뤄진 기쁨 때문이었을까.
자세를 가다듬은 말가리다 수녀는 정결·순명·청빈을 서약하고 "끊임없는 기도와 복음적 자아포기로 완전한 애덕에 이르고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를 영원히 찬양하기 위하여 성녀 데레사가 개혁한 이 수도가족에 저 자신을 바친다"는 요지의 서원문을 낭독했다.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은 1940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완전봉쇄수도원이다.
지금도 서울에선 유일하다.
가르멜수도회는 이스라엘 서북부의 가르멜산에서 은수(隱修)생활을 한 구약시대의 예언자 엘리아에 기원을 둔 수도회.현재 세계 126개국 850여개 남녀 수도원에서 1만2000여명의 수녀와 4000여명의 수사가 고독과 침묵의 숨겨진 삶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선교나 사회봉사 등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활동수도회와 달리 세상과 완전히 단절한 채 평생을 수도원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만 해도 외부인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어요.
외부인사를 만나는 면회실 칸막이도 3중 격자로 해서 서로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였지요.
세상과의 지나친 격리가 외부에는 거부감을 주는 측면도 있으나 완전한 관상에 몰입하기 위해서 세상과의 차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2000년 이상 기도생활의 경험에 바탕한 것입니다."
종신서원식에 앞서 면회실의 격자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만난 수도원장 이 마리아 수녀의 설명이다.
가르멜수도회가 지향하는 봉쇄는 고행이나 고립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내적 자유를 획득하는 수단이라는 것.엘리아 예언자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산과 사막에 은거한 것처럼,세상과의 물리적 격리를 통해 침묵과 고독의 생활을 더 쉽게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자아의 포기,항상 같은 수도원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데 따른 희생,수도회 규칙 준수,생활의 단조로움,노동의 수고로움 등은 불가피하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바깥일을 봐주시는 수녀님들이 계셔서 내부수녀들은 봉쇄구역 안에서만 생활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외부수녀를 하겠다는 지원자가 없어서 원장이 대외 창구 역할을 하고 있지요.
수녀원도 조직이 있다 보니 3년마다 심부름꾼을 뽑는답니다."
맨 처음 서울 혜화동에 있다가 1963년 수유리 산 밑에 1만여평의 터를 마련해 이사한 서울가르멜여자수도원은 지금도 3000여평의 채마밭을 직접 일구고 각 성당에 미사용 제병을 만들어 공급해 생활비를 마련한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으며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는 삶"이라고 이 원장은 설명한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그동안 부산·대전·천진암·캄보디아에 수도원을 설립하며 가지를 쳤고,2008년 완공을 목표로 동두천에도 수도원을 짓고 있다.
서울수도원을 포함해 국내의 가르멜수녀원만 10개에 이른다.
서울수도원의 현재 회원은 27명.원래 정원은 21명이지만 동두천수도원을 준비 중이라 30명까지 받을 수 있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밤 11시에 잠들 때까지 하루 7차례 성당에 모여 공동기도를 바치고 노동과 독서,묵상으로 일관한다.
이 원장은 "현대인은 자기계발에 많은 것을 투자하지만 내면을 보면 채워지지 않은 영적 빈틈이 많다"며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것을 희생하는 자세와 자기 포기,자기수련이 있어야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종신서원식이 끝난 후 수도원 마당에서 작은 축하연이 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자 수도원의 철제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세상 소식도,사람도 전혀 만날 수 없는 곳.그러나 절대 고독과 침묵만이 흐르는 그곳이 수도자들에겐 온 우주라고 했다.
바깥 사람들이 보기엔 수도자들이 갇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세상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천주교 북한 수해민에 구호품 전달
천주교 북한 수해민에 구호품 전달
<연합뉴스 2006/9/12/화>
|
천주교 북한 수해민에 구호품 전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12일 인천 월미도에서 '북녘 수해 구호물품 축복식'을 개최했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제공/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6.9.12 (서울=연합뉴스) | |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12일 인천 월미도에서 '북녘 수해 구호물품 축복식'을 개최했다.
주교회의 사무처장 배영호 신부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질 밀가루 400t, 분유 7천560통, 아동용 내의 1만벌, 아동용 양말 2만 켤레 등 2억1천만원 상당의 구호물품에 천주교의 축복을 내리는 의식을 이날 주례했다.
구호물품은 14일 인천항에서 남포항으로 출항하며 북측 조선카톨릭교협회(위원장 장재언)를 통해 7월 대규모 수해를 입었던 북한 동포들에게 전달된다.
민족화해위원회는 1982년 북한 선교부로 출발해 1999년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평화통일을 위한 대북사업을 펼쳐왔으며 2004년 룡천 기차역 폭발 사고 때 1억2천만원 상당의 미숫가루, 2005년 5억3천만원 상당의 비닐 박막을 북측에 지원한 바 있다.
[문화소식] 원불교 한·일 종교인 합동법회
[문화소식] 원불교 한·일 종교인 합동법회
<연합뉴스 2006/9/12화>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원불교 성동교당(교무 김대선)은 창립 5주년을 맞아 17일 서울유스호스텔에서 '상생 평화를 위한 한·일 종교인 합동법회'를 연다.
성동교당은 이날 일본 재가불교단체 입정교성회 동북교구 평화사절단 50여명, 탈북자 50여명을 초청해 법회를 열고 판소리 등 축하공연도 진행한다.
법회에서 원불교 일본교구장 양현수 교무가 주제법문을 하고 입정교성회 동북교구 스보우치 교구장과 국제한국학회 회장인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가 축사를 할 예정이다.
원불교는 이 행사에 이어 18일 오전 9시 서대문 독립공원 순국선열 추념탑에서 '한·일 생명평화위령제'를 개최한다.
▲태고종 열린선원(원장 법현)은 26일 오후 3시 '명절 차례 특강 및 시연 법회'를 연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올바른 차례법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법현스님은 15년 전부터 "차례(茶禮)에는 차(茶)를 올려야 한다"며 술이나 숭늉을 대신해 차례상에 차를 올리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 02-386-4755.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이사장 황성규)는 28일 오후 5시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효촌관 2층 세미나실에서 '죽음에서 발생하는 윤리문제'를 주제로 열한 번째 '장공 사상연구 목요강좌'를 개최한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박명철 박사(윤리학)가 강사로 나선다.
기독교단체 전작권 반대서명지 미대사관 전달
기독교단체 전작권 반대서명지 미대사관 전달
<연합뉴스 2006/9/12/화>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환수 논의에 반대하는 목회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국가안보를 위한 기독교 긴급행동'(이하 기독교긴급행동) 은 전국 목사ㆍ장로 3만 명의 서명지를 12일 오후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이들은 서명지와 함께 전달한 서한을 통해 "미국 정부가 전작권을 2009년 조기이양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며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미연합사를 조기 해체하려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서명지는 현재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가 국내에 없는 관계로 헨리 해거드 국내정치담당팀장에게 전달됐다.
기독교긴급행동은 기독교사회책임(공동대표 서경석 목사)을 비롯한 11개 기독교 단체가 전작권 환수 시기를 유보토록 촉구하는 활동을 벌이기로 하고 지난 달 22일 연합해 만든 한시적 기구다.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연합뉴스 2006/9/12/화>
성경 기원탐구한 성경연구서 출간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수천 년 동안 세계 정신문명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성경. 그러나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성경을 만들었는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미국 UCLA 근동언어문화학과 교수인 윌리엄 슈니더윈드의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에코 리브르 펴냄)는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와 언어학 분석을 토대로 성경에 얽힌 수수께끼를 치밀하게 추적한 연구서다.
저자는 최초의 구약성경 대부분이 기원전 7-8세기경 유다 왕국 히스기야ㆍ요시야 왕 시절에서 바빌론 유수기(기원전 6세기) 사이 기록됐음을 논증한다. 이는 문자문화의 시초로 알려진 그리스 문명보다 몇 세기 앞선 시기다.
기원전 7-8세기 무렵부터 글쓰기는 유다 왕국에서 왕실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특히 7세기 요시야 왕 시절 과감한 종교개혁 과정에서 구전 성경의 대부분이 문자화됐다는 것이다.
또한 구술에 불과한 성경이 문헌으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간에 종교적 권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전개됐음을 구체적 논거를 통해 보여준다.
그렇다면 성경의 저자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기록한 서기관이 있었을 뿐"이라며 사실상 성경의 저자는 아예 없었다고 말한다. 모세가 성경의 기록자로 보이는 것도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후대의 인위적 편집기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누가 성경을 썼는가'의 문제보다 '언제 쓰여졌는가'가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 질문이다.
저자는 "성경은 여러 권들의 집합체이지 어느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다. 더구나 성경처럼 오래된 글에서 저자라고 추측되는 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알아내기란 매우 어렵다. 그보다 좀 더 접근이 가능한 것은 그 글이 당시의 고대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 가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UCLA 성서학과 북서셈어 전공 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과 올브라이트 고고학 연구소 방문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변천하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과 사회' 등이 있다.
박정연 옮김. 400쪽. 1만6천500원.
[여적] 집사
[여적] 집사
<경향신문 2006/9/14/목/오피니언26면>
집사(執事)란 기독교에서는 장로·권사 등과 함께 교회 내 봉사 직분의 하나를 지칭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주인 집에 고용되어 그 집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뜻한다. 집사는 집안 일이라고 해서 청소, 식사준비 등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부, 정원사, 운전사 등의 인력을 총괄 관리하고 주인의 대소사를 조정하며 집안의 재정·회계업무를 처리하는 등 일종의 개인비서 겸 매니저에 해당하는 일을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전문화된 집사가 드물지만 서구의 경우 웬만한 일반전문직보다 훨씬 전문화되어 있고, 보수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집사는 주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도 챙겨줘야 하는 만큼 양자 간의 신뢰관계는 필수적이다. 할리우드 영화 ‘대부’에서 변호사인 톰(로버트 듀발)은 콜레오네 가문의 집사지만 ‘주군(主君)’인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랜도)와 부자의 인연을 맺은 뒤 가문의 주요 의사결정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1950년에 개봉된 영화 ‘선셋대로’에서는 무성영화시대의 스타였으나 세월이 지난 뒤 빈 저택만을 지키고 있는 노마(글로리아 스완슨)는 집사이자 전 남편인 맥스(에릭 본 스토로하임)의 보살핌으로 공허함과 외로움을 이겨나간다.
서양의 집사 개념에 어느 정도 근접한 우리 전통시대의 직종이 바로 마름이다. 마름은 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와 감독을 위임받아 권한을 행사했다. 마름의 자격에 신분적인 제한은 없었으나 문서를 다루기도 하는 업무의 속성상 어느 정도 문필력이 있어야 했으므로 통상 지방유지나 중농층 이상의 사람이 많았다. 마름들은 소작료의 결정·징수·보관·운반 등에 대한 전권을 휘두르면서 소작료를 착복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가 생전에 사랑했던 진짜 연인은 파키스탄 출신의 심장외과 의사 하스넷 칸이었다고 한다. 다이애나의 집사였던 폴 버렐이 언론에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교통사고로 다이애나와 함께 사망한 도디 알 파예드는 ‘휴일용 애인’이었으며 다이애나는 첫눈에 반한 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이다. 집사 버렐은 대중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 민주시민인가, 지켜줘야할 주인의 비밀을 폭로한 배신자인가.
〈손동우 논설위원〉
鄭추기경 '우리들의 행복한..' 시사회 참석
鄭추기경 '우리들의 행복한..' 시사회 참석
<연합뉴스 2006/9/13/수>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이 18일 오후 4시 중앙시네마에서 열리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시사회에 참석한다.
작가 공지영의 동명 베스트셀러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는 불우하게 자란 젊은 사형수와 세상에 냉소적인 젊은 여교수의 만남을 다뤘다. 송해성 감독이 연출했으며 배우 강동원과 이나영이 남녀 주인공으로 나온다.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이영우 신부(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장)와 조성애 수녀(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는 실제 인물이다.
이날 시사회에는 정 추기경을 비롯해 이영우 신부와 조성애 수녀, 염수정 주교(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위원장), 교정사목 담당 수도자와 봉사자들이 함께 참석할 예정이다.
참사랑만이 지구촌 갈등 치유
참사랑만이 지구촌 갈등 치유
<세계일보 2006/9/13/수/사람들27면>
|
UPF 창설 1주년 청평서 기념식
|
|
|
지구촌 평화 정착의 길을 모색하는 천주평화연합(UPF)이 12일 경기 가평군 설악면 천성산 청평청심박물관(일명 천정궁)에서 창설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UPF 3차 총회(10∼14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가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대거 참여로 ‘민간 유엔총회’를 방불케 하는 가운데 맞은 겹경사다.
이날 행사는 각계인사 축사, 곽정환 UPF 세계회장 기념사, UPF 공동창시자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의 특별강연, 축하오찬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전 벨로루시 대통령 등 각국 지도자들은 공동으로 문 총재 내외에게 천주평화대훈장을 증정했고, 베네수엘라 산타마리아 대학의 카를로스 엔니케 페냐 부총장은 문 총재의 세계평화 업적을 기려 명예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문 총재는 ‘하나님의 이상가정과 평화이상세계’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에서 유엔의 한계를 보완해 줄 새로운 차원의 평화기구인 UPF 활동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문 총재는 “지구촌 갈등과 전쟁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원수를 자기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참사랑의 힘뿐”이라며 “인류가 참사랑으로 맺어지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국경 종교 인종의 벽을 영원히 종식시킬 수 있다”고 역설했다. 문 총재는 이어 “동서양의 평화를 이어줄 월드 피스킹 브리지 터널 건설에 종교인들이 나서주길 기대하며 반드시 이루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학자 총재는 “하나님의 소원은 조부모, 부모, 손자손녀를 중심삼고 3대가 한 가정에서 영존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을 세우는 것”이라며 “세계가 이런 가정들로 채워지면 법이 필요 없는 순리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제임스 맨첨 세이셸 초대 대통령은 축사에서 “UPF는 조화로운 단결의 세계, 인권존중, 인류정신교육 등의 목적으로 창설됐다”며 “지구촌 평화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정진 중인 문 총재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철승 유엔평화군추모연합회장은 “과거 유엔은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사명을 다했지만, 작금의 현안인 인종갈등, 종교분쟁 등을 해결하는 데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며 “문 총재가 추진하는 유엔 갱신 운동이야말로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UPF 3차 총회에 참석 중인 오치르바트 푼살마긴 전 몽골 대통령, 해밀턴 그린 전 가이아나 총리, 라힘 알리예비치 후세이노프 전 아제르바이잔 총리, 데비 레멩게사우 팔라우공화국 대통령 부인, 조지 스톨링스 미국 이마니탬플 대주교 등 140여개국 400여명의 외국 지도자와 함께 김민하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이철기 전 천도교 교령, 나용화 불교 임제종 종정, 김명신 세계평화여성포럼 회장 등 국내 지도자 1000여명이 참석했다.
UPF는 지난해 9월12일 미국 뉴욕에서 창설된 이래 각국 지도급 인사들의 참여 아래 종교간 화해, 분쟁지역 평화대행진, 유엔 갱신 지원, 평화대사 활동, 인종간 교차축복 등 다양한 평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segye.com |
교황 모국서 미사 집전
교황 모국서 미사 집전
<동아일보 206/9/13/수/국제A16면><조선일보 2006/9/13/수/사람들A31면><국제신문 2006/9/13/수/국제18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12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인근에서 있었던 마지막 야외 미사 도중 한 신도에게 성찬을 주고 있다. 교황은 고향인 바이에른 주 일대를 6일 동안 돌며 야외 미사를 집전했고 모두 25만 명의 신도가 참석했다.
레겐스부르크=AFP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