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손
원용재
온천욕을 끝낸 후의 귀갓길은 늘 힘이 들었다. 나른한 몸으로 운전하는 일은 버거운 일이었다. 하물며 오늘같이 따듯한 봄날 오후, 게다가 홀로 차를 모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한적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가 차 한 잔 마시며 바깥바람을 쐬었다. 그래도 정신이 맑아지지 않아 잠깐 눈을 붙이고 가야겠다고 차로 돌아왔다.
조수석 의자를 뒤로 빼다가 문득 옆을 보니 차창을 통해 한 여인의 손이 보였다. 어묵을 들고 천천히 오르내리는 손이 예뻐 보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손가락,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손바닥. 나긋나긋한 손놀림이 내 눈을 혹하게 했다. 손톱이 긴지 짧은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손톱이 정갈해보였다. 얼굴이 궁금해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그의 차 센터필러(center pillar)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오직 자그마한 손만 보였다. 저런 손을 옛 어른들이 섬섬옥수라 했겠구나하며 감탄했다. 어묵을 다 먹고 이번에는 종이컵의 물을 마시는 게 아마 어묵 국물이겠지. 새끼손가락을 살짝 편 손까지도 애교스러워 보였다. 내 눈에 봄바람이 든 것인가, 아니면 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인가.
이윽고 여인의 차는 떠나갔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길게 누웠다.
여인은 서둘러 집에 돌아가 귀티 나는 아들에게 간식을 줄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를 켜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며 저녁을 준비하겠지. 더러 나직하게 흥얼거리기도 하겠지. 그러다가 문득 성모의 보석 간주곡이 흘러나오자 손을 멈추고 음악에 몰두하기도 할 것이다. 고교 시절. 음악 시간에 해설과 함께 듣던 성모의 보석 간주곡. 살짝 좋아하던 음악선생님을 회상하며 잠시 10대로 돌아가 보기도 할 것이다.
손이 예쁜 여인은 아이에게 심한 매질도, 벌거벗겨 목욕탕에 가두지고, 굶겨 바깥에 내쫓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 손 예쁜 값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잠깐 풍요롭게 해준 그 예쁜 손은 그래서 덕스럽고 따듯한 손이다.
나는 이런 망상에 잠겼다가 문득 얼마 전에 만난 어느 농부의 손이 생각났다. 나와 악수를 나누던 그의 손 안에 내 손이 속절없이 파묻혔다. 사포(sandpaper)같이 거칠고 굳은살로 딱딱해진 손바닥, 뭉툭하고 쩍쩍 갈라진 손가락, 닳아빠진 손톱, 그나마 두어 개는 빠져있던, 이런 거친 손과 손들이 있어 나는 의식주를 해결하며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아왔다. 참으로 고마운 손들이다.
열한 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잘라 피로서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진 안중근 의사의 손은 어린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 분을 통해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위대한 손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손들도 생각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행복을 주는 손이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혼을 쥐어짜는 인고를 겪고서야 작품 하나가 만들어진다. 그런 손들 중에 감동까지 준다면 단연 최고가 될 것이다.
첼리스트 장한나 양의 개구리 손이 생각났다. 오른손 중지가 왼손 중지에 비해 유난히 길다. 또 오른손 약지가 약간 휜 기형이다. 손가락 끝이 유난스럽게 둥글고 뭉툭하다. 양손의 균형이 무너진 짝짝이 손이다. 그런데 그런 기형적인 손이 내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녀의 피나는 노력을 알기 때문이요, 보통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천재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발레리나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의 망가진 발과 함께 내게 감동을 주는 손이다.
또 어느 소설가의 움푹 들어간 손가락이 나를 기죽게 한다. 대하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써나가던 손가락이 펜에 눌려 오른손 중지 첫 마디가 움푹 파인 것이다. 그 기형적인 손가락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준다.
명인 황병기 교수의 손가락은 온전할까. 한 손으로는 튕기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눌러야 하는 가야금 연주를 중학교 3학년부터 시작해 팔순을 훌쩍 넘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았으니 그의 손가락에 지문이 남아 있을까 싶다. 장인 정신이 만들어내는 위엄인 것이다.
택시 운전석에 매달려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소녀의 기도는 또 어떤가.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와 함께 우리에게 친숙한 그 소녀의 손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기도여서 아름다워 보인다.
성경 한 권, 스프 한 그릇, 딱딱한 빵 앞에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올리는 노인의 그림에서 경건함을 본다. 로라 나이버그의 “은혜” 또는 “감사의 기도”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더 많은 것을 욕심내 가난하게 사는 내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바울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풍족한 식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 있어 감사하고 먹은 것 소화할 수 있는 건강 있음을 감사할 줄 아는 최고의 손이 아닐까.
독일의 뒤러가 그린“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 또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어 유명하다.
미술 공부를 하고 싶은 가난한 뒤러는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친구와 약속을 했다. 한 사람이 일을 해서 친구의 학비를 보조해 주고, 후에 이 역할을 바꾸어 친구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친구가 먼저 노동을 해서 뒤러는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된 뒤러가 이제는 내가 일해서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구의 작업장을 찾아갔다. 그는 마침 두 손을 모아 소리 내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이제 손이 굳어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러니 내가 계속해 그의 뒷바라지를 해서 뒤러가 큰 화가로 성공하게 해 주십시 오.”
뒤에서 이 광경을 보던 뒤러는 급히 연필을 꺼내 기도하는 친구의 맞잡은 손을 스케치했다. 그 그림이 “기도하는 손”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뒤러는 후에 “기도하는 손이 제일 깨끗한 손이요, 위대한 손이다.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며 최고로 높은 자리다.”라고 했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게 해서 눈 좀 붙이고 가겠다던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이럴 바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싶어 조수석 의자를 바로 했다.
마침 그 때 전화가 왔다. 큰딸의 안부 전화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물었다.
“얘, 최고로 위대한 손은 누구 손이겠냐?”
딸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답했다.
“테레사 수녀요.”
아! 그렇구나. 나는 왜 그녀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더 테레사야말로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했고, 또 그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섬기며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 기도 많이 하라고 큰손을 받았고 많이 나누어주라고 남자 손같이 큰 손을 지니게 되었다. 사진으로 본 그녀의 거칠고 크고 못생긴 손이 생각났다. 그런 손이야말로 고마운 손, 감동을 주는 손, 최고로 위대한 손이다.
그런데 마더 테레사의 마더에서 문득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아기 배는 똥배, 엄마 손은 약손.”하며 아픈 배를 쓸어주던 어머니의 손은 따듯했었다.“멍멍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울지 마라. 우리 아가 잘도 잔다.”하며 가슴을 다독여 주시던 어머니의 손은 부드러웠다. 때로는 맴매를 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던 등댓불 같던 어머니. 무엇이든 더 챙겨주고 싶어 하시던,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미안해하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손은 늘 사랑 철철 넘치는 희생적인 손이었다.
그래. 세상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의 손이 최고라 칭송하더라도, 나는 그리운 어머니의 손이 최고로 위대한 손이라고 결론 내렸다.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테레사 수녀의 손에 반이나 될까 말까 하게 작은 손. 못된 짓 어지간히 하고 다닌 죄 많은 손. 섬기는 일에 게을렀던 한심한 손. 나누는 일에 인색하던 부끄러운 손. 불의 앞에 정의로운 주먹 한 번 불끈 쥐어보지도 못했던 비겁한 손. 이기적인 기도나 하던 편협한 손.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아내를 지켜주지도 못한, 기도의 능력도 변변찮은 손. 손, 손... 한없는 자괴와 자책에 빠지다보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기분전환을 위해 화장실에 들렀다가 손을 씻었다. 손을 말리며 그래도 이 손이 30여 년 운전하며 큰 사고 한 번 안 낸 착한 손이었음을 상기했다.
그렇다. 지금 이 시간에는 안전하게 운전하는 손이 최고의 손이다. 지금 당장은 이런 손이 요긴한 손이라 자위하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천천히 차를 몰아 안성맞춤휴게소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