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 천재, 열혈 애국청년
♣ 배재학당(培材學堂), 운명의 갈림길
배재학당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교육 기관이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95년에 시작했을 때 학생 수는 단 2명이었다. 10년 뒤인 1895년에는 학생수가 10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던 이승만의 동료들 가운데는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서당을 떠나 서양 학교로 간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했다. 동료들은 그에게 권유했다. "전보, 기차, 비행 기계 등 서양에서 발명된 온갖 놀라운 물건들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어떤가?"
이승만은 대답은 단호했다. "그들이 천상, 천하의 질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도 나는 내 모친의 종교를 절대 버리지 못한다."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그였지만,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신긍우, 신흥우 형제가 집요했다. 결국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친구들에 의해 학교를 바꾼 정도의 사건이었는데, 그 파장은 엄청났다. 그 일로 이승만의 일생은 물론 이 나라의 역사 전체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물론, 그 당시에는 설득하는 신씨 형제들이나 설득된 이승만이나 얼마나 엄청난 일이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을 불사르는 거대한 불길도 작은 불꽃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배재학당에 들어감으로써 이승만은 서양을 만났고 민주주의를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기독교를 만나게 된다. 배재학당은 일개 한학자나 관료로 일생을 끝마칠 유생(儒生) 이승만을 서구 지향의 근대적 개혁가 - 혁명가로 개조시켜 놓은 용광로가 되었다.
강철같이 고집을 부리는 사나이를 용광로로 밀어 넣은 것은 집요한 우정이었다. 시인 서정주의 표현은 비유가 아닌 직절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아니, 참으로 위대한 것은 이 우정이었다."
당시의 배재학당은 한국인, 서양인, 일본인, 청국인이 두루 섞여 배우고 가르치는 국제 학교였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서양 문명에 눈을 뜨게 한 별천지"였다. 하지만 그때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학살당했던 시기로부터 불과 30여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생소한 서양 문명과 종교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서양 학교를 "이상한 약을 먹여 하늘이 노할 사악한 사상을 가르치는 곳"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특히 경계했던 것은 기독교 예배였다. 아침 예배에 나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서 뭔가를 먹이거나 마시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상한 약은 먹이지 않았다. 그는 예배에서 아펜젤러의 설교를 들었다. 난생 처음 참석한 예배에서 최초로 기독교의 설교를 들은 소감을 이승만은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들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을 하기 위해서나 혹은 반박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끄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1900년 전에 죽은 한 인간이 내 영혼을 구원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온갖 놀라운 일들을 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그런 우스꽝스러운 마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들은 자신들은 믿지 않으면서 무지한 사람들만 그런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을거야. 그러니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만 교회에 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 위대한 부처님의 진리와 공자님의 지혜로 무장된 학식 있는 선비라면 저런 말은 절대 믿지 않을 거야'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기독교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영어는 필요했다. 이승만은 발전된 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어려서부터 발휘되어왔던 천재성은 영어 습득에서도 빛을 발했다. 불과 6개월 만에 배재학당의 영어 교사로 임명된 것이다.
영어 학원이나 테이프는 물론, 사전조차 없던 시대에 6개월 만에 영어를 마스터하고 교사까지 된 것은 신기에 가까운 성취였다. 이때부터 영어는 그의 일생에 소중한 도구요 무기가 된다.
♣ 민주주의에 눈뜨다
1896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인물이 배재학당에 부임했다.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서재필이 12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의 쿠데타인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그는 역적으로 몰렸다. 그의 가족들은 처가와 외가까지 모두 처형당했다. 일본으로 도피했던 서재필은 천신만고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워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시민이자 의사가 되어 미국인 부인과 함께 귀국한 것이다.
서 박사는 한동안 장안의 명물이었다. 그가 '실크 해트'에 '모닝'을 입고 그의 색다른 부인과 같이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는 늘 몇 십 명씩의 구경꾼이 그 뒤을 졸래졸래 따라다닐 정도로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서재필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미국과 성경과 서양 역사 등 새로운 지식이 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이승만을 배재학당으로 이끌었던 신흥우에 의하면, 이때 서재필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의 혁명가답게,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혁명적인 시도를 한다. 조선 학생들에게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배운 토론을 훈련시킨 것이다. 그가 주도한 토론 모임이 협성회(協成會)이다. 협성회의 진행 방식은 먼저 토론의 주제를 정한다. 그리고 두 팀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찬성, 한 팀은 반대하는 연설을 하게 했다.
당시에는 토론 문화는 물론, 토론에 관련된 용어 자체가 없었다. 쟁점사항을 전체 투표에 회부한다든지, 의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다든지 하는 개념도 없었다. 그런 시절에 시작된 협성회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의회에 가까운 모임이었다.
협성회가 조직될 때, 이승만은 창설 멤버 13인 중의 하나였다. 훗날 그는 서기를 맡고 회장도 되는 등, 혀성회의 주요 멤버로 활약했다.
토론의 주제는 처음에는 비(非) 정치적인 것으로 시작했다. '배재 학당에서 한복을 입을 것인가 아니면 서구식 옷을 입을 것인가'. '부녀자의 교육이 필요한가', '체력 운동이 필요한가' 등등이었다.
토론이 열기를 더해가고 참가자들의 실력도 늘어가면서, 주제는 점차 정치색을 갖게 되었다. 24회에는 '한국에서 상하 양원을 둔 의회제를 성립해야 한다', 27회에는 '각종 정부 기관에 고용된 외국인 고문관들은 해고되어야 한다'는 주제가 선정되었다.
토론회의 주제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이다. 이 때는 이승만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갖는 개화(改化)의 위력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훗날 그가 감옥에서 발전시키게 되는 "기독교 입국론"의 씨앗은 협성회 시절부터 심겨졌다.
학생들을 위주로 진행되던 협성회는 점차 일반인도 참가하는 정치 토론의 장으로 발전해갔다. 이승만은 서재필의 가르침과 협성회의 활동에 매료되었다. 어릴 적부터 무엇 하나에 몰두했던 습관이 어김없이 발휘된 것이다. 그 시절에 대한 이승만의 회상을 소개한다.
"내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나가게 된 것은 오직 영어를 배우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포부는 달성했지만 곧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적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알게 된 것이다.
조선인들이 당하는 정치적 압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의 국민들이 통치자들의 압제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내 가슴에 어떤 혁명이 일오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정치 원리를 채택할 수만 있다면 고통에 처한 동포들에게는 대단한 축복이 될 것이다.'"
배재학당 시절, 이승만의 절친한 친구로 주상호가 있다. 훗날 주시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한글 학자이다. 그는 그때부터 우리글 연구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떠돌았다. "주시경은 한글을 연구하러 배재학당에 다니고, 이승만은 정치를 하러 다닌다."
토론이 거듭되면서 참석자들의 자신감도 커졌다. 당대에 가장 앞서가는 학문을 배우고 웅변술, 토론법, 설득 기술까지 배웠으니 사기가 충천했음은 물론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던 조선의 운명은 젊은 피를 뜨겁게 했다.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서 토론회를 거리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협성회의 정치색이 분명해질수록, 난처해지는 쪽은 학교 측이었다. 배재학당을 이끌었던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을 위해서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학생들의 모임에 일반인들도 점차 가세하고 있으니, 부담스러울 부밖에 없었다.
정부 역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펜젤러 학장은 어쩔 수없이 학생들에게 자제해줄 것을 여러 번 당부했다. 협성회는 자제하기보다 확장하는 쪽을 선택했다. 학교 측의 우려를 고려하여 아예 배재학당을 벗어난 대중적인 조직으로 변신한 것이다. 1896년 6월 7일 협성회의 이름은 독립협회로 바뀌어졌다. 우리 근대사에 혁혁한 발자취를 남긴 독립협회의 탄생이다.
♣ 이승만의 영어 연설
1897년 7월, 배재학당의 학기말 종강행사를 겸한 졸업식이 열렸다. 그것은 장안의 화제가 된 이벤트였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열리는 서양식 학교의 졸업식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날의 행사에는 부득이하게 불참한 한 명을 제외한 당시 정부의 모든 판서(장관)들이 참가했다. 한양의 판윤(시장), 미국 공사와 영국 총영사를 포함한 외국 공사관의 장들을 위시해서 600여 명의 귀빈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졸업식의 연사는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조선의 교육부 대신, 외무부 대신, 서재필, 미국 공사 등이 연단에 올랐다. 이 행사에서 만 스물두 살의 이승만은 한국 학생들을 대표해서 영어 연설을 했다.
그가 택한 주제는 '한국의 독립'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했다. 청중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때부터 이승만은 젊은 애국자, 조선에서 제일 영어를 잘 하는 청년으로 유명해졌다.
배재학당의 학장이었던 아펜젤러가 편집한 영문 잡지 <The Korean Repository (한국휘보)>는 그날의 장면을 이렇게 보도했다.
"이승만의 연설은 전체 졸업식 프로그램 중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었다. 영어로 된 독창적인 웅변이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이 졸업생 대표는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처음 있는 대학 졸업식사의 주제로서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이 나라의 독립만이 젊은이들이 받아온 훈련의 결과를 필요로 하는 일터를 제공할 것이다. 국가의 독립은 실질적이고 굳건하며, 영속적이어야 한다'는 연설이 행사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이씨의 어법은 상당히 좋았고, 그의 감정은 거침없이 표현되었으며 그의 발음은 똑똑했으며 명확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 영문판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과거의 관계를, 그리고 청일 전쟁을 통한 한국 독립의 성취 과정을 되돌아보고, 한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과 위태로운 사항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의 거침없는 말들은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