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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가 불교가 아닌 이유(8) 구름 이경숙(선의종지 견성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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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교와 혜능의 선이 불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려고 하면 우선 무엇이 불교인가가 분명하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됫박이 제대로 만들어졌는가 재 보려면 표준 됫박이 먼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귀의하고 실천하여 그분의 뒤를 따라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생사윤회의 업장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평온을 얻는 길과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전자를 사성제라 하고 후자를 삼법인이라 한다.
우리는 사성제를 통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고, 삼법인을 가지고 이 세계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이 양자를 모두 어우르는 원리를 학문적으로 이름 붙이면 연기와 중도가 된다.
때문에 불교는 사성제와 삼법인이라는 절대진리를 연기와 중도라는 이론으로 밝힌 과학이요, 철학이다. 아니 불교를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불교가 과학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불교적이어야 한다. 불교적이지 않은 과학은 불완전한 과학이요,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과학이요, 검증되지 않은 과학이요, 가설로서의 과학이다.
불교적인 과학일 때 비로소 과학은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삼법인은 과학의 토대를 이루고 과학적인 모든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있게 하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절대진리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이 원리라고 이름지은 것이라 해도 절대진리는 없다. '우주에 광속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과학적 결론도 특수한 조건과 상황하에서는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러나 삼법인은 절대 무너지지 않으며, 훼손되지 않으며, 수정되지 않는 만고불변의 절대진리이다. 때문에 불교가 과학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고 주객이 바뀐 것이다. 불교는 절대진리이며, 과학은 이를 검증하고 확인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회자정리,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절대진리를 우리는 왜 알아야 하는가? 왜 깨달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사성제를 통해 우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것을 모르고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연기에 의해 이 꿈같은 세상을 세세윤회하면서 고통의 질곡 속을 유전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이 허상의 세계에 붙잡혀있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보셨다. 그 원인을 우리는 왜 만드느냐? 무가치한 대상들에 대해서 무의미한 집착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집착을 끊으면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말이 쉽지. 집착을 무슨 수로, 어떻게 끊는다는 말일까? 눈감고 벽보고 돌아앉아 10년만 버티면 집착이 저절로 다 끊어지나? 화두를 물고 하루종일 벽에 대글빡을 찧으면 집착이 사라지나? 부처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셨다. 집착을 끊는 힘은 오직 한가지 '앎'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부처님은 스스로의 체험으로 아셨던 것이다. 그 올바른 앎을 정각이라 했다. 그 앎을 얻은 것을 해탈이라 한 것이다.
해탈이 신비스러운 어떤 영적 체험의 상태나 경지가 아니다. 바로 삼법인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회자정리를 깨달으면 모든 대상으로부터 애착을 거두게 된다. 제행무상을 알면 헛된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제법무아를 알게 되면 절로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게 해탈이다. 그렇다면 해탈이 곧 부처냐? 아니다. 해탈은 부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삼법인의 절대진리를 한점 티끌만한 의혹도 없이 온몸으로 깨달아 납득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생명체로서 심어진 뿌리깊은 습기가 남아있다. 이 습기를 제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것이 제거된 만큼 완전한 부처의 경지로 다가가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단계까지 이 습기를 제거하신 분이다.
그러면 달마와 혜능은 뭔가? 그들이 하는 짓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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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라는 해괴한 수행교단의 사도들이 외우고 다니는 주기도문이 있다. 일컬어 달마가 제창한 선의 종지라는 것이다. 전부 4개의 구절인데, 앞의 두개는 날조된 거짓말이요, 뒤의 2개는 황당한 헛소리다. 선불교의 주기도문은 제법 유명해서 당나라 때는 절마당의 개도 외우고 다녔다. 교외별전에 불립문자요, 직지인심이면 견성성불이라 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교외별전이 무슨 소리냐 하면 종교의 진수는 비밀리에 따로이 전해졌다는 말이다. 달마는 이런 새빨간 거짓말로 천하중생을 속여먹고 지옥에 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비밀리에 따로 은밀하고 내밀한 전수법에 의해서 전해진 적이 없다. 달마의 선의 종지는 첫마디부터가 완전한 날조요 쌩구라요 철면피한 거짓말이다. 부처님은 깨달아 아신 모든 것을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근기와 지식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공개리에, 백일하에 투명하게 전해주셨지, 어느 누구에게도 은밀한 속삼임을 들려주신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법이, 어떤 교가 별도로 전해졌다는 소리인가?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란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이 연꽃 한송이를 들어보이셨을 때, 마하가섭이 홀로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일에 대하여 경에 적혀있기를, 마하가섭이 대견하신 부처님께서 가라사대, "나에게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이르는 비법이 있다. 이 비법은 형상이 없어 나타낼 수 없으나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문자나 말로는 표현할 수도, 전해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 비법의 열쇠를 마하가섭에게 전한다"리고 하셨다는 것이다.
달마는 이 일을 거론하여 불교의 진수는 문자나 말이 아닌 내밀한 비법으로서 별도로 전해졌다고 구라를 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기록은 의심스러웠다. 평소의 부처님답지 않은 말씀인데다가 평상시의 가르침과도 전혀 어긋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었을까? 정말 진짜 법은 별도로 마하가섭에게 넘어간 것일까? 나머지 1천2백55명의 제자들은 전부 부처님한테 뒷통수를 맞고 바보가 된 것일까?
이 사건이 유일하게 기록된 경전은 오직 '대범천왕문불결의경' 하나 뿐이다. 이 경은 대장경에 포함되지도 못하는 짜투리 경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근세에 들어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이 경은 사용된 언어와 고증의 확인을 통해볼 때에 백프로 조작된 위경임이 밝혀졌다. 누가 조작했을까? 달마는 이 날조된 경전의 구절을 들먹여서 '교외별전'이라고 사기를 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불교에 교외별전은 없다. 부처님은 그렇게 은밀하게 한두명에게만 법을 전하신 적이 없고, 밝혀서 설명치 않고 숨겨놓으신 비법이라는 것도 없었다. 부처님이 아신 모든 것은 다 말씀하셨고, 그것은 문자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전하는 바다. 부처님이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도, 전할 수도 없는 비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날조된 사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악한 달마교의 사도들이 불교를 도둑질해서 자기들의 가면으로 뒤집어쓰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인 것이다.
교외별전이 아니라 교전명백이다. 교는 분명하고 밝게 전해진 것이다. 달마의 선의 종지라는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조금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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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해탈, 성불열반이 불교의 목표라면 성통공완 우화등선은 도교의 목표이다. 즉 신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수백년을 산 진인들의 열전이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써 전해져 오고 있으며, 중인환시리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인(仙人)들의 기록이 역사로서 남아있다. 도교의 수련을 흔히 신선술, 또는 도인술, 또는 양생술이라 한다. 이런 신선이 되는 수행의 방법은 극히 내밀한 것으로써 각 도관마다 비전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불교와 달라서 이런 신선술은 교과서가 없다. 즉 무소의경전(無所依經典)으로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런 비전의 최상승 경지는 다수의 제자들에게 강의되지 않으며 극히 소수의 계승자들에게만 물려진다. 이런 도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무가들도 이런 성향을 띤다. 무협지의 주된 테마가 바로 이런 무공의 비전이다. 도교의 신비주의가 뿌리깊게 스며든 중국에서는 부처님의 불교처럼 비전이 따로이 없고 모든 것이 명백하고 밝게 드러난 진리라는 것이 쉽게 어필되지 않았다.
아무리 이게 다다 라고 설명해주어도 중국인들은 '그래도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이다. 최고의 것, 지고의 가르침은 몰래 전승해주고 숨어서 배운다는 이상한 습벽이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도교에서 생긴 풍토이다. 승복을 걸치기 전의 달마가 도사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달마에게서 나온 선불교라는 것이 불교와 도교의 트기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불교보다는 도교에 더욱 가까운 트기였다. 선불교라는 사생아는 불교라는 어머니를 닮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지 애비를 쏙 빼닮았다. 사람들은 이 선불교의 애비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 어미만을 보고 '불교의 자식'이라고 쳐주었던 것인데, 그러나 일마는 결코 불교의 호적에는 오를 수 없는 놈이다.
사생아를 낳고야 만 달마는 이 애비없는 불쌍한 자식을 억지로 불교의 호적에 올리려고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위조하고야 만다. 그래서 마하가섭을 교외별전의 시전으로 조작하고 달마를 가섭의 28대손으로 조작하였다. 이 엉터리 호적의 이름이 전등록이다. 스승과 수제자 사이에 내밀하게 이루어지는 법통의 전수라는 도교 특유의 승계방식을 불교에 이식하면서 마치 그것이 불교 본래의 방식인 것처럼 조작한 것이 바로 염화미소라는 날조된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도교의 전수방식을 부처님이 시범해 보이신 불교의 본래적 방식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선불교는 달마의 범죄적인 사기극의 산물이다.
본시 부처님의 불교에는 교외별전이 없으며, 불립문자라는 해괴한 소리가 있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런 무당파의 장문인 같은 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선불교라는 사생아를 족보를 위조해서 불가에 입적시키는데 성공한 달마는 혹시 사람들이 이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노래를 지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 노래는 아이의 혈통을 감추는 비밀의 커튼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노래야말로 선불교가 석가세존의 핏줄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히는 산 증거가 될 줄은 달마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천년 후에 구름이 태어나서 이 노래의 비밀을 밝혀내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PS.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한가지 문제가 있어서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불교는 아주 엘리트적인 학문이고 소수만이 행할 수 있는 수행이다. 본질적으로 그리 대중적이지 못하다. 개나 소나, 아저씨나 아줌마나 다 덤벼볼 수 있는 로또복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말씀하시기를 세세 억겁의 전생을 통한 공부와 공덕의 바탕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다 하신 것이다. 우주물리학이나 양자역학이 대글빡 나쁜 삼류대학 꼴통들이 넘볼 학문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불교라는 것이 대다수 중생들에게는 쳐다볼 수 없는 산이요, 먹어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라고 하면 이건 너무 야박한 소리 아니냐 말이다. 물론 그렇지는 않아서 일자무식의 떡파는 할매한테도 불교는 소용이 되고 도움이 된다. 연기니 중도니 몰라도, 팔식이 뭔지 삼법인이 뭔지 몰라도, 유안지 무안지 구별을 못해도, 그저 자업자득의 법칙이 있어서 행한 대로 받거니 하는 것만 알아도 착하게 사는데 도움이 되고, 그저 불경이나 외우고, 부처님 말씀이니까 맞겠거니 하고 팔정도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만 해도 자연히 악업을 덜 쌓게 되고, 선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만큼 받는 복도 커져서 극락왕생하는 표를 사는데 조금이라도 앞줄에 서게 된다. 그래서 기왕에 나는 거 살기좋은 대한민국에 나게되고 저 북한같은 지옥에 떨어지는 화는 면하게 된다 이 소리다.
그러나 그게 불교의 목표냐 하면 당근 아니올시다다. 그런 대중적인 불교의 신앙으로 생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불교는 소수의 선택받은 엘리트들만의 경연장이다. 이 K-1 링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악전고투가 있었겠는가 생각해보라. 구름도 K-1의 피비린내나는 링에 서기 위해서 이토록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생에서 못올라가도 이 생에서 쌓은 캐리어는 그대로 나의 랭킹에 반영이 된다. 다음 생, 안되면 그 다음생에서는 쇼부를 낸다.
장삼이사도 불교 믿을 수 있다. 또 믿어야 한다. 그 수준만큼 알고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가까이 간다. 언제까지 꼴통들 틈에서 삼류대학 다닐 수는 없자나. 하바드 가야지. 예일 가야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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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는 사람들이 헷갈리기 좋도록 교묘하게 암시와 최면을 걸고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구절 속에 들어있는 '성불(成佛)'이 그것이다. 이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은 달마의 선이 마치 성불의 첩경인 줄로 깜빡 속고 말았다. 성불. 부처가 되라는 소리다. 그런데 문제는 달마가 말하는 부처는 신선이지, 석가세존이 이루신 부처가 아니라는 점이고, 그 방법이 석가세존이 가르쳐주신 방법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마는 직지인심(直旨人心)하여 견성(見性)하면 그 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헛소리 나발을 불었다. 공부도 필요 없고, 경전도 소용없으며, 근기도 막론이고,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배나 할매나, 심지어 개나 소나 전부 자기 마음 하나 척 바로 보고 자기 본성을 척 보면 곧바로 부처된다 이 소리다. 이게 바로 개뿔이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다. 그래, 달마 이후 천년 동안 그렇게 해서, 지 마음 하나 척 보고 곧바로 앉은자리에서 성불한 넘 있으면 함 나와 봐바. 잘난 낯짝 함 보자.
달마는 저런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어린 백성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놓고, 사도말법으로 정법을 흐려놓고 지 말에 책임도 안 지고 죽었다. 아주 나쁜 넘이다. 왜냐? 달마는 저 소리에 대해 꼭 해줘야 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는 건지,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 본성을 보면 뭐가 달라지는지, 자기 본성을 본 것과 성불하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각론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벙어리 흉내만 내다가 죽었다.
하기사 교외별전이고 불립문자라 했으니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법통을 전수해준 혜가한테만 귓속말로 전해줬는지 그건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구르미처럼 알고지비 하는 불쌍한 중생들의 열망에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후 지금까지 천년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본성이 뭔지, 마음이 뭔지, 어떻게 보는 건지, 그걸 보고서 우찌 부처가 된다는 소린지 오리야 기리야 영문도 모른 채 달밤에 봉사들끼리 어깨동무하고 불놀이 구경가듯이 더듬더듬 하다가 모진 인생, 허송세월, 도로아미타불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도 절마다 가봐. 속절없이 억울하게 고생만 하다가 골병이 들어서 뼈마디마다 진주가 생긴 넘들이 다비하면서 남긴 사리가 밤만 되면 기나와서 유령처럼 춤을 춘다. 속고 산 인생, 아니 중생이 서럽고 억울해서.
달마가 저걸 선의 종지라고 척 내농께네 천하의 돌중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환호를 지르고 난리가 났지. 마치 구름이 이번 연말에 '오페라의 유령' 영화보고 감명받은 것 맹쿠로 뻑 가고 자빠진 거다. 왜냐? 공부 안 해도 된다 소리였거든. 그 골치아픈 방대한 경전들을 날마다 디다보고 궁리하고 이해하고 그 이치에 통하려 하니까 안 그래도 근기가 80% 부족한 넘들이 죽을 맛이었는데, 달마 얘기를 들어봉께네 망구에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거든.
척 한 손가락 가리켜 지 마음만 보면 된다 카능기라. 할배 할매, 얼라들까지 난리가 났제. 일자무식 영감 할매도 할 수 있고, 영희도, 철수도 계남이도 할 수 있는 일인게라. 지 마음 지가 보는데 그거 못할 시러배 아들넘이 어디 있겠노? 부처가 되고 안되는 건 두고 볼 일이고, 당장에 마음 디다보는 거야 식은 죽 먹기제. 그래서 너도 나도 팔만대장경을 갇다 버리불고, 그날부터 벽보고 앉아서 눈감고 용을 쓰기 시작했는게라. 그노무 마음이 무엇인지 그거 함 보자꼬.
그런데 달마가 이 어린 중생들한테 미리 워닝을 안 해준 게 있었다.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한번보고 나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안 가르쳐 준 것이다. 정말 나쁜 넘이다. 지는 알았으면서 안 가르줬다. 그 후 천년 동안 줄잡아 1만명의 벙어리가 생겼을 뿐 부처는 단 한명도 안 나왔다. 어버버나무아미 벙어리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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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달마가 내민 선의 종지란 것이 일리가 있다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달마는 최소한 했어야 할 일이 있다. 저 소리를 하려면 달마 본인은 자기 마음을 척 한번 바로 보고 성불을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아무리 자비심이라고는 개미 뒷다리 비듬만큼도 없는 사람이라 쳐도 구르미처럼 간절하게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마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보라는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도대체 마음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것을 주의하면서, 어떤 부작용을 피하면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빠르게, 또 쉽게 그것을 볼 수 있는지 설명을 해주고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달마는 저 소리만 내질러놓고, 마음이 뭔지도 안 가르쳐줬다. 본성에 대해서 설명도 안했다. 대관절, 마음 속에 있다는 본성이 무엇이관데 그것을 보면 부처가 되는 건지 그 이유도 말을 안했다.
달마가 남긴 저서라고 하는 '혈맥론'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일언반구도 없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혈맥론'을 달마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유일하게 달마의 오리지널 창작으로 여겨지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망구에 씨잘떼기 없고 영양가 없는 소리만 지지 늘어놓은 것이 이입사행론이다.
"곧바로 가리켜 한 마음을 보라!" 억수로 쉬운 소리 같다. 그래서 땡중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것인데... 그러나 개뿔, 쉽기는 토끼머리에 뿔나는 게 쉽지, 마음을 보는 게 쉬울 리가 있나. 달마 지부터가 그노무 마음을 보는데 장장 9년 동안이나 벽보고 앉아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나 같은 중생은 도대체 몇 년이나 벽을 보고 눈감고 앉아있어야 되겠노? 한 백년 버티면 되겠나? 도대체 마음이라는 물건이 무엇이관데, 그것을 보는데 9년씩이나 그 지랄삥을 떨고 앉았노 말이다.
지는 그랬으면서, 얼레, 남들보고는 아주 쉽게 말한다. 그네 타는 춘향이 고쟁이 훔쳐보는 일 정도 되는 듯이, 한 손가락 척 가리켜 지 마음을 보면 바로 부처니라 하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했던 거였다. 그 마음 하나 보는 일이 팔만대장경 디벼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힘든다는 사실이다. 힘든 건 감수하겠는데 그 지랄염병을 하고도 얻는 게 하나 없는 도로묵 꽝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중들이 이 겨울에 뭐하는지 아나? 동안거한다. 동안거 뭔지 모르지? 선방에 기드가서 봄소식 올 때까지 버티는 거다. 요즘은 그정도 해갖고 중노릇 못한다. 중도 아무나 하나? 요즘은 아주 봉안거라고 최신 시스템이 도입됐다. 아예 선방 문을 밖에서 잠가분다. 그리고 개구멍으로 세끼 공양만 넣어준다. 수행이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감옥놀이 하는 거다. 부처님이 이 꼬라지를 보시면 기함을 하실 거다. 무슨 노무 마음 하나 보는데 밖에서 방문을 잠가놓고 개구멍으로 밥을 넣어주냐? 차라리 교도소를 가라. 도 닦는 데는 그보다 좋은 곳이 없다.
해마다 따뜻한 봄이 오면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기도 전에 동자승 대갈통만한 자물통을 채워놨던 선방의 문들이 열리면서 까까중들이 기나온다. 그런데 뭘했는지, 그 컴컴한 방구석에서 무슨 지랄염병을 하다가 나왔는지, 봤다는 넘 하나도 없다. 그 수많은 세월을, 그 많은 절마다 선방마다 빼곡 들어차서 마음을 본다나 뭐라나 했으면 한 해에 열댓명은 '왔노라 봤노라 깨쳤노라!'하고 선방문을 걷어차고 중간에 튀나오는 넘이 있어야 될 거 아냐. 그러나 눈물겹게도 우리의 선불교 역사 천년에 그런 넘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동안거, 하안거, 봉안거가 끝나고 수많은 까까머리가 햇볕 속으로 나오지만 그 중에 본 넘은 없다. 그래 디다보니 보이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우찌 생겼데? 본성은 뭐하디? 물어보면 다 꿀먹은 벙어리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럴거면 그 짓을 뭐하려 하노?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봐라. 부처님 말씀이나 읽고 생각해라. 무슨 뜻인가 궁구해서 이치에나 통할 생각을 해라. 달마가 해놓은 짓이 이거다. 내말 틀리나? 마음을 봐? 지랄한다캐라. 미련곰탱이 콘테스트고, 깡다구 올림픽이지 그게.
구름~~ 2005-01-13 23:5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