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천하를 다스린 황제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지혜로운 성인으로, 때로는 잔인하고 냉혹한 폭군으로 그려지는 이들, 황제를 주인공으로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고, 거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계인물>, <인물과역사>에서는 이처럼 한 시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한 여러 황제들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부터 진시황, 칭기즈칸에서 나폴레옹까지, 역사 속 황제들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캐스트 원문보기 : 세계인물 -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는 ...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발하던 이집트를 어렵지 않게 정복했다. 그는 이집트에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상업과 행정 중심지 구실을 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이집트를 떠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10월 티그리스 강 동쪽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3세와 다시 결전을 벌였다. 철저하게 패배한 다리우스 3세는 몇 달 뒤 파르티아 사막에서 자신의 친척인 박트리아의 왕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캐스트 원문보기 : 세계인물 - 진시황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애써 천하를 통일해 놓고도 겨우 50세의 나이로 객사했으며, 곧바로 제국이 무너지고 천하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그가 당치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불멸하리라 주장했고, 자신은 1대 황제이며 다음은 2대, 3대…로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했다. ....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한고조 유방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서민 출신이 황제나 왕이 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 최근 임꺽정 일당을 “조선시대의 비정규직”으로 조명한 경우가 있는데, “유방과 그의 떨거지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성공한 비정규직, 백수 집단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출신이 비천했기에, 이들은 종종 무례한 행동도 했다. 한나라의 통일 후 한동안은 궁중 연회를 하면 저마다 취해서 옥좌 밑에 드러누워 자거나, 궁전 기둥을 칼로 치거나, 오줌을 갈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하지만 역시 오만했던 항우와는 달리 진짜 인재는 깍듯이 모실 줄 알았다는 점이 달랐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고 불리는 군 통수권을 가졌으며 ‘프린켑스’라는 원로인 1인자 칭호를 받음으로써 귀족 원로원을 장악하였다. ... 그는 언제나 카이사르의 후계임을 자처하였으며 카이사르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후계를 직접 정함으로써 권력의 상속도 제도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의 후손을 자처하는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실제적인 황제국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계속 평화를 누리며 발전하였다. ... 이 시기를 팍스로마나라고 한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수문제 양견
수문제에게는 또 한 가지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정치를 독고황후와 함께 의논하고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여 매사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 부부를 ‘두 분의 성인’이라 부르고, 독고황후가 죽자 “묘선보살의 현신이셨다”는 극존칭이 바쳐지기도 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여성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일은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졌다. ... 그러나 독고황후는 실제로 유능하고 헌신적인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사치를 금지하고 법령을 엄격히 세우는 등 수문제의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그녀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샤를마뉴
샤를마뉴 자신은 끝내 문맹으로 남았지만(글을 배우려고 노력은 했다고 한다), 그는 문치에도 각별히 힘을 기울였다. 수도 아헨에 학교를 세우고 곳곳의 수도원에 학교를 부설하는 일을 장려했으며, 고전 문헌을 널리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제국의 바깥에서도 널리 학자를 초빙했는데, 그 중에서 영국 출신의 앨퀸은 샤를마뉴에게 ‘스승’으로 대접받는다. 이런 샤를마뉴의 노력으로 서로마 멸망 후 오랫동안 황량해졌던 서유럽의 문화는 모처럼 부흥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대를 맞는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송태조 조광윤
뜻밖에 전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그 기회를 활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문제나 송태조나 똑같았다. 하지만 송태조는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시종훈과 그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했다. 또한 한고조나 명태조 같은 창업황제들과 달리, 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시키지 않았다-굳이 따지자면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 피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파문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만나줄 때까지 내복바람에 금식을 하며 3일을 버텼다. ...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 황제의 신분을 떠나 성문 밖에서 추위에 떠는 신자를 자비의 교황이 내팽개쳤다는 오명을 덮어쓸 수 없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하는 수 없이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하인리히 4세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걸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 하인리히 4세를 참석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파문을 거둬들였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칭기즈칸
1206년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할 참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칭기즈칸이었다. ...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호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샤 자한
뭄타즈 마할은 1631년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부르한푸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 샤 자한의 슬픔은 깊고도 또 깊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비통에 잠기기를 수십 일,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바뀔 정도였다. 샤 자한은 대리석, 벽옥, 수정, 진주, 에메랄드, 터키옥, 청금석, 사파이어 등 값비싼 자재와 장식재들을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와 전대미문의 크고 화려한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반열에 드는 타지마할이다.
캐스트 원문보기 : 세계인물 - 영락제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의 도적놈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락제는 소리질렀다. “네가 정녕 구족을 멸해야 말을 듣겠느냐?” 방효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맞받았다. “구족이 아니라 십족을 멸한다 해도 역적과 손잡을 수는 없다!” ... 영락제는 문자 그대로 구족을 멸했을 뿐 아니라 혈연관계가 아닌 제자, 친구, 선후배 등 방효유와 친분관계가 있다 싶은 사람도 ‘열 번째 일족’이라 하여 모조리 처형장으로 보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벌이었다.
캐스트 원문보기 : 세계인물 -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은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혁명의 원칙과 성문법과 관습법에서 보존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의 문헌으로 작성했다. 모두 102번의 법률 회의에서 전쟁을 하느라고 바쁘신 몸인 나폴레옹은 57번 이상을 참석했다. ...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민법전]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민법전]은 나의 행정재판 절차를 글로 옮긴 것이며 장관들과의 서신을 수집한 것이다. 행정가로서, 또한 광대한 ‘프랑스 가족’을 재조직한 자로서 행한 그 모든 일들이 … ”
캐스트 원문보기 : 인물과역사 - 빌헬름 2세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처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세르비아에게 보복할 것이며 이를 지지해 달라는 친서를 보냈고, 빌헬름 2세는 “적극 지지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 세르비아에게 안전보장을 해주었던 러시아는 개입을 선언했고, 프랑스도 러시아와의 동맹에 따라 개입할 뜻을 밝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베를린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으나, 황제가 이미 오스트리아 적극 지지 의사를 밝혀 버린 데다 유람 중인 황제와 연락이 닿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 주전론에 불타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일체의 협상을 거부함으로써 7월 24일,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발행일 201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