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주암댐테마펜션캠프는 주암댐 건설로 사라진 마을을 기리기 위해 수몰 마을 이름을 따서 방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 주암면과 송광면에 있는 마을이지만 이외에도 보성 문덕 등 더 많은 마을들이 있습니다 오봉리 옥령마을
○오봉리 옥령마을 : 1734년경에 우편에는 안울치(內吾)란마을이 있었고 좌편에는 박울치(外吾 )란 마을이 있었으며그 중간에 마을을 설촌하였으나 1962년도 행정구역 개편에따라 중촌과 안울치를 합하여 옥령이라고 하였는데 마을 뒷산 주령이 옥녀봉이라 하여 뒷 산명을 따라 옥령이라 불렀다 한다. 주임댐 수몰직전 36호 196명이 거주하였으며. 수몰 후 주암면과 경계지점에 이주민 일부가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음. 오봉리 신월마을
○ 오봉리 신월마을 : 약250년전 칠원제씨(漆源諸氏)가 터를 잡아 살면서 부르기를 “안울태”라고 하였으며 그 후 최씨 임씨 김씨 등이 부유하게 살다가 마을이 갑자기 폐촌이 되어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新基)라 불러왔으나 196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을이름을 새로 뜨는 달이 커가면서 밝혀주라는 뜻에서 신월이라 하였고. 주암댐 수몰직전 35호 100여명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 되었음. 신흥리 신흥마을
○ 신흥리 신흥마을 : 단양우씨들에 의해 설촌되었고 지명을 도장동으로 불러오다가 200여년(1800년대)전에 신흥으로 개칭되었으며 1949.8.26일 여순반란사건의 폭도들에 의해 전 마을이 소실되었으며 1950년경 재건하였으며 마을 입구에 오미실 마을이 있었다. 수몰직전 87호428명이 거주하였으며, 수몰 후 주암댐 이주단지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신평리 고대마을
○ 신평리 고대마을 : 780여년 (1210년)전 송광사 중창이후 고대마을 건너편에 경대마을이 설촌되었고 경대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 마을이 성촌 되면서 건너편 경대마을은 점차 폐촌되었으며 1948년 여순반란 시 마을이 전소 되었다가 1949년부터 마을을 복구하였으며, 수몰직전 77호 453명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낙수리 낙수마을 ○ 낙수리 낙수마을 : 1361년 설촌 당시 씨족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살면서 청운(靑雲)이라 불리어 졌는데 개촌 자가 떠난 뒤 김해김씨가 살았고 고려 공민왕10년에 홍건적 난을 당하여 난을 피하기 위해 이마을 앞을 지나가면서 낙수리로 개칭하였다 하여 낙수라 부르게 되었으며 수몰직전 165가구 888명이 거주하였고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월산리 고부마을
○ 월산리 고부마을 : 삭시마을과 고부마을을 합하여 형성되어 있으며 그중 삭시마을은 1370년경 나주 나씨 나홍규가 개촌하면서 마을 지세가 활의 모양 같다고 하여 삭시라 불렀고, 고부마을은 1600년경 조선중엽에 김해김씨 김덕규가 들어와 설촌 하였다 하며 마을 좌편에 시루봉이 있고 그 밑으로 보성강이 흐르는데 그 중간에 가마쏘라는 쏘가 있어 가마솥에 시루를 걸어 떡을 찌는 형국이라 하여 마을지명이 된 것으로 추정하며 수몰 직전 56호 270명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 되었음 월산리 추동마을
○ 월산리 추동마을 : 추동과 토수 2개 마을을 합하여 추동마을(행정리)을 형성하였으며 조선조 중엽 제주양씨와 진주강씨양가가 처음 들어와 설촌한 마을이 어전이란 마을인데 농토가 부족하여 일부가 추동마을로 이주하여 살다가 6,25사변 후 어전마을이 없어지고 추동마을이 남게 되었음, 토수마을은 조양임씨 임계선이가 설촌하였는데 마을 형세가 토끼의 형국이라 하여 수염수자로 하여 토수(兎須)라 하였는데 일정시대에 토수(土水)로 개명하였으며 수몰직전 56호198명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월산리 사비마을
○ 월산리 사비마을 : 사비,반월,용수 3개마을을 합하여 사비마을(행정리)을 형성하였으며,사비라고 부르기 전에는 석현이라 하였는데 사비마을 뒷산에 4명의 왕비가 날 명당자리가 있다하여 사비라 불렀다 한다. 300여년 (1690년경) 전 전주이씨인 이이단이 우산리 외우마을에서 살다가 반월 앞들이 넓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뒷산이 반월형으로되어 있다고 하여 마을명을 반월이라 하였다, 용수마을은 300여년(1690) 전 밀양박씨가 최초로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수몰직전 58호335명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대곡리 대곡마을
○ 대곡리 대곡마을 : 조선조 10대 성중 원년에 창녕조씨일가가 우연히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가 그 후 조선조14대 선조 때 임진왜란의 재화를 입고 마을 앞 강을 건너 도롱동에 새터를 정하여 자연히 소개 되었다가 1600년경에 주암면 죽림리에 거주하고 있는 옥천조씨 趙齋亨이가 당시 지리학의 지사 이의신 선생의 지도를 받아 본 마을에 정착하여 큰 골짜기가 되므로 한실 또는 대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곡이라 하였으며 수몰직전 94호 495명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대곡리 도롱마을
○대곡리 도롱마을 : 1470년경에 창령조씨 曺燉 이가 이 마을 건너편 대곡리 대곡마을에 터를잡아 살다가 1490년경에 임진왜란 시 이 지역에 새 터를 잡아 살면서 도롱이라 부르고있다. 수몰직전 59호 292명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우산리 곡천마을 ○ 우산리 곡천마을 : 1500년경에 성명 미상의 목천장씨에 의하여 설촌되었으며, 꼭두네라고 불러오다가 한일합방 당시인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동리, 내우리,외우리,중우리,꼭두네 장산리와 송광면의 죽산리 일부를 합하여 찬 샘물이 있다 하여 한천리라고하였으며, 1973.7.1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승주군 송광면에 편입되어 우산리로 개명되었고1995. 1.1 도농통합으로 승주군과 순천시가 통합하여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로 되었음. 수몰직전 94호 452명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원 마을은 수장되고 마을 뒤 높은 지역만남게 되었음
우산리 내우마을
○ 우산리 내우마을 : 1614년에 죽산안씨 안방준 선생이 조선조 광해조 때 벼슬을 버리고낙향하여 이 마을에 터를잡고 설촌하였으며 그 당시는안소매라 불러왔다. (앞산이 와우형이라 하여 지명이 됐음) 마을 뒤에는 오봉산이 병풍처럼 가려져 있고 남으로는 토자 형의 덕봉산이 우뚝 솟아있고 북으로는 모후산이 높이 솟아 있으며 청룡등과 백호등이 좌우로 펼쳐있고 보성강과 동복천이 합류하여 대강이 마을앞을 구비쳐 흐르니 명지라 일컬으며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고 조선조 중세에 목미암 서재를 짓고 전라도 일대에서 많은 선비들이 유교의 도를 닦았으며왜정때는 벼슬상이는 물론 일부 창씨개명도 하니않은 충효가 많았다. 조선조 시대는 보성군 문덕면 우산리로 불리다가 일제시대부터 보성군 문덕면 한천리라 개칭되었으며 1973.7.1 행정구역 개편으로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로 개명과 동시 승주군에 편입되었다. 1995.1.1 도농 통합으로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로 되었음.1949.10월 여순반란 후 마을이 전소(목미암2동-서당, 농가2동 미소) 되었으나 당시 백선엽 대장 휘하 병력과복구비 일부를 지원받아 주민노력으로 3년에 걸쳐 다시 복구하였다. 수몰직전 51호가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마을 뒤 높은 지대만 남게 되 었음.
오봉리 오리치마을 오봉리에는 옥령 오리치 신월3개마을이 있었으며 옥령과 오리치를 합하여 옥령이라는 행정마을로 불렀음, 1734년경에 우편에는 안울치(內吾)란 마을이 있었고 좌편에는 박울치(外吾 )란 마을이 있었으며 그 중간에 마을을 설촌하였으나 1962년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촌과 안울치를 합하여 옥령이라고 하였는데 중촌에 해당하는 마을이 오리치이며 박울치에 해당하는 마을이 옥령임, 뒷산 주령이 옥녀봉이라 하여 뒷 산명을 따라 옥령이라 불렀다 한다. 주암댐 수몰직전 옥령 오리치 2개 자연마을 36호 196명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우산리 외우마을 ○ 우산리 외우마을 :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된 마을로써 1624년경에 내우마을이 설촌된 후 에 서울에서 거주하는 적신 이우첨과 한찬남 두사람이 안방준과 사귀고자 벽불견남귀하여 이곳에 머물러 집을 짓고 설촌하였으며 이 마을을 밭소매라 하였다. 외장마을은 1500년경에 진주하씨가 설촌한 마을로 병풍같은 조계산 줄기를 타고내려오다 보성강에 이르러 그 가운데 조그마한 들이 있어 노루가 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산이라는 마을명이었는데 1949년 마을이 전소되어 3-4년에 걸쳐 다시 복구하였다. 우산리 외장마을 ○우산리 외장마을: 1700년경에 장수황씨에 의하여 설촌되었으며 외장마을과 동일하다는 뜻에서 안노리산이라고 불리워졌으며 마을됫산에 망일봉이라는 산이 있어 이산 정상에 오르면 벌교앞바다와 무등산 정상이 보이며 망일봉 중턱에 차가운 겨울에도 물이 얼지않는 곳이 있으며 1973.7.1 행정구역 개편으로 보성군 문덕면 한천리가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로 개명 편입되었다가 1995.1.1 도농통합으로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순천시로 편입되었 음. 수몰직전 52호 305명이 거주하였으며 외우마을과 외장마을은 완전 수장되었고 지금의 마을은 수몰 후 이주하여 형성 되었음.
월산리 반월마을
월산리(법정리)는 3개 행정리(고부,추동,사비)로 형성되었고 사비는 3개 자연마을 (사비,반월 용수)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반월은 300여년 (1690년경) 전 전주이씨인 이이단이 우산리 외우마을에서 살다가 반월 앞들이 넓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뒷산이 반월형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 마을 명을 반월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월산리 토수마을 월산리(법정리)는 3개 행정리(고부,추동,사비)로 형성되었고 추동은 2개 자연마을 (추동,토수)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토수마을은 조양임씨 임계선이 설촌 하였는데 마을 형세가 토끼의 형국이라 하여 토끼 토 수염 수 자로 하여 토수(兎須)라 하였다가 일정시대에 토수(土水)로 개명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월산리 삭시마을 월산리(법정리)는 3개 행정리(고부,추동,사비)로 형성되었고 고부는 3개 자연마을 (삭시,월산삼거리, 고부)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삭시마을은 1370년경 나주 나씨 나홍규가 개촌하면서 마을 지세가 활의 모양 같다고 하여 삭시라 불렀고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신평리 금평 마을 신평리(법정리)는 3개 행정리(외송,평촌,고대)로 형성되었고 고대는 2개 자연마을 (고대,금평)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금평마을은 3거리(낙수, 송광사, 대곡방향)에 위치하고 780여년 (1210년)전 송광사 중창이후 고대마을 건너편에 경대마을이 설촌되었고 경대촌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 마을이 성촌 되면서 건너편 경대마을은 점차 폐촌되었으며 1948년 여순반란 시 마을이 전소 되었다 복구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덕산리 죽산 마을
덕산리는 죽산 덕동 2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고 덕동 마을은 수몰되지 않았으며 죽산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정자 밑에서 아이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개촌 당시 무동정(舞童亭)이라는 마을로 불러졌는데 서울 가는 길목이어서 마을 건달들이 기생과 풍악을 즐기면서 텃세를 부려 행인들을 말에서 내려 걸어가게 하였고 또한 소금장수도 오금이 펴지지 않은 채 지나간다는 전설이 있었음, 조선조 시대에는 노변(路邊)마을 역촌(驛村)이라 경시하는 바람에 마을 터를 옮겨 신촌이라 부르다가 1910년경 죽산이라 개칭하였다, 마을 옆 당산나무 밑에 까마귀 비석이 있어 행인들이 고개를 갸웃하게 하였으며 지금은 수몰이 되고 마을 뒤 높은 지대로 이주하여 몇 가구가 살고 있음.
봉산리 봉산마을
봉천과 산척 2개 마을을 합하여 봉산리라 하였는데 산척은 수몰되지 않았으며 봉천은 지금부터 약 200여년(1800년)전 갱틀에서 고씨와 박씨 5호가 살면서 설촌 되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갱틀이란 마을은 망한다하여 지금의 마을 터를 잡아 설촌 하였다. 마을 뒷산이 새의 꼬리 모양 같고 마을 앞의 깨끗한 물이 흘러 봉천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완전 수몰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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