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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집이 불타고 있음을 아는가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화택(火宅)과 같거늘 거기에 참아 오래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으랴.’ K수심결 1장에서 L
수심결(修心訣)은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스님의 저술이다. 보조국사는 밖으로는 계속되는 무신들의 정변의 와중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리어 종교적 기강이 해이해지고 안으로는 선교의 대립으로 심한 갈등 속에 있던 고려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일으키고 평생을 일관하여 ‘마음 닦는 수심(修心)’ 불교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분이다.
보조국사는 수심결의 맨 첫머리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온통 하나의 불난 집이라는 것을 애타게 가르쳐주려 하고 있다. 물론 이 불은 119 소방서에 연락하여 끌 수 있는 그런 불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욕심, 걱정, 번뇌의 불이다.
대산종사께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60억 인구의 머리에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수양을 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신 바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과연 물질적으로 풍요해진만큼 우리의 행복지수도 아울러 상승하고 있는가? 물질의 소유와 사회적 지위가 행복의 대명사일까? 정확한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직장에서 진급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진급하지 못함을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문제인가.
요즘 들어 물질문명의 한계를 깨닫고 선이나 명상, 요가 등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크게 확산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불안, 초조, 욕심, 분노와 원망의 불길에 휩싸여 있음을 깨닫고 이 불을 꺼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이제 보조국사와 함께 그 불을 끄는 방법을 찾아 행복한 여행길을 떠나보자.
번뇌의 불길을 꺼줄 소방수
‘윤회함을 면하고자 할진대 부처를 구함만 같지 못하고 만일 부처를 구하고자 할진대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 찾으리오.’ <수심결 1장 중>
탐·진·치의 무명심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번뇌의 불길은 물을 끼얹어 끌 수도 없고 그런다고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끌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번뇌의 불길을 일시에 진화시킬 특급 소방수는 누구란 말인가.
보조국사의 대답은 ‘부처를 구하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이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고 자유의 세계,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바로 탐?泰弊苔÷? 씨앗을 제거하여 이 활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잠재우는 것이며, 그 길을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부처란 과연 무엇일까? 대산종사께서는 부처를 이해하는 정도를 쉽게 단계적으로 설명해주셨다.
사찰에 모셔진 등상불을 부처로 여긴다면 초등학교의 수준이며, 역사적 인물 고타마 싣달타를 부처로 여긴다면 중학교의 수준, 깨달은 사람은 모두 부처라고 여기는 정도는 고등학교 수준, 깨달은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부처라고 여긴다면 대학교 수준, 마지막으로 마음이 곧 부처라고 여기는 사람이 최고의 단계인 대학원 수준이라 하셨다.
보조국사 역시 마음이 곧 부처임을 힘써 강조하고 있다. 도대체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며,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소유가 아니라 마음임을 잘 알 수 있다. 마음에 욕심을 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자재하고 보면 그것이 곧 여의보주라 하지 않았던가.
모래를 쪄서 밥을 짓지는 않는가
‘부처를 구하고자 하되 자기의 마음을 관(觀)하지 아니하나니’ <수심결 2장 중>
번뇌의 불길을 끄기 위한 최고의 유일한 방법은 부처를 구하는 것이며 부처는 곧 마음임을 알았으니 부처를 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마음을 찾아야 한다. 마음을 찾다니 내가 언제 마음을 잃어버렸던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정녕 내 마음을 잘 관찰해본 적이 있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좋아하며, 자각적인 성찰 없이 판단하고 결정하며, 근거 없는 편견을 주관이라 내세우며, 으레 그래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고 찾아야 한다.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곧 챙긴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요란하거나 어리석으며 그르지는 않은지 챙겨야 한다. 신?兌筋汰핀太봉막? 나아가는지 불신?跆슴煬搭ど殆荑? 빠져 있지는 않은지 챙겨야 한다. 자력에 바탕하고 있는지, 잘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있는지, 잘 가르치려는 자세는 되어있는지, 공익에 바탕하여 생각하는지 늘 챙겨야 한다.
이렇게 챙기고 또 챙길 때 나의 참마음을 알게 되고 마침내는 자유자재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대종사님의 교법은 마음을 찾고, 챙기며, 마음 쓰는 법을 훈련하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조국사 또한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티끌 같은 겁(劫)을 지내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불사르며 뼈를 으깨어 골수를 꺼내는 등의 고행을 하며, 피를 뽑아 경전을 쓰거나 결코 눕지 아니하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모든 경전을 다 읽는 등 온갖 수행을 닦는다 할지라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만 괴로울 뿐이라 하였으니 정말 깊이 명심할 일이다.
수심결 강의 ④
나에게 그런 보배가 있다니
‘널리 일체 중생을 보니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어 있다.'<수심결 3장 중>
번뇌의 불길을 끄고 마음의 평화,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은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며, 부처는 깊은 산 속이나 두꺼운 경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임을 알고 내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많은 법문이나 경전을 공부하고 법 갖춘 스승을 찾아 지도받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모든 경전과 법문이 곧 참마음을 찾는 길을 가르쳐주고, 스승은 곧 참마음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전과 법문을 공부하되 나의 참마음을 찾지 않고 한갖 지식을 갖추는 것으로 끝난다면 부처를 찾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참마음을 찾는데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나의 참마음만 알고 보면 모든 경전과 법문이 그 속에 있다. 그래서 보조국사도 ‘다만 자기의 마음만 알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수 없는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의지를 구하지 아니하여도 얻는다' 하였으며, '널리 일체 중생을 보니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어 있다'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강조 해주셨다.
견성을 너무 멀리 생각할 것이 없다.
견성이란 나의 본성 즉 나의 참마음을 제대로 안다는 뜻이다. 게임만 하고 있는 나의 컴퓨터나 프로그래밍, 그래픽, 자료관리, 자료검색 등 다양하게 활용하는 저 사람의 컴퓨터나 똑 같은 컴퓨터임을 알아야 한다.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은 비하건대 거부 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재산으로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다 하신 대종사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이미 나는 부처?
심성이 물듦이 없어서 본래에 스스로 두렷이 이루었나니, 다만 망연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니라. <수심결 3장 중>
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로 밖에서 찾지 말고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피라는 보조국사의 간절한 부탁이 계속된다.
마음 바탕이 밭이라면 그 밭에서 생장하는 채소나 잡초는 마음 작용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내가 경작하는 밭이나 부처가 경작하는 밭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밭은 잡초만 무성하니 나의 밭에서는 좋은 채소를 재배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나의 밭이나 부처의 밭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기름진 땅이다. 그 사실만 깨닫는다면 곧 바로 유용한 채소를 재배하여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조국사는 '일체중생의 가지가지 환화가 다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며 느끼는 마음 작용들이 바로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는 마음 바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심성은 본래 물들지 않고 본래에 스스로 두렷이 이루어져있으므로 다만 망연만 여의면 곧 여여한 부처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망연이란 경계를 대할 때 아무 근거없이 자의적이며 임의적으로 짓는 우리의 생각들을 말한다. 그것은 곧 번뇌이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 스스로 나의 기대에 못 미친다 하여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두가 망연이다.
그러나 보조국사가 말하는 망연은 마치 묵은 때가 잔뜩 낀 거울을 청소하듯 어떤 힘든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태양이 솟으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듯 마음을 밝히면 저절로 없어지는 헛꽃일 뿐이다.
수심결 강의
왜 마음을 찾는가?
'능히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은 반드시 너의 불성이라' <수심결 4장 중>
보조국사가 지금까지 밝힌 수심결의 요지는 '마음이 곧 부처이니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아라'는 것이다.
수심결의 주제이자 부처의 본질인 마음에 대하여 보조국사는 '불성'이라고도 표현하고 '한 물건(一物)'이라고도 표현하며 '본래심' 또는 '형상없는 것(勿形段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음이란 한 단어로 개념지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내 안에 있다면 범부인 나에게도 분명 있을 것인데, 도대체 어디에 있기에 나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이는 보조국사 스스로 마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닦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수행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보조국사의 대답은 평범하다 못해 싱겁기 그지없다.
부처의 본질인 마음 곧 불성은 어디 성스럽고 깊숙한 어느 곳에 가만히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하루 종일 보고, 듣고, 느끼고, 지각하는 것 일체가 바로 불성이라는 것이다.
배고프고 목마른 것, 춥고 더운 것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요, 법을 설하고 듣는 것, 나아가서는 좋을 때 기뻐하고, 싫을 때 성내고 짜증내는 것도, 바로 다름 아닌 마음이요 불성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어이없다.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곧 마음이요 불성이라면 굳이 마음을 찾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을 찾으라고 그렇게 간절히 외치는 뜻은 무엇일까?
수심결 강의
수행의 목적
이른바 형상할 수 없는 것(勿形段者)은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또한 너의 본래심이니라. <수심결 4장 중>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곧 마음이요 불성이라면 굳이 마음을 찾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을까?
마음을 찾으라고 그렇게 간절히 외치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수행자들이 나아가야 할 공부 목표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정확하고 명확한 목표의식을 깨우쳐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행의 목적이 호풍환우하거나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세계를 보는 것이거나 신비한 어떤 능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대종사께서도 “수도인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며, 생사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며, 죄복의 이치를 알아서 죄복을 임의로 하자는 것”이라 하여 ‘마음’을 강조하셨다.
생사를 자유하고 죄복을 임의로 하는 것 또한 마음의 근본을 알게 될 때 가능한 것이다. “각자의 마음 근본을 알고 그 마음을 마음대로 쓰게 되어야 의식주를 얻는 데에도 정당한 도가 실천될 것이며, 생로병사를 해탈하여 영생의 길을 얻고 인과의 이치를 알아 혜복을 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종사의 가르침 또한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작용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상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하면 형체가 없는 마음이야말로 부처를 부처라고 부를 수 있는 표지가 되는 것이며 곧 내 자신의 본래심이다. 그러므로 결코 바깥을 향하여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하겠다.
수심결 강의
불성은 작용하는 데 있다
불성은 작용하는 데 있다
‘왕이 만일 작용을 하시면 불성 아님이 없거니와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체(體)도 또한 보기가 어렵나이다.’ <수심결 5장 중>
미묘한 마음의 세계로 보조국사의 안내를 따라 계속 여행해보자.
마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보조국사는 경덕전등록에 나오는 이견왕과 바라제 존자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바라제 존자가 불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남천축의 이견왕을 교화하기 위하여 찾아가자 이견왕이 물었다.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가 대답하기를 “견성을 하면 부처입니다.” 왕이 묻기를 “대사는 견성하셨습니까?” 존자 답하기를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왕이 묻기를 “성품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존자 답하기를 “작용하는데 있습니다.” 왕이 묻기를 “무엇이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 답하기를 “지금도 작용을 하건마는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왕이 묻기를 “그러면 나에게도 있습니까?” 존자 답하기를 “왕이 만일 작용을 하시면 불성 아님이 없거니와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체(體)도 또한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이견왕과의 대화에서 바라제 존자는 우리의 육근을 통하여 불성이 출현하며, 아는 사람은 이를 불성이라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고 한다고 깨우쳐주고 있다.
이른바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움직이는 등의 육근 작용이 곧 불성의 작용이라는 말이다. 불성은 곧 성품이요 본래 마음이다. 본래 마음이 별도로 있고 비본래적인 거짓 마음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인데 우리가 미혹되어 잘못 알고 있을 뿐인 것이다.
네가 곧 부처
또 어떠한 중이 귀종 화상에게 묻되 “무엇이 부처이오니까.” 귀종이 이르시되 “네가 지금 믿지 아니할까 염려하노라.”
중이 이르되 “화상의 진실하신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아니하오리까.” 대사 이르시되 “곧 네가 부처니라.” <수심결 5장 중>
보조국사는 마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이견왕과 바라제 존자와의 문답을 통해서 우리의 육근 동작이 모두 불성의 작용임을 설명한 바 있다.
이번에는 선문염송에 나오는 귀종화상과 그의 제자와의 문답을 소개하고 있다.
제자가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는 질문에 “네가 곧 부처이니라”고 답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견왕과 바라제 존자와의 문답은 퍽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반하여 귀종화상과 제자와의 문답은 매우 직관적이다.
그러나 이견왕과 바라제 존자의 문답을 이해했다면 귀종화상과의 문답은 자연스런 결론이 된다.
우리의 육근 동작이 모두 불성의 작용이라면 당연히 그 작용의 주체인 나는 부처일 수밖에 없다.
대종사께서도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은 비하건대 거부 장자가 자기의 재산을 자기의 재산으로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다고 하셨다.
나의 마음이 불성의 작용이요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는 지혜 덕성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보조국사는 왜 이렇게 마음의 이해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마음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올바른 수행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교(禪敎)의 갈등과 세속적 이욕에 관심이 집중된 당시 고려불교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행자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