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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의 악인을 성인으로 만든 千聖山
밤새 비가 내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수 소리의 강도에 신경이 갔다.
푹 잠이나 자라는 잔비일까.
머물러 있으라는 이슬비일까.
어차피 길 떠나야 할 나그네 어서 가라는 가랑비겠지.
주말답게 만원 사례인 찜질방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느니
비맞고라도 산으로 들어가는 게 山나그네의 순리리라.
황토 찜질 덕일까?
오늘 중으로 부산 땅을 밟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 덕이겠지.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비를 맞으며 어둠 속 길을 떠나는데도
늙은 이의 걸음이 의외로 가벼웠다.
이른 새벽의 질주하는 차량 행렬이 부산권임을 실감케 했다.
안적고개에 오르기 위해서는 택시 이용이 불가피했다.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서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탔다.
첫 손님이 멋장이 山할아버지여서 기분이 좋다며 요금을 조금만
받겠다는 택시 기사 쇠돌이(金石岩을 그렇게 부른다고).
그는 후한 육덕에 선질형(善質型)의 인상대로 젊은 이 답잖게
너그럽고 여유로워 보였다.
곧 모범택시 기사(best driver)가 되고 개인택시도 갖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쯤은 택시 주인으로서 한층 품위있고 내실있는 선행을
하고 있을 그를 그려 본다.
참으로 기분 좋은 상상이다.
천성산 정상
안적고개에서 김석암이 축원한 대로 비가 그치고 운애도 걷히고
겨울답잖게 따스하여 산행하기엔 최적의 날씨가 되었다.
늙은 山나그네가 누릴 행복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싸인들이다.
백두대간 조령산 연릉의 축소판 같은 암릉과 영남알프스 억새
능선의 연장선인 낙동정맥은 천성산(千聖山)으로 이어진다.
천명의 악인을 성인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산이다.
이 즈음에는 비구니 '지율'의 경이로운 단식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생명과 환경 7번 글 참조)
고속철도는 천성산 외에도 수 많은 산들을 관통하고 있다.
고속도로 또한 무수히 많은 터널을 통해 뻗어 있다.
가히 터널의 나라 스위스에 버금갈 정도다.
그 분야의 식견이 얕아서 일까.
왜 천성산만 중요하다는 걸까?
겁 주는 원효산 지뢰밭
천성산은 원효산으로 이어진다.
922m 원효산 중턱의 원효암 현판이 '千聖山元曉庵'으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지도에 922m 천성산으로 표기된 걸로 미루어
이 두 산은 본래 하나의 천성산이었으리라 어림된다.
다만 군 주둔으로 정상에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현 위치에
천성산 표석이 서있게 된 것 아닐까.
아뭏든 산 정상의 공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산을 좌로 옆돌아
가도록 철조망 울타리와 밧줄이 설치되어 있다.
<이 지역에 지뢰(mine)가 매설되어 있으니 접근을 금지함
DO NOT APPROACH>
원효산의 경고판과 그림 / 도처에 세워 있다.
경고판과 겁주는 그림이 도처에 박혀 있거나 줄에 걸려 있다.
군 작전지역 근처에서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하다가 지뢰를 밟아
사망하거나 치명적 중상을 입은 이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지만
막상 경고지역을 통과하는 동안은 쭈삣하고 몹시 긴장되었다.
저리 많은 지뢰를 정말 매설하였을까?
혹여 폭우에 쓸려 산길로 굴러 내려와 숨어 있으면 어쩌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휴대전화의 통화가능 여부까지 확인한 걸
보면 나는 겁이 되게 많은 늙은 이인가 보다.
정상까지 올라온 군도로 상에 도착해 비로소 심호흡 한 번 했다.
(지뢰의 공포는 훗날 한북정맥 수피령 ~ 광덕산 구간에서 다시
체험해야 했다)
원효암의 동지 팥죽 한 그릇
산 아래 안부의 많은 차량에 깜짝 놀랐다.
아뿔싸, 오늘이 12월 22일 일요일 동지가 아닌가.
원효암의 동지 팥죽공양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온 신도들의
차량이며 차들은 연달아 올라오고 있었다.
저 차량들이 천성산 원효암 명성의 가늠자리라.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 심산 고지대 암자에서는 스피커를 통해서
스님의 염불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일이 호명하며 축원하는 내용은 얼핏 들어도 이승의 축복과
극락 왕생인 듯 했다.
동지날 팥죽공양 행사의 주된 타아겟(target)은 유래대로 역질의
추방과 횡액의 접근 금지인데 세월 따라 많이 다양해진 것인가.
한 신도가 멀찍이 있는 내게 숫기를 불어 넣으며 안으로 들였다.
이 새 저 새 먹새가 최고라고?
식당, 주방, 마당 가릴 것 없이 모두 팥죽 먹기 삼매경이었다.
애기동지도 아닌데 팥죽 공양받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을까.
(음력 11월 초순의 동지를 애기동지라 하며 이 해에는 가정에서
팥죽을 쑤지 않고 사찰의 동지공양을 받는 것이 전래의 풍습이다)
11시가 넘었는데도 어제 밤의 과식 영향인지 아직 시장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군침은 도는 듯 했다.
지긋한 보살이 초췌한 큰 배낭의 늙은 이를 챙겨 줬다.
시원한 동치미와 따끈한 팥죽 한 그릇에 배가 부른데도 보살은
더 먹으라며 새알심을 담뿍 가지고 왔다.
나이대로 먹는 거라 하시며 새알심을 넣어주시던 내 어머니!
뒷 북치듯 사후에 얻어 먹긴 간혹 했지만 동지 당일에 팥죽 먹기는
어머니 세상 뜨신 후 처음이라 기억된다.
생전의 어머니는 동지에 팥죽 쑤시는 일을 거른 적이 없다.
팥죽의 유래는 차치하고 비록 미신이나 속설에 불과하다 해도
절기 따라 좋다는 음식 만드는 일을 빼뜨리지 않으신 어머니!
어머니의 가족 사랑은 가이 없이 지극하셨다.
아! 금정산이 보인다.
원효암의 동지 팥죽 한 그릇이 사모의 정을 간절하게 했다.
어머니가 함께 하시는 정맥길임을 다시 확인하며 재촉한 걸음을
정맥 한 복판의 군 부대가 막고 나섰다.
어떤 점검중인 듯한 두 명의 공군 소령이 정중히 인사하며 낙동
정맥에 대해 이런 저런 물음을 해왔다.
공군 중위로 전역한 아들 연배여서 인지 친근감에 바쁜 갈 길도
잊고 한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네 탓이 아닌데도 우회하게 해서 죄송하다며 안내한 대로
우측으로 돌아가는 동안 지뢰의 공포에 또 시달리는데다 어이
없게도 비록 작으나마 계곡을 건너야 했다.
운봉산 정상 / 뒤로 금정산이 아스라하다.
다시 찾은 정맥 따라 순탄하게 남하를 계속했다.
양산 땅에 부산광역시장의 경고문이라니?
부산시민의 상수원인 법기수원지의 수질 보호를 위해서 라지만
아무래도 야릇한 느낌이었다.
534m 운봉산에 올랐다.
탁 트인 정상에서는 무심결에 소리치고 말았다.
"아! 금정산이 보인다."
부산의 산 금정산이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눈에 잡힌 설악에 뭉클했던 감정이 되살아나
그랬을 것이다.
도상거리 천리 산길의 골인(goal in) 점을 마침내 목전에 두게
되었는데 어찌 덤덤할 수 있겠는가.
이후로는 가속이 붙는 기분이었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지그재그 남하가 계속될 수록 낙동강 따라
펼쳐지는 김해벌이 선명해졌다.
김해공항 이착륙 항공기들의 은빛 날개가 가끔 눈부셨다.
부산 지리에 무지해서 잘 모르지만 시가지도 한 눈에 들어왔다.
포장도로에 내려섰으나 밤나무단지 유락농원이 자기 땅이라며
정맥 진입을 봉쇄하고 저 아래로 우회하라나.
또 한참을 헤메야 했다.
정맥 밟아가기를 훼방하는 혼란스런 임도와 다투며 요란한 차
소리에 걸음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가로막는 형제목장을 뚫고 4차선 도로 앞에 섰으나 난감했다.
건널목은 없고 중앙 분리대는 높고 꼬리를 문 차량들은 질주하고.
남락고개로 알려진 이 길을 건너느라 위험 천만한 짓을 했다.
배낭을 들어 분리대 위로 넘긴 후 배낭도 통과할 수 없는 분리대
밑을 엎드려 포복하듯 간신히 빠져 나갔다.
어지럽게 개발된 영남사료 농장(공장?)을 거쳐 우로 급회전하여
높지 않은(270m) 정상에 올라섰다.
경상남도와 부산광역시의 경계다.
2002년 12월 22일 17시 05분, 드디어 부산 땅을 밟은 것이다.
고개를 조금만 치켜 들면 금정산 계명봉이 코 앞이다.
맨 아래는 정신 못차리게 바쁜 경부고속도로다.
왼 쪽 옆으로 부산 컨트리클럽이 한가로웠다.
어둑발과 동행하는 내리막은 언제나 그러하듯 다소 지루했다.
어느 새 노포동 일대가 휘황한 야경으로 바뀌었다.
고속도로위 녹동교를 건너 온천장행 버스에 오름으로서 비로소
부산 입성이 완벽하게 완료된 셈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