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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지막 날에 갔다온 전라남도(장성,담양,나주)와
광주.. ~~
(방울샘, 담양읍
5층석탑과 석당간, 관방제림, 나주성남고문, 나주곰탕, 광주시내)
◈ 차례(次例)
<2003년 12월 31일 6시 ~ 2004년
1월 1일 6시> |
◈ 서문(序文)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03년 계미년(癸未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수요일,
2003년을 정리할 겸 그 해의
마지막 여행,답사 코스로 광주(光州)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도(南道)지역을 갔다.
광주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2003년 한해 동안 그 곳을 한번도 못가봤고, 장성읍 부근에 있는 신비의 샘 방울샘이
은근히 땡기는 지라 그 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그 외에 태조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와의 야릇한 사랑 전설이 서린
나주의 완사천(浣紗泉)도 보고자 했으나
시간관계상 가질 못했다.
그럼 지금부터 남도 여행기를 천천히 써보도록 하겠다.
* 2004년 6월 19일, 여행 후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상편,하편을 하나로 통합함.
* 제왕(帝王)의 재위기간은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原法)에 의거하였다.
(즉위년칭원법은 사람 나이를 만으로
따지는 거와 같다고 보면 된다)
◈ 1. 서울
→ 장성
2003년 12월 31일 아침 6시. 차가운 아침공기를 가르며 조용히 집을 나선다.
우리집 부근 도봉시장 정류장에서
서울시내버스
13번(의정부시↔장수원↔수유리↔돈암동↔종로5가,창경궁)을
타고
수유리,미아리고개,돈암동을 지나 성균관대입구(명륜동)에서
하차, 다시 서울시내버스 25번(화계사,북한산↔돈암동↔
종로↔노량진↔시흥2동↔삼성산,삼막사입구)를 잡아타고 종로,남대문시장을 지나
6:40분에 서울역에
도착한다.
도봉동에서 여기까지 겨우 40분 정도 걸린 셈..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서울역사(驛舍) 남쪽으로 하얀색으로 무장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신(新) 서울역사(驛舍)에
들어가서 장성행 열차표를 구입(12500원)하고
7:05분에 목포행 무궁화호 제403열차에 탑승한다.
열차에 타고 보니 왼쪽 선로에 날렵하게 생긴 열차가 세워져 있는지라 승객들 모두 신기한 눈빛으로 그 열차를
쳐다본다. 알고보니 그 열차는 2004년 4월부터 다닌다는 고속전철(高速電鐵)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대에
주파한다는 바로 그 열차이다. 음 한번 타보고는 싶은데, 운임이 상상외로 비싸서..
7:05분이 되자 열차는 서울역을 출발.. 한숨 자고 보니
11:11분 장성군(長城郡)의 관문
장성역(長城驛)에
도착했다.
장성역을 나와 한적한 장성읍내를 벗어나면 호남고속도로 밑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 백양사 방면 1번국도로 조금만 가다 보면 '장성교육청'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고 그 부근에
"湖南名勝鈴泉(호남명승영천)"이라 쓰인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그 표시판을 따라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장성교육청'이 나오는데, 여기는 볼일이 없고, 오동촌을 향해 계속 직진.
평화로운 분위기에 시골풍경과 방울샘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내(川)를 따라 가면 길의 끝쪽에 오동촌 주민들이
성(聖)스럽게 여기는 장소가 나오니 그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영천리(鈴泉里) 방울샘이다.
◈ 2.
신비의 우물 장성 방울샘
① 방울샘은 어떤곳?
방울샘은 순수한 우리말을 가진 우물로, 한자로 쓰면 영천<鈴(물방울영)천(샘천)>이나
보통 방울샘으로 통한다.
순수한 우리말이 더 이쁘고 부르기 좋으니까 그런듯 싶다. 나도 개인적으로 방울샘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다.
이 방울샘은 영천리(鈴泉里) 오동촌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물이 방울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이 우물의 큰 특징이다.
마치 탄산음료나 온천(溫泉)의 온탕에 솟아오르는 방울처럼 말이다.
이 우물은 현재 오동촌의 공동우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방울샘의 물 맛은 어떨까 궁금해서 마셔볼려고 했으나,
물을 마실만한 장소도 없고, 바가지나 물을 떠는 도구가 없다. 그래서 그냥 우물의 모여있는 물만 쳐다보았다는
안타까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ㅋㅋㅋ
현재의 방울샘은 1931년, 1972년, 1991년에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그 이전에는 우물의 둘레가 20m,
수심(水心)이 15m에 이르렀다고 한다. 거의 연못과 비슷한 규모.
◀ 방울샘(전남지방기념물 186호) - 1991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샘바닥에서 방울이 뽀글뽀글 솟아오르는 것이 이 우믈의 큰 특징으로,
예로부터 오동촌 주민들이 신성시 하는 곳이다.
② 신비의 샘 방울샘 - 다양한 색깔을 가진 샘물
방울샘은 원래 용이 승천(昇天)했던 늪이었다고 한다. 물론 거짓말이지. 샘의 솟아오르는 방울이 워낙 신기하다보니
옛 사람들이
그런 전설을 지어준 것이다. .
옛 기록에 의하면 이 우물이 영험(靈驗)하기로 유명하여 가뭄이 들 때면 이 샘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특히
국가의 큰 변고(變故)가 일어날 때마다 물의 색깔이 핏빛 또는 흑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오동촌 주민들에 의하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10일 전에 샘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하며, 1920년경에 괴질이
온 마을을 휩쓸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을 때는 흑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8.15해방과 한국전쟁 10일 전에도 4~5일간 물빛이 적갈색으로 변했다고 하며, 1980년에는 옆동네
에서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물빛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과연 사실인지는?
그러면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했을 때도 믈의 색깔이 변했을까? 그건 모르겠다. 마침 우물 주변에 마을 주민들이
없는지라. 있었으면 물어보는건데. 그런데 괜히 물어봤다가 우물을 의심하냐면서 한대 맞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풍년이 들거나 경사가 생겼을 때는 물의 색깔이 하얀색으로 변했다고 하며, 이때 샘 안에 물고기(우물 안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엄청 많음)의 오른쪽 눈이 먼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른 물에 있던 물고기가 이 샘에 들어오면 역시
눈이 멀게 된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재해를 입는다고 하여 이를 경계했다고 한다.
과연 사실인지 거짓인지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행히 내가 갔을 때는 물의 색깔은 정상적인 색을 띄고 있었다.
다행이군. 혹시 핏빛을 띄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2003년 한해도 착하게 살았던 것 같다. ㅋㅋㅋ
③ 물색깔이 변하는 이유는 뭘까 - 학자들의 견해
방울샘이 이런 조화(물방울 솟아오르는
것, 물의 색깔이 변하는 것)를 부리는 이유는 지층 구조상 지질습곡대에 의해 지표
가까이에 노출된 지하 대수층이 지표에 가장 가까운 지역 위에서 형성되어 있고
지질은 석회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지형적인 위치와 석회암의 화학적인 변화 때문에 샘물이 방울처럼 솟아오른다거나 색깔이 가끔씩
붉은 색으로
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시기가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고 있어, 과연 우연의 일치인지
우물의 자체적인 조화인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물방울은 하루종일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었다고 해도 방울샘의 신비로운 조화는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④ 우물신앙(泉井信仰)이 남아 있는 방울샘
오동촌의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
2곳에 있는 당산나무의 당제(堂祭)와 함께 이 방울샘에 제사를 지낸다.
방울샘 만큼 우물신앙이 잘 남아있는 곳은 별로 없다. 예로부터 우물은 마을에 물을 공급해주는 소중한 존재임과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물은 예나 지금이나 온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물이 많은 강이나 내(川)
주변에 정착해 살았고, 마을 내에는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했다. 그리고 물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우물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를 우물신앙. 유식한 말로는 천정신앙(泉井信仰)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물이 중요시되다 보니 우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여러가지 설화(說話), 신화(神話), 토테미즘이 등장했는데
신라(新羅) 박혁거세 설화에도 나정(蘿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나온다. 여기서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났다는..
그래서 나정 주변은
신비스러운 성역으로 그 부근에 신궁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만큼 우물은 중요하고
성스러운 존재였으며, 고구려(高句麗)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권신(權臣) 연개소문<淵蓋蘇文, 또는 천개소문(泉蓋蘇文)>
같은
경우
그의 시조가 샘(泉)또는 물(水)에서 나왔다고 하며 여기서 연<淵 또는 천(泉)>이라는
성씨(姓氏)가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우물,호수,내(川)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계시키는 예는 고대(古代) 동북아 지역의 설화,신화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 나주(羅州) 완사천 같은 경우 고려태조와 나주오씨 집안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표현되었다.
그 외에도 물과 관련된 토테미즘, 설화가 상당히 많으나 생략.
지금 이 샘은 마을의 상수원 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활용되고 있으며, 가뭄 때도 수량이 줄기는 커녕 일정한
양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의 온도가 일정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⑤ 방울샘 주변
방울샘 앞에는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고, 샘 뒤에는 오천정사(梧泉精舍)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리고 오천정사 정문 앞에는 한문으로 도배가 된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으며, 방울샘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수령(樹齡)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방울샘을 바라보고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에 이 나무에서 당제(堂祭)를 지낸다.
방울샘은 아래 사진과 같이 하얀 돌로 정비되어 있으며, 샘은 동그란 형태를 하고 있다. 물론 근래에 그렇게 만든
것이다.
샘 내(內)에는 이름 모를 조그만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는데, 그 개체수가 상당히 많다. 그만큼 물이
깨끗하다는 뜻, 그리고 물바닥에서는 여전히 물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온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군..
방울샘 역시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으로 그 신비로운 조화는 천년만년 계속 될 것이다.
◀ 방울샘(전남지방기념물 186호) - 1991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 방울샘 찾아가기.. (서울 기준, 2004년 1월 기준)
서울역,영등포,수원,천안,서대전역에서 장성역까지 새마을호, 무궁화호 열차가 1시간에 2회꼴로 다닌다.
장성역에서 방울샘(오동촌)까지 택시 10분 거리, 도보 30분.
◈ 3.
장성에서 담양까지 가깝고도 먼 길 (장성
→ 광주시내 → 담양 )
방울샘을 둘러보고 오동촌을 한바퀴 돌아 장성읍내로 가는 도중, 밭 가운데에 서 있는 오래된
신도비(神道碑)를
만났다. 신도비는 고위관료나 왕족들의 생애를 적은 비석으로 이 근처에 조선시대 때 고위 관료를 지낸 사람의
무덤이 있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도 있던데 안내문이 없는지라. 누구의 신도비, 무덤인지는 모르겠음.
필자는 신도비를 읽어볼려고 비석을 뚫어지게 쳐다봤으나, 아는 한자(漢字)도 없고 비문(碑文)의 마멸이 좀 심하여
그냥 비석의 외형만 보고 나왔다. ㅋㅋㅋ
장성교육청을 지나 장성읍내로 진입, 장성역 남쪽에 있는 장성터미널에 이르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비겠지 싶어서 무시했으나 점점 비의 양이 많아진다. 그날 전라남도에 약간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많이 내릴 줄은 생각치 못했다.
어쨌든 비가 쏟아져도 계획대로 갈 곳은 가야지. 그래서 터미널에 들어가서 담양행 버스 시간표를 확인해봤으나
아무리 찾아도 담양 방면 시간표는 나와있지 않았다. 거리상으로 담양과 장성간의 거리가 가까운 편인데, 두 도시를
이어주는 노선이 없다니. 참 황당하군.. 그럼 어떻게 가야 될까. 답은 여러 개가 있겠지만 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광주시내를 거쳐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부근 중국집에서 간짜장 한그릇 배부르게 먹고 터미널로 와서 광주시내로 들어가는
장성군내버스 100번(20~30분
간격, 장성터미널↔비아↔운암동↔광주롯데앞,대인광장)을 탔다.
처음에는 비아동까지 갈려고 비아까지 요금인 900원을 냈으나, 그냥 죽치고 앉아있으니, 50분 만에 종점인
광주롯데백화점(대인광장)에 도착했다. 대인광장까지 1600원정도 하는데. ㅋㅋㅋ
대인광장에서 다시 담양읍내로 가는 담양군내버스 322번(담양터미널↔고서↔서방시장↔광주역,대인광장)을
타고
서방시장,고서를 지나 40여분만에 종점인 담양터미널에 도착했다.
(대인광장에서 담양까지 1600원)
장성에서 담양까지 2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군(潭陽郡)의 중심지 담양읍, 처음와보는 낯선 땅이지만 나는 계획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담양읍내를
가로질러 순창 방면으로 걸어갔다. 한 15분정도 걸었을까. 종대3거리라고 불리는 3거리가
나왔는데,
3거리를
중심으로 왼쪽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석당간(石幢竿)이 오른쪽 공터에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닮은
5층석탑 1기가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5층석탑을 먼저 살펴본다면..
◈
4.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닮은 담양읍 5층석탑
이 5층석탑은 담양읍내에서 순창으로 통하는 국도변 넓은 공터에 외롭게 서 있다.
탑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절터의 흔적은 찾아 볼 길이 없다.
주변이 모두 밭이나 풀밭으로 전락해 버렸고, 절터임을 입증하는 유물도 나오질 않았다.
다만 몇 년전에 석탑 주변을 발굴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뚜렷한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석탑의 외형을 보면 충남 부여(扶餘)에 있는 정림사터 5층석탑이 생각난다. 그 정림사터 5층석탑은 백제후기
석탑으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백제를 꿈꾸던 백제유민들이 백제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며 소부리(부여)의
상징인
정림사터 석탑을 모델로 옛 백제 땅에 여러 개의 탑을 만들었는데 이 담양읍 5층석탑도 그
중에 하나이다.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기로 보이며, 1층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웠으며, 탑의 머리부분인
상륜부는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은 다른 탑에 비해 높이가 낮으며, 탑신(塔身)부는 윗층으로 올라갈 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들고 있어 안정된
느낌을 주며, 탑신 2층 이상부터는 몸돌을 받치는 두툼한 괴임을 새겨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두껍고 처마는 약간 경사졌으며 네 모서리는 가볍게 들려져 있다. 그리고 모서리에는 처마 밑에 달아놓는
풍경(바람방울)을 달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예전 절이 있었던 시기에는 탑 모서리에
풍경을 달았던 모양이다. 바람이 불면 풍경(바람풍경)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는 참 그윽하고 아름답다.
옛날에 이 탑 역시 그런 풍경(風景)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이 없어지며서 부근 주민들이 떼어갔을 것이며,
아마 농기구나 무기로 변신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의 큰 특징은 부여 정림사터 5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데 있으며, 고려중기까지 백제를 그리워 하던
백제계 후손들의 백제 부흥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석탑은 보물 50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탑의 명칭은
읍내리(邑內里) 5층석탑이었으나 근래에
담양읍 5층석탑으로 변경되었다. 탑이 소속된 절의 정체를 모르니 부근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 담양읍 5층석탑(보물 506호) -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든
고려초기 석탑으로, 정림사 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혹시 형제였나?
이 탑은 백제유민들의 후손들이 백제의 부흥을 소망하며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는 660년에 망했지만 백제를 부흥하자는 운동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고려중기까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
5. 하늘 높이 서 있는 담양읍 석당간
5층석탑 건너편 길가에는 석당간(石幢竿)이라 불리는
당간지주가 하늘 높이 서 있다.
개인적으로 당간지주와 철당간은 여러개 봤어도 석당간은 처음 보는데, 여기서 당간(幢竿)이란 사찰(寺刹) 행사 때
괘불이나 깃발을 달아두는 용도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지탱하는 돌기둥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석당간의 제일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당간을 세우고 양 옆에 기둥을 세웠다.
당간은 가늘고 긴 8각 돌기둥 3개를 연결하고 연결부위에 철띠를 둘렀다. 당간의 머리부분에는 쇠로 만든
바퀴모양에 동그란 보륜(寶輪)이 있는데 주위에는 바람방울(풍경) 같은 장식물 2개가 대롱대롱 달려있고 그 위에는
철침이 솟아 있다.
이 석당간의 조성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길 건너편에 5층석탑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 같은 절에 소속된
유물로 생각되며, 대략 고려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석당간 앞에 세워진 석비(石碑)에 의하면 조선 헌종 8년(1839년)에 석당간을 중수했다고 한다.
석비의 내용을 보면
'石棹之立年不可攷 盖自設邑始幾, 年至甲寅爲大風折以木代立昨春
又頹今則如初重建歲己亥三月也, 崇禎紀元後四己亥
三月日知府洪耆燮記'
<석도(석당간)를
세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대개 읍을 처음 설치한 때부터이다. 갑인년에
큰바람으로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가 작년 봄에 또 훼손되어
중건한 것이 기해 3월이다. 숭정기원후 4기해 3월 일 <담양>부사(府使)
홍기섭이 기록하다>
이 석당간은 보물 505호로 지정되었다.
◀ 담양읍 석당간(보물 505호) - 길 건너편에 있는 5층석탑과 함께 이름 모를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석당간의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며, 앞에 세워진 비석을
통해 1839년에 중수했음을 알수 있을 뿐이다.
* 담양읍 석당간, 5층석탑 찾아가기.. (2004년 1월 기준)
광주(광천동,문화동,대인광장,서방시장),남원,순창에서 담양행 직행,군내버스
이용, 담양터미널에서 하차,
읍내에서 순창방면 도로로 15분 정도 걷다보면 종대3거리가 나오는데, 그 주변에 석당간과 5층석탑이 서 있다.
순창,남원에서 올 경우 종대3거리를 지나 담양읍내로 들어가게 된다.
◈ 6.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담양천 둑방과 제림(堤林)
① 관방제림은 어떤곳?
석당간(石幢竿)을 둘러보고 담양천 방면(북쪽)을 바라보니 손에 잡힐듯 가까운 곳에 오래된 거목(巨木)들이 동서로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래서 그 곳이 관방제림(官防堤林)으로 생각되어 담양군청(潭陽郡廳) 옆길을 통해 북쪽으로
가보니 생각했던데로
담양천 둑방길이 나오고, 둑방 위에는 오래된 나무 수백 그루가 담양천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으니,
이 곳이 바로 담양읍 관방제림(官防堤林)이다. 관방제림은 말그대로 관청에서 수해(水害)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그 위에 수백 그루에 나무를 심어놓은 수해 방지용 둑방을 말한다.
이 관방제림(官防堤林)은 담양읍 북쪽을 흐르는 담양천(潭陽川) 제방에 조성되었으며, 남산리 동정마을에서
황금리를
거쳐 대전면 강의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로는 푸조나무(111그루), 팽나무(18그루),
벚나무(9그루), 음나무(1그루),
개서나무(1그루), 기타 곰의말채, 갈참나무 등 약 420여 그루가 둑방을 지키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이와 덩치가
제법 있는 185그루만 천연기념물 366호로 지정되었다. 나머지는 들러리..
ㅋㅋ
담양읍 주민들에 의하면 덩치가 큰 나무는 16~17세기 경에 심어진 것이고, 작은 나무는 철종 5년(1854)에 담양부사
(현 담양군수)를 지낸
황종림이 심었다고 한다.
담양의 관방제림은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내(川)주위에 제방(堤防)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인공림을 조성,
자연재해를 막고자 했던 옛 선인(先人)들의 슬기와 지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곳으로써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담양읍 관방제림(천연기념물 366호) - 담양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그 위에 인공림을 조성했는데, 지금은
담양읍 주민들의 휴식장소 겸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 담양읍 관방제림(천연기념물 366호) -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무더운 여름에는 이곳에 돗자리 깔고 한숨 자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듯 싶다.
* 관방제림 찾아가기.. (* 2004년 1월 기준)
광주(광천동,문화동,대인광장,서방시장),남원,순창에서 담양행 직행,군내버스
이용, 담양터미널에서 하차,
읍내에서 담양향교,담양호 방면으로 10분 정도 걷다보면 담양천(潭陽川)이 나오는데 담양천 뚝방길에 심어진
수백 그루의 오래된 나무들이 바로 관방제림이다.
② 관방제림 산책..
담양천 둑방으로 올라서니 앞에는 넓지 않은 고수부지(高水敷地)가 펼쳐져 있고, 그 앞에는 담양천(潭陽川)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날씨가 좀 쌀쌀한 탓인지 산책을 나온 군민(郡民)들은 없었다.
필자는 둑방의 오른쪽으로 약 500m 정도 거닐다가 다시 왼쪽으로 틀어 둑방길을 거닌다.
둑방을 몇백년 동안 지켜온 고목(古木)들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둑방 길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낙엽들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흙 속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여름에 왔으면 제림(堤林)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을텐데 겨울에 왔으니 황량하고 썰렁하다.
뚝방길을 조용히 거닐고 있으려니 진행방향 왼쪽에 활터가 나온다. 거기서는 노공(老公) 몇
명이 활솜씨를 자랑하고
있던데 쏘는 것마다 백발백중이군. 저들은 아마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의 후손들이 아닐까 싶은..
나도 한번 국궁(國弓)을 해봤으면 좋겠는데,
활터를 지나 600m 정도 가니 담양읍과 담양호를 이어주는 국도(國道)가 나온다. 여기서 계속 둑방을 거닐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읍내로 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의견충돌이 있었으나 시간문제도 있고 해서 그냥 읍내로 들어갔다.
여기서 담양천 건너 북쪽을 바라보니 조선시대 때 담양부의 교육을 담당했던 담양향교(鄕校)가
보인다.
그리고 둑방과 국도가 만나는 부분에 관방제림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렇게 관방제림을 둘러보고 다시 읍내(邑內)에 있는 담양시외터미널로 이동하였다.
◈ 7. 담양
→ 광주 → 나주
담양터미널에 들어서니 갑자기 고추장의 고장 순창(淳昌)이 가고 싶어 진다. 그
이유는 순창군(淳昌郡)을 한번도
안가봤기 때문에 게다가 담양에서 순창까지 제법 가까운 거리기 때문에 한번 가볼까 싶어 나름대로 시간계산을
해봤으나 그 때 시간이 이미 5시가 다 되었고, 만약 순창까지 들어가게 되면 나주(羅州)의 명물 나주곰탕을
먹을만한 여유가 없을 듯 싶어 그냥 광주(光州)로 갔다. 순창은 다음에 가면 되지..
담양터미널에서 광주광천동가는 동광고속 직행버스를
타고 88올림픽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차례대로 경유하여
20분 만에 광주 문화동에 도착했다. 담양에서 문화동까지 운임은 중고생은 1000원이다.
약 3시간 만에 다시 광주 땅에 들어오니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여기서 그냥 광주시내에 있을까 아니면 나주까지
갈까 고민하다가 예정대로 나주까지 가기로 했다. 나주곰탕이 땡기는지라..
문화동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나주에 갈려면 말바우시장까지 걸어가야 되는데 다행히 거리가 1블록 거리밖에 되지
않는지라 말바우시장까지 걸어가서 나주시내버스 160번(영산포↔나주터미널↔송정리역↔대인광장↔광주문화동)을
타고 광주역,양동시장,송정리역,동신대를 지나 80분만에 나주시내에 있는 나주터미널에서
도착했다. (20시)
터미널에 도착후 바로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우선 나주성 남고문(南顧門)을 본 다음에 천천히
먹기로 하고 시내
쪽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런데 나주는 1년여 만에 오는지라 길이 햇갈린다. 그래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길을 물어
옛 나주역 방면으로 가니 중층구조(重層構造)를 가진 우람한 성문(城門)이 나를
맞이하니 그 성문이 바로 나주성
(羅州城)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 남고문(南顧門)이다.
◈ 8. 전라도의
중심도시 나주의 옛 흔적들 (나주성 남고문, 정수루)
① 나주성과 남고문을 통해서 본
아주 간략한 나주의 역사..
현재 나주시(羅州市)는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의 위성도시로 조그만
도시이지만 왕년에는 전라도의 중심도시로써
전라도를 관할하던 큰 도시였다. 참고로 전라도(全羅道)란 이름은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나주가 이렇게 중요한 도시로 성장한 배경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때
태봉국(泰封國)의 군주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던 고려의 시조 왕건(王建)이 수군을 이용하여 이곳 나주를 점령, 나주
세력의 우두머리
오다련의 딸을
2번째 부인(장화왕후
오씨)으로 맞이하면서 부터이다. 이때 금산이라 불린 이곳에 지명을 나주로
고쳤다.
1010년에는 거란패거리의 2차 공격으로 현종(顯宗)이 나주로 몽진하여 여러 달 머물렀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주를 목(牧)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 세종 때는 나주목이 영암,영광,고창,광산(광주),장성을 비롯한 10개의
고을을
관할하는 큰 도시로 성장, 조선 후기에는 38개 면(面)과 신안군 지역의 수십개의 도서를 관할하는 큰 고을로
많은 호구(戶口)와 토지를 보유했으며, 1895년에는 나주목이 부(府)로 승격, 관찰사(현
도지사)가 주재했다.
1896년에는 나주부가 나주군으로 격하되면서 전라도의 중심이 광산(광주)으로 이전, 그 이후부터 광주의 위성도시가
되어 지금에 이른다.
② 나주성과 남고문..
고려시대부터 전라도의 중심도시로 성장한 나주고을을 수비하기 위해 고려시대 때(정확한 시기 모름)
나주읍성
(羅州邑城)을 쌓았다. 조선 세조 3년(1457년)에는 읍성을 확장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들어와서 쪽발이들이 도시화를 구실삼아 읍성을 철저하게 때려부셔 지금은 남내동, 금성동에
약간의 성터만 남아 있다.
나주읍성의 규모는 둘레 3126척(약 940m), 높이는 9척(약 3m)으로 조그만하며, 대포를 쏠 수 있는 포루가 3개,
우물이 20개 정도 있었다고 하며, 성문(城門)은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어 북문터와
남문터에 기초석만 남아있는데, 남문터 같은 경우 1993년에 복원되었다.
나주성의 남문 남고문(南顧門)은 중층구조(2층처럼 보이는
형태)를 가진 문루(門樓)로 정면 3칸, 측면 2칸, 총 6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문루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어 비상시에 화살이나 총을 사용할 수 있으며,
문루 양쪽에는 협문(夾門)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문루가 중층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만든 이유는 좀 더 높은 곳에서 적을 관망하고, 또한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중층구조의 남고문을 바라보니 한 때 전라도를 통치한 옛
나주고을의 영화로움이 이 성문에 간직되어 있는 듯 하다. 보통 읍성의 성문은 1층으로 중층구조를 가진 읍성의
성문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전주성 풍남문(豊南門), 나주성 남고문, 수원성 팔달문(八達門)과 장안문(수원성은
국도(國都) 천도용 으로 만들었으니 예외) 정도>
그런데 복원된 남고문의 규모는 매우 작아보인다. 아니 매우 작다. 그것은 체성(體城)의 높이가 낮고 복원할 때
문의 위치가 5거리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좀 축소해서 복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문 양쪽으로 성곽(城郭)이 이어지지 않았으니 양 옆구리가 허전해 보인다.
이 남고문과 나주성터는 옛 나주고을의 전성기를 말해주는 유적으로 사적 337호로
지정되었다. 언젠가 나주성이
온전히 복원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 나주성 남고문(시적 337호) - 일제시대 때 쪽발이들이
파괴한 것을
1993년에 복원하였다. 전라남도에 유일한 중층구조의 문루로 나주고을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유적이라 하겠다.
* 남고문 찾아가기.. (서울 기준, 2004년 1월 기준)
나주터미널에서 나주시청2청사,중앙동 쪽으로 도보 15분, 또는 나주시내버스 160번 이용, 남고문 하차,
또는 광주역,양동시장,나주역,영산포터미널에서 나주시내버스 160번 이용 남고문 하차,
③ 나주관아의 정문 정완루(정수루)..
남고문을 둘러보고 1km 떨어진 나주시청 2청사(1청사는 나주역,완사천 부근에 있음)로 가면 2청사 앞에 2층 문루
2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1채의 이름은 정완루(정수루)이며, 나머지 1채의 이름은 안타깝게도
잊어먹었다.
이 정수루(正緩樓)는 다른 말로
정완루라고도 불린다.
이 누각은 조선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 우복용이
세운 것으로, 나주관아의 관아문 역할을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樓閣)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2층에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커다란 북이 걸려있는데 근래에 복원하여 매달은 것이다.
이 정수루는 전남지방문화재자료 86호로 지정되었다.
필자가 정수루에 도착한 시간은 밤 8:30분으로 주위에 조명시설이 없어 겨우 누각의 형체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수루 얖을 통해 2청사 내로 들어가면 나주고을의 객사(客舍)로 쓰이던 금성관(錦城館,
금성은 나주의 옛 이름),
동학농민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세운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 보물 50호로
고려후기 석탑인 나주북문밖 3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1992년에 봤으며, 또한 이들을 볼 경우 이들 문화재까지 언급해야 되므로
내용이 엄청
길어질 수 있은 위험성이 있으므로 일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핑계도 좋다.. ㅋㅋㅋ
이로써 12월 31일 문화유적 답사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이제 곰탕먹으로 가는 일만 남았군..
◀ 나주관아의 정문 정수루(전남지방문화재자료 86호) -
나주관아의 정문으로 2층 가운데에 커다란 북이 걸려 있다.
이 북은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2청사를
중심으로 옛 나주관아 복원이 한참 진행 중이다. 정수루 부근에
이름을 까먹은 누각도 92년 이후 복원된 것이다.
* 정수루 찾아가기.. (서울 기준, 2004년 1월 기준)
나주터미널에서 나주시청2청사까지 도보 10분,
◈ 9. 나주의
명물 나주곰탕
나주시청 2청사 주변에는 나주곰탕집 3곳이 들어서 있다.
나주곰탕하면 나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경상도에
현풍곰탕이 있다면 전라도에는 나주곰탕이 있다. 참고로 곰탕은 설렁탕과 약간 비슷한
음식으로 소고기를 원료로
하여
국을 진하게 우려서 내는 음식이다. (필자는 대구현풍, 나주 2곳의 곰탕을 다 먹어보았다)
필자는 나주시청 2청사에 있는 정수루를 둘러보고 부근에 있는 3곳의 곰탕집중 한 곳인 '탯자리나주곰탕'집에
들어가서 곰탕 한 그릇을 먹었다. 곰탕 한그릇의 가격은 5000원, 참고로 수육곰탕은
7000~8000원.
13시에 장성에서 간짜장 먹은게 전부인지라 무척 시장히여 한 그릇을 거의 비운 상태에서 밥 한그릇 더 갖다달라고
하니, 식당 아줌마가 밥과 국물. 고기를 더 얹어서 주는군. 그리고 곰탕과 설렁탕에 단골로 나오는 깍두기도
맛있고,
그래서 덕분에 배불리 잘 먹었는데, 서비스로 커피까지, 음..
역시 여행에서 먹는 재미는 빠질 수 없지..
이렇게 곰탕 1그릇 먹고 커피까지 마시니 배부르고 등따스하고 한숨 자고 싶군... ㅋㅋㅋ
어쨌든 곰탕으로 저녁을 잘 해결, 식당 명함 한 장 들고 밖으로 나와 1km거리인 나주터미널로 이동하였다.
나주터미널에서 500원에 저렴한 요금으로 광주시내버스 555번(나주터미널↔송정리역↔양동시장↔전남도청↔증심사)을
타고 광주시내로 가는데, 운전사가 성미가 급한지 시속 100을 왔다갔다하여 겨우 40분만에 광주의 중심번화가
금남로에 도착, 전남도청(全南道廳)에서 내렸다.
◈ 10.
2003년에서 2004년으로.. 광주 → 서울
① 2003년
마지막 밤을 광주에서..
전남도청은 1980년 5.1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유서깊은 곳으로
지금은 광주시내에 제일 번화가이다.
도청과 금남로 주변에는 2003년 마지막 날을 보내려는 광주시민들로 가득하고, 금남로 한쪽 구석에는 광주지역
방송국에서 2003년 마지막날 기념 공개방송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구경하려는 시민들로 가득. 마침 무대에
조그만 어린애가 올라와 시민들에게 새해 복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하는 장면이 목격..
이렇게 금남로 풍경을 살펴보는 가운데 시간은 22시를 넘었다. 이런, 광주시내버스는 23시경에 운행이 모두 끝나
는지라 서둘러서 부근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광주시내버스 333번(장등동↔원광대한방병원,풍암지구)을
타고
광주역으로 가니 22:30분.
광주역(光州驛)은 거의 13개월 만에 와보는데 마침 역사(驛舍) 공사중이었다.
역 내(內)로 들어서니 서울방면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가득.
필자는 예약한 열차표를 구입(광주
→ 영등포 13400원)하고,
역 내(內)에서 1시간 동안 쉬면서 그동안에 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이제 내일이면 나이 한살 더 먹는구나"하면서 한탄도 해보고.. 이젠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군. 벌써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온 것인가.
23:30분이 되자 서울행 열차 표확인이 시작, 표확인을 받고 열차에 올랐다.
23:50분이 되자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제456열차는 광주역을 출발.. 이 열차가 2003년 광주역을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가 되는 셈이군. 그러나 이 열차는 2004년이 되도 같은 시각에 같은 방향으로 출발할 것이다. 시간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편의상 만들어놓은 법칙에 불과하니 말이다.
광주역을 출발한지 얼마안되서 극락강역에 정차. 여기서 시간은 2003년 12월 31일에서
2004년 1월 1일로 바뀌면서,
2004년 첫날을 광주 땅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극락강역을 지나 나는 잠이 들고,
② 1년만(?)에 와본 서울의 신년 풍경... 신년 해돋이를 보러 도봉산에 가는
서울시민들..
2004년 1월 1일 4:24분에 영등포역(永登浦驛)에 도착했다.
정시보다 2분 일찍 도착한 것이다.
열차를 타고 올라오는 사이 해는 2003년에서 2004년으로 넘어갔다. 그 사이에 해가 바뀐 것이다. 참 기분이 묘하군..
4:40분에 부근 영등포역 정류장에서 서울시내버스 30-2번(월계동↔종로↔광명시광명6,7동)첫차를 타고 가는데 한강
(漢江)을 건너 종로(鍾路)에 이르니 밤새서 술마신 애들 10여명이 버스에 몰리면서 순식간에
버스 안이 가득하다.
그리고 종로1가, 보신각(普信閣) 앞을 지나는데 전날 재야의종 행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보신각 주변
거리도 엄청 지저분하고.. 행사는 하더라고 깨끗하게 해야지.. 곳곳에 술취한 인간들이
해롱해롱...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에서는 묵은 2003년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다가온 2004년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으로 가득차 보였다. 언제나
신년이 오면 이런 기대감에 설레는 법..
동대문,안암동을 지나 새벽 5:10분에 종암동(鍾岩洞)에서 내린다. 여기서 도봉동으로 가는 13-2,13-3,19번 첫차를
기다렸으나,
예상 통과시간이 되도 오질 않는다. 그 사이 도봉산에 가서 신년 해맞이를 보려는 등산객들이 서너 명
나타나는군. 신년 해돋이를 산에서..
5:20분이 되자
서울시내버스 13-3번(양주시덕정동↔독바위↔양주시청↔의정부시↔수유리↔종로5가)
첫차가 온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이제서야 오나.. 하긴 노선이 장거리니..
내가 탄 13-3번 버스는 도봉산 신년 해돋이 등산객들을 태우느라 예상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차 안은
순식간에 만원이 되어버렸다. 나도 도봉산 해돋이나 보러 갈까 했으나 1살을 먹은 휴유증?으로 그냥 도봉동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2004년 1월 1일 새벽 5:50분..
-> 이로써 장성,광주,담양,나주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총 지출 금액은 39800원..
* 상편은 2004년 1월 10일에 완성
* 하편은 2004년 1월 12일에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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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마살 향기 같습니다. 훌훌 털어 버리고 떠니는 미륵리석불님 부럽습니다. 조용히 생각하는 답사 아 언제 해뫘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미륵리석불님의 연재 늘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