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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한국적’인 정치논리인 두 가지 테마에 대한 보고서.
공산주의적 공동체-자유주의적 공동체 헷갈리기.
1980년대 대학가에서 전대협 대학 선배들의 저학년 속이는 용법과, 우파 사회를 장악하는 북한동포에 대한 관심유도의 용법--북한동포에 대하여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자들이 개입하여 불량국가에 억압받는 이들에 개입해야 하는 요청명제를 별개논의로 할 때--이 한국적 정치에서의 ‘공산주의 타입’과 일치 현상.
칸트의 세계평화론은 개인의 소중함에서 시작됩니다. 롤스 등의 자유주의적 공동체 관점은 개인의 소중함을 기본 전제로 한다고 압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적 공동체 관점은 사회적 삶의 소중함과 공동체의 소중함에서 시작됩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청년 헤겔]에서 ‘기도’를 해야만 하는 기독의식의 딱딱함과 개인주의적 속성이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부르주아적인 것을 비판하는 의식에서 (공산주의적) 해방의 그림을 그린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명료한 것입니다.
박세일교수가 우리민족끼리 서울페스티발에서 중심이었던 백낙청교수가 운영한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글과, 뉴라이트가 평소 밝혀온 글은 어디에 소속되는 것인가요? 변증법적 유물론을 휘날리는 공동체 주의에서, 개인주의의 설자리는 한 뙤기의 땅도 안 남습니다.
그러면, 늘 되돌아가는 지평은 간단합니다. 일제 시대에 농촌 사회의 풍습을 아는 몸에 박힌 경험에서 나왔을 뿐이며, 이것은 자신의 몸에 착 달라 붙어서 자유로운 것이며, 이외의 풍습을 자기화할 때 전혀 안 맞는다. 미국도 이러한 차원에 대해서 허락하지 않느냐. 이러한 수준을 허락 안하고 진짜 자유민주주의이겠느냐?
김대중전대통령이 군사정부의 다분히 유교적인--중세적 야만성을 포함하는 측면이 다소 포함된--정치적 공격을 피해서 미국에 의지했던 일이, 이러한 테마의 직접적 기원이라고 여겨집니다. 박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미달이 아니라 미국같은 자유민주주의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헷갈림을 무조건 허락해야 한다는 공식은 좌파들에는 무조건의 승리와 우파에는 무조건의 패배를 불러온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건축법 변천사를 해설하는 부동산교육자에게서 서로 헷갈릴 수 없는 ‘공동체’관의 명백한 차이를 들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정부 이전의 건축은 전부 북쪽으로 건물이 공간을 띄웠습니다. 입니다. 그림자라도 결코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박대통령 시대의 서구 개인주의에 대한 수용의지가 그대로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정부 이후에는 서로간에 ‘그림자’야 서로 침범할 수 있는것 아니냐 하면서 사용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남쪽으로 띄웠습니다.
국가안보가 대단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글을 쓰면서도 북한동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글을 쓰는 자와, ‘뭉치면 죽는다’ 따위의 현실주의 인식을 보이는 책을 쓰는 자는 공산주의적 공동체관과 자유주의적 공동체관의 서로 섞일 수 없는 명백한 차이를 가진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개개인도 소중하면서 북한동포가 불쌍한 사람의 자유주의적 공동체관 소유자와, 대한민국 국민의 삶은 북한동포 구출에 일정 수준 짖이겨저도 좋은 것 아니냐는 사고의 차이가 명확합니다.
북한동포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모씨는 당시에 대졸자면 곧장 대단한 봉급의 취업을 할 수 있었던 당시에, 자기의 이익을 내려놓고 일에 봉사했음을 아직도 미화하면서 대한민국에 적대적으로 향했던 운동에 향수젖은 표현을 적은 바 있습니다. 사실, 좌파들의 대학가 장악화인 전대협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북한동포론자’의 공산주의적 세계관은 명백하게 다가옵니다. 다만, 배움이 적은 일제 잔재의 교육을 아직도 기억하는 기성세대들에겐 그게 일본취향의 농촌마을에선 늘 있는 공동체성이지, 뭐가 이적사상이냐는 식의 좌파의 꼬득임 유발에 의한 반박이 가능할 것입니다.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직업적 혁명가들의 공산주의적 사유방식과 헌신을 모범으로 하고, 나머지를 배타적으로 분리해내는 방식입니다. 북한동포론자들도 한국 좌파의 반체제논리의 지독하게 상투적인 이분법을 아직까지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한국 기독교인 중 일부의 ‘잇쇼껜메이’와 ‘자기 희생(Sacrifice)의 의미 혼동을 딛고 서 있습니다. 한국의 좌파들의 시위 때에 곳곳의 요소에서 삶을 초개처럼 버리는 의미는, 예수님의 자기 희생의 의미와 전혀 다른 ’가미가제‘정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본적 상상력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가미가제‘정신은 일본적 공동체관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6.25때 김일성의 남침에 대하여 ‘불법 남침’이었다와 ‘통일전쟁’이었다 라고 말하는 자들의 세계관 논리로 이어집니다. 의당, 남로당 잔당들을 데려 가기 위해서는 ‘협상’의 기법을 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남로당 잔당 데려 가는데에서 선량한 사람들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투의 생각에 동의하는 자는 6.25의 의미를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동포론자들이 대한민국 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과 현실인식은 완전히 내놓고서 북한동포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이버 리얼리티’속에서 협상전략이 실제적 파괴력 있는 무기처럼 김정일정권을 헤집고 파괴한다는 현실과 몽상의 잡동사니 집합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북한동포론자의 책임자 조갑제기자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조상에 침략자 우두머리를 오랫동안 숭배하는 글을 써온 것에 비추어 볼 때, 밑면에 깔린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가안보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 우파정당 열성 지지층을 헷갈리게 하는 의지가 있다고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김정일 치하에 억압받는 북한주민이 불쌍하고 선진 자유세계의 개입으로 그러한 일이 막아져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제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가안보가 허물어진다고 하면서도, 애국심과 애국적 명제로서의 요청명제를 포기하여야 한다는 전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역시, 이러한 모순을 둘러싸고 아직도 건재한 일제 잔재 속에 있는 386세대의 직접적 아버지 세대로서 자리하는 664(60대 -60년대 학번-40년대 출생세대:북한의 대남공작에 시달린 시기인 이른 바 4.19 세대)세대에서, 저교육 층의 무의식에 잠재된 것은 선명하며 이것이 정말로 옳은 것 같으며 합리적인 논리는 알지 못하거나 어려워 죽겠는데 뭔 소리냐는 답이 가능할 것이다.
김일성민족론-국기에 대한 맹세의 ‘민족’의 헷갈리기.
조갑제기자의 김일성 왕조론은 단순한 북한을 위한 애국자이며 대한민국의 애국심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바를 말한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에 적시되고 국기에 대한 맹세에 기록된 ‘민족’은 김일성의 이북의 불법 점거론에 기반되어 있습니다. 한국사의 중심고리에서 대한민국이 정당하게 계승했다는 바탕을 가지며, 북한은 국가로서 부정되며 민족으로서는 부분적이며 제한적인 인정을 받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의 지식인이면서 김대중 정부 때의 지식인이면서 노무현 정부 때에 마침내 북한공산당과 지독하게 지근거리인 이들과 공개적 만남을 가진 백낙청교수등의 드러냄은, 한국내 제도권 좌파들이 어떻게 어떠한 식으로 행동해 왔는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럼으로써, 가장 의심되어야 할 0순위로 오른 자들이 문민정부 초기 때부터 북한인권론을 주장한 조갑제기자 같은 이들일 것입니다.
민족을 가장 따지는 이들이 가장 민족을 배반했다는 식의 해설은, 좌파를 위해서 우파의 시간만 낭비시키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는 김일성 민족이론을 위해서 행동하면서도 진정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의 민족이론을 했는데, 약간의 불찰 때문이라는 식으로 의미를 고정하기 때문입니다.
백낙청 교수 강만길 교수등은 북한을 위한 민족이론을 개발하면서도, 그것을 철저하게 국기에 대한 맹세의 민족론이라고 해설하며 주장해왔습니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664’세대의 지식 패러다임의 한계성을 반영하며 일체의 새로운 지식을 추가하지 않는 노세대의 편견어린 옹고집 유도가 방패막이가 됩니다.
미셀 푸코의 [담론의 질서]등과 라캉 심리학등에서 아이디어를 따오게 된다면, 한국 사회에서 664 세대부터 386 세대 사이는 책과 독서가 일반화되지 않은 상태로, 민족이라 함은 초시간적이며 절대적이며 심원한 어떠한 감상적 공동체 이상으로 규정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인 ‘민족’이론가의 문제는 철저하게 감추어집니다.
현실적으로 60년 가까운 대한민국의 역사만큼, 60년 가까운 북한의 역사는 중세에서 북한공산당으로 이어지는 북한공산당 친화적인 공동체관으로서의 민족이론을 포함합니다. 북한의 대남공작부서가 자신있게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민족끼리 서울페스티발’을 제시함은, 북한공산당의 지도자 김일성 김정일의 한마디에 공산주의적 공동체관으로 빠진 김일성 민족이론을 전혀 변별하지 못하도록, 조갑제기자의 북한인권론조차 굳세게 후원하고 있는--당시, 조갑제기자가 후원했던 이명박서울시장이 그 대회에 참석 못해서 아쉽다는 식의 조선닷컴에 보도됨은 문제적이다--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단합용 정체성만이 깨어지고 북한동포를 국가안보 제껴놓고 위하기만 한다면, 뭔가 거대한 희생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드러난다는 밑그림이, 북한동포론을 내세우며 아직도 좌파의 정체성을 명백히 과시하는 자가 의도하는 바의 실체일 것입니다.
북한동포의 인권에 개입하여야 하고 도와줘야 한다는 인류애적 세계평화적 요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이벤트로 하여서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심리적으로 허물어뜨리는 작업의 진행 바탕에 대하여는, 늘 반대의 입장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북한동포론을 내세우는 자들은 늘 갑작스럽게 전대협 스타일의 변증법적 역사논리로 훌훌 섞여서 하나로 딱 될 국면이 있는 데, 덜 배운 대중은 모르고 전위이며 엘리트만 안다는 논리로 눈가림하여 시간 보내는 작전을 쓰고 있습니다.
대학가 전대협 학생들의 철학교재로 많이 쓰인 [철학에세이]는 경찰에 붙잡혀 가면서도 생각만 바꿔 먹으면, 경찰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심리적 역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북한인권을 다루어야 한다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럼으로써 김정일을 억압하여 붕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이 먼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냥 덤으로 하는 식의 발언을 합니다. 386 세대의 아버지 세대인 664 세대의 전대협 스타일의 비틀림이 명확합니다. 애국심을 별개로 하는 자유주의의 확장 전략은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요?
[결론] 대한민국에서 사회 정치 문화 현실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민족해방이론’의 ‘민족’은 김일성 민족이론의 ‘민족’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제도권 좌파들은 그것을 대한민국의 ‘민족’이론인양 헷갈리게 하면서, 북한이 대한민국 국민을 심리조종하도록 마음대로 방치하면서, 꼭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으며 그들의 페이스에 말리도록 하며 저학력 열성 지지자의 무의미한 객기만을 강조합니다.
김일성 민족이론과 대한민국의 민족이론의 헷갈림과 자유주의적 공동체관과 공산주의적 공동체관의 헷갈림은 위험 수위입니다. 언론은 바름과 그름을 변별하지 않고 인맥에 의해서 가치포폄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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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라이트 운동은 자신의 과거를 구체적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 학술적으로 검증자가 나올 수 없게 하는 환경에서 탄생한 구제불능의 자칭 우파. 논리의 구체적 실체는 한나라당에 잠입한 1983년 민족해방선언자 김영삼대통령계보자의 김대중대통령계보자와 힘겨루기를, '우파'와 '좌파'에 일치시키는 '레슬링'쑈인 것이다. 이러한 레슬링 쑈가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진전시켜왔으며, 한국 사회를 소리소문 없이 다수에게 세뇌시키는 정치프로그램의 전진을 지속하는 것이다. 우파가 무엇이고 좌파가 무엇이고 하는 원칙적 개념 정의에 대한 충실이 아니라,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김영삼은 무조건 선이고 한나라당에 들어왔으니까 우파란 전제로서, 일국사회주의 공산이론 숭배자의 '진영론'을 내세우며 변증법을 휘두르는 '우파판' <임헌영교수의 민중문학진영논리>일 것이다. 이러한 힘겨루기 시스템이 있기에, 한국 사회에서는 '민족해방이론'을 그 어느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제도권의 그물망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서 차지한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의 많은 논쟁에서, 좌파가 위장 전향하여 우파 스탠스에서 서고서, 공을 주고 받으면서 특정공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원조는 [창작과 비평 87-부정기 간행물]의 사회구성체 논쟁 대담문 마지막에서, 논쟁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홍보하는 책략의 일환이다. 이러한 가장 가까운 예는 강금실 장관의 북한인권주장이다. 우파의 열에 여덟 아홉은 송두율때의 그 분의 자세를 보아 진심이 아님을 안다. 바로 다음번에 홍준표씨와 맞장뜨게 맞물려 세우는 홍준표씨를 위하는 가짜 바람잡이에, 열린당에서 헤쳐 나와도 좋고 아니어도 변호사로서 수입에 도움이 되는 손해 안 볼 장사로서의 면모가 드러났다. 홍준표씨를 돋보이게 하는 홍보를 위해서, 강금실장관에 손해 안볼 장사로서의 거래가 전제되었다고 추정되는 바탕으로, 강장관이 북한인권문제를 가볍게 제기한 것이다. 뉴라이트 운동은 단 한차례도 한국 사회에서 명명백백한 용공좌익 이념인 '민족해방이념'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반박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해방이념'은 좌익 이념 자체라고 등치 시켜도 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교재를 많이 읽어버린 사람에 비해서 순수하다는 식의 '오십보'만 선이란 생각은 온당치 않다. 오히려, 1990년대 초반의 문민정부에서 처럼 대남통일전선에 비교적 거리가 멀다고 간주한 책상물림 독서파들에는 국민들은 관대했었던 것이 맞다. 왜냐하면, 뉴라이트운동이 민족해방운동이념의 변주곡이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전대협 선배들이 대학 후배 속여 먹는 수사학적 변주곡을 택할 뿐이다. 기성세대는 모른다. 민족해방 집회에 나선 전대협 간부를 제외한 대다수는 꿈에도 자기가 김일성민족론에 동의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따라나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민족'과 북한공산당이 리드하는 김일성 민족이 명확하게 다름에도 얼마나 그들이 헷갈리게 써서 사람들을 사기쳐서 유도하는지를 모른다. 그것을 전직 전대협 간부 출신의 운동권은 속고서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다수를 '386 따라지'라고 을씨년스럽게 조롱했다. 조롱하려는 의지가 진심이라면 깨어나도록 자기희생을 통해서 반복으로 천번 만번 억번을 이야기함이 인간적일 것이다. 뉴라이트는 전직 전대협의 최고위 간부 선배들에 가깝게, 표피 의미와 심층 의미가 나뉘어지며 심층의미를 감추며 끝까지 거짓말하는 논쟁술의 훌륭한 소유자이다. 뉴라이트가 미국과 우파를 속이고 있다는 증명은 간단하다. 꼭, 박대통령시대처럼 수십인만의 깨인 소수의 성장 국가 만들기에 국민이 좌익사상에 오염되지 말라고, 힘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찍어눌러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바탕으로서 우파 신념을 가지려면, 전대협과 공산주의 운동 자체와 전대협 운동을 통해서 무수하게 상처 받은 자들에 '사죄문'을 올렸어야 마땅할 것이며, 공산치하를 경험한 노년 세대들에 '동무'단어에 가까운 '민족해방'변주곡은 포기했어야 마땅하다. 뉴라이트는 약한 국가를 내세우는 뉴레프트 집권기의 미국을 비판하는 미국의 애국자 헌팅턴이나 후쿠야마의 입장이 아니라, 약한 국가 시대의 뉴레프트 집권기를 허락하는 '지는 보수'담론에 병적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 외곽의 비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뉴라이트 구성원 전원에게 '나는 공산주의가 싫습니다. 당신도 그렇지요'라고 하면, 그들은 전원이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서, 개개인의 소중함과 자유에 기초된 바탕의 논리보다는, 전대협 공동체에서 기초한 '전대협의 자유'를 우파 일반의 자유로 규정한다. 북한인권론을 내세우는 논리에 공산주의 치하에서 당연하게 빚어지는 인권 박해 부분의 해설을 하지 않는다. 김정일이니까 나쁘고 못 살게 해서 나쁘다고 규정한다. 뉴라이트운동은 '나는 공산주의가 싫습니다'하는 이들을 대변하지 않고, 우파 권력체를 부당하게 대변하여 조금 덜 과격한 공산주의의 변종을 하고 싶습니다, 라는 결론으로 요약된다. 김진홍목사님은 훌륭하신 목사님이다. 그러나, '기도농법'이라니 서구 근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역할을 철저하게 부정하려는 말씀을 안하시더라도, 교육받은 자들에겐 상당한 수준의 '反자유민주주의'적 의지가 간주되어진다. 통일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자에 열어놔야 된다는 바탕은 부당하다. 자유민주주의로의 확장 통일이란 의지가 없는 자들이다. 송두율 비판에 온갖 호들갑 떨었던 이들 세력은, 결국은 송두율이 주장하는 바가 북한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흐리멍텅하게 하려는 바탕이었음에 다름 없음을 숨긴다. 호들갑스럽게 공격했지만 결국은 똑같은 이념을 가진 것을 숨겨왔다는 말이다. 마치, 김영삼대통령이 1983년에 김대중대통령과 민주화선언이란 이름의 민족해방선언을 했으면서도, 늘 호들갑스레 공격해서 깨끗함을 김영삼대통령이 가진 듯 여기게 했듯이. 뉴라이트운동에 대해서 늘 딱 두 가지 질문만 하면 그들의 진정성이 파악됩니다. 1)"나는 공산주의가 싫습니다"란 이들을 대변해온 바 없고, 그들을 줄기차게 완곡어조로 명백히 부정해왔죠? 2) 그러고서도 우파를 대변한다고 믿습니까? 전대협 임종석의장이 대학생을 대변한다고 대학생이 대리권을 허여한 바 없음에도 억지로 그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학가에 아담한 공간을 차렸듯이, 뉴라이트 운동은 좌파 장악 사회에서 우파 언론이 제한적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남은 우파 언론의 자의적 독점적 편애가 만들어서 만들어진 '대변성'이지, 결코 우파이념을 가진 단체가 아닌 것이다. 2. 마르크스 레닌주의 베껴온 거 다 아는 주체사상. 그러나, 김일성의 영생불멸의 창조물이라네.=뉴라이트의 이념은 전대협 전위출신의 왕자병이 만든 곡학아세가 명백. 그러나, 배움이 짧은 저학력 위주의 우파 사이트 열성참여자 배경으로 끝까지 학술적 진실성인척 하네. ******인용문******** ―뉴 라이트운동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뉴 라이트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보수는 ‘수구 반동’과 동의어처럼 쓰였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좌우 세력을 혁신 우파, 수구 우파, 혁신 좌파, 수구 좌파로 나누고, 혁신 우파의 등장을 통해서 정국을 ‘혁신 우파 대(對) 수구 좌파(올드 레프트)’ 게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논쟁을 촉발시켜 왔다.” ―올드 레프트는 누구를 지칭하나. “이미 세계적으로 실험이 끝나서 효용성이 폐기된 이념을 신봉하는 세력을 말한다. 동구 사회주의 실험과 서유럽에서 나타난 복지병(病)현상을 한국 사회에서 부활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올드 레프트인데, 현 집권 세력에 이런 요소가 많다.” ******************** 변증법적 유물론을 잊지 못하고 입에 달고 다니는 흔적은 가볍게 무시해주자. 위 이론은 '영국병'을 치유한 '대처'정신을 강조했던, 김영삼정부의 집권 철학에서 한발자국도 안 넘어섰다. 이 실험은 정확하게 십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후쿠야마의 [강한 국가의 조건]에 기록되었듯이, 영국에 타당했던 영국적 이론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은 강한 국가는 죄악이라고 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며, 김영삼정부의 통치철학은 결론적으로 강한국가를 부담스러워 하는 '강남부자' '대기업' '친북좌파'를 받들고, 다수 국민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건전한 사회]를 생각나게 할만큼, 개인에게 허락된 자율성은 방향성 결여로 인한 혼란으로 나아갔다. 지금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강한 성장 국가'를 국민에 욕구를 요청하여, 그 배경으로서 북한에 대해서 승리하여 굴복 시키게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의 방향성을 증가시킨, 네오콘의 스승인 슈트라우스보다도 더 '이기는 보수'에 대해서 이론적인 골격을 갖춘 박대통령의 이념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물론, 박대통령 이념은 일제 시대 기억을 많이 가지는 이들과의 동시대적 한계성을 많이 가지며, 국제적이지 않고 대한민국적인 특성이 많기는 하다. 대한민국의 국가성을 '약한 국가성'으로 고정하고서도 북한을 포용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뉴라이트와 조갑제파의 이론이다. 이 논리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인문사회계열의 대학원이상 졸업자들에겐 재론의 여지가 없이 말도 안된다고 일치될 것이다. 북한에 이로울 미끼밥 수준으로 내부에서 와해시키면서도, 끝까지 헛것을 보게 하는 작전이라 봐야 적절할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 그 이전의 모든 대통령을 싸그리 욕하기 위해서, 강한국가를 惡으로 만드는 이론을 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강한 성장 국가'로서의 많은 조건을 대한민국은 잃고 있다. 그 부분을 생각해야 할 때, 김영삼대통령의 통치철학으로만 생각 없이 돌아가면, 단순한 김영삼의지의 하수인이지 우파의 대변인이라고 볼 수 없다. 강한 국가로서의 면모도 포기하고서 북한을 북한으로 명시적으로 고정적으로 부르는 자신감이 없이, 약한 국가만이 비전이면서 북한동포론을 주장하면 그러한 논리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하는 것인가는 명백하다. 명백하게, 우파 지지층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뉴라이트 파벌은 김영삼정부의 90년대 초반의 통치철학의 앵무새이며, 올드레프트가 뭐고 뉴레프트가 뭔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김영삼정부의 통치철학으로 인한 우파의 정신오염으로 인한 고통은 아랑곳 없이, 그 내용에다가 단어를 살짝 살짝 바꾸는 것이다. 김영삼정부 때에 '대한민국'의 국가성은 속좁은 것이라고 무시했던 세뇌공식이, 결국은 2005년 오늘날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의 국가해체공식을 위한 지식사기술로 드러났어도, 창립선언문에 '국가주의'로 표현하는 것은 좋은 예일 것이다. '올드레프트'는 학술적으로 명백하다. 후루시초프 이전의 레닌 스탈린 공산당을 의미한다. 그리고 뉴레프트는 영국등지의 유럽지식인들이 뭉쳐진, 공산당중심성을 부정하는 우파 테제들의 곳곳을 해체하려는 자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쓰여질 당시에 있어서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과, 후루시초프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유럽 좌익 공산 지식인들의 자기 정당화 논법으로서의 뉴레프트와 올드레프트 인식, 그리고 약한 국가로 달려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아픔과 불량국가 북한의 문제점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소중함을 파악해야 되는 지금의 문제인식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조선일보]가 신지호교수에게 '올드레프트'의 규정을 요청할 수는 없다. 해서도 안된다. 국제적 학술용어로 명백한 단어 조차도 자의적으로 규정하라고 한다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용하며 베끼면서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이라고 사기치는 북한식의 정치사기술을 하는 것이다. 올드레프트의 규정은 뉴레프트 리뷰 지에서 그들 공산좌익이 이전을 평가하는 차원을 따라야 한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기초하여 무수한 협력 지향적 찬성을 하고서, 국면적으로 불이익이 있다고 크게 뻥튀기는 정치 이슈를 만드는 레닌주의적 개념 규정론의 조갑제기자와 이명박시장식의 사고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학계는 북한의 사상을 레닌 스탈린주의 체제 변종의 공산당으로 규정한다. 어떻게 개념 규정하여 정보를 폐쇄한 자들에 동의를 받음으로 권력화하여 그것을 넘어가려 한다는, 친북주의가 몸 속에 박힌 자들만의 '당연'이되 자유민주주의 세계로는 '곡학아세'인 행각을 언제 그만 두려 하느냐? 3. 표면적으로 좌파에 공격적이고 우파정당을 위한다는 말로만으론 그대들을 신뢰해선 안돼. 반파시즘 연합전선이란 변주곡으로 그대들의 '반공 없음'장착한 부당한 우파대변을 용납할 수 없음이다. ****인용문****** “2007년 대선은 태극기와 한반도기의 대결이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좌·우 대결이 아니다. 다음 대선은 태극기를 지키기 위한 ‘구국연합전선’이 돼야지 단순한 ‘우파 대동 단결론’은 필패(必敗)한다. 지금 연대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각 우파 세력이 상호 생산적인 경쟁을 하면서 결정적인 국면에서 힘을 합치면 되지, 지금부터 어깨 걸고 스크럼을 짤 필요는 없다.” *************** 한반도기는 결국은 김일성민족론의 한반도 관철을 말한다. 임수경이 방북할 때 이입된 '조선은 하나다'란 슬로건이 한반도기이다. 그러면, 북한공산당이 공산당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자는 한반도기의 구체적 정치논리의 드러남을 설명하려 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다. 한반도기는 북한공산당성이자 북한의 인민성의 집결을 말하며 국내 친북좌파의 충성체를 말하는데, 조갑제파와 뉴라이트는 한결같이 북한공산당을 왕조로 규정한다.(미국의 '네오콘'은 까맣게 속았다.) '구국연합전선'이란 말이 한반도를 적화하기 위해서 남로당이 1945-1948년의 정치공간에서 먼저 쓴 용어이며, 기원이 반파시즘 연합전선론이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 어떠한 의미로든 미국과 우파는 그대들에 이러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을 근거가 있다. 1) 나는 공산주의가 싫습니다, 라고 하는 자들을 대변할 의사가 있으신가요? 그러기위해서, 내면과 외면에 진실한 기본 조건으로서의 진정한 전향을 하실 의사는 있으신가요? 2) 그것을 안하고서도 우파를 대변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나요? 3) 반파시즘 연합전선론을 장착하여 우파가 당신들을 믿었다 칩시다. 그러면, 당신들이 그 이후에 정통 우파를 내부에서 침몰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은 뭘로 하죠? (설마, 스탈린이 연합전선론으로 바보 일으켜서 연후에 잡아 먹는 기법을 모른다고야......) *. 이들이 가는 곳에서 친북좌익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공산당의 '반동'규정으로 이러한 내용임을 알면서도 공격하는 것은, 김대중전대통령에 기득권자와 우파를 대변한다고 불만을 토하는 정통 좌파 세력들의 불만과 연장선으로 봐야 적절하다. 우파들의 시선을 기만하기 위한 단순한 책략인 것이다.
뉴라이트(NR)운동은 민족해방운동(NL)의 단순한 분화. 미국과 우파 세력을 그만 속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