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천진
화북진에서 20리길 조천진(朝天鎭)에 도착했다.
조천진은 화북진의 판박이다.
화북과 조천만이 아니고 제주섬 해안선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9진
(鎭), 25봉수(烽燧), 38연대(煙臺)가 모두 그러하다.
심지어 비석거리까지.
가치있는(요충지) 섬의 숙명이라 하겠다.
조천진에는 화북진의 환풍정에 비교되는 연북정(戀北亭)이 있다.
유배자들이 이 정자에서 한양으로부터 올 기쁜 소식을 고대하고,
북녘의 임금을 향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조천이 화북과 더불어 제주의 양관문중 하나
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다만, 제주관아에서 지근인 화북보다 20리나 먼 이곳으로 오고간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연북정(1. 2), 조천연대(3), 조천비석거리(4)
1970년대에 지인들과 부부동반으로 제주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우리가 대절한 버스기사는 자기의 셔츠와 신발이 일제라고
자랑하며 제주민 중에 재일교포 가족없는 집이 거의 없다고 했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뭍으로 진출하기 보다 일본으로 밀항해
천신만고 끝에 성공해서 가족을 돕고 있음을 에둘러 한 말이리라.
광복은 됐지만 정부의 배려가 미치지 못해 여전히 곤핍한 제주가
재일교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데, 조천의 삼일독립운동기념탑이 있는 만세동산도 재일교포의
희사(喜捨)에 의해 조성되었단다.
압제했던 자들를 상대해 벌어 그들에 항거한 기념동산을 세웠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사람들이라면 결례가 될까.
읿본에서 '껌'으로 시작해 재벌이 된 '롯데'가 서울에 등장했을 때
매판자본으로 매도한 이들도 있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조천만세동산의 3. 1독립운동기념탑(1, 2), 신흥리방사탑(3)
만세동산에서 조천연대가 있는 해안으로 다시 돌아가 신흥리방사
탑(防邪塔) 앞까지 나아갔다.
기능면에서 뭍의 장승에 비견되는 돌탑으로 섬 곳곳에 서있다.
즉, 마을 어느 한 방위에 어떤 불길한 징조가 비친다거나 지형이
허(虛)하다면 그러한 허한 방위를 막아야 마을이 평안하게 된다는
속신(俗信)에서 쌓아 올린 탑이 방사탑이다.
신흥리에는 포구의 방파제 부근과 북서쪽 바닷가 등 두개가 있다.
4. 3 사태
아직 휴면중인 함덕해수욕장 모래밭을 잠시 거닐었다.
제주 다운타운의 지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인기를 누릴 수
있을 텐데 물빛이 가장 아름다워 더욱 사랑받는 해수욕장이란다.
나는 1996년 여름에 투병중인 아내와 함께 여기에 머문 적이 있다.
암(癌) 수술후 장기간의 항암치료에도 회복 기미가 없어 절망적인
아내에게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과 권유에 따라.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참담하고 절박한 여행이었다.
해수욕장 일대는 바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혀 생소하게 변했다.
호텔과 리조트 등과 편의시설이 들어서는 등.
가공스런 급변 시대에 13년은 참으로 긴 세월인데 당연하지.
당시에는 없던 함덕리4구 샘물공원 정자(평사정)에 앉아 그 때를
돌이켜 보며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해 준 김홍기님에게 전화했다.
그 때 이후 친구 김상욱과 함께 하는 한라산등반 뒤풀이때 이따금
재회하지만 함덕을 통과하는데 무심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함덕해수욕장 샘물공원내의 평사정
김녕(金寧)도착 후 되돌아와 만나기로 한 그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서둘러야 했다.
김녕 길은 북촌삼거리로 진출해 한동안 일주도로를 타야 한다.
북촌리(北村)는 예전에는 뒷개(後浦) 또는 북포(北浦)로 불리기도
했다는 제주 해변마을의 전형(典型)이다.
곧, '너븐숭이4.3기념관' 앞에 당도했다.
<제주4. 3희생자 북촌리원혼 위령비>가 서있는 곳이다.
화북에서는 '곤을동4. 3마을유적지' 안내판을 무심히 지나쳤는데.
'너븐숭이'는 '넓은 쉼터'라는 뜻의 제주방언이란다.
이 평화로운 해변마을이 참혹한 살육의 장(場)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반세기도 더 지나 국가권력의 과오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더불어 그 자리에 기념관과 위령비가 들어섰다.
그랬다 해서 북촌의 439위 원혼들과 제주 전역에서 그렇게 당한
희생자들이 과연 편히 영면에 들어갈 수 있을까.
너븐숭이 4. 3기념관과 위령비
과도 혼란기에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한 섬에서 일어난 이념적
갈등과 반목의 불행한 산물이라고?
무남촌(無男村)은 그렇다 치더라도 애기무덤들은 왜 있는가?
2천년전 예수가 태어났던 때의 베들레헴도 아니며 삼족을 멸하던
시대도 아닌데 어린 아이들까지 무참히 죽인 것을 어떻게, 무어라
변명할 것인가.
이 시대에 4. 3만 있는가.
국민방위군을 비롯해 무수한 양민을 마구 살해하지 않았는가.
군사쿠데타정권은 또 어떠했는가.
겨우 30년 된 5. 18은 어떠한가.
동족간에도 이러했거늘 어느 나라를 지배한다면 얼마나 잔혹할까.
모골이 송연(毛骨竦然)해지려 해서 훌훌 떠났다.
조천진 ~ 김녕원(金寧院) 25리길중 아직 한참 남기도 했고.
애잔한 추억때문에?
구좌읍(舊左)에 접어들어 김녕교차로에서 하루를 마감하고 함덕
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 갤로퍼승용차가 해결해 주었다.
제주로의 첫 히치하이크(hitch-hike)다.
함덕에서 14년 만에 재회한 그는 이곳에 정착한 월남 피난민이다.
하산(霞山金尙昱)의 친지라는 점 외에도 평안도 기질이 여전하여
대하기가 편하다.
호기찬 한라산 뒤풀이와 달리 처연했던 그 때를 회상하는 자리라
분위기가 적잖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회상은 유명하다는 제주돗괘기보다 더 진한 안주였다.
그 때, X개월이 고비라는 의사의 상투적 답변보다 아내의 회생을
비관시하는 친정쪽 분들의 위로와 당부가 나를 더 침통하게 했다.
그래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우리의 여행(死別旅行?)은 함덕
여름바다에 이어 태국 파타야 해변으로 이어졌다.
그랬는데도 아직 건재한 우리의 스토리가 최고의 안주일 수 밖에.
찜질방(황금불가마)을 나선 새벽에는 아무 탈이 없었는데 김녕길
버스 안에서 돌연 오한의 엄습을 받았다.
간밤의 과음 때문이라면 진작에 그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제 석양에 접은 교차로에서 김녕해수욕장을 구보하듯 뛰었으나
오한이 물러가기는 커녕 더욱 심해갔다.
식당들이 이 이른 아침에 영업을 할 리 없다.
인근에 병의원, 약국이 있을 리 없거니와 있다 해도 일요일이다.
늙은이의 창백해진 안색에 놀란 해수욕장내 한 분의 호의로 달려
간 평대리(坪岱)의 삼성연합의원이 다행히도 진료한단다.
의사의 출근을 기다리는 1시간 남짓이 퍽 고통스러웠건만 의사는
정형외과 전문이라 내과분야는 확진할 수 없다는 것.
다만, 기본적인 체크로는 이상 징후가 없다고.
한 대 맞은 주사 효과인가 때맞추어 비춰오는 햇볕의 위력일까.
오한이 가시고 걸을만 했다.
그러나, 세계 최장(13.422m) 용암동굴인 만장굴(천연기념물 제98
호)을 비롯해 동굴의 본산 김녕을 지나쳐버린 것이 유감이었다.
UNESCO자연유산 등재와 관계 없이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고 미로
공원도 들러보려 했는데.
결국, 애잔한 추억 더듬다가 이 꼴이 된 것인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해안도로로 다시 나갔다.
봄기운이 물씬하는데도 해안은 이상하리 만큼 한적했다.
이틀 후에 장이 설 곳이라기엔 너무도 황량한 세화민속5일장터다.
장날(5, 10일)이 아니라고 이렇게 까지?
해녀들, 왜 변했을까
해안에서 좀 떨어져 '제주해녀박물관'과'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이 자리잡고 있다.
제주에서 '호이~호이~' 휘파람같은 소리는 해녀(海女또는潛女)의
가늘고 긴 호흡소리를 뜻한단다.
아무 장비도 없이 해저20m까지 잠수하여 해산물을 캐내는 해녀야
말로 초인(超人)에 다름 아니지만 오죽이나 숨이 가쁘겠는가.
가계를 책임지고 섬 경제의 중추였고 항일운동의 선봉이던 해녀는
강인한 제주여성의 상징이며 제주여성문화의 아이콘이란다.
그러므로 '해녀'가 한라산에 이어서(2번째로) 제주도문화상징으로
선정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해녀박물관(1~3)과 해녀항일운동기념탑(4)
그러나, 고령화와 지망자의 격감으로 사라질 운명이란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낳지"
고달픈 해녀의 삶을 스스로 한탄하는 속담이 회자되는 한 '물질'에
뛰어들려 하는 여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가계와 섬 경제의 중압감에서 해방된지도 이미 오래되었는데.
오매불망하던 뭍의 해안으로 진출해 물질하며 북상을 거듭하다가
결혼, 정착한 부지기수의 해녀들 이야기도 옛얘기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세화리 막다른 해안길 입구의 용문사(龍門寺)에서 얼마 가지 않아
불턱에 모여 물질가기 직전에 수다중(?)인 해녀들과 마주쳤다.
'불턱'은 겨울에 해녀들이 물질후 불지펴 몸데피는 장소를 일컫는
제주말이지만 물질의 시작에서 끝맺기까지의 전천후 공동장소다.
그러므로 비록 노천이지만 그네의 휴식과 대화, 온갖 정보의 교환,
물질 수련 등의 공간이며 직접민주주의가 구현되는 해녀공동체문
화의 상징이란다.
지금은 거의가 온수시설을 갖춘 현대식 탈의장으로 바뀌어 해녀
복지도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정작 주인공들(海女)이 없다면?
불턱도, 새롭게 태어난 시설들도 모두 유물(遺物)이 될 운명?
용문사(1)와 불턱(2)
1996년의 자전거 일주 때는 우중에도 그네가 따온 홍삼을 안주로
하여 소주잔을 함께 나누며 담소를 여러 번 했다.
한데, 그때의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나려 하는데 이번엔 말 걸기가
민망하도록 배타적이다.
해녀들, 왜 변했을까.
그 때는 핸섬(handsome)했으나 지금은 늙은이이기 때문일까.
굳이 할 얘기가 있는 것 아니고 실없는 늙은이로 보이기를 바라는
바도 아니기에 길을 재촉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