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갯샘
-작은 갤러리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어디론가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살아온 날보다
내 이름이 너무 가볍거나
그림자가
햇살보다 무거운 날
강계 갯샘 찾아 떠난다
자운토방 소설가의
새벽 원고지가 떠다닌다는
칼국수 한 그릇
바지락을 헤치며
뚝뚝 떼어난 울음공양 비운다
아직도 오독거리며 질긴 유고
몇 마디를 젓가락으로 건져낸다
겨우내 쌓아둔 침묵들이
부침개 하나 익힐 화목이 될까
수제비 빈 그릇마다
해인삼매 바다가 밀려오는
높고 작은 갤러리.
수제비 위에 뜬 자운토방과 작은 갤러리
-자전거는 멈추면 쓰러진다-
세상은 그림이다. 아니 화첩이다. 우리는 저마다 필선을 따라 화첩기행을 떠난다. 누군가는 백두대간을 따라 자전거여행을 떠나 동행한 사진작가 허 모씨가 내 집까지 찾아와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나는 늘 한 곳에 머물며 크놀프들의 다리를 다독거리는 것으로 화첩기행을 대신 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는 진도 모도에서 한 달 여동안 머물며 상여가 어떻게 섬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가는가 사진으로 담았다. 인사동에서 광주 궁동에서 진도만가와 다시래기를 엥글에 담아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가 지났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해서 여름의 바다가 사라질 리가 없다. 도시의 바이러스로부터 도피하려는 무리들이 ‘메멘토 모리’라는 주문을 내팽개치고 남쪽 황토길 삼백리를 지나 남해안 바다를 찾고 있다. 누군가는 오두막에서 데카메론을 쓸 지도 모른다.
바닷가 작은 갤러리는 온통 초록의 향연이었다. 진도는 산도 들도 바다도 청록의 노래를 부른다. 바닷길을 달리는 자전거를 쫓아가는 향은 봄동에서 겨울대파까지 스펙트럼을 이룬다. ‘바다의 꽃’이라는 마플로는 아열대의 푸른 그늘을 드리운다. 사의전신(寫意傳神). 화가는 설명을 줄이고 경물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시화동원 불이(不二)라 할 것이다.
진도출신으로 21세기에 시서화를 체화시킨 분은 오직 금봉 박행보 화백 뿐이라고 감히 알리고 싶다. 그분은 겸손하니 ‘江山을 훔쳐보고 詩를 건졌’다고 첫 번째 시화집 제목을 달았다.
그림을 읽지 못하는 시인 작가들이 너무 많다. 모든 비유는 날것 생선회처럼 날만 섰지 깊은 숙성의 맛은 머릿 속에 남지 않는다. 나 또한 그 부족함을 채우지 못하고 늘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림과 글씨를 좋아했던 송나라 휘종은 궁중 화원들에게 어느날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 踏花歸去馬蹄香"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다. 단 꽃을 일체 그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다른 화가들이 모두 데꿀멍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려 올렸다. 말이 떨어진 꽃을 밟고 가자 그 발굽에 배인 향기를 맡았다는 것.
또 어느 날은 화공들을 불러 '竹鎖橋邊賣酒家(대나무가 다릿가에 있는 술집을 둘러있다)'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사람들은 모두 술집을 그리기에 열심이었는데 오직 한 사람은 다리에 대나무만을 그리고 그 밖에 술 파는 곳임을 알리는 기 한 폭을 걸어놓은 것만 그렸다. 드디어 이 사람이 장원했다고 한다. 화공의 상상력이 가히 시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늘 주책(酒冊)에 젖는다.
이 유명한 일화는 요절한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늘 우초의 자전거를 사람을 태운 말로 비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자전거라기 보다 수평의 세계를 연장시키며 감상자들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 향기를 맡는 몫은 감상자들의 것으로 넘긴다.
친구인 임동확 중앙대 교수는 또 다른 요절시인 ‘안개’의 시인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모든 인간의 삶은 결국 거대한 은유‘라고 규정한다. 기형도는 왜 정거장에서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하면서 궂이 ’미안하지만‘ 이라고 했을까. 도시의 샛강은 죽음의 강이었다. 침묵을 강요하는 개발 자본주의의 수렁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바다는 재생의 세례강이다. 우초는 늘 죽림바다를 ‘내 마음의 호수’라고 불렀다. 캐도 캐도 나오는 바지락과 귀머거리 해방고둥, 화랑기가 살아있는 갯벌. 그 가운데 바이칼호 알혼섬의 돌무더기같은 갯샘이 오래 동안 이 갯마을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지금은 우초 박병락 화백의 그 푸른 붓질의 물길질이 나그네들 영혼의 갈증을 적셔준다.
무엇을,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이 된다.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정거장의 시간표는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다보탑이 되기도 하고’ 뒤집으면 짜투리 숫자로 다가온다.
바다로 떠나가서 그 바다에 무엇을 함부로 버리지 말자. 많은 충고들도 쉬이 씻어보내지 말라. 저 잿빛의 거대한 충고에 지레 뒷걸음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가 진도에서 시인으로, 화가로, 다시래기 소리꾼으로 태어났다. 오직 두려운 것은 알고 좋아하면서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 뿐이다.
한 그릇의 수제비국을 만들기 위해 우초 부부는 수없이 원형을 뭉게면서 점착성을 힘들게 얻어낸다. 그러나 정작 한 점 한 점 살을 떼는 데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기다리는 손님들은 울금막걸리를 살짝 맛보며 벽에 걸린 작은 액자 속에 들어앉은 산과 섬들을 제 삶의 무게와 흔들림을 견주어 보기도 할 것이다. 물리적 규모는 오히려 염치없이 상상력을 짖눌러버린다. 그릇은 그 안이 비어있으므로 쓸모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노담은 말하지 않았던가.
30대 중반 첫 부임지로 조도에서 5년을 보내고 남쪽 섬 바닷가 진료소에서 아내가 살고 있을 때 나는 읍내에서 막버스를 기다리며 정거장의 시간들을 소요하다보면 어디선가 싸이렌이 울리곤 했다. 애국가도 새들도 떠났지만 머릿속을 예비검속이라도 하는 듯 울리는 싸이렌소리는 여전히 우리들의 저녁시간을 지배하였다. 아슬아슬한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며 은색 주화의 개수를 헤아려가면서 죽림행 퇴근버스 여행을 반복하였다.
아내는 날마다 달이 뜰 때면 온전한 사내를 기다렸지만 나는 늘 잘못 배달되는 부실한 반려품에 불과했다. 일상을 힘들여 조인 흔적은 없고 막걸리 냄새에 느슨해진 허리띠와 아침 바다내음과 맞바꾼 몇 구절의 힘겨운 문장들을 지역 동네신문사 칼럼 문구를 미역귀를 오물거리듯, 시간에 수액을 바르며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잊어버렸을 때에도’ 그 사내는 봄이 아닌 계절로 찾아오곤 했었다.
인천에서 사귀었던 또 한 명의 벗. 한상봉 도로시 데이 영성센터 편집장은 파커 파머의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에 대한 실망을 소개하고 다른 답변을 소개한다. ‘메멘토 모리’가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결정에 도전하도록 한다. 지금 여기에 완벽히 존재하고, 그러므로써 영원한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정이다. 올바르게 이해된 영원성은 시간의 영속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지금을 통한 시간의 극복이다.”이다. 바닷가에는 신이 늘 산책을 하는 곳이다.
그 바닷가에 수제비국을 파는 가게가 들어섰다. 주인은 화가였다. 그 부인도 본디는 미술학도였다. 이미 미술대학을 다니던 젊은날에 전국무등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필력과 구상력이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고향의 충고는 솔숲 방풍림을 뚫고 뭍으로 오르는 해풍처럼 시리고 영혼을 에이게 하였다. 황토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누런 막걸리를 마시러 그 현장 마당을 자주 찾았다. 우초는 성실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강계 바다에서 건져온 숭어회도 잘 떴다. 초은 박태우 화백도 ‘연 시리즈’를 약념(藥念)으로 풀어놓곤 했다. 산다는 것은 그래 한 시라도 은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에꼴드 죽림’을 꿈꾸던 질풍노도 시대
마침 그 때 오봉산 건너 탑립마을로 50대 중반의 소설작가 한 분이 이사를 왔다. 문화일보에 소치 허련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를 마감하고 이곳 남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한옥집을 지었다. 전망이 툭 트인 집은 많은 문사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 자운(紫雲) 곽의진씨였다. 서울 문단에서는 잘 알려진 여성 소설가로 김동리선생의 추천을 받아 여러 단편집을 펴냈으며 직접 출판사 운영도 하며 문예지까지 뻗쳐 아동문학시리즈 개발 도중 접었다고 알려졌다.
그녀가 진도에서 두 번째로 찾는 향은 초의(艸衣)선사의 다향이었다. 길 위의 산문집 ‘향 따라 가는 길’ 그 향을 찾아 두륜산 일지암을 자주 다녔다. 옥천을 지나 강진 만덕산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야생차 산길을 누비며 다녔다. 한 아름의 동백나무숲 붉은 꽃보다 붉은 열정은 거칠 것이 없었다. 세방낙조 마을 가장 허름한 꼭데기집에서 거주하던 시절부터 나는 5월의 밤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사천리에서 와우리 개초리 해안을 걸어 찾아가 아침을 함께 맞고 읍내장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편지글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나를 황홀하게 괴롭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자운토방이 자리잡고 작은 갤러리를 자주 다니면서 이 갯벌에서 엉덩이가 실팍해진 여인의 삶을 진솔하고 진득하게 새겨놓은 ‘실팍한 궁둥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사자인 춘심씨는 지금도 물이 빠지면 바자락을 캐로 갯벌로 나간다. 젊어서 서방 잃고 대바구로 얻은 것이 노래였다. 그 노래의 흥으로 더운 피를 씻었다. 자운선생은 명량대첩 주역을 호남 백성들로 재조명한 소설 ‘민(民)’도 의욕적으로 냈다. 우재 이철재. 나절로미술관장. 김희준 MBC PD. 이창준 현 재경향우회 사무총장 등. 수제비 한 동우로 이문회우(以文會友)를 다졌다. 그야말로 ‘에꼴드 죽림’ 멤버들 중에 농민소설가 정성숙씨, 대륙철강의 김권일, 파란비의 소설가 박종규교수, 일산의 박성숙도 단골이었다. 이곳에서 ‘또 하나의 고려있었네’라는 민요역사극의 대본이 완성되었다.
(자운토방에서 ‘칼의 노래’를 구상하던 시절의 김훈과 곽의진)
이제 자운은 여귀산의 마고선녀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아비규환의 팽목항을 날마다 찾아다니던 그 봄 5월. 찔레꽃이 이제 막 피던 날. 자운토방 텃밭에서 풀 위에 눕고 말았다. 언제나 바람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 아침바다의 안개로 100세의 아버님(고 곽학남옹)과 함께 연운공양을 즐겨 하시던 자운 선생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벌써 5년이 지났다. 이런 6월이 깊어지면 하얀 찔레꽃을 모시적삼 가슴에 꽂고 오봉산 탑돌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오봉산의 달빛 한 소반 차려 한 접시의 젖내음을 새벽 찔구향으로 버무려 토방마루 앞 고인돌탁자에 천연스레 내놓던 여인. 홍 주 한 잔의 향과 반주도 바다를 건너가 버렸다. 나는 다시 병속의 새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아프락사스는 태양의 저쪽으로 날아가 버린 것일까.
(갯샘 한 여인이 50대에 이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 뒤 아이가 서 아들을 낳았다 하여 ‘아들 낳는 샘’으로 알려졌다.) 본디 이 샘은 강계마을 입촌조인 주비장이 발견해 처음엔 식수로 귀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웃샘 아랫샘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지금은 한 곳만 남아 있다.
내 아들의 대부를 자처한 막걸리 간첩
죽림 시향골에 살던, 막걸리 간첩의 누명을 20년 만에 벗어난 장의균씨는 7년8개월의 무고한 옥고에 대한 재심이 받아들여 1차 보상을 받은 뒤 요즘은 자주 진도 죽림을 찾는다. 서울에 개마서원 복원을 남은 생의 숙원으로 삼은 장 선배. 10년간 진도 시향골 생활은 페관도 두문불출도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르강에서 알마티로 강제이주된 조선 호랑이 여천 홍범도장군의 흔적을 찾아 카자흐스탄을 자주 찾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서 천자문과 노자 강의를 받았다. 나중에 읍내 세중이네 학원으로 옮겼다. 그 다음 해에는 박영상 당시 군의원의 도움을 받아 군청 철마도서관 3층 세미나실에서 막걸리강의를 진행했다.
죽림은 그에게 기다림과 인고의 ‘거대한 은유’가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안식처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은유와 상징의 바다를 떠나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약초가 되어 살아간다. 날마다 해풍을 맞으며 독밭에다가도 징하게 발뿌리를 되게 내리 뻗는다. 모든 경전은 은유와 상징의 사전이다. 공자나 석가모니도 제자들마다 다 달리 설법을 하였다. 요즘의 선사들은 너무 어렵게 지식전달에 매달린다.
접도 앞 바다는 금갑만호의 식탁이며 세례강이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인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바다와 함께 사는 강계 사구미마을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풍습 등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바’와 ‘단이’라는 진도만의 인칭접미사와 대바구 풍습을 밝혀내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죽림진료소와 갤러리 식당 바로 앞에 뒤태를 드러낸 접도와 다양한 아열대 식생대 야생초의 남망산. 숲해설사 장재호씨는 20년 넘게 이곳을 답사 안내하며 웰빙길을 명품산책길로 만들어냈다. 가족간에 휴가를 보내는데 수온과 경사가 가장 적합한 금갑해수욕장과 사구미 연대, 탑쌓기 시합을 한 전설이 서린 탑공원과 시비, 선녀들이 내려와 춤과 노래를 들려주는 국립남도국악원 등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여름엔 진도참전복 먹이로 쓰는 다시마가 많이 나오고 늦가을부터는 앞바다에서 우윳빛 굴이 나온다. 날이 추울수록 굴구이와 굴회는 그 맛이 일품이다. 굴부침개도 겨울철 추위를 물리치고 배를 든든히 채우는데 제격이다. 그림보다 더 그림같은 풍경을 가진 죽림 강계바다. 나의 두 번째 시집 『몽유진도』를 이 마을바다에 헌정한다.(박남인 진도문화 허튼소리꾼)
*나는 그 때까지도 시집을 엮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아내는 갈비뼈가 다섯 개나 부러져 나가고 나는 앞이빨들이 흔들려 결국 몇 년 뒤 빠져버렸다. 20세기는 그렇게 우리와 결별했다. 아내의 통증이 아물어지고 다시 안정이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들이 왔다. 봄부터 가을까지 파도와 솔바람이 아이를 키웠다. 밤이 되면 여귀산 벌바우 위로 떠오르는 별들은 언제나 맑게 빛나며 잠들지 않고 지켜주었다. 동네에 영험이 높다는 할머니 당골을 모셔다 진료소 안방에서 간략한 무병장수 굿을 올렸다. 그래서였는지 얼마 되지 않아 테어날 때부터 조금 뒤틀린 장이 제자리로 되돌아와 우리 내외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눈물이 고일 정도로 어제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달이 뜨면 장의균씨와 나는 죽림 솔숲 아래에서 만나 달빛이 어린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그토록 자주 만나도 늘 가슴은 벅차오르고 죽림 저수지 깊은 곳으로 걸어들어간 죽림사 아미타여래가 아무도 모르게 달빛에 떠올라 면해좌선하여 이 바다의 무량한 안녕을 지킨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장선생은 그림에 관심이 깊었다. 특히 먹으로 단숨에 그린 누드크로키를 좋아했다. 담박하고 간결한 대상을 통해 자기정화를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는 고전적인 원시공동체 마을을 꿈꿨다. 그리고 지인들을 불러 3년 전부터는 임회면 피오동(陛洞)에 약초반 단지를 조성 중이다.
아내는 작년 말 25년간의 보건진료소장(6급)직을 마치고 정년을 했다. 6월 25일 정년 퇴임식을 갖는다. 마음에 두었던 부정맥 심장수술도 탈없이 마쳤다. 관사도 시절부터 죽림까지 계속되었던 나의 가방조수 역할도 마침표를 찍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탑립마을과 귀성마을까지 가 미리 이장님이 동네 방송을 통해 마을회관에 모이신 어르신 들에게 위장약, 관절약, 감기약, 혈압약 주사를 맞춰주는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성함과 나이를 적고 구분해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말목장이 있었던 관사도 짝지말 마을이나 상조도 동구리, 여미, 율목, 좁은도, 당도, 옥도, 섬등포에서 똑 같은 역할을 맡았었다. 물론 숭어회와 소주는 내 몫이 더 많았다. 경기도에서 찾아온 사진전문 여행가 부부의 도움을 얻어 65세 이상 주민들에게 무료 영정사진 촬영해 액자에 넣어 선물하기도 했다.
탑립이나 귀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꼭지딸 참딸을 따먹고 4월에는 두릅과 취나물을 뜯어와 바로 무쳐 봄입맛을 돋구었다. 막 부화를 마친 꿩새끼들이 떼를 지어 놀기도 했다.
우리들이 떠난 그 바다는 여전히 하루에 두 번씩 물이 들고 나며 사람들을 부를 것이다. 바다를 향해 일자진을 펼치고 있는 명품 해송숲. 물김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는 구자도 김밭 위로 햇살이 눈부시다. 아들은 벌써 중2 열여섯이다. 지금은 법원재판을 통해 개명하여 민규라 부르지만 애초 해인이라 불렸다. 당연히 내가 지었다. 아들은 나의 일기다. 참회록이다. 훈장이다.(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