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청→ 야은사 →박서생 묘 →점심식사(온천골 가마솥국밥)→ 박서생 기적비→ 도선굴 → 장현광 묘 → 선산부사 수령비 → 최현 유허비 → 쌍암고택
1-1 야은사-도량동
1403년(태종 3)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남재(南在)가 길재(吉再)가 거처하던 곳에 가묘(家廟)로 사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에 길재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향사하다가 건물이 퇴락하여 1583년(선조 16)에 선산부사 유덕수(柳德粹)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2년에 선산부사 김용(金涌)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그 뒤 순조 때에 이르러 크게 중수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2년에 후손이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사당 안에는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교지와 《야은문집 冶隱文集》의 판각본 및 문집 1백여 권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2 박서생 묘-도량동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여상(汝祥), 호는 율정(栗亭). 할아버지는 윤보(允甫)이고, 아버지는 중랑장(中郎將) 점(漸)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음보(蔭補)로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어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0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우정언에 제수되고 전 20결과 노비 1구(口)를 하사받았다.정언을 거쳐 이듬해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반차(班次)를 무시한 것이라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19년(세종 1) 사헌부집의가 되었고, 다음 해 4월 장령(掌令) 정연(鄭淵)과 함께 철원에 가려는 상왕(上王 : 태종)을 간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1426년(세종 8) 대사성이 되고 1428년 정월, 종묘·제향의 대축판사(大祝判事)로 친향(親享 : 임금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것) 때 축문을 8자나 빼고 읽어 무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1월 대사성으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다음해 12월에 돌아왔다. 1429년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 이듬해 집현전부제학, 1431년 공조참의·병조참의에 임명되고 1432년 병조좌참의·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를 지냈다.
1433년 4월, 앞서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수차(水車)의 이점을 건의하여 농사기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비안의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는『야은언행록(冶隱言行錄)』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1 박서생 기적비-남통동
비석은 율정공 박서생 기적비 생애 야은 길 재 선생간의 학습하시여 실천 벼슬길 내용을 기록한비석으로 70년대 설치하려하였으나 도립공원측에서 불가입장에서 문래방아 등 농업개혁선구자란 말에 80년초에 세워젔고 터는 길씨 문중에서 제공 하였으며 경상북도 도립공원 안이며 야은 길재 선생 강도하시고 추묘하고 있는 채미정 70M아래 이고 금오산 도립공원우측 입구 저수지 에에서 50M지점이다. 주위는 선비의 기상을 상증하는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비안박씨 대종회"
4.선산부사 수령비-선산읍 독동리
조선시대 선산부사를 지냈던 분들의 비를 본래는 선산읍 남문 낙남루 앞에 있었으나 차량통행 증가로 영남유교문화진흥원 100m 뒤편으로 옮겨놓았다.다양한 비석과 뒤편을 둘러싸고 있는 12지신상을 볼수 있다.
5-1 최현 유허비-해평면 해평리
최현의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齋)이며 전주 최씨이다. 좌찬성 심의 아들로, 해평면 해평리에서 명종 18년(1563)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고장이 폐허가 되어 많은 역사적 유물이 전란으로 없어지므로 이를 걱정하여 심혈을 기울여 지리 및 역사, 인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영역에 걸쳐 소상하게 나타낸 일선지(一善志)를 지었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문장과 덕망이 높아 이름을 떨쳤다.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글로 써서 선조께 올렸으며 스스로 의병에 가담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인조(仁祖) 18년(1640) 78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니 조정에서는 순국보조공신 예조판서 완성군이란 가자와 정간이란 시호를 내렸다. 숭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문집이 있다.해평리 마을 남쪽 나지막한 송산에 올라가면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다."인제 최선생 유허비"라고 적혀 있다.1968년 음력 3월에 세웠다.
출처-구미시 홈페이지
5-2 쌍암고택-해평면 해평리
쌍암고택은 검재(儉齋) 최수지(崔水智)의 후손인 최광익(崔光翊)이 1731년(영조 7)에 아들의 살림집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집 앞의 큰 바위가 2개 있어 쌍암고가(雙岩古家)라고 하였다. 동서로 긴 대지에 앞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만 남향이고 나머지는 동향이다.
안채는 비교적 큰 6칸통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방과 부엌 등이 ㄷ자 형을 이루고 있다. 안방 뒤편에 찬방을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구성이다. 사랑채는 좌측에 4칸으로 구분되어 전(田)자를 이룬 온돌방을 두고 3칸 대청과 1칸 제청(祭聽)을 배열한 겹집이다. 사당은 전면에 툇간을 두고 그 뒤편 3칸 모두에 아주 높은 굽널을 들인 장자살문을 달았다. 막돌 초석위에 방주를 세우고 장혀만 수장한 3량가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출처-다음 블로그 "이산"
첫댓글 3월 답사 자료를 일찍 올려주셨네요. 뜻깊은 구미 답사 될 것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전부터 둘러본 것 중에 의성과 연관이 있는 곳을 골라보았습니다~^^
왕산 허위 선생 관련 유적과 마을을 답사지에 넣었으면 합니다. 한번 살펴보세요...
그러면 "장현광 묘"와 "선산 수령비"를 보는 대신 "왕산기념관"을 들리는 걸로 바꾸겠습니다~^^
장현광 묘도 보고싶어요.. 그런데 수령비는 좀... 장현광의 사상과 왕산 선생의 사상을공부하면서
선인들의 사상과 정신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를 논의해보는 답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고하세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