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6일.
윤석수씨 집까지 찾아온 사위와 딸내미로 하여금 아내와 나는
곧장 일어나 나와서 사위 차에 탔다.
그리고 하양읍을 향해 달리기에 딸이 사는 아파트로 가는줄 알았는데,
저녁 먹을시간이 너무 일찍어서 다시 나올거면
어디가서 놀다가 저녁 먹고 들어간다고 했더니,
며칠 전에 저희들끼리 가봤다는 만불사로 가보자고 해서
의견 일치하고 하양을지나 영천쪽 방향으로 달려 곧장 만불사에 도착했다.
한국의 절은 절마다의 특색이 있는것 같은데 만불사는 바로 큰길옆이라 주차장도 넓고,
가건물처럼 지어진 마당 가운데 삼존불을 모셨으며 금색탑에 새겨진 부처님 모습이 색달랐다.
그리고 3층 종루와 오른편 산위에 우뚝솟은 서있는 불상이 눈길을 끌었고,
큰 법당 옆으로 미로를 돌며 기도하는 공간도 있었고, 기념품 판매점도 있었다.
그 뒤로는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부터 관세음보살 불상이 길 양편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정말 만분의 부처님을 모셔 놓은듯
관세음보살 불상아래 동자승인양 그물 모자를 쓴 아기불상이 수도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는 절에대한 안내나 설명을 듣지도 않고, 그저 장면 좋은 곳에서
폰카를 찍어대며 만불사의 경내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뒤 쪽의 법성계가 새겨진 금색 종을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곳에서
누워있는 와불 안내도를 보고, 다시 사위의 차를 타고 한참 공사중인 산을 올라가니
산 중턱을 에워싼 골짜기에는 이미 조성된 납골당 묘지가 즐비하게 조성되어 있고
와불은 그 밑에 먼저 조성된 납골석을 내려다 보며 황금천을 덮고 누워 계셨다.
보기만 해도 엄청 큰 와불은 그 발바닥을 쓰다듬으면 병도 고치고 소원도 이루어 진다는
설명이 있었기에 딸과 아내는 와불의 발바닥을 쓰다듬고 내려왔다.
납골석마다 한 그루씩의 나무도 심은 것이 수목장을 겸한 것 같은데,
일렬로 배열된 나무들 중에는 더러 죽은것과 시들은 것이 있어
그 주인은 기분이 안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와불을 보러 왔다가 괜히
공동묘지에 온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생각 가운데서도 이 정도 납골당 사업이면 엄청난 돈을 벌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지는해를 향해 우리는 만불사를 빠져 나왔다.
차가 있으니 2시간의 여유로도 관광지 한곳 쯤은 둘러볼 수 있다는게 좋았지만,
요즘들어 너무 오르는 국제원유 때문에 경유를 연료로 쓰는 차들이 운행비도 안된다는
뉴스를 볼때 사실 사위차를 타면서도 그것이 걱정되는 현실이었다.
아무튼 길이 좋아서 30분도 안 걸리는 만불사에서 하양의 딸내미집 근처에 도착한 우리는
새로 생겼다는 용궁 횟집으로 들어가 회를 시켜 먹었는데,
속칭 찌게다시로 나오는 별별 음식을 맛보며 가족간의 정을 건배했다.
그 자리에서 곧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였지만,
언제 그렇게 세월이 흘러 버린건지 실감이 나지 않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쫄깃쫄깃한 자연산 회맛에 배를 채우고 사위와 건배하여 마신 소주로
취기가 오른 상태로 딸내미가 사는 하양역 앞 평광아파트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올라가니
이런, 엘리베이터가 중간층에 나를 내려 놓지 않는가?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제정된 지금으로 보면 분명 불법일텐데...
15년전쯤 지었다는 그 아파트. 전세가 싸서 거기 세들어 산다고는 하지만
딸내미 집이어도 쉽게 갈 곳이 못되는 장애인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아파트였다.
아무튼 반 계단이지만 아내와 사위의 도움을 받으며 아파트 안에 들어가니
딸내미의 신혼생활이 한눈에 펼쳐지는데, 방 둘에 칸지른 거실과 주방, 양쪽 베란다.
신혼살림 하기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을만큼 아담하였다.
거기에다 새로 들인 장롱과 침대, 냉장고, 42인치 텔레비등 갖출만큼 갖춰진
살림살이를 보고 나니 이번엔 미리 준비해 놓은 아기용품을 꺼내는데,
뭐가 그리 많은지 배냇저고리부터 기저귀등의 옷감과, 목욕용품 노리게감,
유모차 까지, 백만원이 넘는다는 수십가지의 아기용품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저 외할머니가 기저귀 정도 사준다는 말만 듣고 갔었는데, 돈십만원이면 될줄 알았더니...
그 펼쳐놓은 물건들을 보니 20만원을 보태도 빛도 안날것 같아 속으로 30만원은 줘야
기본 도리는 할것 같은 생각으로 입다물고 있었다...
참으로 딸내미 선예를 낳아 키울때와는 비교도 안될 세상으로 변모한걸 보면서,
다시 맥주로 술상을 봐온 술 한잔을 마시며, 세대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위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기에 일찍 들여 보내고,
나도 노트북 컴으로 금춘카페 들렀다가 자정 전에는 자리에 누웠다.
시집보낸 딸내미 집에서 처음으로 자보는 기분은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냥 친한 친구집에 와서 자는 기분이었다.
첫댓글 윤작가님 댁을 나와 사위와 딸과 영천 만불사에 갔군요. 저도 두어 번 만불사에 다녀왔습니다. 만불사를 구경하고 횟집에서 회를 드셨군요. 그리고 딸이 사는 아파트로 가서 아직 낳지 않은 손주의 옷가지며 장난감이며를 구경했군요. 구경도 잘하시고 딸의 집에서 1박 편히 보내셨군요.
예, 그랬어요. 김선생님. 그날은 그렇게 하루를 보냈어요.
이! 만불사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가 보지는 못했네요. 언제 시간이 되면 어머니 모시고 한번쯤 다녀와야 겠네요. 나보다 어머니께서 더 좋아하시게넸네요. 햇살의 행복한 모습이 눈에 아롱거립니다. 이제 찐짜 할아버지네....... 난아직 총각인데. ㅋㅋㅋㅋㅋㅋㅋ 어쩜 좋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만불사에 순간적으로 다녀왔어요. 남들이 보면 행복해 보이겠지만, 머 그리 행복한 느낌이 안들던데요... 책임과 의무와 내 자신의 건강이 행복보다 더 무겁게 느껴져서요....
의무와 책임과 자신의 건강이 행복보다 더 무겁게 느껴졋다는 말을 들으니 아직 웅이 앞날이 많이 잇다는 느낌이 들어 친구로서 기분이 좋다~웅아 그게 행복인거 아닐가?행복보다 더 무거운 아버지의 책임과 의무가 사랑인거 아닐까?
에고 부러워라~~행복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 같네요~~든든한 사위 대동하고 돌아다니는 기분은 친구들과 같이 다니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을것 같은데 ~~에구 나는 그런재미는 꿈속에서나 볼랑가~~ 그라고 할아버지 되는거 미리 축하합니다.
전국에 뿌려놓은 99명의 아들과 50명의 딸이 있다고 했잖아요. 이제부터 슬슬 그네들을 찾아 다니세요... 남의 떡이 커 보이지만, 입장 바뀌면 그렇지도 않은것이 삶입니다. 아무튼 축하라는 말에는 고마움을 표합니다. 경남형.
마져 웅이 말이 맞어 입장 바뀌면 그렇지도 않은것이 삶이지요.....작은인연 하나에 사는 맛이 나는 것이 인생살이지요.....햇살의 행복이 솔바람님과 여러사람에게 기쁨이지요....
사위차 타면서 기름 값 걱정하고 유아용품 보고 다 사주고 싶어하고 크도작도 않은 딸래미집 자랑이며 은근히 사위자랑 구석구석 늘어 놓고....ㅎㅎㅎㅎㅎㅎㅎ참 좋다~웅아~나도 디기 부럽다~
자랑은 아니었는데, 사실적으로 쓴걸 옥이 넌 너무 상세히 파악했구나! 여자들은 그런 세심함도 있는가 봐? 숙표는 그런점에서 영 깡통인데...ㅎㅎㅎ.
저도 할아버지가 되니까, "나의 전성시대는 다 지나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지만, 세월이 가는걸 잡을 수 가 없어서 안타까워요. 그래도 무사히 다녀왔데니 감사드려요.
뱐등님도 할아버지 되었습니까? 뱐등님 전성시대에는 무엇을 했는지요? 그것이 궁금해집니다. 나는 전성시대도 없이 꾸물꾸물 다 보낸 세월이었던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