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 8조를 보면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처음 해석한 이마니시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관은 차현(車峴以南)을 존재하지도 않는 차령산맥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2005년 실시한 국토연구원의 조사에서 차령산맥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구릉 상태임이 들어났다. 그는 또한 공주강외(公州江外)를 금강이 허구로 만들어진 차령산맥의 위치와 유사한 점을 들어 공주강 남쪽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여기서 외(外)는 금강의 바깥쪽 다시 말해 위(上)로 해석해야 맞다. 금강은 경주를 중심으로 했을 때 배류수가 되고, 개경을 기준으로 하면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이 그것에 해당된다. 만약 개경을 기준으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을 배류수로 한다면 개경 가까이에 있는 임진강·한강 모두 배류수가 되고 만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렇다면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왕건은 태봉국 왕인 궁예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에 성공한다. 쉽게 말해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는 친궁예 세력이었던 홍성·공주·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인근 지역을 의미한다. 실제로 왕건이 집권한지 5일만에 이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고려왕조를 창업하고 왕건이 즉위하는 데 공로가 컸던 공주 출신 환선길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9일째, 즉 태조 즉위 14일째 되던 날에는 공주를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또 모반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되었다. 2개월 뒤인 같은해 8월에 공주·홍성 등 10여 주·현이 함께 고려에 등을 돌리고 후백제로 투항해버린다. 이 지역 출신 호족세력은 궁예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일찍이 궁예는 효공왕 8년(904) 국호를 후고려에서 마진으로 고치고 그해 7월 그의 강력한지지 세력이 있던 청주의 민호 1천호, 즉 약 4천~5천명을 철원으로 이주시켰다. 다음해인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철원은 청주인을 기반으로 한 궁예의 본거지였다. 918년 9월에는 왕건의 도읍지인 철원에서 청주인 임춘길이 같은 고향 사람 배총규와 매곡인 경종 등과 모반을 일으켜 임춘길 일당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에 임춘길·경종 등의 주살에 대한 여파로 청주의 민심이 더욱 동요되는 상황에서 청주 호족세력인 진선이 그의 동생 선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연이은 반란이 왕건에게 생애 최대의 시련을 주었다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볼 때 훈요십조 제8조는 이때 모반사건이 발생한 지역 혹은 반란 주모자의 출신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배역의 땅으로 지목했음이 분명하다.
차현이남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지역이 유력하다고 확인되어 진다. 궁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칠장사(七長寺) 부근의 차현고개(수레티고개)라는 설이다.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과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청주를 온전히 포함하게 된다. 차유령 고개라고도 불리는 차령 지역이다. 공주에 가까워서 이곳에서 금강까지 범위를 표시해 보면 공주 근처의 유역이 설정된다.
훈요십조 8조의 해석을 보고 호남을 배역의 땅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있다. 왕건은 호남사람을 중용하였다.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와 살아서는 상주국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왕건과 호형호제 하였던 개국공신 신숭겸(전남곡성)과 왕건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광주지역 호족출신)또한 호남인이었다. 호남인을 주의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출신인 박술희를 불러 언급할 이유가 없다.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경)출신 호족으로서 나주의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궁예를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