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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을희 장로-여군의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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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형제들의 죽음은 우리 가정의 큰 시련.남편 대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여군 입대. 날씨가 쌀쌀했다.3월 중순에 접어 들었지만 집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바람이 여전히 차가웠다.햇빛은 봄기운을 느끼게 했으나 동장군 은 물러가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이를 감상하는 것이 일과가 된 지 어느덧 여러 해가 됐다.불현듯 맥아더 원수가 군생활을 마감하면서 의회에서 행한 연설이 생각났다.“노병은 죽지 않는다,다만 물러갈 뿐이다” 여군에 몸을 담은 이후 맥아더 장군처럼 되겠다고 생각하며 늘 마 음에 새겨두었던 말이다. 여군.내 인생의 황금기에 시작해 모든 것이 되어 버린 군인생활.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뛰어 들었던 여군생활은 어렵고 힘든 길이었 으나 한편 큰 즐거움이었다. 군생활의 추억을 더듬어 나가던 나는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기억이 없었다.어떻게 된 걸까.눈을 뜨니 병원이었 다.“과로하셨습니다.혈당이 급속히 떨어져 쓰러졌습니다.큰일날 뻔하셨습니다” 의사선생님의 말이었다. 2년여동안 정릉의 감리교안식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너무 무리했던 탓이었다.정동감리교회 교인들이 달려왔다.걱정스러운 얼굴들이었 다.“걱정하지들 말아요.건강하고 활달하기로 이름난 박을희가 아닙니까” 천성적으로 낙천적인데다 군인으로 있으면서 다져진 활달함에 문병온 사람들이 함께 웃었지만 ‘74살이라는 나이는 속일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925년 6월21일 서울 효자동에서 태어났다.아버지 성함은 선(善)자 근(根)자로 충북 영동 출신의 부농이었다.어머니는 강(康)자 옥(玉)자 갑(甲)자로 경북 선산이 고향이다.어머니는 12남매의 맏딸로 13살에 1살 연상의 아버지에게 시집와 아들 다섯,딸 넷을 두었 다. 나는 그중 막내로 태어났다.그러나 오빠 셋과 언니 둘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내가 자랄 때는 위로 오빠 둘과 언니 하나만 있었 다.그나마 하나뿐이던 언니는 시집간 지 얼마되지 않아 숨졌다.오빠만 둘이 남은 것이다.형제들의 죽음이 이 당시 우리가정에 찾아온 가장 큰 역경이었음이 틀림없다.<정리=이승한 shlee@kukminilbo.co.kr> 교육열 높았던 아버지 덕택에 서울로 이사와 소학교 입학.9살때 처음간 교회에서 큰 기쁨 느껴. 자식사랑과 교육열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집안의 우환을 극복하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고향을 떠났다.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시골의 전답을 모두 소작주고 서울 효자동으로 이사하셨다.논과 밭에서 나오는 소출과 아버지의 인삼 판매사업으로 우리 가정은 어려 움이 없었다.아버지는 오빠와 언니,나를 모두 경성사범부속 소학교에 입학시켰다.남자사범부속소학교는 지금의 메디컬센터에 있었고 여자부속소학교는 지금의 계동 천도교 본부에 자리하고 있었다.지금도 어머니가 정성들여 만들어 주신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입학시 험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윤치호씨의 둘째딸 윤영희씨(미국거주)와 동기동창이다.윤치호씨는 감리교 첫신자였다.효자동에서 계동으로 이사한 뒤 우리집에 서 동관대궐이라고 부르던 창덕궁으로 가자면 원서동을 거쳐야 했다.원서동으로 가는 큰 길가에 원동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있었다. 교회당에서 나오는 찬송소리는 길거리까지 울려퍼졌다.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찬송가를 들을 때마다 가슴에 ‘찡 ’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구주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기독교역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밀라노의 궁정 밖에서 들려 오는 어린아이들의 찬양소리를 들은 뒤 성경을 집어 읽고 회심을 했다.그것과는 다르지만 찬송은 나에게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예수꾼들이 부르는 찬송가 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일까” 호기심에 가득찼던 나는 9살때 교회에 첫발을 디뎠다.교회학교 시간에 처음 만난 사람은 유경선선생님이었다.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무척 아름다웠다.밝고 명랑하여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었다. 그는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나는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고 교회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유선생님은 후에 ‘여호와 는 나의 목자시니’ 등 유명한 찬송가를 작곡한 나운영장로의 부인이 됐다 부모님 반대에도 열심히 교회출석.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말씀은 언제나 큰 감동으로 다가와. 세일러복을 입은 유경선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우상이었다.완고한 유교집안에서 교육받았던 나는 유선생의 활달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유선생님은 연극 고전무용 구연동화 등을 했는데 못하는 것이 없었다.자연히 주일이 기다려졌다. 성경공부 시간에 들은 출애굽사건,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5병2어의 사건,사사시대의 드보라 이야기는 감명이 되어 두고두고 잊지 못 했다.드보라는 여성의 몸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시스라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시스라의 적장 야엘과 철병거 9백기를 일거에 물 리쳤다.유선생님께 들은 드보라의 이야기는 후에 군인의 길을 걷게된 나에게 천금같은 교훈이 됐다. 나의 둘째 아이가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운경유치원에 다녔는데 그때 “내가 2대에 걸쳐 가르치는 구나”하며 감개무량해 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유선생님은 나를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성극의 주인공으로 뽑아주었고 가끔 방송국에서 노래도 부를 수 있도록 했다.내 신앙은 이렇게 해서 성장했다.그러나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는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셨다. “집안망신을 시키려고 앰한 델 다니느냐.예배당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연애질하러 다닌다고 하지 않더냐.또 가면 혼내줄거야” 때만 되면 집에서 치성을 드리던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나간다고 하자 질색을 하셨다.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교회로 향한 다음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나를 끔찍이 귀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이용했다.여자의 무기를 사용했다.교회에 못나가게 하면 마구 울었다.아침에 울 기 시작해 저녁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부모님은 나의 울음소리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어느날 방송을 통해 나의 노래를 들은 어머 니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열심히 교회에 다니라며 독려하셨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빛줄기가 되어 나를 이끌었다.전도한다며 동네 친구들을 교회에 데리고 다녔 고 돈이 생기면 헌금을 했다.덕분에 연말결산을 하면 언제나 전도상과 헌금상을 받았다 많은 추억과 기쁨을 준 고교시절.신앙 키우고 정동감리교회 신자가 되는 행운을 만났다. 소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나를 경기여고에 보내려고 했다.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컸던 아버지는 당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진 학하던 경기여고 진학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해 입학시험에 낙방을 했다.아버지는 1년을 더 공부하면 무난히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시고 나를 일본학교 고등과에 입학시켜 1년을 더 공부하도록 했다.그러나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그 시절 경기여고 학생들은 황토색 스웨터를 입고 다녔는데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이화여고생들이 입고 다니던 자 주색 저고리에 까만 치마와 길게 땋은 머리는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경기여고에 낙방한 나는 이듬해 이화여고에 응시했다.12대1의 경쟁률이었다.2번의 낙방은 나로 하여금 기적의 하나님을 찾게했다. “하나님 이번 시험에 꼭 합격하게 해 주세요” 이미 학교에 진학한 동급생들의 교복입은 발랄한 모습은 삼수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 다.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난 3등으로 이화여고에 합격했다.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내가 그렇게 입고 싶어 했던 자 주색 저고리의 한복 대신 세일러복으로 교복이 바뀌었지만,기쁨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이화는 내겐 잊지 못할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미션계 학교인 만큼 성경공부와 정기적인 예배시간이 있었다.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그러나 무엇보다 근처에 정동감리교회가 있어 든든했다.그때 정동감리교회와 맺은 인연때문에 평생 정동교회 교인 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 많은 선배들은 피부가 뽀얗고 발그레했던 나를 무척 귀여워 했다.그 가운데 한사람이 육상부 선배였던 송민도씨였다.그는 달리기도 잘했지만 노래도 무척 잘했다.그는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해 나에게 주곤 했다.송민도씨는 후에 ‘나혼자 만의 사랑’을 불러 가요계 의 여왕으로 군림했다.송민도씨와의 우정은 아직도 계속되어 얼마전 미국 LA에 갔을 때 민도언니 집에서 회포를 풀었다. 이화여고 1학년때인 1943년 일제는 대동아전쟁의 전선 곳곳에서 패전하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학교도 탄압을 받아 폐교의 위기에 직 면했다 일제의 탄압은 끝을 향해 달리고… 일본 유학 꿈접고 입학한 이화여전을 1년만에 졸업.단양 대강초등학교로 배치되는데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여학생들도 ‘근로봉사단’이란 이름아래 지방을 다니며 며칠씩 일을 했다.졸업이 임박하자 아 버지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도 어린데다 이화여고를 나온 언니가 하기 싫은 결혼을 한 뒤 3년만에 세상을 뜬 것이 마음에 걸려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어머니는 내편을 들어주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뭘 그리 서두르세요.아직 나이도 어린데,그러지 말고 하고 싶다는 공부나 더 할 수 있도록 합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설득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난 일본 고베약전에서 공부하고 싶었다.그래서 입학서류를 냈는데 합격통지서가 날아 왔다.그러나 어머니는 나의 일본 유학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셨다.당시 일본은 대동아전쟁의 막바지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세상이 이런 판국인데 19세 밖에 안된 처녀를 혼자서 보낼 수는 없다.정 공부하고 싶으면 여기서 하거라” 난 기도끝에 일본 유학을 포기했다.그리고 이화여전 문과에 들어갔다.문과라고 하면 당연히 영문과인줄 알았는데 영문과는 없어지고 국문과라고 해서 일문학만을 가르치는 곳으로 변해있었다. 학교도 이화여전이 아니고 ‘이화여전여자청년연성소’라 해서 1년만에 졸업시키는 속성과정으로 바뀌었다.이때문에 1944년 우리는 전에 입학했던 언니들과 함께 졸업하는 어이없는 일을 겪었다.이런 변칙제도는 해방이 되면서 없어졌지만 당시 3학년이었던 김옥길선 배(이화여대 전총장)도 우리와 함께 졸업을 했다. 1년만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나는 충북 단양의 대강초등학교로 배치됐다.일제는 전쟁말기에 일본말과 일본정신을 한층 더 고양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일을 시켰다.당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신대로 끌려갈 판이었다.난 단양대강초등학교에서 일본어 선생노릇을 했다.학 생들은 12세에서 25세사이의 여자들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시골 사람들이었다.난 그들에게 일본어와 함께 신앙을 가르치며 하 루빨리 해방이 되길 기도했다.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 못한것 뼈저리게 후회.44년 집에 하숙했던 남학생집으로부터 중매 들어와 단양으로 내려간 이후 첫 방학을 맞았다.단양에선 친척집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별로 불편한 것이 없었으나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 다.방학을 맞은 나는 당장 서울로 올라갔다. 집은 단양으로 내려갈 때와 변함이 없었다.“어머니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 뛰어나오실 거야” 난 어머니를 만나는 기쁨을 두 배로 느끼고 싶었다.대문을 활짝 열고 어머니를 부르며 뛰어들어갔다.그러나 딸의 목소리를 듣고 뛰어 나와야 할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집은 적막감에 싸여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불안한 마음으로 안방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병환으로 누워계셨다.늘 몸이 약해 건강이 안좋으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덜컥 앓아 누운 어머니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아들 다섯,딸 넷을 낳았으나 아들 셋,딸 셋을 잃은 어머니.그때문에 나를 유난히 사랑하셨던 어머니.자식들 을 잃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가 이 지경이 되도록 무심했다니…” 어릴 때 어머니의 배에 발을 척 올려놓고 잠자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후 어머니는 얼마 못가서 돌아가셨다.난 하루종일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손을 잡고 교회에 한번 가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할 걸….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법이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신앙생활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해 나갔다.어머니가 돌아가신지 5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어머니는 나에게 영원한 존재이다.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커가고 있음을 느낀다. 단양에서 다시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됐다.어머니가 없는 집은 허전했지만 오빠와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이 큰 힘이 됐다. 44년 겨울방학을 끝으로 나는 단양 대강초등학교를 그만두었다.그 해 겨울은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1년동안 우리집에 기거하며 대학에 다녔던 원산 유학생 댁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결혼문제로 아버지와 대립.굳은 결심 보이며 아버지 설득.결혼식후 꿈에 그리던 해방은 오고… 중매가 들어온 청년은 굉장한 부자집 외아들이라고 오빠가 소개했다.그는 기악을 전공한 청년이었다.나와 나이가 같았다.단양에서 방 학을 맞아 집에 올라왔을 때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나의 결혼에는 오빠가 더 적극적이었다.“을희야,너 병규청년 어떠니.내가 원산에 있는 청년집에 가 보았는데 아주 괜찮은 집안이야. 아버지는 큰 과수원을 하시고 어머니는 원산신학교를 졸업하신 인텔리시란다” 오빠와는 달리 아버지는 선뜻 내켜하지 않았다.청년이 아무래도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움에 시달리 던 나는 시어머니가 되실 분이 신학교를 나왔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어머니 손을 붙잡고 교회 한번 가보지 못한 것이 가슴의 상처가 되었던 내가 아니던가.신학교를 나온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주일 에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면 얼마나 좋을까.나는 마음이 부풀었다. 결혼문제를 놓고 기도를 드렸다.청년 김병규와 결혼을 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왔다. 그는 1945년 4월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몸이 약해 10월로 연기됐다.그 사실을 알게된 아버지는 더욱 반대하셨다.학병으로 나가 면 살아 돌아올지,아니면 죽어서 올지 모르고 설사 살아온다고 해도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 아버지의 반대이유였다. 아버지는 그래도 결혼을 하겠느냐고 물었다.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난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 청년과 결혼을 하기로 결 심했다.나의 결심을 안 아버지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 결혼날짜는 45년 8월11일로 잡혔다.결혼식 장소는 새문안교회,주례는 강신명목사님이셨다.교회라면 근처에도 안가셨던 아버지는 기막혀 하셨지만 어려웠던 시절,어디에서 결혼식장을 구하랴.새문안교회면 나에게는 최고의 결혼식장이었다. 결혼식은 포탄이 떨어지는 속에서 진행됐다.신랑은 원산에서 사촌동생 하나만 데리고 왔다.전쟁의 와중에서 시부모는 아들의 결혼식 에 참석하지 못했다. 식을 올리고 나서 우리는 사흘뒤 시댁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오빠는 곧 해방이 될지 모르니 기다려 보라고 했다.사흘뒤 정말로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식 올린지 한달만에 원산 시댁으로.아궁이 불 지피며 행복느껴.2개월 후 시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시고…. 해방은 36년간 일제에 억눌려 지냈던 민족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그것은 나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남편이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실 나는 결혼을 앞두고 남편이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아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신혼의 단꿈 빼앗 긴 채 남편이 전쟁터에 끌려간다는 것은 상상만해도 가슴아픈 일이었다.남편과 함께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시댁 어른들은 며느리가 보고 싶다며 하루빨리 원산으로 오라고 독촉했다.그러나 오빠는 “지금은 모든 것이 어수선하니 급히 서두르 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했다. 오빠의 만류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한달이 훌쩍 지나갔다.시댁에서는 연일 사람을 보냈다.사람들이 들끓어 매일 돼지 한마리씩을 잡아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드디어 식을 올린지 한달만에 서울역에서 원산행 기차를 탔다. 우리가 탄 경원선이 마지막 열차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남편과 나는 차창 밖의 경치를 감상하며 황홀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원산 바닷가의 명사십리가 한눈에 시원스럽게 보였다.하얀 모래,그 모래가 태양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그것을 보니 신혼의 꿈이 뭉게 뭉게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시댁은 소문대로 대단한 부자였다.없는 것이 없었다.당시 귀하던 오르간 바이올린 플루트 같은 악기도 있었다.결혼식에 참석하지 못 했던 시부모의 뜻에 따라 우리는 다시 한번 구식결혼식을 올렸다. “새아기한테 집 구경 좀 시켜주려무나” 시어머니의 말에 남편은 한움큼이나 되는 열쇠꾸러미를 들고 나왔다.그것은 모두 창고 열쇠 였다.창고 속의 독들이 얼마나 큰지 돋움을 밟고 올라서야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게다가 사과를 저장하는 광은 정동감리교회보 다도 더 컸다. 일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나는 행복을 맛보았다.아궁이에서 연기가 거꾸로 피어오르면 눈물 콧 물이 쏟아졌지만 그것은 나의 행복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시어머니는 친어머니처럼 잘해 주셨다.그러나 그렇게 마음씨 좋았던 시어머니는 우리가 결혼한지 석달만에 세상을 떠나셨다.<정리=이승한 shlee@kukminilbo.co.kr> 원산 시댁서 6개월만에 서울로.여중 체육교사 취직.집체훈련후 예비역 소위로 학교에 배속.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3월 남편과 나는 시간을 내어 서울에 가게 되었다.원산으로 간지 6개월 만이었다.당시 덕수궁에서 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무렵이었다. 해방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해 나는 허름한 복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길은 해방된 조국에 정착하려는 사람들로 만주에서부터 만 원이었다.남과 북을 잇는 기차는 38선을 경계로 해 왕래가 끊겼다.우리를 태운 기차는 원산에서 철원까지만 운행됐다.이곳부터는 걸 어서 남한으로 가야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기차에서 내리자 러시아군인들이 길을 막아섰다.그때 어떤 여자가 나서서 러시아말로 군인들을 안심시켰다.군인은 우리 일행이 빨간 돈(러시아돈으로 38선 이북에서만 유통됐다)을 주자 통과시켰다. 서울에 온 나와 남편은 큰오빠 집에 머물렀다.하루 빨리 미·소공동위원회가 잘 끝나 38선이 풀리기만을 기다렸으나 38선은 끝내 풀 리지 않았다.시아버지는 북한에서 4차 추방자명단에 포함되어 그많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홀몸으로 남한에 내려오셨다.대법원장이 었던 김병로씨의 제자로 초대 함경도지사를 지낸 강기덕씨와 친구사이였던 시아버지는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채 내려 오셨지만 태연 하셨다. 남편과 나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가정을 꾸려 나갔다.나는 명성여중에 체육교사로 취직했다. 당시 안호상 초대문교부장관은 일민주의를 외치며 남·여중학교체육교사들을 모아 배속장교 교육을 시켰다.그는 학교마다 집체훈련을 시켜야 한다며 학교에서 소집된 체육교사들을 훈련시켜 각 학교에 예비역소위로 배치했다. 전국에서 모인 여자선생 1백명이 훈련을 받았다.당시 종로 6가에 있던 경성사범대학 내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전 보사부장관 김정례씨 도 함께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고 1백명 가운데 31명이 예비역소위로 배속을 받았다.내가 배속받은 곳은 숙명여중(당시 문남식 교장)이었다.우리는 학생 들의 교육뿐 아니라 각 학교 호국단 간부와 여자청년단 대한부인회 간부들의 훈련도 맡았다.이때 대한여자청년단 지방조직이 구성되 어 나는 마산 부산 대구 등지를 돌며 교육했다.배속장교로 부임한지 1년이 되었을 때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발발했다 시아버지에 등떼밀려 피란.한강인도교 끊겨 엄청난 인파 아우성.가까스로 도강에 성공. 시편 37편 23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고 기록돼 있다.나의 길을 정하시고 인도하신 분도 하나 님이 분명하다.6·25가 터졌으나 예비역이었던 나는 미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넌 대한민국 여군 장교이니 어서 몸을 피해라.여기 있다간 빨갱이들 한테 꼼짝없이 잡혀간다”며 등을 떼밀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3일째.저녁 어스름이 깔린 시각이었다.밖에는 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있었다.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훈련복을 입 은 채로 조교 박성희와 함께 후암동 집을 나섰다.거리에는 피란민들로 꽉차 있었다.박성희는 충성스런 부하로 고비때마다 나를 도와 줬다. 우리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용산쪽으로 방향을 잡았다.한강 인도교만 건너면 수원을 지나 친정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충남 옥천으로 갈 생각이었다.깜깜한 어둠속,꽉 막힌 거리에서 밀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었다.어둠이 조금씩 걷히면서 사람들 의 발걸음이 둔해졌다. 갑자기 남산에서 환하게 조명탄이 터졌다.나는 옆에 있는 조교를 끌어 안고 근처에 있는 트럭 밑으로 숨었다.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어둠에 익은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뜻밖에도 우리가 있는 곳은 서빙고 나루터 한강백사장이었다.그곳은 이미 하얀 백사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강인도교는 끊어졌고 피란을 가는 사람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아우성이었다.어떤이는 모래구덩이를 파고 소리지르며 기도했다.또 건장한 청년은 헤엄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다.우는 사람,한숨만 내쉬는 사람,한강백사장은 아비규환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렸다.청년이 거룻배 한척을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사람들은 먼저 타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배는 금새 사람들로 가득차고 얼마 가지 못해 뒤집혔다. 그때 청년 한사람이 “모두 물귀신이 되지 않으려면 줄을 서라”고 외쳤다.조교는 줄을 서자고 했으나 배를 타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배가 두번째 출발할 때쯤 헌병 한사람이 우리를 보더니 타라고 명령했다.우리를 태운 배는 무사히 반포쪽에 닿았다.그러나 세번째 배 는 오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배에서 내려 무작정 남으로.옥천에서 빨치산으로 내몰려.미군에게 탈영병으로 오해 받기도.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저마다 흩어져 길을 떠났다.우리는 무작정 남쪽을 향했다.모두 피란을 갔는지 마을마다 인적이 없었다.밤새 걸 은데다 집을 떠난 후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해 갈증과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밤이 됐다.얼마나 걸었을까.시골의 간이역이 나왔다.병점역이란 표시가 보였다.간이역 대합실과 승강장은 피란민으로 가득했다.모두 들 지쳐 서로 의지한채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후 역으로 들어온 기차는 객차가 아니라 고빼기차라고 하는 화물차였다.객차 화물차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서로 먼저 타려고 야 단이었다.지붕위에도 못탄 사람들은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다. 박성희조교는 어느새 기차에 올라타 있었다.그는 나에게 빨리 타라고 했으나 난 기차를 포기하고 다시 대합실로 돌아왔다.30여분이 지났을까,박조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그는 나를 두고 갈 수가 없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음 기차를 타고 아버지 고향인 옥천으로 향했다.옥천에는 아버지만 계셨고 오빠는 황간에 있었다.아버지와 함께 먼저 피란 해온 큰 아이 형수는 홍역을 하고 있었다.“하나님 아이를 살려주세요,그리고 이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빠를 보기 위해 황간에 갔던 우리는 공산당이 이미 대전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을 받았다.나와 박조교는 옥천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다가 군인들에 의해 빨치산으로 몰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했다.빨치산으로 오해했던 장교가 우리를 옥천까지 데리고 가 확인한뒤 풀어줬다.죽음의 고비 는 이것만이 아니었다.네살된 아들과 함께 걸어서 김천까지 피란을 간 나와 박조교는 직지사 앞에 왔을때 미군을 만났다.미군은 훈련 복을 입은 나와 박조교를 친절하게 대구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그러나 그 차는 탈영병을 잡아가는 차였다.< 청년의 도움으로 탈영병 오해 풀려. 국방장관 비서실에 배치돼 여자의용군 모집에 나서고… 미군은 훈련복을 입은채 아이를 데리고 가는 나를 탈영병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탈영병으로 오인해 잡아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나 는 큰 아들 형수보고 “차를 타고가니 좋구나”며 꼬옥 끌어 안았다. “혹시 박소위님 아니세요” 차가 대기하고 있는 사이 피곤이 몰려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누군가 아는 척했다.눈을 떠보니 G2라 고 쓰인 완장을 두른 청년이 서있었다.당시에는 연세대학생들이정보요원(G2)완장을 두르고 역에 나와 피란민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네 맞는데요.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죠” “제 여동생이 경기여고 학도호국단 간부로 경성사범에서 교육받고 있을때 면회갔다가 뵌적이 있습니다.그때 주번 사령으로 계셨던 박교관님을 뵌적이 있습니다” 어렴풋이 그때 본 기억이 떠올랐다.그는 반갑다는 나에게 왜 이차를 타고 있느냐고 물었다.미군들이 신분증을 검사한뒤 타라고 했다 고 말하자 그는 탈영병을 잡아 총살시키러 가는 차라며 당장 내리라고 했다. 그 청년은 미군에게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우리일행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정훈 장교인 박영준 중령(후에 한전사장을 지냄)의 주선으 로 나와 박조교 큰아들은 트럭을 타고 대구로 이동한 육군본부에 도착했다.지프 한대가 와서 정문에 내린 우리를 태워 국방장관관사 로 데리고 갔다.김현숙 중위가 예비역을 현역으로 바꾸는 수속을 해주었다.김중위는 경찰학교에 있다가 배속장교훈련시 사감을 지냈 으며 중위로 임관됐었다. 이렇게 해서 학도호국단 배속장교였던 나는 현역군인이 되었다.배속장교로 지내다 현역군인이 된 동기들은 김현숙중위와 나외에 홍서 운 김영숙 하복조 안명례씨 등이 있다.나는 국방장관 비서실에 배치됐다. 1개월후 여자의용군을 모집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하달됐다.우리는 지프를 타고 여자의용군 모집광고를 하고 다녔다.나는 대구와 부 산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다.수천명이 응시했다.모집인원의 여섯배가 넘는 인원이었다.나라와 민족을 위해 여자도 나서기 시작한 것이 다 9·28 서울 수복 다시 밟은 서울땅.남편과 시아버지는 무사.중공군 참전 다시 남으로… 부산에서 모집한 여자의용군은 모두 5백명이었다.나는 대대장겸 A중대장을 맡았다.사관학교의 남자교관들이 와서 시키는 훈련은 빈틈 없이 엄격히 진행됐다. 의용군은 각개전투와 포복 사격은 물론 야간전투에 대비해 밤에도 훈련을 받았다.비록 군번이 없는 의용군이라해도 나라를 위해 싸우 리라는 결심만은 대단했다. 훈련은 한달간 진행됐다.그러는 사이 전세는 역전되어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훈련을 마친 우리는 기차 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피란을 온지 3개월만에 서울땅을 밟아 보는 것이어서 감격이 컸다. 눈물이 핑 돌았다.나는 기차안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하나님 감사합니다.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 이땅에 평 화가 찾아오도록 해 주십시오” 서울에 입성한 우리는 남산국민학교에 본부를 두고 여장을 풀었다.나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남아 있던 남편과 시아버님의 소식이 궁금 했다.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서울은 피란갔던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텅비어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후암동 집으로 재촉하는 발걸음이 오히려 더디게 여겨질 정도였다.집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불안했다.“남편 과 시아버님은 아직도 집에 계실까”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남편과 시아버님은 아직도 집에 살아계셨다.우리는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남편은 북한 인민군 이 우리집에 세번이나 들이닥쳤으나 무사했다고 말했다.동네사람들이 서로 숨겨주고 해서 무사했다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1기생을 모집해 근무처에 배치한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2기생을 모집했다.부산1기생이 배출된 날이 9월6일이어서 지금도 이 날을 여군창설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서울 입성후 나는 여군훈련소장인 김현숙대위를 모시고 중위로 작전 교육참모를 지냈다.서울 위성지구 책임을 담당한 나는 주야로 순 찰했다. 서울을 수복한 군인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해 우리는 다시 부산으로 피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부산에 내린 나는 대구육 본으로 소집됐다.육본의 6중대장으로 부관감실 여군반을 담당하게 됐다. 근무지에 천막교회세워 신앙활동.여군들 권익위해 심혈 쏟으며 한알의 썩은 밀알되길… 여군반장은 여자의용군의 인사관리 및 통솔을 책임지는 자리였다.여군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고 군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일 이라고는 전화당번이나 차당번이 고작이었다.나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천대장에게 건의해 여군에게도 행정병 통신병 타자병 교환병 등의 기술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후 나는 육본의 각 국감실 보직을 거쳤고 부산병기학교 교재담당관 등을 역임했다.초창기 여군장교였던 나는 어디에 부임하든지 일 밖에 몰랐다.덕분에 표창도 많이 받았다.여군부차장으로 부임해 여군장병의 정식 위치나 자리문제를 포함한 인사법을 통과시켰다. 육본 인사참모부 논산제2훈련소 여군교육대장을 거쳐 1961년 여군훈련소 소장으로 부임했다.여군으로서 최고 지휘관이었다.현역당시 군번은 17663번.1766이 여군이니 여군으로는 세번째 군번이었다. 나는 12년의 군인생활을 통해 신앙인 장교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여군창설 초기에는 근무하는 군지역에 천막교회를 세워 신앙활동을 했다.어렸을 때 원동교회에서 시작한 신앙의 단단한 뿌리가 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했으며 하나님의 제단을 쌓는 일에 나서게 했다. 나는 여군훈련소장에 부임한 뒤 신앙인 군지휘자로서 나의 직무가 무엇인지 기도하며 깊이 생각했다.앉아서 명령만 할 것이 아니라 여군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당시 정보참모(G2) 외에는 모두가 남자군인이었다. 미국의 경우 여군훈련소에는 운전병까지 여군이라는 말을 들었다.이에 참모들을 모두 여군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반년이 채 안돼 참 모를 여군장교들로 교체했고 운전병까지 여군으로 바꿨다.나는 먼저 군에 발을 디딘 선배로서 여군들에게 따뜻한 어머니의 역할을 해 주고 싶었다.그래서 여군들의 권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고 싶었다.그것이 그 시대에 하나님이 나에게 준 사명이라고 여겼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나는 이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십자가 정병으로 직임을 다하려고 했다.군인교회의 예배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기독군인장교회(OCU)에 참여해 활동했던 것 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64년 중령으로 예편.부족한 일꾼이었지만 사역 계속해….하나님의 일에 충성할때 가장 행복느껴
1964년 나는 젊음을 바쳤던 군에서 중령으로 예편했다.중령 10년 인사법에 해당되어 첫번째로 퇴임하게 된 것이다.이때 내 나이는 39
세.군복을 벗었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수그러 들지 않았다.
예편한 뒤 잠시 임영신씨가 설립한 대한여자청년단 단장을 맡았다.그 다음 정동제일교회가 지원하는 ‘사랑의 집’ 운영을 맡았다.당
시 담임이었던 은준관목사가 사랑의 집을 운영하라고 권유하셨다.
사랑의 집은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이다.목동지역 판잣집 2천세대를 대상으로 구제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정부에서 철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후 맡은 일이 감리교 여선교회선교회관 초대관장이었다.그때부터 나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선교회원들의 신앙재훈련을
진행했다.70년대 말부터는 감리교단 대표의 일원으로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부족한 일꾼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나에게 계속 교계의 일이 맡겨졌다.
교단에서는 나에게 은퇴여교역자를 위해 지은 ‘안식관’ 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안식관에는 여목사 2명과 전도사 16명,봉사자
등 21명이 살고 있었다.이곳에서 은퇴여교역자들의 화합과 안식관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노력했다.
하나님은 나를 또 다른 사역지로 안내하셨다.그곳은 교도소였다.아무도 가고싶어 하지 않는 곳.나는 처음 의정부교도소에서 여자재소
자를 대상으로 설교했다.예수께서 촛불을 들고 문고리 없는 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진 성화를 들고서….
정성을 다한 결과 단단히 닫혀있던 그들의 마음문이 열렸다.그때부터 지금까지 30여년 가까이 교도소 선교에 힘써왔다.85년,89년 두
차례 법무부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내가 한 일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공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96년 5월19일,존 웨슬리의 회심 2백58주년 기념일에 나는 정동감리교회 장로직에서 은퇴했다.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하나님 일
에 열심히 충성할 때였다.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닮기 위해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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