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 한여름 불볕더위 속 국립중앙박물관은 축제였다. <폴란드, 천년의 예술>전을 보러 온 관객, 박물관 내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산책로에서 야외 유물을 감상하는 사람들, 돌계단에서 음악회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박물관은 거대한 테마파크처럼 보였다. 그저 유물을 감상하며 역사 공부를 하는 고리타분한 박물관이 아니다. 전통에게 생명을 주어 생동하는 현대의 맛과 멋을 재현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심에 선 김영나 관장을 만났다.
어떤 이는 오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여섯 번째 찾았다고 했다. 신라 금관에 매혹된 이는 노란 은행잎을 금관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오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는 시구를 박물관에서 떠올렸다. 시대를 거슬러 역사와 삶, 예술을 만나는 유물 역시 오래, 자세히 봐야 4차원 시간 여행의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미즈내일>에서 기획 중인 ‘한 박물관 세 번 가기 프로젝트’ 도 이런 맥락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옮긴 지 10년째, 박물관의 인식과 전시 환경, 가치의 변화에 큰 획을 그은 김영나(64) 관장은 미소가 고운 분이었다. 관장실 창밖에선 군악대
의 연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박물관의 풍경이 무슨 축제장 같습니다. 박물관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 두시나요? 박물관에서 휴가를 즐기는 가족이 많아졌습니다.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다소 엄숙한 박물관을 편안하고 재미있는 휴식처 같은 문화 공간으로 바꿨습니다. 물품 보관소도 있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책을 보는 공간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박물관에서 놀아야 문화적 토양이 달라지고, 문화의 저력이 쌓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꼭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그 안에서 보고 즐기면 자연스레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생겨나거든요. 배우는 박물관보다 즐기는 박물관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박물관에 드나든 관장님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지요. 당시 드물게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신 아버지(김재원 박사)가 1945년 초대 국립박물관장이 되셨어요. 저는 덕수궁 석조전 안에 있던 국립박물관을 집처럼 드나들며 놀았지요. 그때 본 불상을 다시 박물관에서 만나니 운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자연히 미술에 관심이 생겼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사학자가 됐지만, 1970년대 아버지와 함께 다녀온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 문화 체험에서 진짜 미술사 공부를 했어요. 문화를 마음껏 보고 즐겨야 그 행복감이 몸에 배고 생활로 파고듭니다.
고고학자인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받으셨어요? 독일에서 유학하신 아버지는 독일 미술관 관련 책을 많이 수집하고 읽으셨습니다. 특히 렘브란트와 뒤러를 좋아하셨지요. 저에겐 당시 학원사에서 나온 그리스 신화와 위인전 시리즈를 주셨는데, 책이 많은 시절이 아니라 한 권을 열 번씩 읽었어요. 방과 후면 근처 남산 기슭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신화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렇게 재미있더라고요. 아마도 그것이 서양미술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동기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아버님은 “한국 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으니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라”고 강조하셨는데 언니가 불교 조각사를, 제가 서양 미술사를 전공했지요. 유학 시절에 아버지가 꼼꼼히 챙겨준 정보로 유럽의 미술관이나 미술가의 집을 여행하는 등 굉장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루브르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은 문화 권력을 넘어 국격에 공헌하는 위상인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느 정도 주목을 받고 있나요. 작년에 350만이 찾았어요. 관람객이 많은 세계 10대 박물관에 들었지만, 내용적으로 세계 10위 안에 들면 좋겠습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루브르박물관, 대영박물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의 소장 유물은 제국주의 시절 약탈한 문화재와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컬렉션이 많아 우리와 비교가 안 되죠. 우리는 약탈 유물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며 자랑입니다. 그러나 한국 문화의 특징과 정수를 보여주려면 세계 문화 속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국내 역사 관련 전시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이슬람 문화등 다양한 세계 문명전을 기획한 것도 그런 균형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최근 해외에서도 ‘갤러리 테크놀로지’ 목적으로 많이 배우러 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 전통 이미지를 강화해야 하지 않나요? 전통은 답습이나 고정이 아닙니다. 근대 이후 전통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지요. 어떤 것이 한국적일까요. 기와집과 농촌, 한복 입은 여인을 그린다고 전통일까요? 소재가 아니라 전통 속에 있는 정신이 핵심이죠. 전통을 지키는 건 좋지만 그냥 지키면 시대에 뒤떨어져요. 누구는 전통을 살리기 위해 현대적 건물인 우리 박물관에 기와를 올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파트에 온돌의 장점을 살리듯 현대에서 옛 문화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 중요해요. 전통은 의식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우리 속에 있는 생명으로 봐야 합니다.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는 시도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박물관은 과거의 한국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을 보여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는 전시는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가면 전통을 이어가는 현대 작가들의 전시를 1년마다 한 번씩 바꿔서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황인기 작가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보여주었고, 지금은 임충섭 작가의 ‘관음’이 전시 중인데 ‘소리를 본다’는 관음(觀音)과 관음보살상의 이중적 모습을 감상할 수 있어요. 현대미술은 전통을 계승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데, 이런 시도를 통해 전통이 과거일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삶에도 살아 숨쉰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해외 특별·테마 전시를 다양하게 개최하며 <오르세미술관전>이 큰 주목을 받았는데, 미술사학자로서 전시에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작년에 기획한 <오르세미술관전>은 인상파에서 후기인상파에 이르는 미술사적 흐름을 보여주고자 기획했습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건 나열일 뿐, 미술사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미술사에서 하나의 작품을 알려면 작가의 개인 전기는 물론 시대 배경이나 철학, 역사를 다 알아야 해요. 인상파의 작품의 전시가 목적이 아니라 인상파가 근대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을 인식시키고 싶었어요. 산업혁명과 함께 물감 공장이 만들어지고 튜브가 생겨나면서 그림을 그리기 편해졌다는, 즉 미술을 통해 시대를 이해하는 스토리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박물관에서 미술 전시를 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도 하는데요… 박물관은 물건을 전시하는 곳이고 미술관은 그림을 전시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안타깝습니다. 다양한 문화재와 작품을 보관·전시하는 ‘뮤지엄(museum)’을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따로 번역한 일제강점기의 영향인데, 공간과 연대를 나눠 구분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고 이제는 그런 경계도 거의 없어졌어요.
자녀와 함께 박물관 전시를 감상할 때 어떻게 즐기는 것이 좋을까요? 학부모들은 가르쳐주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런데 계속 설명하면 집중하기 어렵지요. 우리 박물관에는 감상에 도움을 주기 위한 오디오나 큐레이터 앱 등 다양한 시스템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강요하지 마세요. 사실 나는 한 번도 오디오 시스템을 이용해보지 않았어요.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오래 집중해서 보는 데 방해가 되더라구요. 스스로 선택하게 하세요. 처음엔 교과서에 나오는 것부터 보고 체험관에서 놀아보면 호기심 생기는 분야가 있을 거예요. 자녀의 성향에 맞는 감상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스무 살 노년이 있다면, 예순 살 청년도 있다. 김영나 관장의 사고는 단연 후자 쪽이다. 그는 전통을 답습하고 고정하기보다 전통을 무너뜨리고 뒤집어보면서 오히려 전통의 생명력을 발견하려고 한다. 시대나 국경에 순응하는 전시보다 그것을 초월하거나 역행하며 예상치 못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인상파나 고흐 등 아는 작가만 찾아가지 마세요. <폴란드, 천년의 예술>전은 폴란드를 가기 전엔 볼 수 없는 귀한 전시예요. 전시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접하는 즐거움을 누리세요.”
김 관장의 진심을 담은 홍보는 마음을 움직인다. 인터뷰를 마치고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마음이 행복하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