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왕의 여자’ ‘영웅시대’의 의상을 만들었던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52)의 집 효재(效齋)를 찾아 자연을 닮은 살림법을 배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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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돌담 옆에 위치한 한옥 효재. 갤러리인지 카페인지 모를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
서면 딸랑딸랑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풍경소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탄 듯 시간을 거슬러
옛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4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집 효재에는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자연을 벗삼으며 살고 있다.
15년째 한복을 만들고 있는 곳이지만 쇼룸도 없고 간판도 내걸고 있지 않아 얼핏 보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워낙 사람을 좋아한다는 주인은 집 한 켠에 꾸며 놓은 다실을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 원
하는 지인에게 흔쾌히 내어놓곤 하는데, 한 번은 손님이 이곳을 찻집으로 착각하고 찻
값을 쥐어 주고 나가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살면서 하나씩 만들어간 정성 어린 집
마당 뒤 돌담을 타고 탐스럽게 내려온 아이비 덩굴과 한가득 물을 머금고 피어 있는 야생화, 마당 한쪽에
떡하니 놓인 장독들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진짜 서울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구석구석 집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집은 그가 살아가면서 하나 둘 고친 까닭에 꼬박 3년을
들여서야 지금의 모습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시멘트가 발린 마당에 정화조며 수도가 그대로 드러나 삭막하기 그지없었던 곳에 부직포를
깔고 마사토를 뿌린 다음 생명력 강한 야생화를 심어 소담스러운 앞마당을 만들고, 보기 싫은 정화조 위에는
가운데가 움푹 패인 돌을 올린 후 물이 고이게 두어 작은 샘을 만들었다. 기왓장을 쌓아 만든 화단은 수도배관을 가리기 위한 것. 작은 기왓장 두 개를 포갠 사이에 수도 호스를 넣어
물이 기왓장을 타고 떨어지도록 했는데 그 청명한 소리가 음악에 비할바가 아니라고. 때문에 그는 아래
세숫대야를 받쳐두고 항상 물이 한두 방울씩 흐르게 둔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물은 다시 꽃들에게 돌아간다.
돌담을 가득 메운 아이비는 선물로 받은 5천원짜리 화분을 땅에 심었더니 무럭무럭 자라난 것이고 고구마 넝쿨은
먹다 남은 생고구마를 던져두었더니 뿌리를 내려 고맙게도 아름다운 덩굴을 이뤄주었다 한다. 그후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며 방향을 잡아주고 물을 주며 가꾼 게 그의 몫이었다.
“풀도 사람처럼 애정을 갖고 지켜보며 방향을 잡아주어야 해요. 조금씩 커갈 때마다 길을 잡아주는데 너무 어릴 때는
약해서 꺾이기 쉽고 너무 크면 뻗대서 말을 안 듣거든요. 그러니 꾸준히 관심을 주어야 하죠.”
01_ 마당의 아이비와 야생화는 얼핏 보면 제 맘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란 듯하지만 다 길을 만들어주고 터를 가꾼
이씨의 정성으로 길러진 것이다. 02_ 아이비는 알맞은 시기에 테이프로 줄기를 고정시켜 길을 잡아 주어야 예쁘게 자란다. 테이프의 끈끈이가 줄기에
묻을 것을 염려해 그는 줄기가 닿는 부분에 꽃무늬 천을 대 숨구멍을 터놓았다. 03_ 효재는 한복을 만드는 색색의 천이 가득한 곳이라 화려한 꽃보다는 정갈한 풀이 더 어울린다. 손님이 오는 날이면
아이비나 고구마잎을 뜯어 정화조 위 돌샘에 띄워두는데 그 어떤 꽃을 꽂아두는 것보다 멋스럽고 분위기 있다.
01_ 혹여나 사람들이 밟을세라 꽃 옆을 따라
돌길을 만들어 두었다. 처음에는 길 사이에 몇 송이
나지 않았는데 한 해 공을 들였더니 촘촘하게 커서
이제 사람들에게 분양해야 할 정도.
돌길 사이에 심은 아주가는 번식력이 강하고 잘 죽지
않는 질긴 생명력이 마음에 들어 선택한 야생화다. 봄이 되면 피는 보라색 꽃이 그는 그렇게 예쁘고
기특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02_ 기왓장을 쌓아 만든 화단은 삐죽 나온 수도배관을
가리려고 만든 것. 기왓장은 오래된 한옥 허무는 곳에
가서 하나에 5백원씩 주고 구입했다.
문을 향해 낸 돌길 사이에 심은 야생화 ‘아주가’는
새순이 날 때마다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 뿌리 내릴
자리를 만든 후 하나씩 옮겨 심었다.
“마당의 3센티미터 아래는 시멘트 바닥이라 꽃을 심을
때 연장도 필요 없어요. 깊게 심지 못하니까 잘 죽지
않는 야생화를 심은 것이고요. 다들 보기엔 근사하지만
알고 나면 방법이 너무 쉬워 허망하다고까지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만큼 따라 하기 쉬우니 아파트에 살면서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관심과 정성만 있다면 집안에 정원을 불러들이는 방법이 그리 어렵지 않은 듯 보였다.
손을 움직이며 명상하는 그의 살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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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실 옆 돌 주방. 벽에 붙인 돌은 시골집에서 가져와 하나씩 붙인 것이다. 돌의 무게 때문에 접착제 위에 붙이면 미끄러져 어느 곳에서도 시공은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접착제를 바르고 구덕구덕하게 마를 즈음 돌을 하나씩 붙여 만들었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만큼 보기만 해도 흐뭇한 주방이다.
이효재는 무명으로 예쁜 생활 소품을 만드는 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다. 때문에 집에는 그다운 살림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불이며 요, 식탁보, 테이블 매트 등 그가 사용하는 패브릭 소품들은 모두 무명 일색이다.
종이 냅킨을 뽑아 쓰는 대신 예쁘게 수놓은 무명 냅킨을 여러 장 준비해두고 사용할 정도. 행주며 냅킨, 앞치마 등 쉽게 물이 배는 주방 소품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푹푹 삶는다. 거무튀튀한 무명천이 때를 벗고 뽀얀 속살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다고. 삶는 행위 자체가 그에겐 일종의 명상의 시간이 된다고 한다.
그의 부엌을 들여다보면 더욱 입이 벌어진다. 큰 돌 세 개로 싱크대를 대신한 부엌에는 차곡차곡 포개진 그릇들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수도꼭지는 표주박 아래 숨어 있고 주방세제는 수놓인 무명옷을 입어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해낸다. 그는 남들이 소홀히 하는 작은 것에 특히 공을 들인다고 한다.
“이사를 와서 벽을 봤더니 유난히 못이 많이 박혀 있는 거예요. 뽑자니 구멍이 생길 것 같고 그냥 두자니 보기 싫어서 무명천에 꽃자수를 놓아 일일이 씌웠지요. 그래도 심심해 그 위에 가락지를 걸었더니 멋진 장식이 되었답니다.”
콘센트나 전기 스위치도 마찬가지. 자수 놓은 액자를 걸어 스위치를 가린 것도 집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그의 노력에서 나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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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행주는 비눗물에 한 번, 그냥 물에 한 번, 총 두 번을 삶는다. 입에 닿는 것을 만지는 물건이라 항상 두 번씩 삶아야 마음이 놓인다고. 비누 조각을 하루 동안 물에 불려 걸쭉한 액체로 만든 것을 한 스푼 넣고 달걀 껍데기와 함께 끓이면 무명천을 더욱 깨끗하게 삶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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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옆에 위치한 효재의 모습. 옛날에는 집에도 모두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
01_ 자투리 공간을 이용해 만든 드레스룸. 지하로 통하는 문이 집과 어울리지 않아 수를 놓은 천을 창문에 덧댔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인데 우리의 전통이 느껴지면서도 실용적이라 아주 만족스럽다. 02_ 스위치와 콘센트들은 모두 수놓은 액자 아래에 감춰두었다. 그는 집에 아무리 보기 싫은 것이 있더라도 함부로
뜯어내거나 없애지 않는다고 한다. 궁리해서 조금씩 고쳐나간 덕에 집은 몸에 꼭 맞춘 듯 자연스러운 멋이 살아 있다. 03_ 못 자국은 솜을 두른 다음 수놓은 무명천을 씌워 감쪽같이 없앴다. 04_ 다실에는 티테이블을 대신해 돌절구를 두었다. 물 위에 항상 아이비 잎을 띄워두었다가 손님이 올 때 얼른 건져
매달아둔다. 아이비에서 조금씩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싱그러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음식에 날개를 다는 여자
그의 취미 중 하나는 그릇을 모으는 것이다. 전통 도자기는 물론 양은냄비부터 로열 코펜하겐 등의 명품까지 취향도 제법
다양하다. “옷감을 많이 만지다보니 그릇 모으는 취미가 생겼어요. 그릇도 옷감처럼 만지는 느낌이 참 좋거든요. 그릇을 모으면서
이 예쁜 곳에 무엇을 담으면 좋을까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요리에도 취미가 붙었고요. 사람은 옷이, 음식은 그릇이
날개인데 그러고보니 저는 날개를 다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네요.(웃음)”
그는 음식을 만들어 선물하는 것을 즐긴다. 요리를 자주 하는데 혼자 먹기엔 힘들고 남기기는 싫으니 음식을 없애려면
이웃에 선물해야 한다는 것. 이때 마당에 정성껏 길러두던 여러 풀들이 빛을 발하게 된다. 미나리, 감자, 고구마싹은 부
침개나 녹두전 위에 올리고 소쿠리에 고구마순이나 칡넝쿨을 깔고 음식을 담아내면 훌륭한 액세서리 역할을 한다. 직접 만든 양갱이나 떡 위에 야생화나 고구마잎을 따 장식하면 비싼 케이크·쿠키를 사서 주는 것보다 훨씬 감동적인
선물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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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는 효재의 앞마당. 빨랫줄에는 무명 행주 한 장이 항상 걸려 있는데 이것 또한 집안 분위기와 어우러지도록 걸어두는 그의 인테리어 소품이다.
돈들 일 없는 건강 식생활
이효재의 식생활은 참으로 간단하다. 생고구마와 튀긴 콩, 멸치, 우유가 주 메뉴. 보통은 아침마다 생고구마를 한두 개
깎아 먹고 고구마를 보관하기 어려운 추운 계절엔 시골에서 뻥튀기 아저씨한테 튀겨온 콩을 우유와 함께 먹는다.
누룽지를 뜨거운 물에 불려 팔팔 끓인 뒤 날된장과 함께 먹는 것도 즐긴다.
그는 몸에 맞는 것을 먹다보니 자연식을 즐기게 되었는데 덕분에 먹는 데 돈이 별로 들지 않게 되었다며 웃는다.
“점점 조리를 하지 않고 날것으로 먹게 돼요. 이러다가 나중에는 타잔처럼 사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자연식을
즐기는 식생활 때문인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의 피부는 비단처럼 곱고 흑단 같은 머리에는 윤기가
반지르르 흐른다. 빨리 시작할수록 건강을 챙기기 쉽다고 하니 당장 오늘부터라도 건강한 그의 식생활을 따라 해볼 만하다.
01_ 튀긴 콩과 멸치는 그가 옆에 두고 먹는 것들. 원래 우유와 멸치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뼈를 생각해 약처럼 먹고 있다. 02_ 그는 일회용 이쑤시개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 무명으로 만든 포크 주머니에 놋으로 된 포크를 여러 개 꽂아
가지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03_ 마당 한쪽에는 화분에 직접 심어서 딴 목화송이를 두어 장식했다. 이는 목화 볼 일이 없는 요즘 사람들을 위한
그의 배려. 목화에는 검불이 붙어 있어 자연스러운 멋이 듬뿍 묻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