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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鄕土 史學者 故 송지향(宋志香)선생님
흰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만을 고집 백의현자(白衣賢者)로 불리는 고 송지향 선생님은
고려 말 안향(安珦)선생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면서
2004년 1월 27일 향년87세로 귀천(歸天)하신 우리고향 향토사학자 이 썩은 세상에서 꼿꼿하게 선비정신을 실천한 분이십니다. 선생님은 일절 교육을 받지 않으시고 독학으로 공부하셨습니다
1967년 펴낸 '영주향토지'는 군내 산재한 국보 보물, 개인 소장품 등 선생님이 뛰어들어 "안동향토지"를 집필하셨습니다.
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솔 아래 아이에게 물으니 . . .
유불 문화의 값진 유산은 골짜기마다 볼 수 있었고,
은은한 멋과 아름다운 얼, 높은 향기를 풍긴다.
지나온 세월, 가는 곳마다 뼈아프게 .
겨례의 얼 말과 글을
한 깨침
이승의 벽을 넘어
당신이 떠나시던 날
별무리
존자여 잘 가옵소서
해 가득 달 가득
송지향(宋志香)1918.8.2 - 2004.1.27
송지향의 삶
글 : 김인순
▶열두살에 피난 온 풍기 금계리 출생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8년 8월 26일 지금은 미수복지구인 평안북도 박천군 동남면 동하동 221번지에서 부 송국훈, 모 차남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고향 이북 향리에서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던 중 아버지를 따라 열 두 살 때 두 명의 동생 손잡고 당시 피난처로 알려져 있던 풍기 금계리로 옮겨오게 된다.
아버지 3형제 같은 시기에 월남하셨지만 선생님가가 가장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화전을 일구어 생계에 보탬을 가지면서 단란한 가정은 꾸려보지 못하고 긴 터울로 삼형제를 얻게되고, 마침 금계동에 사학재단 금계중학교가 설립함에 적을 두면서 겨우 생존의 터전은 마련했지만 워낙 급료가 적었다.
하지만 그 것 조차도 제대로 집안에 도움이 적어서 재능이 탁월했던 아이들 교육도 순조롭지를 못했으니 성장하여 만학의 대학졸업장을 받았으나 적령시기 정규과정은 장남 고퇴, 차남은 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삼남은 고 1년 재학 중 중퇴를 하는 자식의 쓰라린 아픔을 보게 된다. 사모님과 장남은 일찍이 도솔봉 뒤쪽 넘어 귀미라는 곳에 가서 화전민으로 10여 년간이나 고생하는 동안 몇 명되지 않는 식구들이 절반을 나누어 살았으니 형편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복장은 흰옷의 한복정장을 착용하시고 평생양복을 걸치지 않으심은 당신만이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계셨을 것이며 준수한 용모에 백발의 긴 흰 수염을 끝까지 간직하심은 선비의 강직한 면모를 보여 주심일 것이다.
▶넉넉치 못한 삶, 그리고 부인과의 이별 15년 전인 1989년에 사모님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신다.
함께 살아온 시간은 적지 않다고 하나 한방 거처는 수십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밥상을 차려드리면 먹고 가만있으면 독촉하거나 요구한 일이 없으셨던 남편, 세속을 초월한 훌륭한 분이었지만 부인으로서는 악역의 남편을 모시기 힘들어 고생하시다가 먼저 가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교에서 나오신 후 잠시 동안 평소에 익힌 의술로 환자를 돌보신 일도 있었으나 그것도 생업일진데 약값을 주면 받고 없으면 받지 않는 약국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천성으로 타고나신 성품과 절실한 글공부 때문에 결국 가정의 생계를 부인과 아들에게 맡기고 일찍이 향토사 연구와 자료수집, 집필, 편찬에 몰두하게 되는 길로 나서게 된다.
▶향토사 연구에 나서다 30년 전 감히 안동향토지에 뜻을 두시어 10여 년간 교통도 불편한 안동지역,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자료를 수집하시고 서울 도서관과, 박물관을 수없이 오르내리시면서 상상키 어려운 안동향토지 상, 하 두 권의 대작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교통도 불편한 넓은 지역 곳곳을 다니기에 수 천리가 되었고 이른 바 명문가나 안동유림 양반가의 종가집을 방문하여 자료를 구하려면 문전박대를 받아가며 엎드려 구걸하듯 사정하면서 글을 찾고 자료를 모았으니 사서 고생하신 긴긴 세월 누구를 위한 고뇌요 희생의 길이었으랴!
양반, 선비가 즐비한 안동의 학계나 유림계에서 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안동향토사 정립을 영주의 사학자 幽溪 宋志香 선생님 당신께서 集大成 해 주신 것이다. 그동안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중간에 중단까지 하셨지만 하늘은 선생님의 뜻을 받아 들여 건강을 지켜주셨던 것 같다.
1968년도 향토사의 첫 작품으로 영주향토지를 집필 발간한 적이 있으나 내용이 충실치 않음을 아쉽게 생각하던 중 건강도 회복되시고 자식들도 성장하여 도움을 주게되자 이어서 영주 향토지를 대폭 보완하여 역시 상, 하 두 권을 발간하게 되는데 그 기간이 또 10년이 걸렸고, 이후 관계기관의 요구도 있어서 5년간에 걸쳐 순흥향토지까지 完刊하기에 이른다. 본인이 표현하시지 않았지만 그 과정은 끝없는 苦惱요 試鍊이었을 것이며 선택받은 자로서 의 執念을 실천한 결과였다.
이와 같이 방대하고 고귀한 업적을 기리어 선생님께서는 굳이 사양하셨지만 영풍군민대상, 경북향토문화상, MBC 향토문화상을 수상하셨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신체적인 무리를 감수하시면서 이 시대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업적을 남기셨다.
선생님의 업적과 가르침은 고맙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살아있는 저희는 부끄러울 뿐이니 이제 죄송한 마음 가슴으로 새겨 유지를 받들어 발자국을 따라 계승해 가야할 것이다.
▶나라사랑의 이정표 세우다
오늘날 성역화 되어있는 저~ 산법동 동산에 대한광복단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나라사랑의 이정표가 되었음도 바로 선생님의 업적일 것이다. 일컬어 태초부터 山紫水明한 소백산 아래 첫 동네인 영주의 큰 족적을 남기셨음에 후회 없이 떠나시리라 믿는다.
오직, 선생님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呱呱한 人品과 學德을 갖춘 분이 오래 계셔서 후학인을 더 많이 가르치고 길러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유언..부음을 내지말고 호곡을 삼가하라
- 선생님은 고고한 학처럼 고결한 인품의 후덕한 분이셨다
- 우리지역의 자랑스러운 선비이셨다
어느날 조용하게 세상에 오셨다가 소리 없이 떠나가신 신선이셨으며 남기고 간 업적은 태산과 같으니 영세불망토록 기억될 것이다.
- 순명, 청빈, 순결의 수도자적 삶이셨다
- 택호를 觀風停으로
- 짧막한 有志를 남기셨으니
60여 년간의 긴 세월, 주거를 옮기지 않으시고 머무르셨던 당신의 세간은
글 김인순 <전 영주시의회전문위원. 풍기진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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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스승님! 용서 하십시요...........
숭고하신 송지향 선생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