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ography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은 70년대 혜성같이 등장한 하드록/헤비메틀 그룹으로, 헤비메틀 의 시작으로 불리는 (비록 헤비메틀이란 명칭이 레드 제플린 이후에 등장하긴 했어도) 야드 버즈(Yardbirds)에서 파생된 그룹이다. 1968년 야드버즈의 창단 멤버인 케이스 렐프(Keith Relf)와 제임스 메카티(James McCarty) 가 듀엣 결성을 위해 탈퇴한 후, 리드 기타의 지미 페이지(Jimmy Page)와 베이시스트인 크 리스 드레자(Chris Dreja)는 밴드의 이름을 걸고 투어 준비를 하고, 합스트위들 (Hobbstweedle)의 보컬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를 영입하게 된다. 프로젝트 작업을 위해 크리스마저 밴드를 떠난 후, 지미 페이지는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를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존 본햄(John Bonham)을 드러머로 밴드에 가담시킴으로써 라인업을 구성한다. 뉴 아드버즈(New Yardbird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그룹의 이 름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68)으로 바꾸고, 아틀란타 레코드사(Atlantic Records)의 전 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셀프 타이틀의 데뷔앨범(69)을 발표한다. 블루스적인 성향이 짙게 남아있는 'Babe, I'm Gonna Leave You'를 비롯하여 'Good Times-Bad Times', 'Dazed and Confused', 'Communication Breakdown' 등의 곡들이 수록된 첫 앨범은 발매 2개월만에 U.S 톱 텐에 올랐고, 이에 힘입어 영국 공연과 전미 투어 중에도 앨범 작업을 하여 69년 10월 [Led Zeppelin II]를 발표한다. 두 번째 앨범 또한 발매 두 달만에 미국 차트 톱에 올라 7주 동안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움은 물론, 메인 리프가 돋보이며 록의 고전이란 평을 받는 'Whole lotta love'를 싱글 차트 4위까지 올리는 기염을 토한다. 영국 포크(British Folk) 음악적인 색채와 함께 더더욱 깊어진 레드 제플린의 사운드는 70년 10월 발매된 [Led Zeppelin III]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레드 제플린 음악의 뿌리로 볼 수 있 는 블루스 명곡 'Since I've been loving you'를 필두로 하여 그들이 심취해 있던 포크와 신화의 결실은 [Led Zeppelin IV](71)에서 극대화된다. 이 앨범은 헤비메틀 발라드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는 'Stairway to Heaven'을 비롯해, 로버트 플랜트의 카리스마적 보컬과 공격적인 하드록이 유감없이 발휘된 'Black Dog'에서 포크음악인 'The Battle of Evermore'까지 레드 제플린의 음악적 다양성을 드러난 역작이 라 할 수 있다. 'Starway to Heaven'은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방송국 역사 이래 가장 많이 연주되었으며, 앨범이 US 톱의 자리에 등극되지도 않았지만 2년여 동안 1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쾌거를 기록한다. 4집 앨범 이후 이들은 인기수위 조절의 일환으로 여러 공연에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대규모 공연장으로 활동의 범위를 집중시킨다. 72년 투어를 마친 레드 제플린은 73년 [Houses of the Holy]라는 5집 앨범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록과 포크에 펑 크(funk)와 레게(reggae)를 가미한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었고, 순식간에 US와 UK 넘버원 차트에 진입한다. 이후 레드 제플린은 스완 송(Swan Song)이라는 자신들의 레코드사를 세우고, 자신들의 앨 범을 비롯해 데이브 에드먼드(Dave Edmunds), 베드 컴퍼니(Bad Company), 프리티 씽즈 (Pretty Things) 등 여러 뮤지션들의 앨범을 출반했다. 1975년 스완 송에서의 첫 앨범인 [Physical Graffiti] 역시 US와 UK에서 동시에 정상의 자 리를 차지했지만,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로버트 플랜트의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대규 모의 전미 투어가 취소되었고, 레드 제플린은 한동안 휴식기에 들어갔다. 76년 [Presence]로 활동을 재개한 레드 제플린은 3년 전인 73년 6월 메디슨 스퀘어 가든 (Madison Square Garden)공연에 바탕을 둔 실황녹음 앨범 겸 영화 [The Song Remains the Same](76)을 발표하고, 1977년 봄부터 미국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로버트 플랜트의 6살 난 아들이 갑작스레 죽음으로써 공연은 취소되고, 로버트 플랜트의 탈퇴설, 밴드의 해체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들은 한동안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1979년 [In Through the Out Door]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80년 9월 25일 술잔치 후 구토제 과다 복용이 사인이 되어 존 본햄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은 해체를 선언한다. 82년 지미 페이지는 생전에 존 본햄이 녹음해 두었던 드럼 솔로곡 'Bonzo's Montreau'를 포함한 미발표곡들을 모은 편집앨범 'Coda'를 발표한다. 멤버들은 연주, 솔로 앨범 녹음, 프로듀서의 길을 걷는 등 각자의 활동을 하면서, 간간히 예전 레드 제플린 때의 음악을 박 스 세트, 멀티디스크 세트, MTV 언플러그드(MTV Unplugged)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은 확실히 헤비메틀 밴드이다. 그러나 그들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음악을 단 지 고음역의 보컬과 화려한 연주 리프로 폭발적으로만 연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영국 민 속음악을 비롯한 다른 여러 장르의 음악과 신화, 신비주의를 그들의 사운드에 융화시킨 그 룹이다. 밴드에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계와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레드 제플린은 팬들과의 교감 을 오직 공연과 앨범을 통해서 이루어갔다. 또한 인기곡을 싱글로 출반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앨범 위주의 활동을 펴 더더욱 헤비메틀의 전형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개성이 다 양한 4인의 멤버들이 전혀 불협화음 없이 완벽한 하모니로 밴드의 신화를 이뤘다는 면에서 는 더더욱 여타 록밴드의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changgo.com
Biography 70년대 록을 대표하는 수퍼그룹 레드 제플린의 역사는 1961년 지미 페이지의 나이 열일곱살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틀 리차드 등의 록큰롤이 쇠퇴하고 팻 분, 폴 앵카, 바비 다린, 닐 세다카 등의 틴아이돌들이 시대를 풍미하던 당시, 50년대 록큰롤을 들으며 자란 평범한 전후세대였던 지미 페이지는 도저히 당시의 유치한 틴아이돌 음악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룹 'Neil Christian & The Crusaders'에 가입해 최초의 그룹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추구했던 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였다. 그 후 'Cynil Davis All Stars'에 가입, 기타리스트로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그는 distortion, feedback 등의 기타 연주기법을 스스로 개발하게 되지만, 당시는 록큰롤이 숨을 거둔 때였으므로 이러한 그의 재능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틀즈의 열풍이 불어닥치고 록이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면서, 그는 일약 재능 있는 기타 연주가로 평가를 받게 된다. 1963년 이무렵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듀서인 C.L.Tarumi는 그를 레코드 디렉터 겸 프로듀서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그는 세션맨 활동을 시작했고, 전영국 레코딩기타연주의 삼분지일을 담당했을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으며, 당시 야드버즈의 멤버였던 에릭 클랩튼과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름을 날린 지미 페이지는 1966년 그의 나이 스물두살때 명 그룹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로 영입된다. 그는 처음에는 베이스를 담당했지만 곧 천재성을 인정받아 당시 세계 최고의 기타 테크니션인 제프 벡과 '트윈리드'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과 같이 차가우면서도 엄청난 테크닉의 소유자인 제프 벡의 기량에는 그의 천재적인 기타실력도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앨범 'Roger The Engineer'의 작업을 하면서 그는 제프 벡이 구사한 기발한 트릭과 풍요로운 음색에 질려버리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재능은 기타가 아니라 작곡 겸 프로듀싱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때 그는 제프벡으로부터 블루스를 기본으로 한 스피드감을 전수받았고, 이는 그가 이후 제프 벡이 구상한 하드록적인 패턴을 레드 제플린을 통해 완성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야드버즈가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면서 제프 벡이 그룹을 정식으로 탈퇴하자, 이후 야드버즈는 마지막 싱글 'Goodnight Sweet Josephine'을 내놓고 1968년 7월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때 그룹의 막내인 지미 페이지는 끝까지 남아 그 명맥을 잊고자 크리스 트레져와 손을 잡지만, 곧바로 그가 탈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혼자 남게 된다. 결국 지미 페이지는 피터 그랜터와 함께 'Super Hype Recording'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야드버즈의 새로운 멤버 모집에 들어간다. 이때 영입된 멤버들이 존 폴 존스(베이스, 키보드), 존 보냄(드럼), 로버트 플랜트(리드보컬, 하모니카)로서 이들은 장래 레드 제플린의 전설적인 멤버 4인이 되는 사람들이다. 당시 스물세살이던 존 폴 존스는 롤링스톤즈의 레코딩에도 참가했던 최고의 스튜디오뮤지션이었고, 스물한살로 동갑이었던 존 보냄과 로버트 플랜트 역시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일류급의 뮤지션이었다. 이러한 막강 진용을 갖춘 이들은 처음 야드버즈의 영광을 되살려보자는 의미에서 'New Yardbirds'란 이름으로 그룹 활동을 전개하지만, 전대의 이미지에서 탈피, 제프 벡의 하드록패턴에 버팔로 스프링필드와 같은 어쿠스틱록을 절충하는 식으로 새출발을 해보려 했던 그들에게 이러한 밴드명은 확실히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밴드명을 'Led Zeppelin'으로 바꾸었다. 'Led Zeppelin'이란 이름은 1차 대전 때 하늘을 주름잡았던 독일의 대형 비행선 'Zeppline'과 납으로 만든 대형 기구 'Lead Balloon'의 Lead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친구 음악인인 키스 문의 아이디어에 영감을 얻어 그룹의 연장자인 지미가 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들의 음악은 웅장하고 위압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름덕인지 이름탓인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해서 1968년 레드 제플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은 그룹으로서의 통일된 사운드의 창조였고, 야드버즈로부터 이어져내려온 블루스와 야성적인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록을 창조해내면서, 여기에 소울 풍의 강렬한 보컬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해서 런던 일대의 클럽 무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캐리어를 닦아나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레드 제플린이라는 존재는 팬들에게 생소했으므로 이들의 포스터에는 언제나 '이전의 야드버즈'라는 달갑잖은 주석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워낙 막강멤버들이 모인 데다 야드버즈의 후광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어틀랜틱 음반사는 그들에게 거액을 제시하고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기수를 미국으로 돌려 1968년 10월 하순 미국 살레 대학의 무대를 시작으로 오랜 콘서트 투어를 펼치고, 1969년 2월에는 대망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과 여기에서 커트한 데뷔 싱글 'Good Times Bad Times'를 각각 미국시장에 선보인다. 이 곡은 처음부터 지미 페이지의 위압적인 강력한 기타 리프와 함께 유연한 드러밍으로 시작되었는데, 로버트 플랜트의 흐느적거리는 보컬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맛을 살린 것은 존본햄의 드러밍이었다. 베이스 드럼을 무려 두 개나 두고 여기에 유난히 두꺼운 킥드럼을 무자비하게 두들긴 존본햄의 드러밍은 그 파워에 있어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지경에 이미 올라있었다. 지미 페이지는 기가 막힌 신인들을 발굴했던 것이다. 당시 록계는 비틀즈와 크림, 지미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그리고 사이몬 & 가펑클이 한꺼번에 사라진 직후였다. 무엇보다도 비틀즈의 퇴장이 갖는 공백감은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비틀즈의 뒤를 이을 대형 그룹을 애타게 찾고 있던 참이었다. 레드 제플린은 이에 적절히 부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룹이었고, 그들의 미국상륙작전은 그대로 적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데뷔 싱글이었던 'Good Times Bad Times'는 1969년 빌보드 핫100 싱글 차트 80위라는 저조한 순위를 기록했으나, 앨범은 순식간에 50만장 판매고를 돌파하며 빌보드200 앨범 차트 톱10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의 데뷔 앨범은 그동안의 경력을 통해 지미 페이지가 구상해오고 있던 새로운 음악형태가 드디어 빛을 발한 것으로서, 여기서 보컬과 기타의 텐션 밸런스라고 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의 기본패턴은 비로소 구축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젊고 야심에 넘치는 실력파 뮤지션들이 마치 용이 하늘을 나는 듯한 거친 열정을 전했던 데다,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전개된, 강력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제플린의 헤비 사운드는 데뷔 앨범 한장만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존 바에즈의 포크곡을 리메이크한 'Babe I'm Gonna Leave You'는 지미 페이지가 블루스에 포크록까지 훌륭히 소화하고 있음을 과시함과 동시에 어쿠스틱한 멜로디와 하드록의 파워를 적절하게 융합시킨 지미 페이지의 저력이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기괴하고 혁신적인 사운드의 'Dazed and Confused'에서는 존 폴 존스의 단단한 베이스음를 축으로 한 지미의 기타연주가 이어졌으며, 후반부에는 존의 베이스와 지미의 기타 속주 경쟁이 불꽃 튀었다. 이후로도 존 폴 존스는 독특한 사운드적인 감각과 실험적인 정신을 보여주었고, 다양한 음색의 건반연주를 통해 제플린 사운드에 양념을 넣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신디사이저에 대한 그의 식견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네 명의 멤버 모두가 최고의 기량을 소유한 정통 록그룹. 레드 제플린의 신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데뷔 앨범이 공개된지 불과 6개월 후인 1969년 8월에는 헤비메탈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Whole Lotta Love'가 발표되어 4위('69.11)를 기록했다. 흔히 하드록이라 정의할 수 있는 최초의 곡이며 헤비메탈의 도래를 10년 앞당긴 곡이라고도 불리우는 'Whole Lotta Love'는 도입부에서부터 들소가 밀고나가는 것 같은 도발적 기타리프라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으며, 소리가 좌우 스피커사이로 날아다니는 느낌, 갖은 기괴한 음향, 소리가 좌우 스피커로 빨려 가는 듯한 녹음은 그 당시의 사고로서는 실로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약간은 동양적 뽕짝과 여백의 분위기가 배어나오는 'Ramble On'은 전체적으로 포크의 기반하에 어쿠스틱한 터치로 곡을 감싸면서도 플랜트의 보컬이 기막힌 강약의 완급조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무조건 무식하게 밀어붙이기만 하는 다른 록밴드의 보컬과 플랜트의 보컬은 차원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곡들이 수록된 두번째 앨범 'Led Zeppelin II'는 발매 3개월만에 감격의 1위('69.11)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고, 이 앨범으로 레드 제플린은 미국에서만 5백만 달러를 벌어들임으로써, 국고 수입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로부터 플래티넘 디스크와 골드 디스크를 받기도 했다. 이로써 제플린은 1969년 한해에 2매의 앨범을 선보이며 불과 1년만에 정상에 오르는 대기록을 수립한 셈이 되었다. 비틀즈로부터의 바톤터치는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9월에는 'Immigrant Song'과 'Since I've Been Loving You'가 수록된 'Led Zeppelin III'가 발표되었다. 'Immigrant Song'에서 그들은 도발적인 기타 사운드에 마성적인 보컬로 공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Since I've Been Loving You'에서는 마구 쏟아내는 듯한 날카로운 보컬에 블루스적인 필까지 보여주었다. 특히 'Immigrant Song'은 하드록의 양식을 확립한 곡이라고도 불리우며, 'Stairway To Heaven'과 함께 많은 이들이 꼽는 그들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이 3집 앨범 역시 발매 1개월만에 1위('70.10)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해냈으며, 이로써 그들은 하드록밴드로서의 안정적인 발판을 확고하게 다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불후의 명작인 'Stairway To Heaven'이 담겨진 네번째 앨범이, 아무런 앨범 타이틀도 없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1년후인 71년 11월이었다. 그때까지 상업적인 성공과는 별도로 매스컴에서의 평가가 좋지 않던 그들이었지만 이 앨범으로 그들은 음악적인 평가까지 아울러 받게 된다. 'Black Dog', 'Rock And Roll', 'Misty Mountain Hop'도 록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이지만, 'Stairway To Heaven'은 말 그대로 조각적이라 할 정도로 치밀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지닌 대곡이었다. 이 곡은 당시 지미 페이지가 심취해있던 흑마술의 알레이스타 크로울리의 철학과, 로버트 플랜트의 고대 켈트 역사관 등이 반영되어 지극히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띄었다. 이런 색채는 이미 'Immigrant Song'부터 나타났던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그들의 음악은 더 이상 사회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가사의 마력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엄청난 것이었고, 미국밴드의 유치한 노랫말에 비해서는 차라리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충격이라는 록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곡에서 지미 페이지의 기타만은 정말로 뛰어난 것이었고, 이후로도 전통적인 주법에 충실하면서 여러 장르를 리프화시키며 어쿠스틱 기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페이지의 기타는 록기타의 커다란 지침이 되었다. 73년 3월에 발표한 5집 'Houses Of The Holy'는 그동안 일련번호를 붙여오던 앨범 타이틀에서 벗어나 최초로 제명을 달았던 앨범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쫄깃쫄깃한 펑크를 처음으로 갖고 들어왔다. 이후 트레드, 민속음악 등 각양각색의 음악적 요소를 융합시킨 그들의 잡식적 창작력이 이 앨범에서 그 시작을 보인 것이다. 다양한 악기의 사용, 시대를 앞서가는 녹음기술도 그렇지만, 이처럼 편식하지 않는 다양한 장르에 대한 높은 이해야말로 그들이 비틀즈의 대를 잇는 그룹임을 증거하는 요소임에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이무렵 레드 제플린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록 음악사에 길이 남을 환상적인 스테이지를 펼쳤다(약 18만 달러에 달하는 이 공연의 수익금 전액은 도난당했다). 이후 플로리다의 템퍼에서 개최된 대규모 콘서트에는 무려 5만 6천여의 인파가 운집하여 불과 하루저녁에 31만8천 달러라는 믿기지 않을 액수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그들은 거의 최초의 대형 스타디움 록밴드였지만, 이는 그들이 청중과 호흡하기 보다는 청중 위에 군림하는 음악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는 이들의 거대한 위상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점이기도 했겠지만, 그들은 더 이상 록음악의 소박하고 촌스러운 멋을 간직한 밴드가 아니었다. 73년 한해를 공연여행으로 보낸 레드 제플린은 74년을 새로운 작품구상 및 휴식으로 보내며 그동안 전속되어 있던 어틀랜틱사에서 독립하여, 레드 제플린의 음반사인 '스완 송'(Swan Song)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75년 2월에 스완 송 레이블에서 발표한 최초의 앨범이자, 레드 제플린 최초의 더블 앨범인 6집 'Physical Graffitti'를 선보인다. 이 음반은 인도계 혼혈인 로버트의 아내 모린의 안내로 인도에서 휴가를 즐기면서 구상한 곡을 중심으로 꾸며졌으며, 인도풍의 'Kashmir'와 니힐리즘의 극치를 연출해 내는 'In My Time Of Dying' 등이 수록되었다. 그로부터 1년후인 76년 3월엔 최후의 걸작앨범이라 불리우는 7집 'Presence'가 발표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지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Tea For One'과 함께 더욱 원숙해진 면모를 과시했다. 8개월 후인 같은해 11월엔 3년전에 도난사건으로 유명했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의 하일라이트에 멤버들의 실루엣을 곁들인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The Song Remains The Same"이 공개되면서, 아울러 더블 사운드트랙이 통산 8집으로 선보였다. 레드 제플린의 명성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휴가를 즐기던 로버트가 부인 모린과 함께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어, 레드 제플린의 모든 일정은 이듬해인 77년 4월까지 연기되었다. 그러나 전미순회공연을 돌던 얼마 뒤, 이번에는 로버트의 어린 아들이 급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이 일로 로버트는 물론, 레드 제플린 전체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남은 공연 일정은 전면 취소되고 말았다. 그 뒤 레드 제플린은 2년동안을 침묵하게 되고, 주위에선 레드 제플린의 해산설을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그러나 이러한 낭설을 일축하듯 레드 제플린은 79년 9월 9집 'In Through The Out Door'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In The Evening'을 비롯하여 'Fool In The Rain'과 'All My Love', 그리고 처절하기 이를데 없는 'I'm Gonna Crawl' 등으로 점철된 9집은 미국에서만 4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앨범차트 1위에 안착했지만, 그 음악적 평가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결국 1980년 9월 25일 금세기 최고의 록 드러머였던 존 보냄이 죽게 되면서 레드 제플린은 그 비행의 나래를 접게 된다. 그해 10월 16일부터 개시될 월드 투어를 앞두고 지미의 집에서 리허설을 하던 존 보냄이 33세의 나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급성 알콜중독으로 죽어버린 것이었다. 기자들은 레드 제플린의 후임 드러머에 대한 기사를 연일 보도했으나, 지미는 존의 장례식을 마친후, "그것은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우린 존을 위해 제플린을 해체하겠다"는 인터뷰로 레드 제플린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들이 보여준 이러한 우정은 대단한 미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로써 록의 전성기는 사실상 그 끝장을 본 것이었다. 마침 이 무렵에는 존 레논도 그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록계로서는 불운이 겹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지금도 라디오 신청곡 목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음악을 최고로 생각하는 골수팬들이 영미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다수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초대형 록밴드로서, 딥 퍼플과 함께 70년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록계에 많은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Members*
Jimmy Page
출생 : 1944-01-09
“뮤지션이 한장의 앨범을 만들어내기까지의 노고, 에너지는 대단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과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만드는 것이다. 내가 레드 제플린에서 해왔던 것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음악의 개념을 하나씩 깨트리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락 역사의 신화적인 그룹으로 길이 남을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로써 명연을 남긴 지미 페이지는 1944년 1월 5일 영국 미들섹스주의 헤스턴에서 태어났다. 스코티 무어(Scotty Moore), 제임스 버튼(James Burton), B.B.킹 등으로부터 영향받아 14살 때부터 일렉트릭 기타를 시작한 페이지는 16살 때엔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 활동했다.
66년 6월에 페이지는 그룹 야드버즈에 가입해 제프 벡과 함께 트윈 리드기타를 펼치다가 68년 야드버즈의 해산과 함께 레드 제플린을 출범시켰다. 그는 레드 제플린에서 기타사에 길이 남을 명 리프 및 솔로잉들을 공개했고 레드 제플린 해산 후에는 솔로 및 세션 활동을 하다가 폴 로저스와 함께 펌(The Firm)이라는 밴드를 만들었고 이후에는 로버트 플랜트와 함께 ‘Page & Plant'라는 이름으로 음악활동을 했고 데이빗 커버데일과도 듀엣활동을 한 바 있다.
지미 페이지는 밴드지향의 기타리스트이다. 레드 제플린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밴드의 팀웍에 우선하는 탁월한 ‘보조자(Supporter)’로써 그리고 인상적인 멜로디라인과 독창적인 배킹 플레이어로써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Black Dog', 'Rock And Roll', 'Stairway To Heaven', 'Misty Mountain Hop' 등에서의 뛰어난 리듬기타와 명석한 하모나이징, 'Living Loving Maid', 'Whole Lotta Love'에서의 명 리프, 'Good Times Bad Times'에서의 조바꿈되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솔로, 'Dancin’Days'에서의 리디안 모드에 의한 이색적인 구성 등 그의 연주는 뛰어난 악상과 어레인지의 능란함을 장점으로 한다.
지미 페이지는 70년대 기타리스트들처럼 블루스를 근간으로 한 펜타토닉 리프를 주로 추구했지만, 거기에 아르페지오나 독특한 오픈코드(Open Chord) 배킹에 의한 방법으로 당시로선 보다 현대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기계적으로 무척 세련되고 정교하며 수준 높은 포크록에, 끈끈한 블루스를 가미하고, 이 모든 것에 도전적이며 야수적인 헤비메틀 사운드를 도금한 것, 그것이 바로 레드 제플린 시절에 그가 추구한 기타 세계였다.
한편 어쿠스틱 기타를 별로 연주하지 않던 동시대의 헨드릭스나 제프 벡 등에 비한다면 그는 일렉트릭 기타 이외에도 어쿠스틱 기타적 상상력을 넓혔다고 평가된다. 이외에 그는 기타솔로시 간간 미스톤을 내는 기교적인 단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지미 페이지는 기타리스트도 기타리스트지만 그보다는 뛰어난 작곡가, 어레인저로써의 역량이 더욱 크게 빛을 발했다고 보여진다.
사 용 장 비
록 기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재능 있는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페이지(Jimmy Page)는 1960년대 초부터 음악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십대 때부터 수많은 세션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1960년대 중반의 많은 앨범들에서 그의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그는 킹크스(The Kinks)와 더 후(The Who)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떠돌이 생활에 염증을 나타내기도 했던 그는 이미디어트 레코드사(Immediate Records)의 A&R로 일하면서 니코(Nico)와 존 메이올(John Mayall)의 곡들을 프로듀스하였다.
이후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야드버즈(Yardbirds)의 가입을 거절했던 지미는 마음을 바꿔 1966년 이들과 합류하며, 2년 후 그룹을 마감할 때까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위대한 하드록/헤비메틀 그룹인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결성하여 확고한 명성을 굳혔다. 그의 역동적인 기타 리프는 수많은 그들 트랙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드러머 존 본햄(John Bonham)의 죽음 이후 레드 제플린은 해체되었으며, 이후 지미는 폴 로저스(Paul Rodgers)와 펌(The Firm)을 결성하기도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8년 솔로 앨범 [Outrider]에서는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크리스 팔로우(Chris Farlowe), 그리고 존 본햄의 아들인 제이슨 본햄(Jason Bonham)이 참여하여 앨범을 빛내 주었다.
1993년에는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의 보컬리스트였던 데이비드 커버데일(David Coverdale)과 함께 프로젝트를 결성하였는데 히트곡의 부재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이들은 결별하였다.
1994년 지미는 로버트와 함께 MTV 언플러그드 텔레비젼 쇼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함께 투어를 시작하였다.
--------------------------------------------------------------------------------
최고의 락 기타리스트가 과연 누구이냐는 질문에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거론되는 후보자 명단에 Jimmy Page의 이름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의 이름이 기록된 앨범은 그의 name value 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
Jimmy Page(본명 James Patrick Page)는 1944년 1월 8일 London 근교에서 태어났다. 지나치게 소심한 소년이었던 그는 50년대를 휩쓸었던 Elvis Presley의 Rock & Roll에 심취되어 락 기타리스트의 미래를 꿈꾼다. 이후 Neil Christian, The Crusaders와 같은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Scotty Moore, Hank B. Marvin 등의 기타리스트의 연주기법을 배워간다.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서 라이브 공연이 힘들어진 Jimmy Pages는 레코딩 세션으로의 활동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하게되고 이후의 화려한 세션 뮤지션의 캐리어에 첫발을 내딛는다.
듣기에 편하면서도 기타연주에 특별한 지식이 없어도 금새 느낄 수 있는 그의 탁월한 연주재능은 Kinks의 'You Really Got Me'와 같은 여러 뮤지션들의 히트곡 배출에 크게 기여하였고 Rolling Stones, The Who, Joe Cocker, Donovan, Tom Jones 등 다양한 장르의 기라성같은 아티스트들의 음반제작에 초빙되면서 Jimmy Page는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의 위치에 오르게된다. 수많은 락 밴드들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아오던 Jimmy Page는 60년대 중반 Yardbirds에 참여한다(건강상의 문제와 경제적 이윤 문제로 밴드 참여를 거절해 오던 그는 최초 Eric Clapton이 떠남으로 생긴 Yardbirds의 기타리스트 포지션을 거절한다. 그 자리를 Jeff Beck으로 메운 Yardbird는 베이시스트 Paul Samwell Smith 마저 팀을 탈퇴하자 다시 한번 스카웃을 제의, 결국 참여를 유도한다). Jimmy Page가 참여함에 따라 Yardnbirds는 강력한 멤버를 갖추게 되고 최초 팀의 베이스를 맡았던 그가 이윽고 트윈 리드 기타로 포지션을 바꾸게 됨에 따라 그간 팬들이 열망해오던 Jeff Beck과의 환상적인 트윈 리드 기타의 꿈을 실현한다(그러나 Jeff Back은 오래지 않아 팀을 떠난다).
Yardbirds가 해체되자 1966년 Jimmy Page는 독자적인 밴드를 결성, Robert Plant(보컬), John Bonham(드럼), John Paul(베이스) 등의 멤버와 함께 New Yardbirds(Yardbird의 공연 계약 의무 이행과 Yardbirds라는 name value의 연장차원에서 명명)를 출범시키고 이 그룹은 후에 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주름잡는 그 유명한 Led Zeppelin으로 이름을 바꾸게된다. Jimmy Page는 기타 연주와 앨범제작을 통해 그룹의 독특한 사운드를 개척하였고 Led Zepplelin은 70년대의 화려한 무대를 장식한다. 그러나 Led Zeppelin은 드러머 Bonham의 사망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1980년 후반 해체를 하게된다.
Led Zepplelin 해체 이후 새로운 밴드 The Firm을 결성한 Jimmy Page는 1985년과 1986년에 발표한 두 개의 Top30 히트 앨범을 발표한다. 1988년 솔로 데뷔 앨범 [Outrider]와 1993년 Whitesnake의 보컬 David Coverdale과 함께 개최한 Coervale/Page라는 명칭의 US 투어 콘서트 이후 동명의 라이브 앨범을 내놓는다. 1994년 Robert Plant와 재결합하여 Led Zeppelin의 곡들을 리메이크한 [No Quarter]을 발표하였으며 1998년 [Walking into Clarksdale]의 제작을 위해 Plant와 다시 한 번 결합한다. 그는 여전히 기타 뮤직의 상업적 차원 뿐 아닌 예술적 차원의 발전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
Led Zeppelin이 베스트 음반 [Early Days- The Best Of Led Zeppelin Vol.1]에 이어 연작 [Latter Days: The Best of Led Zeppelin, Vol.2]를 최근 발표. 더불어 Led Zeppelin의 기타리스트 Jimmy Page가 특별한 앨범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앞선 두 베스트 음반을 수록곡을 직접 선곡하기도 했던 Jimmy Page가 새롭게 발표한 앨범은 2월 29일 발매된 [Live At The Greek]. 이 앨범은 그가 미국의 하드락 그룹 Black Crows와 지난 가을 함께 가졌던 공연 실황을 담고 있다. 당시 공연했던 곡은 Led Zeppelin의 히트곡들과 익히 잘 알려진 블루스 커버곡들, Fleetwood Mac의 'Oh, Well', Jimmy Page의 전 밴드였던 The Yardbirds의 'Shapes Of Things'와 같은 명곡들이다.
그러나 이 앨범이 특별한 점은 이색적인 판매방식을 도입했다는 것. 일단 [Live At The Greek]을 듣기 위해서는 일반 음반 매장을 찾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앨범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오로지 Musicmaker를 찾는 길밖에 없다. 이 사이트에서는 [Live At The Greek]의 완전판인 19곡을 모두 담은 2CD 세트 앨범을 18달러 정도의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이색적인 점은 팬들의 기호에 따른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즉, 앨범 수록곡 19 곡 중 자신이 원하는 곡만 선택해 CD에 담아 구매할 수 있다.
기본적인 패키지로 5곡을 5달러 정도의 가격에 판매하고 있으며, 1곡마다 1달러씩 추가된다. 또한 이 앨범의 전곡을 유료 다운로드 구매할 수도 있다. 19곡을 모두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물론 취사선택할 수 있다. 다만 다운로드 포맷은 MP3가 아니라 윈도우 미디어 포맷 형태로 제공된다. Musicmaker에서는 지난 2월 29일부터 이 앨범의 판매를 시작, 갑작스럽게 많은 고객들이 몰려와 사이트가 다운되는 소동까지 치루고 난 후다. 이번 성공을 기반으로 Musicmaker에서는 올봄 말쯤 The Who의 라이브 앨범을 같은 방식으로 판매할 계획이다.
Robert Plant
출생 : 1948-08-20
헤비메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70년대 최고의 하드 록/헤비메틀 그룹 레드 제플린(Led Zepplin)의 리드 보컬리스트로서 고음역의 폭발하는 가창력을 자랑했던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는 금세기 최고의 보컬리스트이다.
플랜트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흥미는 레드 제플린의 시적인 가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룹에서 당대 최고의 록 스타로 군림하던 12년 동안, 블루스에 기조한 하드 록과 헤비메틀을 구사하면서 다이나믹한 보컬 스타일을 넓혀 가는 동시에 송라이터로서의 역량도 키워갔다.
최고의 명성을 구가한 록 밴드의 일원이었지만, 로버트는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뷰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80년 드러머 존 본햄(John Bonham)이 폭음으로 사망한 후 그룹이 해체되고 한 동안 각종 루머가 난무하는 가운데, 82년 플랜트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첫 앨범 [Pictures at Eleven]을 발표하고 레드 제플린의 명성에 힘입어 골드를 기록한다.
83년 [The Principle of Moments]의 톱 20위 싱글 'Big Log'로 플래티넘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공고히 하게 된 그는, 84년 지미 페이지(Jimmy Page), 기타리스트 제프 백(Jeff Beck), 닐 로저스(Neil Rodgers)와 함께 또 하나의 수퍼 그룹 하니드리퍼즈(Honeydrippers)를 결성하고 셀프 타이틀의 EP 앨범으로 록 스텐다드를 구축한다.
다시 솔로 작업으로 돌아온 로버트는 [Shaken 'n' Stirred](85)를 발표하고 지미와 함께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자선공연에 출연하기도 한다.
88년 [Now and Zen]으로 플래티넘에 오르고, 90년 [Manic Nirvana]로 골드를 기록함으로써 그는 안정적으로 90년대에 진입한다. 94년 로버트는 지미와 MTV 언플러그드 세션으로 참여해 옛 레드 제플린의 음악 스타일과 세계 뮤직에서 영향을 받은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레드 제플린의 재결합을 기대하는 팬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94년 [No Quarter: Jimmy Page and Robert Plant Unledded]를 발표한 후, 지미와 팀을 이룬 또 다른 레코딩 작업 [Walking Into Clarksdale](98)을 발표하고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레드 제플린의 그늘에 가려있지 않은 로버트는 자신만의 음악적 영역을 공고히 하고 있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로서 20세기 록계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John Paul Jones
레드 제플린의 네 사나이 중 가장 과묵실천형이었던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 1946년 1월 3일 영국출생, 본명 John Baldwin)는 본래 탁월한 오르간 주자였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는 수많은 밴드들과의 레코딩 작업을 통해 오르간과 베이스 뿐 아니라 관현악 편곡까지 두각을 나타내며 일찌감치 유망한 세션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밴드에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과소평가 되었던 뮤지션을 뽑으라면 단연 그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베이시스트로서, 키보드 연주자로서, 편곡자로서, 또한 뮤지컬 감독으로서의 그의 음악행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가 록, 또는 음악 역사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가를 알게 된다. 이는 같은 영국 출신 뮤지션인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나 카멜의 앤드류 레이티머 이전에 영국을 대표하는 종합적인 뮤지션으로서 그의 광범위했던 활동영역을 돌이켜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롤링 스톤즈([Satanic Majestie Request]/1967), 야드버즈([Ten Little Indians]/1966~1977), 제프 벡([Truth]/1968), P. J. 프로비([Three Week Hero]/1968, 이 음반에는 존 폴 존스 외에도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그리고 존 보냄이 참여하였다), 허먼스 머미츠(Hermans Mermits, 1965~1967), 도노반, 루루, 탐 존스 등 레드 제플린 해산 이전의 참여 앨범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가 오랜만에 뭉쳐 새로운 프로젝트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을 때도 그는 평론가들의 관심을 외면한 채, 또한 상업적 성공도 고려하지 않은 채 Diamanda Galas와 같은 새로운 뮤지션들과 함께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다져 나갔다.
결과적으로 그는 제플린 고유의 사운드에 의존하지 않고 항상 진보적인 스타일과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유일한 제플린 출신의 멤버가 되었다.
레드 제플린 해산 이후에도 그는 1985년 지미 페이지와 함께 참여한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 [구원의 외침(Scream for help)], 1994년 Diamanda Galas의 앨범 [The Sporting Life]와 프로모션 투어, 1995년 클럽 공연(Back Stage, 시애틀)까지 참여했으며, 건재함을 과시했던 하트의 [The Road Home] 앨범에까지 참여하며 그의 첫 솔로 앨범 [Zooma]를 완성하는 밑거름을 다져왔다.
John Bonham
Full Name: John Henry Bonham
1980년 9월 25일,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본명 John Henry Bonham)이 지미 페이지(Jimmy Page)의 집에서 비상식적으로 많은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자신의 토사물에 질식사하여 시체로 발견되었다. 평소 술을 즐겨마시는 편이 아니던 그가 왜 그토록 자학적인 폭음을 했는지는 영원히 의문으로 남긴 채. 그는 고작 32세의 나이였다.
70년대 중반부터 고질적인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존 본햄은 80년 초부터 연속된 유럽 투어 공연으로 인해 과도한 피로와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뮌헨공연 도중에는 단 세곡을 연주한 뒤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어쩌면 그는 이런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그토록 많은 술을 자신에게 들이부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런 존 본햄의 죽음은 많은 레드 제플린 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으며 두달여 뒤 발표된 레드 제플린의 해체 소식은 전세계 음악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레드 제플린의 존속을 열렬히 기대했으나 10년동안 단 한번의 멤버변동없이 환상의 팀웍을 유지해온 레드 제플린의 나머지 세 멤버,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와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는 "존 본햄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망설임없이 밴드 해산을 선언하였다. 네명의 멤버가 만들어내는 완벽에 가까운 조화로운 사운드가 멤버 각자의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그처럼 대단한 우정과 결속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결정이었다(로버트 플랜트와 존 본햄은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사이로 10대 시절 Band Of Joy라는 밴드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다).
남은 세명의 멤버는 존 본햄의 사후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가끔씩 고개를 드는 밴드 재결합설에 아랑곳없이 세션이나 솔로앨범 발표 등 개인적인 음악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가끔 레드 제플린 시절을 그립게 하는 베스트 형식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2000년 들어서 발표된 두장의 앨범 [Early Days/ The Best Of Zeppelin Volume One]과 [Latter Days/The Best Of Zeppelin Volume Two]는 레드 제플린의 활동시기를 두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그들의 대표적인 곡들을 차곡이 담은 앨범으로 추락하지 않는 레드 제플린 신화를 다시한번 확인시키고 있다. 아마도 레드 제플린을 들으며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적지않은 감회를 안겨주는 앨범일 것이다.
레드 제플린에서의 존 본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많은 후배 드러머들이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는 그의 드러밍을 모방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보기만큼 그리 만만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새삼 감탄했다는 얘기들이 전해진다. 이런 일화들은 존 본햄이 결코 쉽지않은 연주를 매우 간단한 것인 양 연주했음을 입증해주는 예들이다. "존 본햄의 드러밍이 훌륭한 것은 그가 결코 과장된 연주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로버트 플랜트의 말처럼 존 본햄의 드러밍에서는 화려한 기교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프론트맨으로 나서길 좋아했던 로버트 플랜트나 지미 페이지와 달리 베이스주자인 존 폴 존스와 함께 한발 뒤에 물러난 태도로 레드 제플린의 하드록 사운드에 넘치는 록필과 강렬한 임프로바이제이션을 제공했다.
언뜻 듣기에는 다소 싱겁게 들릴 수도 있는 존 본햄의 드럼 연주에는 과시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5살 때부터 드럼스틱을 잡기 시작해 10세 무렵에 이미 대단한 기량을 몸에 익혔을 만큼 뛰어난 드럼 연주자인 본햄의 진가는 라이브 무대를 보면 쉽게 실감할 수 있다. 그저 무지막지하게 드럼을 두드려대는 대신 그는 섬세하고 놀랄만큼 재빠른 손목놀림으로 정교한 리듬과 사운드를 만들어내었다. [Led Zeppelin Ⅱ]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틀곡 'Moby Dick'은 그의 드럼 솔로가 빛나는 명곡으로 레드 제플린의 라이브 무대에서 빠지지않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그때마다 존 본햄은 무려 30여분 동안이나 물흐르는 듯한 드럼연주를 즉흥으로 펼치면서 박력과 넘치는 에너지로 수만 관중들을 몰아지경에 빠뜨리곤 했다.
존 본햄의 사후 만약 레드 제플린이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 계속 밴드를 이어갔다면 그들의 사운드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을 것이다.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친구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화려한 비행을 마치고 땅위로 내려앉은 거대한 비행선 레드 제플린의 해산은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레드 제플린의 재결합을 빌며 고사를 지내기보다는 범람하는 하드코어와 테크노와 모던록 앨범들에 파묻혀있는 레드 제플린의 지난 앨범들을 꺼내 록역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사운드로 평가받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잠시 존 본햄에 대한 애도의 묵념이나 올리는 것이 어떨까.
Buried Alive In The Rock 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