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왕으로서는 최초로 고리대금을 법으로 금지하고
민중이 참여하는 재판을 열었으며,
프란치스코 3회 회원으로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스스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생전에 이미 국민들로부터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루도비코는 사후 불과 27년 만에
보니파치오 8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라틴식 이름으로 성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쉬의 아들로
프랑스 프와시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성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성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어머니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성 루도비코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성인은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성인은 1242-1243년의 남 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또 잉글랜드의 헨리 3세를 테임브르그에서 격퇴하였으며,
포와투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1248년 성인은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다미에타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뤘다.
그 후 성인은 석방되어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성인은 플랑드르와의 평화를 이룩했고
리모주 카오르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성 루도비코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정의를 펴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었다.
동시에 성인은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성인은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다.
성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성인은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성인은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성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으며.
성인의 신심은 자신이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인은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루도비코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임종시에 루도비코는 이런 말을 하였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성인의 유해는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태자에게 남긴 유언 일부
“내 아들아,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사랑하여라.
네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만사가 무익하다.
자주 고해하고 성체를 영하며,
네 힘이 닿는 대로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여라.
주님께서 고난을 주시면
이런 보속이 마땅한 사람인 줄로 알고 감사하며,
행운을 주시면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청하여라.
말을 교묘하게 하는 이들보다는
양심이 바른 이들을 주변에 두고,
그들이 너의 잘못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하여라.
정의를 세우는 데 엄정하되,
진실이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는 약자의 편을 들어라.
죄스러운 험담이나 하느님께 모독이 되는 말을
네 앞에서 용납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나라와 분쟁이 생겼을 때는
고민하고 심사숙고하여 정말 피할 수 없을 때에만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
불평등과 착취를 나라 안에서 몰아내되,
우선 네 집안에서부터 그리 하여라.
왕이 스스로 궁정의 비용을 줄이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백성이 따라 할 것이다….”
천주교 부산교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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