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저질러버리고야 말았다. 당장 월요일부터 전공시험인데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내 마음을 잡지는 못하나 보다. 더군다나 내 스물 한살 짧다면 짧은 인생에 첫‘남도여행’인데 어찌할 수 있으랴. 전날 보고서 때문에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역시나 무거운 눈꺼풀 속의 잠을 힘겹게 들이밀고 일어나 부랴부랴 챙겨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시간을 잘 맞추었나보다. 우등고속이 아닌 일반이다. 속으로 ‘돈 굳었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시작이 좋은 느낌에 가벼운 마음이다. 하지만 날씨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을 햇살이 정말 좋았는데 말이다.
전라도나 경상도
여기저기 이곳 저곳
산굽이 돌고 논밭두렁 돌아
헤어지고 만나며 아하,
그 그리운 얼굴들이
그리움에 목말라
애타는 손짓으로 불러
저렇게 다 만나고 모여들어
굽이쳐 흘러
이렇게 시퍼런 그리움으로
어라 둥둥 만나
얼싸절싸 어우러지며
가슴 벅찬 출렁임으로 차오르나니
어화 어화 숨차
어화 숨막히는 저 물결
어화 어기여차
저 시퍼런 하동 포구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0 -하동 포구' 전문)
남도여행이어서 그럴까? 경상도를 지나 전라도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지난 날 파란만장했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끊임없는 지역감정 분쟁이 떠오른다. ‘저, 전라도 깽깽이들’하면 우르르 몰려가 몰매를 놓고 ‘저 경상도 문둥이들’하면 떼지어 달려들어 매질을 했던 지난날과 오늘날. 하지만 훗날에는 우리가 되고,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이 시가 아련히 떠오른다.
# 해남과 고산
초행길에 어리둥절하지만 사람들이 친절하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기대했지만 웃음이 나올 정도는 아니다. 고산의 생가에 가는데 택시비 4,000원이면 된다고 해서 얼른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돌발이다. 라디오 일기예보에서 전남지역에 태풍주의보가 내렸고 곳곳에 돌풍이 예상된다고 한다. 정말 “뜨아∼”할 수밖에 없다. 차창 밖 2차선 도로 양옆으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일기예보는 어울리지 않는데… 오보이기를 바랄 수밖에! 어떻게 해서 온 여행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연동파)의 종가 고택 『녹우당』.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몇 백년을 그 자리에 지키고 있었을 법한 은행나무다. 사진을 찍고싶은 욕심이 절로 든다. ‘고산 윤선도’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국문학의 비조, 시조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릴 만큼 고산의 문학성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 한문문학의 숲속에서 고아한 우리말을 사용해 나타낸 그의 높은 정신이 아닐까?
만흥(漫興 )
1.
산수간 바위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르는 남들은 웃는다 하지만은
어리고 어두운 뜻에는 내 분수인가 하노라
2.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서 싫도록 노니노라
그 남은 나머지 일이야 부러울 줄 있으랴
고산이 금쇄동에서 지었다는 작품 「산중신곡」중의 일부이다. 자연에 몰두해 무아경에 든 산처럼 고고했을 고산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혼란한 정계에서 벗어나 40여년간 귀양·은둔생활을 하며 유유자적했을 그의 삶이 보리밥, 풋나물에서 묻어 날 법도 하다.
유물관에 고산 선생이 47세 때 장원급제한 과거시험의 답안지가 있다. 오늘날 사법고시, 행정고시 1등쯤 되려나 싶다. 한 벽면 가득 쌓여있는 고전문권의 오래된 책내음 속에는 분명 고산 윤선도 선생의 치열한 시정신이 녹아있을 것이다. 미술교과서에서 본 듯하기도 한 그림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로 선비화가라 불렸던 윤두서의 자화상이란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공재 윤두서는 3재라 일컬어졌다고 하는데 대동여지도보다 무려 151년이나 앞선 ‘동북여지도’까지 그가 그렸다니 속으로 놀랄 따름이다. 윤씨 집안은 시조문학, 그림에도 능했지만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나보다. ‘고산유금’은 듀륜산과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그가 탔던 가야금일까? 자연 속에서 차도 마시고 시도 지으며 가야금을 탔을 고산의 호방함이 부러워진다.
녹우당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아쉽게도 연목(서까래)이 부식되는 바람에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볼 수 없었다. 고산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는데 나중에 봉림대군이 왕으로 즉위한 후 스승이었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주었다. 1660년 효종이 죽은 후 고산은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왔는데 이것이 지금 녹우당의 사랑채라고 한다. 그러니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연동파)의 종가 고택 전체가 녹우당이 아니고 사랑채만을 녹우당(綠雨堂)이라 해야 마땅한 것이다.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그런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고산의 체취가 묻어 있을 사랑채 녹우당을 볼 수 없음을 500여년을 넘게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내 두팔 한아름으로도 안을 수 없는 3.4미터 둘레의 해송과 담쟁이 덩쿨 가득한 돌담길로 아쉬움을 대신할 수밖에… 신주를 모셔놓았다는 고산사당에서는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졌지만 늙은 해송들이 병풍처럼 묘 주위를 둘러싸 지키고 있는 듯한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묘에서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무덤가라는 것도 잊고 고운 잔디 위에서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녹우당을 뒤로한 채 다시 해남읍으로 가려하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얼굴에 느껴진다. 사람은 둘인데 우산은 하나. 그것도 감지덕지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갔는데 몇 분 기다리지 않아 버스가 와서 기쁘기 이를 데가 없다. 버스 안에서는 그야말로 구수함아 묻어나는 전라도 본토 발음을 들을 수 있었다. 작은 마을 버스이기에 알 사람 다 아니 안부인사에 여념이 없는 모습. 이런 것을 두고 정겨움이라 할까?
이제 생각나는 것은 오로지 ‘밥’이다. 해남읍을 이 잡듯이 찾아 헤맨 결과 전통찻집에서 순두부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1인분에 4만원 가량 한다는 남도한정식이 간절하지만 주머니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놀러온 이웃 아이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공책 사서 쓰고, 돈가스 해줄 테니까 먹고 가”라고 말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서 우리 밥상의 푸짐함도 느껴본다.
# 또 다시 떠남
땅끝마을로 간다는 우리를 너무도 잘 챙겨주셨던 해남 터미널의 아저씨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얼마를 갔을까? 드디어 바다가 보인다. 비는 아까보다 더 세차게 창문을 때리고 있지만 넓디넓은 바다를 보니 날씨에 대한 걱정도 잠시 접을 수 있다. 그런데 점심 먹을 식당을 찾느라 너무 많이 걸었나? 어느새 나는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갈두 땅끝마을에 한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태풍이 오긴 오나보다. 높은 파도와 심상치 않은 바람에 소름이 돋는다. 산에 있는 전망대를 바라보며 내일 아침에 갈 수 있을지 의문도 잠시 못 간다고 단정을 내리고 서둘러 예약한 민박집으로 향했다.
cape... 민박집이 너무 예쁘다. B동 2층 3호실. 나무로 된 테라스도 있고 파란 벽지에 형광등이 아닌 백열등 하나…돈 3만원이 아깝지만은 않다. 아침 해맞이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지는 해라도 보려고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테라스만 바라봤지만 그것도 무리였나 보다. 그냥 서서히 어두워만 갔다. 1층에 있는 카페… 마지막 잎새가 연상되는 담쟁이가 있는 창가에는 여전히 세찬 빗줄기가 때리고 있다. 카페 안에는 내가 시킨 유자차 향이 알싸하게 퍼진다. cape는 대륙의 끝인 ‘곶’을 뜻한다고 머리 긴 주인아저씨가 귀뜸 해준다. 12시 무렵에서야 거친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아침! 어라∼ 비가 그쳤다. 드디어 제대로 된 바다를 만나기 위해 등대까지 산책을 나섰다. 비는 그쳤지만 역시 바닷가라 바람은 세다. 보길도 가려는 사람들로 선착장에는 줄이 이어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이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산이 세상 꼴을 보지 않으려 은둔했던 보길도를 가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접어야만 했다.
땅끝은 끝이면서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시작이 된다. 또한 바다로 나서는 사람에게도 시작이 된다. 사람들이 해남의 땅끝을 찾는 매력은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땅끝에서 다시 해남… 해남에서 강진… 어제오늘은 떠남과 다시 떠남의 연속이다.
# 차와 다산
다산초당으로 가기 전 영랑생가에 잠시 들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의 주인공 영랑 김윤식의 생가. 집안의 온갖 것들이 그가 쓴 시들의 소재였나 보다. 껍질을 다 벗겨 놓은 백일홍 나무가 운치 있어 보여 사진을 찍어보지만 역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색하기만 하다. 영랑생가에도 은행나무가 있지만 녹우당의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이것이 중세와 근현대사의 차이는 아닐까 하는 얄팍한 생각을 잠시 해본다. 언제 태풍이 왔었냐고 듯한 완연한 가을 날씨가 너무 좋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들어맞았다. 장날이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버스는 장을 보러왔던 어르신들과 수업을 마친 학생들로 만원버스를 이루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겨우 숨통을 돌릴 수 있나 했는데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돌계단은 언제 끝이 나려나?’라는 생각만 간절하다. 다산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에서 잠시 쉬어 가는데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 동자석이 있다. 그런데 돌부처의 코가 없어 이상하게 여겼는데 누군가가 아들을 낳으려고 떼어간 것이라 생각하니 미신의 힘도 참 큰가보다.
오르는 길에 나무를 베어내고 만든 차밭이 보인다. 정약용 선생이 차를 접하고 ‘茶山’이라는 호를 얻게 된 것은 강진땅에서 보낸 18년간의 귀양살이 때라고 했다. 거처인 다산초당 아래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 차도 배우고 호도 받았다고 하던가. 초당 앞에 청동화로를 올려두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이던 반석 ‘다조’가 있다고 했는데 올라가서 봐야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는 사이 드디어 도착했다.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우거진 숲그늘에 자리잡은 다산초당.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집필하며 실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장소치고는 너무나 소박하다. 제자들의 거처인 서암, 그 오른편에 초당과 다산 사경 중 하나인 ‘연지석가산’이라는 작은 연못 그리고 수많은 저술이 집필된 동암.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라기보다 선배들이 유유자적 자연을 벗삼아 잠시 머리를 식히며 시를 읊조리고 차를 마셨던 산속 쉼터 같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현판과 동암에 걸린 ‘寶丁山房(보정산방,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방)’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 한다. 24살이나 되는 연배에도 불구하고 다산과 추사의 인연은 꽤나 깊었었나 보다. 동암에서 몇 발작 더 가니 강진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천일각이 자리잡고 있다. 흑산도에 유배된 둘째형 정약진과 가족들을 걱정하며 먼 곳을 바라봤을 다산은 이곳에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당시에는 천일각이 없었지만 가족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았던 다산을 기리며 강진군에서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산 아래가 다 갯벌이었을 텐데 지금은 간척을 해서 누런 황금들판이다. 아무렴 예전의 운치만 할까 싶지만 산중턱에 걸터앉은 정자에서 먼 발치를 내려다보니 황금들판에 푸른 바다까지… 시원한 바람까지 머물다 가는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이로세.
천일각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km 정도 가면 우리나라 동백명소로 손꼽는 백련사 동백숲이 있다고 한다. 300m에 달하는 백련사 입구의 진입로도 동백나무로 빨간 숲터널을 이룬다고 하는데 때가 아니라 볼 수 없었지만 다음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한다.
# 귀향
다산초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구르고야 말았다. 정말 잊지 못할 추억(?)까지 만들었다고 좋게 생각을 해보지만 욱신거리는 발목에는 여행을 다녀온 후 파란 멍이 자리잡았다.
조금은 질퍽한 추수 끝난 논을 엉거주춤 걸어 갈대밭을 찾았다. 여행선물이라고 가족에게 안겨줄 갈대도 한 아름 꺾고 사진 한 컷도 잊지 않았다. 우리를 강진 터미널로 데려다 줄 버스가 왔다. 그런데 잔돈이 없다. “(모기만한 목소리로) 저기요… 기사님 잔돈이 없는데요…”, “어라∼ 나도 없는데…”, “터미널 가서 바꿔서 드리면 안될까요?”, “(웃으면서) 그러쇼∼” 아저씨의 넉넉한 웃음과 함께 버스 창밖의 사람구경, 경치구경에 여유롭다.
남도의 가을은 이렇게 깊어 가는구나! 이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강진에서 광주… 광주에서 다시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