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대 : 고려
생몰년 : 877(헌강왕 3)~943(태조 26)
자 : 약천(若天)
시 호 : 신성(神聖)
관련전투 : 조물성전투(曹物城戰鬪)
고려 태조로 후삼국을 통일한 왕. 재위 918년~943년.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륭(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이 해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이흔암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 당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24년 7월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력 우열을 가리는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물성전투가 그것이다. 조물성은 낙동강 상류의 안동과 상주 사이 지역으로 추정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전투에서는 피차 정예군이 총출동하여 대결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고, 후백제도 별 소득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낙동강 유역에서 고려의 군사력이 커지고 신라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자 후백제 견훤(甄萱)은 927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압박하였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의 고려군은 11월 대구 공산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였고,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 공격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대장 신숭겸, 김락 등이 사력을 다하여 왕건을 구출하고 그들은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안동에서 벌어진 930년의 고창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10월에는 신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게 되어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 졌다. 마침내, 936년 9월 신검의 후백제군과 낙동강 지류인 일리천전투에서 최후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능은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소재 현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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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고려 생 몰 년 : 948년(정종 3)~1031년(현종 22) 시 호 : 인헌(仁憲) 본 관 : 금천 관련전투 : 귀주대첩(龜州大捷)
고려 전기의 명장으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에서 금천(衿川 : 지금의 서울 금천구)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며,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된 후 한림학사·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1018년(현종 9)에는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와 서경(지금의 평양) 유수를 겸하였다. 당시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자주 고려에 칩입하였는데, 해를 거듭하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를 보지 못하자 1018년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삼아 고려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12월 10일, 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강감찬은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의 대군을 이끌고 안주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그는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전진하여 정예기병 1만 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인 삼교천을 막아두었다가 적군이 달려오자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적을 수장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지금의 개성)을 침공하려고 남진하다가 강민첨의 침공을 받아 자주의 남쪽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대패하였다. 거란의 소배압은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이듬해에는 개경을 위협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전선에서 1만명의 병력을 후송 배치하여 개경을 방어케 하고 동북지방의 3천 병력도 들어와 원조케 하는 한편, 도성 밖의 백성들을 성 안으로 철수시켜 거란군에 대항하였다. 거란군이 거듭되는 패전으로 사기를 잃은 데다 수도 일원의 방비도 철통 같았으므로 소배압도 개경 공략이 불가능함을 알고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군 도중 영변에 이르렀을 때 고려군의 습격을 받아 5백여의 군사를 잃고, 2월 1일 귀주에서는 강감찬의 맹공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2월 6일 강감찬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자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친히 금화팔찌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귀주대첩 후 거란은 침략 야욕을 버리고 고려와 평화적 국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이후에도 개경에 나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큰 공을 세웠으며, 말년에 문하시중(재상)이 되어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재상으로 있을 때 중국 송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문곡성을 못 본지 오래 되었는데, 그 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면서 강감찬에게 하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落星垈,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호)는 바로 강감찬의 출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유적지이며,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
출처 :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4830&mode=title&query=%B0%AD%B0%A8%C2%F9&dircode=10000000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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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기 : 1019년(현종 10) 2월 1일 전 투 지 역 : 평북 귀주군 전쟁상대국 : 요나라 관 련 인 물 : 고려군 - 강감찬(姜邯贊), 강민첨(姜民瞻) 거란군 - 소배압(簫排押)
고려 현종 10년(1019) 평안북도 귀주에서 고려군이 거란의 대군을 섬멸한 전투. 거란의 성종은 여러 차례 고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자 1018년 12월에 10만 대군이라고 칭하면서 소배압을 주장으로 하여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300명을 안주에 주둔시켰다. 강감찬은 다시 흥화진으로 나아가 정예 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내(흥화진 앞의 삼교천)를 막아 수공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거란군은 수심이 얕아진 삼교천을 아무런 의심없이 건너기 시작하였다. 거란의 주력이 삼교천의 중심부에 이르자 고려군은 물을 터서 거란군에게 수공을 가하였고, 거란군 진영이 수공으로 혼란해지자 고려군은 이번에는 매복해 두었던 병력으로 하여금 기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배압은 이에 개의치 않고 개경을 향하여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에 강민첨이 이를 추격하여 자산의 내구산에서 이를 대파하고, 또 마탄에서도 1만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계속하여 개경을 향해 공격을 하니 고려군은 이에 대한 새로운 방어계획을 준비하였다.
귀주는 우리나라 서북쪽의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이다. 특히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오기 위해서는 서북계의 북로와 남로 두 통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귀주는 북로의 중심지가 된다. 그런 까닭에 귀주는 중국으로부터 침공이 있게 되면 항상 대접전이 벌어졌던 지역이었다. 한편 소배압의 거란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019년 1월 3일에는 개경에서 백리 떨어진 신은현(신계)에 이르렀다. 이때 고려군은 청야전술로 대응해 도성 밖의 곡식은 제거하고 백성들은 성 안에서 군관민 합세하여 대비하였다. 이처럼 고려군의 대비가 강화되자 소배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고려군은 개천과 영변에 이른 거란군을 급습하여 5백여명을 죽였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이 2월 1일 귀주를 황급히 빠져 나가려 하자 이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이를 요격하였는데, 마침 개경에서부터 추격해오던 고려군이 가세하고 또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몰아와 고려군에게 유리해져서 이를 틈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들을 덮었으며, 말과 무기 등 노획한 물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 10만이라고 칭하던 요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거란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려 침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참패였다. 거란의 성종은 이 전투 패배의 책임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가벼이 여겨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여버리리라”고 할 정도로 진노하였다고 한다
출처 :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5872&mode=title&query=%B1%CD%C1%D6%B4%EB%C3%B8&dircode=10000000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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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고려
생몰년 : 942년(태조 25)~998년(목종 1)
자 : 염윤(廉允)
시 호 : 장위(章威)
본 관 : 이천
고려 전기 거란의 침입을 외교력으로 해결한 문신.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조부 서신일 생존 때까지는 이천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년(성종 2)에는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가 되고 이어서 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치적 활동에서도 중책을 맡았으나 외교적으로도 이에 못지않은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 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그가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 10월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끼고 동경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귀주와 태천의 중간지점인 봉산을 격파하고 계속 칩입할 태세를 갖추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할지론에 적극 반대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왕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때 마침 소손녕도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에게 패하여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서희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하여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하였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으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곧 요양)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귀국과 친교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하며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이러한 서희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흥화진 등에 강동6주에 성을 쌓아 대북방 군사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서희는 성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성종 15)에 병으로 개국사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천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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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고려
생몰년 : 미상
관련전투 : 처인성전투(處仁城戰鬪) 충주산성전투(忠州山城戰鬪)
관련성곽 : 처인성(處仁城) 충주산성(忠州山城)
고려 후기에 용인 처인성에서 몽고군을 격파한 승장.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다가 1232년(고종 19)에 몽고병이 침입하므로 처인성(處仁城 : 지금의 용인)으로 피난하였다. 12월 중순 살리타(撒禮塔)의 몽고 주력부대가 수원의 속읍인 처인성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당시 처인성에는 주변의 주민들이 고려군과 함께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때 김윤후는 몽고군을 진두 지휘하는 살리타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처인성의 고려 군민은 지휘관의 전사로 전의를 상실한 적을 공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거나 생포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에 임명되고, 뒤에 충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었다. 그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주성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되어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었을 때, 병사들을 독려하기를 “만일 힘을 다하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관노의 부적을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감문위상장군이 되었고, 그밖에 군공을 세운 자들도 관노·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1258년에 동북면병마사가 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고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262년(원종 3)에 추밀원부사·예부상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사공 우복야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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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 - 호족사회의 성립과 배경>
신라 말에 흥기한 호족(귀족)도 대토지 소유라는 재력을 갖고 있었다. 사전(寺田) 및 둔전(屯田)의 사령화(私領化), 정전(丁田)의 사전화(私田化) 등의 추세에 의하여 그 지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족, 관료들에게 지급되었던 식읍(食邑), 녹읍(祿邑)도 수취체제의 혼란으로 호족들의 전장(田蔣)으로 되었으며, 그들은 장두(蔣頭)라는 관리인까지 파견하기도 했던 것이다. 호족들은 사병(私兵)을 중심으로 한 무력도 가지고 있었다. 지방호족들의 사병은 같은 친족들도 있었겠지만 주로 유민이나 일정한 지역의 주민이 모집 내지 징집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 사병과는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가 유지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기록에 보면 「족(族)」「당(黨)」 등으로 표현되 자들이 사병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한편 그들은 중앙과 비슷한 관부 조직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대등(堂大等), 대등(大等)이란 직함을 가지고 병부(兵部), 창부(倉部)와 같이 중앙과 동일한 명칭의 부서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통치기구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의 주치(州治)나 소경(小京)의 일부에는 「학원(學院)」이 설치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유력한 호족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와 같이 나말려초의 호족도 경제력은 물론 권력, 무력을 갖추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누리고 있는 존재였다. 즉 지방의 유력한 족단(族團)이거나 실력자였다. 이러한 호족은 나말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고려왕조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조 성립 후 호족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귀족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남아있으면서 왕권 강화와 더불어 향리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지방에 남아 있던 향리들도 과거나 천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중앙에서 고위관직에 오르는 데에도 별다른 제약을 없었다. 고려시대 문벌귀족의 저변에도 호족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향리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족의 역사적 성격도 중국의 경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중국사나 한국사를 막론하고 호족은 대토지 소유라는 경제력을 근간으로 하여 권력이나 무력, 그리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갖춘 지방의 유력한 족단이나 그 일원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하겠다. 하편 호족은 고대사회 속에서 왕권과 대립하는 일면 타협하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새롭게 재편된 왕조체제 속에서도 문벌 귀족의 저변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호족의 개념과 성격이 대략 이렇다고 할 때 나말려초의 사회상황을 논하는데 호족이란 용어의 사용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용어의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호족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 또 나말려초 사회변동의 담당자층을 호족 대신에 「호부층(豪富層)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호족에 대한 종래의 내용 규정들이 소위 족단이라는 혈연적인 기반, 정치적으로는 낙향한 귀족이나 촌주 등 과거 수장층과의 계보적 연결,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공동체원에 대한 공납제적 지배라는 면에 중점을 두어 사용해옴으로써 새 시대를 향한 변혁세력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구시대적인 성격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족이라는 일종의 단체 개념보다는 호부(豪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개별적인 존재로 수렴되고 다양한 사회 경제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출처 :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206&mode=title&query=%C8%A3%C1%B7&dirco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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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느낀점이 없습니다
[과제] 고려사전만들기 라고 바꾸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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