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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樂全堂集) 제13권 / 행장(行狀)
죽은 아내 정숙옹주의 행장[亡室貞淑翁主行狀]
배우자 신익성(申翊聖) 찬 / 신익성은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옹주는 선조(宣祖) 소경대왕(昭敬大王)의 셋째 딸이다. 어머니는 인빈(仁嬪) 김씨(金氏)로, 사헌부 감찰 한우(漢佑)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3월 갑진일에 창경궁(昌慶宮)의 양화당(養和堂)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지녀 선조께서 특별이 사랑하였다. 유모의 품을 떠나자마자 화려한 의복을 착용하고 인도받으며 외합(外閤)으로 갔다.
조금 자라서는 직접 《소학》을 배웠으며, 또 궁인에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워서 지나간 시대의 흥망과 인물의 시비에 대략 통달하였으나 글을 아는 것을 능사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아홉 살 때에 봉작을 받고 정숙(貞淑)이란 호를 하사 받았다. 기해년(1599)에 익성(翊聖)에게 출가하였는데, 혼례를 치르고 난 뒤 선조께서 옹주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궁중으로 돌아오도록 명하셨다.
신축년(1601), 비로소 명을 받고 궁에서 나왔는데, 그때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집안 살림을 주도적으로 맡아 대소사를 빠트리지 않았고, 집 안팎을 잘 다스렸으며, 확연히 질서가 있었다. 사려가 주밀하고 상세하여 모든 행동이 사리에 맞았으며, 집안 일로 익성에게 누를 끼친 적이 없었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검소하고 부지런하였다.
인빈의 곁에 있을 때는 거스르는 기색이 없었고, 형제를 대할 때에는 불화를 일으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으며, 시부모를 모실 때에는 지성스러움이 한결같았다. 동서지간에는 화목한 기운이 넘쳐났으며, 이를 미루어서 내외종(內外從)과 당종(堂從)의 친척에게까지 미치니, 친속들 또한 옹주가 귀한 신분임을 잊고 지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변고가 일어나 부친께서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을 적에는 모친을 따라 자리를 깔고 앉아 곡을 하며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부친께서 전리(田里)로 쫓겨남에 이르자 옹주는 거룻배 하나로 찾아가서 뵈었으며, 그때마다 수십 일씩 머무르며 차마 떠나지 못했다.
부친께서 곧이어 춘천(春川)으로 유배되었는데, 이곳은 황폐하고 후미진 산골이라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옹주는 밤낮으로 힘써 쌀과 소금을 넉넉히 보내었으며, 한 가지 진미라도 구하면 반드시 상자에 담아서 보내었다. 이런 생활이 오래되어 형편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비녀와 귀고리를 팔아 공급해 주었다.
부친께서 갇혀있을 때에도 옹주는 가묘의 제사를 받들어 제수 장만은 몸소 행하고 남을 시키지 않았는데,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할 뿐이다.”하였다. 무오년(1618), 박씨(朴氏) 집안에 시집간 큰 누이가 춘천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뵈러 오다가 가평촌(加平村)에 이르러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익성(翊聖)은 부모님 곁에 있었다.
박씨의 집안은 본래 가난한데다 객점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염을 하지 못했다. 옹주가 그 의금(衣衾)을 지어주고 또 상례(喪禮)에 필요한 제반 물품을 마련해 주었으며, 사내 종 수십 명을 보내어 일을 돕게 해주었는데, 그 덕분에 초상을 제대로 치를 수가 있었다.
모친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슬픔을 다하고 예를 극진히 하여 3년을 하루처럼 한결같이 하였다. 막내 여동생이 출가하기 전에 모친이 돌아가시자 옹주는 자식처럼 보살펴 혼수를 마련하여 시집을 보냈으며, 시집 갈 때는 여종을 딸려 보내었다.
자녀를 기를 때에는 정도(正道)로 가르쳤으며, 작은 실수가 있으면 꾸짖어서 올바르게 고치도록 하였다. 어린아이 때부터 베옷을 입혔는데, 평소에 말하기를 화려한 옷이 뜻을 헤친다고 하였다. 노복들을 대할 때에는 엄정하게 대하면서도 은혜를 베풀자 노복들 중에 감히 함부로 행동하는 자가 없었으며, 스스로 단속하기를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였다.
익성과 함께 산 삼십 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는 종일토록 길쌈을 하면서 조금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특별한 일이 아니면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매우 박하게 하여, 한 끼 식사에 두 가지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고, 옷이 해지더라도 바꾸지 않았다.
궁중에서 알현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귀척(貴戚)들이 서로 뒤질세라 호화스럽게 꾸미고 나왔는데, 옹주는 홀로 복장을 검소하게 하였다. 시중드는 자들이 부끄럽게 여기면 옹주는 웃으며 말하기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들이 반드시 내 앞 자리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궁중에서 연회가 빈번하게 열리고 그때마다 반드시 귀척들을 불러서 돕게 하였는데, 옹주가 말하기를, “모후(母后)가 곤욕을 치르고 계신데, 내가 어찌 편안히 즐거움에 빠져 어지러운 상황을 도울 수 있겠는가.”하고는, 십 년 동안 궁중에 발길을 끊었다.
정사년(1617)과 무오년(1618) 사이에 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익성은 병이 나서 헌의(獻議)하지도 못하고 감히 조정회의 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문을 닫고 객을 사절하고 있었다. 하루는 어떤 객이 밤에 지나가다가 들려서는 화복(禍福)의 설을 가지고 두렵게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사나웠다.
익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하게 쟁론하지 않았는데, 객이 가고 나자 옹주가 데운 술과 구운 고기를 내와서는 말하기를, “당신은 객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셨지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가령 불행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정도(正道)로 처신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꼭 죽게 되는 것도 아닌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황폐하고 궁벽진 땅이나 머나먼 변방도 또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부군이 가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하고는, 이어 대비와 공주의 안부를 걱정하며 몇 줄기 눈물을 흘렸다.
능창군(綾昌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와 의창군(義昌君)이 두문불출할 적에 감히 그를 위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옹주는 눈물을 흘리며 달려가 안부를 묻고 보살펴 주었는데 다른 형제들보다 더욱 극진하였다. 비록 부인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고 의를 보고 행동에 옮겼으니, 이는 아마도 타고난 것이라 하겠다.
익성을 대하는 것이 매우 공경스러웠으나 성품이 강직한 면이 있어 익성이 잘못을 할 때가 있으면 그때마다 바로 언급하여 바로잡도록 간하였으며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익성 또한 용납하여 받아들였는데, 결국에는 크게 유익함이 있음을 깨달았다. 동생과 아들 면(冕)이 함께 대과 명단에 들자, 옹주는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너무 성대한 일이 아닌가.”하였다.
얼마 있다가 대각에서 논의하여 합격자 명단을 취소하고 아울러 부친을 탄핵하자, 옹주가 그 소식을 듣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이들이 우연이 과거에 합격한 것인데, 이 일을 가지고 아버님의 평생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가.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으니, 득실이야 무슨 마음 쓸 것이 있는가.”하고는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옹주가 이치를 알았다는 일면을 볼 수 있다.
옹주는 모두 열세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생존한 자는 아홉 명이다. 아들은 면(冕), 변(昪), 경(炅), 최(最), 상(晑)이다. 장녀는 홍명하(洪命夏)에게 출가 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장남 면(冕)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윤훤(尹暄)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변(昪)은 군수 이민구(李敏求)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한 명을 두었다.
경(炅)은 군수 황일호(黃一皓)의 딸과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는데, 혼인날을 잡아놓고서 옹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슬프도다! 옹주는 평소 병이 없었다. 갑자기 어지러움증이 생겨 기절했다가 소생하였으나 정신이 여전히 온전했다. 그런데 저녁에 두통이 점차 심해지고 다음 날에 크게 열이 났다.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경(炅)의 손을 잡고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고, 신시(申時)에 이르러 숨이 끊어졌으니, 실로 11월 초5일의 일이다. 사람의 생사가 이처럼 급작스레 정해진단 말인가. 부고가 알려지자 임금께서 크게 애도하여 이틀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고, 궁에서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부의(賻儀)로 보냈으며, 그와 함께 자급을 더해주도록 명하였다.
내 전(內殿)에서도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고, 성복(成服)한 뒤에 또 중사를 보내어 상주를 위로하게 하였으니, 보기 드문 은택이다. 아! 인생의 길고 짧음이 똑같지 않은 것을 본디 알지만 정신이 쇠하지 않고 또 오랫동안 고질병을 앓지도 않았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애달피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향년이 겨우 41세이다. 12월 신유일에 광주(廣州)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고 우측을 비워 두었는데, 이는 훗날 익성이 죽었을 때 함께 묻힐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슬픔을 억누르고 사실을 모아서 감히 입언군자에게 의탁하노니, 거의 후세에 영원토록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터럭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적이 아니다. 익성이 행장을 씀에 있어 요약하고 넘치지 않았으니 바라건대 고명(高明)은 살펴주소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절합니다.
<끝>
[註解]
[주01] 죽은 …… 행장 : 이 글은 저자의 아내인 정숙옹주(貞淑翁主, 1587~1627)에 대한 행장이다. 옹주는 선조의 서녀로 인빈(仁嬪) 김
씨(金氏) 소생이다. 저자와 혼인하여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다.
[주02] 계축년에 변고가 일어나 :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의 옥
사라고도 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
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
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03] 정사년과 …… 때 : 인목대비의 폐비론을 말한다. 1617년에 폐비론이 제기되어 1618년 대비였던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
궁(西宮)에 감금하고 유폐시켰다.
[주04] 능창군(綾昌君)의 옥사(獄事) : 1615년 신경희(申景禧) 등 서인계 일부 인사가 선조의 서손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일이 발
각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능창군의 이름은 전(佺)이며,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과 부인 구씨의 아들로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 왕위를 위협한다 하여 왕이 되고자 한다는 고변이 있은 뒤 역모로 몰려 교동(喬桐)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주05] 의창군(義昌君)이 두문불출할 적에 : 의창군은 선조의 서자로 이름은 광(珖)이다. 어머니는 인빈 김씨(仁嬪金氏)이고, 부인은 양
천 허씨(陽川許氏)이다. 광해군의 패륜을 못내 한탄하다가 1618년에 모반죄로 주살된 허균(許筠)의 사건에 연좌되어 훈작(勳爵)
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는데, 본문의 내용은 그 때의 일을 말한다.
[주06] 얼마 …… 탄핵하자 : 본서 제13권 〈선부군 영의정 문정공 행장〉에, 신흠이 병인년(1626) 가을, 전시(殿試) 독권관(讀卷官)으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합격자 명단을 개봉하고 보니 아들 익전(翊全)과 손자 면(冕)이 모두 그 속에 있었다. 이에 사헌부가 먼저 시
관이 사정(私情)을 따른 것을 논하면서 파방(罷榜)과 아울러 시관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끝>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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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亡室貞淑翁主行狀
翁主。宣祖昭敬大王之第三女也。母曰仁嬪金氏。司憲府監察漢佑之女。以萬曆丁亥三月甲辰。生于昌慶宮之養和堂。生而有美質。宣廟眷愛特甚。纔離姆懷。衣以雄服。挈致外閤。稍長親授小學書。又從宮人受十九史略。略通往古興亡。人物是非。而不欲以文字爲工也。九歲受封。賜號貞淑。己亥歸于翊聖。合巹禮成。宣廟念其年幼。命還宮中。辛丑始命出閤。時年十五。能操家秉。細大不遺。內外修飭。截然有序。裁度周詳。動咸中窾。未嘗以家事累翊聖也。孝友儉勤。在嬪側無違色。處兄弟無違言。事吾父母。一於至誠。妯娌之間。和氣藹然。推而及於中表堂從之親。親屬亦忘其貴也。癸丑變作。家大人就理。從大夫人席地號哭。不食者數日。洎親家歸田。主以單舸往省。輒留數旬不忍去。大人尋被竄配春川。峽中荒僻。炊爨不繼。主日夜調度。贍以米鹽。得一味之珍。必篋而送之。久而力屈。鬻其簪珥以給之。親家之在纍也。主奉家廟之祀。豆籩之供。禔躬不假曰。大人不得祭。吾當竭力而已矣。戊午伯姊朴氏歸省父母于春川。到加平村疾作不救。是時翊聖方在親側。朴氏家故貧。喪又出於旅店。無以爲斂。主輟其衣衾。且具襲斂祭奠之需。發奴丁十數人以扶之。賴此成喪。大夫人之喪。盡哀盡禮。三更穀燧如一日焉。季妹未婚而大夫人棄世。主撫之猶己出。資而嫁之。其歸也以婢使與之。育子女。敎之以義方。小有失。呵責而使改之。稚孺被之以布素曰。綺紈損志。莅婢僕。嚴而有恩。無敢橫者。自治克莊。與翊聖同居殆三十年。而晨起盥櫛。終日執女紅不小倦。非有事。不蹋梱閾。自奉菲薄。食不重肉。衣或至敝不改。禁廷朝謁。諸貴服用。競事侈華。主獨簡儉。侍者恥之。主笑曰。美衣者不必在吾前列也。光海時宮中宴集頻繁。必徵貴戚以佐之。主以爲母后幽囚。吾豈可晏然耽樂。以助其亂也。跡絶禁闥者十年矣。丁戊間。廢大妃之論起。翊聖病不能獻議。又不敢廷參。闔戶謝客。一日有客過夜訪。怵之以禍福之說。其言甚厲。翊聖唯唯不深辨。客去而主暖酒燻炙而進之曰。君亡亦動於客之說乎。死生有命。藉令不幸。當處之以正。況不必死者乎。窮荒絶塞。亦人之居。吾當隨君而行耳。仍念大妃公主起居。泣數行下。綾昌之繫獄。義昌之杜門也。人無敢問者。主涕泣奔問記存。有加於他兄弟。雖婦人乎。急人之難。見義而行。蓋其天植也。待翊聖甚敬。而性少剛。見翊聖有過。輒直擧而正諫。不相借。翊聖亦容而受之。終覺其大有益也。小弟與冕兒俱參試目。主不悅曰。無已大盛。俄而臺論罷榜。幷劾大人。主聞而歎曰。兒輩偶然登第。欲以此汚衊大人平生耶。可以觀世變也。得失何足介懷。遂不復言。足見其識理之一端云。凡生子女十三人。存者九人。男曰冕,昪,炅,最,晑。女曰洪命夏。餘幼。冕中生員。娶尹暄女。昪娶郡守李敏求女。生一男。炅與郡守黃一皓女約婚。告期而主奄忽逝矣。悲哉。主素無恙。猝得眩暈。幾絶而甦。精神猶未爽。暮而頭痛漸劇。天明熱大作。已不能語。而執炅手流涕漣如。及晡而屬纊。實十一月初五日也。人之生死。若是其遽也耶。訃聞。上震悼。輟朝二日。內賻葬需。俱命加等。四殿遣中使護喪。成服又遣中使弔孤。異數也。噫。人生翛短。固知不齊。而惟神觀未衰。又無沈綿之疾。而一朝溘盡。不能不悲號也。得年僅四十有一。將於十二月辛酉。窆于廣州酉坐之原。虛其右。爲翊聖他日同歸之地。而抑悲摭實。敢托
于立言之君子。庶不朽圖也。狀人之行而毫髮爽則非其人也。翊聖于此。約而不溢。惟高明照之。東陽申翊聖拜。<끝>
한국문집총간 |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