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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약간씩 다 이상하다. 왜냐면 내가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의 눈에도 세상 여자들은 다 약간씩 이상한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내게 있어 완벽하게 괜찮은 남자는 없었다. 다만 사귀면서 조금씩 그의 이상한 면들을 용서 하거나 못 본 척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 남자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그 이상한 면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내가 스스로 변명을 해주니까. ‘그래 이런 면도 있지만 대신 그는 뭐뭐 하잖아’ 라던가 ‘조금 그렇긴 하지만 뭐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하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이 남자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준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 비판받지 않을까 라고 걱정했던 것도 슬슬 사라진다. 왜냐면 내 눈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우니까. 일단 콩깍지가 쓰이고 나면 그의 작은 키도 다소 못생긴 얼굴도 시원찮은 직장도 전부 용서가 된다. 그의 장점만 보게 되고 단점들은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 내 눈에는 모래사장에 떨어진 한 톨의 쌀 알 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때는 친구나 주변인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남들 눈에 보인다고 해서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생각뿐이니까. 함께 얘기할 때는 그래 그런 면은 그가 좀 고쳐야 해 라고 느끼다가도 막상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사랑을 하게 된다. 다소 완벽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임에도 말이다.
사랑이 식었다라던가 혹은 변했다라고 느껴지는 건 이렇게 묻혔던 단점들이 다시 부활하는걸 지켜보면서이다. 마음속에서 발굴단 10명 정도가 밤새 풀가동을 해서는 붓으로 조심스럽게 털어낸 단점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건 예전에도 알았지만 모른 척 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들이기도 하다. 갑자기 그와 함께 간 라면집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가 돈 많은가봐’ 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쯤 되면 내가 너무 아까워 미칠 지경이 되고 이 남자는 내가 봐줬기 때문에 나랑 사귀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형편없는 작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난 이 사람보다 훨씬 더 괜찮은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텐데 하고 말이다.
한때 키가 굉장히 작은 남자를 사귀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대한민국 표준인 170cm가 채 되지 않았던 그 남자. 사실 처음 만날 때는 키가 너무 작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사귀면서 어느새 나는 힐을 신지 않았고 늘 추구하던 ‘키 커 보이고 늘씬해 보이는’ 컨셉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작고 아담해 보일까 고민했었다. 작고 아담이라니. 남자의 장신구가 되거나 남자에 의해 내 스타일이 바뀌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던 내가 그런걸 추구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해서건 내 남자가 커보이게 하려는 욕심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가 자신의 키가 작음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었다. 내 힐에 그의 자존심이 밟히지 않길. 내 키에 그의 콤플렉스가 두드러지지 않길 바랬었다. 그는 겉으로는 자신의 키를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170cm가 되지 않는 남자가 자기키에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고 살기란, 적어도 대한민국 땅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나는 누군가가 그의 키에 대해 지적하면 길길이 날뛰며 이런 소리를 했었다.
‘그 사람 자기키보다는 훨씬 커 보여. 작고 마르면 모르겠는데 그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생긴 것도 전혀 작아 보이지가 않잖아? 안 그래?’
심지어 나는 다리 짧음을 무척 죄악시하는 이 사회에서 그의 앉은키는 누구 못지않게 크다는 주장까지 했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쇼윈도에 비치던 그의 작은 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나는 그의 키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좋은 머릿결, 넓은 어깨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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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식는 건 한 순간이다. 실제로는 서서히 조금씩 식어 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느끼는 사람에게는 한순간이다. 잡아도 더 이상 떨림이 없는 손. 그와 함께 하는 외출에 힐을 신기 시작한 나. 어느 날인가 나는 식어가는 사랑이 너무 서글프게 느껴져서 잠든 그의 팔을 가만히 베고 누워 소리 없이 울기도 했었다. 전에는 보였지만 굳이 인정하지 않았던 이 사람의 단점. 그리고 새로 보이기 시작한 단점들 앞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중요한건 그 사람이 가진 단점이 아니라 그걸 보는 내 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식은 눈으로는 더 이상 그것들을 애정 어리게 봐 줄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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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스키니진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절대로 그렇게 꼴사나운 청바지 따위는 입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힙합 청바지가 유행했을 때처럼 나는 여전히 부츠 컷의 청바지만 고집했었다. 그러다 며칠 전 나는 드디어 스키니진을 구입하고야 말았다. 리바이스는 그나마 핏이 살잖아? 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이렇듯 못 믿을 것이 내 눈임을, 내 마음임을 나는 또 확인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다. 좋아하니까 그 사람이 내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워질 뿐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백수를 사귀면서도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알아주는 회사에 취직이 될 거라고, 인터뷰 시간이 단 십분만 더 주어져도 그의 매력과 능력을 마음껏 알릴텐데라고 안타까워했었다. 돈이 없는 걸 뻔히 아는데도 내 친구들 앞에서 술값을 계산하는 그가 너무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사랑이 식을 때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돈도 못 벌면서 그렇게 카드만 자꾸 긁어대면 신용불량자밖에 더 되겠냐고, 나가서 제발 어떤 일이라도 하라고. 그와 함께 이 회사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했던 내가 어느새 그에게 그렇게 방바닥을 긁으며 노느니 막노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외치고 있었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은 사실 사랑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은 기꺼이 버려진다. 그러나 그게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이다. 사랑 때문에 못한 것들, 심지어는 내 사랑에서 충족되지 못한 부분들까지 못마땅해지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걸 다 걸고 사랑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어디선가 그런 사랑이 나타날 것만 같다.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이런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이렇게나 얄팍하고 미덥지 못하고 스스로의 신념도 잘 뒤바뀌는 인간이 대체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