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꽃보다 더 예쁜 가짜 꽃을 간직한 꽃들
꽃들 중에는 진짜 꽃보다 더 예쁜 헛꽃을 가진 꽃들도 있고, 꽃받침이 더 예쁜 꽃들도 있다.
이들이 더 예쁜 이유는 진짜 꽃만 가지고는 곤충들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인데 헛꽃을 가진 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꽃도 그리 못 생기지는 않았다. 단지 좀 작을 뿐이다.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 옹기종기 모여있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도 모자라 헛꽃이나 꽃받침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헛꽃은 곤충들을 유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진짜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쩌면 변방의 삶이요, 주변부의 삶이다. 그러나 그 변방의 삶, 주변부의 삶이 없다면 참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헛꽃이나 꽃처럼 생긴 꽃받침이 있었기에 그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꽃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어쩌면 진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은 이 경계의 구분이 모호하고 애써 구별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누가 진짜냐 다투지 않고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산수국
산수국의 헛꽃은 개인적으로 많은 의미들을 깨닫게 해 준 꽃이요, 꽃의 세계로 인도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꽃이다.
참꽃도 다 진 마당에 바짝 말라서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헛꽃을 보면서 변방의 삶과 중심부의 삶을 떠올렸다. 늘 중심부만 추구하면서 살아왔는데 변방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그동안 중심부만 추구하며 살아왔던 내 자신이 부질없어 보였다. 내 삶 곳곳에 충만한 행복을 늘 다른 곳에서만 찾다가 그것마저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내 안에 이미 들어있는 행복조각들을 찾아보니 그것들이 너무 많아서 온 몸이 짜릿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니......
내가 서 있는 곳, 그 곳은 변방의 땅이었고 여전히 변방의 땅이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변방이었으며 유배지요 버림받은 땅이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 같은 이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없어져도 그만인 존재였던 것이다. 현재도 단지 관광지로서의 제주로만 각광을 받을 뿐 그 땅에 살붙이고 살아가는 민초들은 여전히 변방의 사람들, 땅의 사람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비록 그들이 중심부의 삶이 아닐지라도 헛꽃 같은 삶일지라도 그저 그렇게 자족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산딸나무
산딸나무는 꽃이 마치 딸기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작은 몽우리에 청자색 꽃을 촘촘히 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헛꽃이 아니었다면 지나가던 새들조차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로 작고 못 생겼다. 그저 멀리서 보면 참꽃이 그저 암술이나 수술로 보일 정도로 헛꽃에 비해 참꽃이 못 생겼으니 두고두고 헛꽃에게 감사해야 할 꽃이 있다면 바로 이 산딸나무의 꽃이 아닌가 싶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는 조금 엉뚱한 데가 있다.
꽃과 관련된 이런저런 노래들을 불러주었더니 꽃마다 노래가 있는 줄 알고, 꽃 이야기도 해주면 꽃마다 이야기가 있는 줄 알고 해달란다. 덕분에 이런저런 꽃 이야기를 꾸며대면서 꽃에 대한 책도 쓰게 되었으니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애야, 이게 산딸나무야, 예쁘지?"
"아빠, 그럼 산아들나무도 있어?"
"응?"
"산할아버지도 있잖아. 산아버지하고 산엄마가 만나서 산딸을 낳은거야?"
이렇게 아이들의 상상력은 재미있고 상큼하다.
그 재미에 사춘기에 접어든 딸들보다 유치원생 막내를 데리고 꽃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은 더 재미있다.
▲으아리
지금은 이파리만 보아도 으아리인지 사위질빵인지 구분을 하지만 맨 처음에는 뭐가 뭔지 구분이 안 가서 꽃만 보고는 이거다 저거다 용감하게 우겨대기도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식물도감에서 으아리꽃을 보고는 사위질빵을 만났는데 꽃 모양이 거의 흡사하다. 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야생화를 사랑하는 모임(야사모)' 갤러리에 떡하니 사위질빵을 올려놓고 제목을 '으아리'라고 붙여 놓았다.
고수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물러서질 않았다. 이게 으아리가 아니면 뭐가 으아리냐고 이파리를 보여주며 증명하겠다고 물러서질 않았다. 그런데 바닷가에 나갔다가 검은 화산석 바위에 기대에 화들짝 피어있는 으아리를 만나고 나니 뭔가 내가 삐딱선을 탔다는 것을 알았다.
백배사죄를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꽃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이 없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댓글에 '사위질빵과 으아리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하는 글이 달려있었다.
꽃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냥 무작정 떠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저 보고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자면 빈손으로 떠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들과 본격적으로 사귀고, 그들의 예쁜 모습도 담으려면 카메라, 돋보기, 메모지, 식물도감 등을 챙겨가는 것도 필요하고 자기의 취미에 따라서 화구를 챙겨가기도 하고, 흔하디 흔한 것들은 조금씩 옮겨 심어도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 꽃삽도 하나쯤 챙겨 가면 좋다.
이런 걸 다 챙겨 다니는 것은 아니고 나는 주로 카메라만 들고 다닌다.
맨 처음에는 산야에 핀 꽃들이 뜰에서도 피어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한 해 두 해 지나고 나니 역시 야생의 상태에 피어있는 꽃들만큼 예쁜 것들이 없다. 그렇게 카메라만 가지고 떠나지만 가끔씩 식물도감을 보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꽃들, 만난 꽃들을 표시해가며 여행을 하다보면 꽃에 대한 무지를 조금은 벗어버릴 수 있다. 더군다나 도감으로만 보다가 처음으로 들에 피어있는 꽃과 조우를 하면서 그 이름을 불러줄 때의 즐거움이란 참 크다.
▲사위질빵
▲사위질빵 씨앗
며느리에 관한 꽃이라고 하면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면 며느리말고 사위라는 단어가 들어간 꽃도 있을까?' 궁금했는데 정말 '사위'라는 단어가 들어간 꽃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바로 사위질빵이라는 꽃인데 제주의 돌담을 타고 올라가 피어있던 꽃이 그것이었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게 으아리라 생각했는데 '사위질빵'인 것이 밝혀졌으니 그 이름의 내력이 궁금했다.
이름만 보고 상상해낸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다. 처음 그 꽃의 이름을 알고 나서 쓴 글은 이런 글이었다.
'마치 사위가 인사드리러 처갓집에 들른 듯, 그러나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 대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처갓집의 동태를 살피는 듯 합니다. 혹시 사위노릇(사위질)이 빵점이라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사위노릇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읽어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다. 사위질빵에 관한 사연인즉 이렇다.
사위질빵의 덩굴은 약해서 뚝뚝 잘 끊어지는 특성이 있는데 질빵은 줄의 다른 말로 지게 같은 종류의 질빵(줄)을 만들 때 사용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게의 질빵은 볕짚을 꽈서 만들기도 하고, 칡넝쿨이나 덩굴식물들을 이용해서 만들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덩굴식물들이 다양하게 사용된다. 물론 육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질빵의 재료는 볕짚이다.
그런데 사위질빵은 줄기에 마디가 있어서 뚝뚝 잘 끊어지니 그것으로 질빵을 만들었다간 짐이 조금만 무거워도 끊어져 버리니 짐을 많이 실을 수가 없다. 무더운 여름 모처럼 처가집에 쉬러 온 사위가 한창 바쁜 들녘에 나가 일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처럼 쉬러 왔는데 일하는 사위가 안스럽고, 힘에 부칠까 노심초사하던 장모님이 얼른 사위질빵의 줄기를 가지고 지게의 질빵을 만들어 주었다.
조금만 무거운 것을 질라치면 질빵이 끊어져 버리니 사위의 지게는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덜 무거운 것을 들게 하기 위한 장모님의 사랑이 베어있는 이름을 가졌다.
그런데 왜 똑같은 자식인 '며느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학대를 했는지 모르겠다. '며느리'라는 이름을 가진 꽃들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슬픈 이야기뿐이니 말이다.
사위질빵이 가장 예쁠 때는 언제일까?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꽃이 다 지고 가을을 넘어 겨울로 접어드는 때에 보송보송 솜털을 달고 부풀어오르는 씨앗, 그 씨앗 중에서도 한낮의 맑은 햇살을 눈부시게 품고 있는 그 때를 가장 예쁜 때라고 추천하고 싶다.
물론 비온 날 촉촉하게 젖어있는 모습도 순위를 다투긴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라는 의미까지 보태지면서 씨앗이 주는 아름다움을 더 크게 치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서 좋아하는 꽃도 다르다고 한다.
10대는 강아지풀이나 제비꽃 같이 가지고 놀기 좋은 꽃들을 좋아하고, 20대는 장미같이 화려한 꽃들을 좋아하고, 원숙한 50대는 국화같이 그윽한 향기를 가진 꽃을 좋아한다고들 하는한다. 60대 이상의 분들은 난(蘭)같은 것들을 좋아하는데 꽃보다도 이파리의 매력에 빠져든다고들 한다. 그런데 3-40대는 어떤 꽃들을 좋아할까?
내가 좋아하는 꽃들은 이런 꽃들이다.
이름이 못 생긴 꽃, 생명력이 강한 꽃, 척박한 땅에 핀 꽃, 겨울에 피는 꽃......
출처/ 김민수의 화행-꽃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