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arrega's "Recuerdos de la Alhambra" by Johannes Moller
15세기 이전 700여 년간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포르투갈 네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대 어떤 왕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한 여인이 이룹니다.
- Isabel I세
< 한 여인의 눈동자 속에는 눈부시게 푸른 지중해가 담겨 있었고,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와 대서양을 품고도 남았다.>
이사벨 1세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인물입니다.
공주의 아버지인, 국왕 후안 2세가 죽은 뒤
왕위를 이어 받은 이복 오빠 엔리케 왕자가
태후와 두 동생을 아레발로라는 시골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천민과 다름없는 생활로 어머니는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고,
이사벨은 어린 남동생과 실성한 어머니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공주의 동생 알폰소를 왕으로 추대하여,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사벨 공주는 현명하게 사고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녀는 자진해서 왕궁의 볼모로 들어간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한 이사벨의 탁월한 선택 덕분에
엔리케는 근심에서 벗어났고, 왕국의 내란은 종식되었습니다.
- '까스띠아' 여왕 Isabel I세
2번째로 그녀의 운명을 바꾼 것은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 2세 와의 결혼입니다.
엔리케 국왕은 강력한 왕국인 포르투갈과 프랑스 중 한 나라로
이사벨 공주를 시집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이사벨은 각국의 왕과 왕자들의 정보를 미리 파악했습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신랑 후보는 자격미달인 자들이고,
아라곤의 페르난도는 인물과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였습니다.
국왕은 이사벨에게 포르투갈로 시집가라고 명하였으나
그녀는 왕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페르난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녀가 먼저 페르난도에게 편지를 보내 청혼을 해버린 것입니다.
이사벨 공주를 잘 알고 있던 페르난도 왕자는
군대를 끌고 와서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
이 만남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과의 전쟁 등 여러 고난을 헤치고
카스티야 여왕으로 등극하였고,
페르난도 역시 아라곤의 국왕이 되면서 두 나라는 합병합니다.
그들은 대관식에서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국왕의 신성한 의무이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 '까스띠아' 여왕 Isabel I세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여왕께서 일하시던 방에는
종종 동이 틀 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내정면에서는 왕 직속군의 정비, 세제의 개혁으로
귀족들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관료화를 꾀하여,
근대적 중앙집권국가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또한 궁정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문헌을 편찬하는 등
문화진흥에 힘썼으며,
정치적 재능도 뛰어나 에스파냐 발전의 기초를 닦고,
궁정(宮廷)의 도덕과 패기(覇氣)를 소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통치로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편안해졌습니다.
국력이 강해지자, 여왕은 그라나다 정벌이라는,
선조들이 700여 년간 이루지 못한 숙원을 풀기로 했습니다.
1491년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라나다 정벌을 위해
두 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습니다.
여왕은 전쟁터의 병원에서 부상병을 손수 치료하였고,
페르난도는 전방에서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군대 역시 위대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완강한 이슬람군의 저항에 페르난도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녀는 지원군과 함께 달려가, 정의로운 전쟁임을 설파하였고,
사기충천(士氣衝天)한 병사들은 온몸을 던져 적과 싸웠습니다.
- The Surrender of the Moors to Queen Isabella
1492년 1월 2일, 이사벨 여왕은 마침내 전쟁에 승리하여
그라나다왕 '보압딜'의 항복을 받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여 스페인 제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을 잃는 것보다 알함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다.>며
애통해할 정도로 '보압딜'이 아꼈던 '알함브라 궁전'을 온전히 접수하여,
'스페인에 피어난 이슬람 문명의 꽃'으로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여왕은 '콜럼버스'를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남편인 '페르난도'까지도 '콜럼버스'를 미치광이로 여겼으나,
그녀는 탁월한 안목으로 '콜럼버스'를 받아들였습니다.
- The Santa Maria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The Santa Maria)호로 출항하여
오랜 항해 끝에 1492년10월12일 신대륙에 상륙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최강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서양을 가로 질러 아메리카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찾았고,
'콜롬버스'의 발견으로 유럽인은 새로운 식민지와 이주의 땅을 얻어,
오늘날 미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게 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 Columbus lands America
그는 이 업적으로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가 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한 '이사벨 여왕'의 업적이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벨 여왕' 이후에 무능한 남성 왕들이 등극하면서,
찬란하던 스페인의 영광은 점차 그 빛을 잃어 갔습니다.
결국 1588년 스페인 '펠리프 2세'의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가
또 다른 위대한 여왕, 영국 '엘리자베스'의 함대에 패배함으로서
해상 주도권을 빼앗기고 세계 최강의 자리를 영국에게 넘기고 맙니다.
'이사벨 여왕'의 리더십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이어졌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대 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하고 세계 최강국으로 발전시킨 지도자는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대선 주자 박근혜의 멘토는 엘리자베스 여왕입니다.
박근혜는 두 여왕의 리더십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승화시켜,
故 이춘상 보좌관이 박근혜와 함께 이루고자했던 꿈,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다짐의
대선 슬로건인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기필코 건설하여,
통일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로 이끌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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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 그리고 박근혜
nk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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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03 10:3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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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느 누가 여성 지도자를 약하다 하는가?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느 남정네도 감히 이루지 못할 획기적인 위업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