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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석화시인의 시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하
열린시학 기획특집 | 이승하 시인_대담
천진한 문학청년과 만취한 백수광부, 그 사이 어디쯤 서성이는 시인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창과 교수)
이은정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강사)
때 ■ 2010년 12월 24일 정오
곳 ■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안 카페 ‘꼭두’
“격렬한 몸짓으로 무용을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독하게 내성적이거나 수줍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승하 시인도 그럴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희디흰 뼈마디를 드러낼 정도로 살이 없고 직선적이며 가파르지만, 이것은 오히려 시인의 내향적인 성격과 숫기 없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언어가 격할수록 시인의 억압된 욕망이 깊게 드러나고, 언어가 강퍅하게 내달릴수록 바싹 말라버린 시인의 입술이 떠오른다.”
언젠가 썼던 이승하 시인론의 한 부분이다.
작품을 먼저 읽고 추후에 그 시를 쓴 시인을 알게 될 때, 시와 시인을 동일한 궤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이승하 시인은 그의 시와 다른 듯, 그러나 흡사하다. 대단히 격한, 그 무엇을 훌쩍 넘어서는, 세고 깊고 진한 그의 시들을 읽은 후 시인을 만났을 때,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과의 불일치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조금 더 겪어보면 그와 그의 시는 천천히 흘러 섞여 하나가 된다. 희고 꼿꼿한, 쉬이 쓰러지지 않는, 결 고운 명주실로 짠 마포(麻布) 같은, 그렇게 대단히 부드럽고도 강인한 시인이다. 천진한 문학청년과 만취한 백수광부, 이 사이 어디쯤엔가 이승하 시인은 서성이며 서 있다.
숫기 없는 사람들은 어떤 와중에도 비슷한 동족을 서로 알아보는 것일까. 이승하 시인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그렇다.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시를 공부하는 인연으로 이곳저곳의 학회와 주변자리에서 만나 왔지만 늘 서로 시원스럽게 알은체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번의 인터뷰는 눈인사를 나눈 이십여 년 동안의 시간들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이은정:예전에 우연히 읽은 『작가들의 연애편지』라는 책에서 선생님의 연애편지를 읽고 밤잠을 다 못 이루고 뒤척인 기억이 있습니다. 문학 근처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겪었거나 으레 꿈꿔 보는 ‘드라마틱’한 사랑과 연애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자주 맞닥뜨리던 고통과 다른 듯하면서도 실은 매우 닮은 이야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승하:아이고, 첫 질문이 저의 연애담이라니 쑥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드라마틱한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구요, 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대학 동기가 ‘부잣집 마나님’이 될 혼처를 하루아침에 팽개치고 저와 일방적으로 사귀겠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끌려가다가 그만 결혼식장에 멋모르고 서게 된 일을 글로 쓴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심한 불면증 환자였고, 가족 중 한 사람을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 놓은 상태였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충격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자면서 밤을 홀딱 새우곤 했는데, 보다 못한 그 사람이 가정이란 것을 제공하면 제가 죽지 않을 것 같아서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고 말았죠. 결혼 후 그 사람이 자기가 보던 책을 몇 박스 집으로 부쳐왔는데 여성해방에 관한 것들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웃음)
이은정:들을수록 점점 더 부럽습니다.(웃음) 새 새집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중 ‘시인의 말’ 부분에서도 읽었습니다만, 여전히 운전을 배우지 않고 계시지요? 저도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다른 환경운동 구호들은 지켜보려고 노력할 수 있어도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은 지키기 어렵습니다. 운전을 결코 하지 않는 모습은 선생님의 문학적 강직함으로 일관된 모습과 퍽 닮았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시집 가운데 『생명에서 물건으로』를 참 흥미롭게 읽기도 했는데,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시에 환경문제나 생태학적 관심이 자주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승하:네, 저는 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운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녹색평론』을 통권 7호부터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지요. 이 책의 입장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환경론자는 아니고요, 저라도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겁이 많아서 거리에서 ‘목격자를 찾습니다’란 플래카드를 볼 때마다 운전을 하면 사고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운전학원에 안 간 것입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인데, 제 필생의 화두인 ‘폭력’과 ‘광기’ 중 경제적 폭력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구현해본 시가 비교적 많이 실려 있는 시집이 『생명에서 물건으로』입니다. 소비사회이다 보니 기업체마다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최대한 많이 팔려고 하지요. 물건을 사서 소비하는 가운데 지구상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할 것이 아니라 뭇 생명체와 더불어 공존할 방도를 찾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시라는 것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도 하니까요.
이은정:마음과 마음을 잇는 것이 곧 시라는 말씀이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최근 시집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실크로드의 우루무치와 둔황 등 어디도 가보지 못한 저로서는 상상과 지식을 동원해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을 읽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실은 추상화된 느낌도 들었습니다. 여행을 즐겨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시집을 비롯해 여행이나 어떤 장소에 대한 사유와 기억이 문학작품으로 완성되는 동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하
이은정
이승하:저는 실크로드 중 천산북로를 역으로 돌고 왔는데 그 여행은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가거나 낮에도 몇 시간씩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길은 정말 황량하고 땅은 척박하더군요. 투루판은 예외적으로 포도가 많이 나는 비옥한 곳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혜초는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 35개국을 돌아보았습니다. 인도만 해도 엄청나게 큰 나라인데 그 나라, 즉 5천축과 중앙아시아 35개국의 풍광과 풍속, 음식과 복식, 경제상황과 정치상황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왕오천축국전』은 제 시심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집의 시편들을 10년에 걸쳐 썼던 것입니다. 혜초는 그 엄청난 길을 오로지 도보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혜초가 소달구지도 타고 말도 탔을 거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본 사람은 그런 말을 못합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길을 걸어가면서 혜초가 도대체 뭘 생각했을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스님이었으니까 법을 구하고 도(道)를 닦는 사람이었는데 길을 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았겠지요. 그런데 그는 『왕오천축국전』에 5편의 시를 남겨놓았습니다. 시인이었던 것이죠. 그게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은정:『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은 혜초의 고행 혹은 구도를 의심하다가, 점점 이입되다가, 마침내 일체화되는 느낌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꿈꾼 점, 본질적인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특히 선생님과 동일화되었다고 보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하:네, 제가 혜초에 끌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겁니다. 불가에서 ‘고해’라는 말을, 기독교에서 ‘원죄’라는 말을 쓰는데, 산다는 것은 고통과 죄업의 연속이지요. 어차피 생이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자포자기할 수도 없습니다. 꿈꾸는 자는 괴로워하게 마련이지만, 꿈꾸는 그 시간에는 행복감을 느끼지요. 성냥팔이 소녀처럼 말입니다. 폭력이 없는 세상, 그 폭력이 야기한 광기가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저는 죽은 날까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은정:혜초가 발로 걸은 그곳들의 의외의, 기벽의, 반윤리적인 삶의 방식이 오늘 우리의 현실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신 건 아닌지요?
이승하:그렇지요. 8세기에 쓴 『왕오천축국전』에 기술된 40개국의 면면을 보면 그때도 온갖 범죄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있었고 신분차별이 있었고 각종 범죄가 있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의 매력은 인간이 사는 곳은 그 어디나, 그 언제나, 아픔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도 인간세상은 아귀다툼이지요. 그래서 그 여행기가 저의 시심을 충동질했던 것입니다.
이은정:여행을 떠났을 때 혜초의 나이는 어떻게 되지요? 어린 나이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사유가 가능했을까요?
이승하:불가사의한 것은 혜초의 나이입니다. 704년에 태어난 혜초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이 719년이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였죠. 중국 광주를 떠나 인도 여행길에 오른 것은 723년이었고, 여행을 마치고 안서도호부 소재 쿠자로 돌아온 것이 727년 11월입니다. 그러니까 열아홉 살 때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나 5년 가까운 세월 동안 40개국을 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나이에 견주어보면 고등학교 졸업할 시점에 여행을 떠나서 중간에 한두 학기 휴학을 하고 대학 졸업할 시점에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죠. 저도 대학 다녀봐서 알지만 철없고 어리석은 열아홉에서 스물네 살 때까지 여행한 결과를 갖고 쓴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입니다. 그 여행기를 보면 혜초는 그 나이에 이미 세계인이었고 동서와 고금의 경계를 넘어선 철학자였습니다. 국제 정세를 살피거나 문화 습속을 살필 때도 보는 눈이 정확하고 표현도 능숙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라에서 열여섯 살 때까지 공부한 것이 대단했는지, 중국에 머문 4년여 세월 동안 엄청난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이은정:혜초의 실크로드의 여행이 마치 로드무비 같은 느낌입니다, 인생을 그 여행길에서 모두 겪은 자취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승하:네, 제가 어떤 글에서도 썼었는데, 혜초가 인도나 중앙아시아를 도는 동안 말이 제대로 통했을까요? 한자로 필담을 하려 해도 대부분 지방에서는 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길도 그 당시는 아주 험했을 겁니다. 낯선 마을에서의 잠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을 테고 매끼 식사도 입에 맞았을 리 없었겠죠. 지역에 따라 물맛도 달랐을 것이고, 전염병 도는 마을도 틀림없이 있었을 겁니다. 혜초가 남긴 시에 잘 나와 있는데, 그는 엄동설한 산악지방의 눈보라와 일망무제 사막지대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5만리를 걸어갔습니다. 우기에는 열흘 이상 비를 맞으며, 건기에는 우물도 말라붙은 고원을 그는 걷고 또 걸었을 겁니다. 모기와 빈대 같은 벌레에 줄곧 물리며, 물 한 모금을 갈망하면서 말이죠. 저는 혜초의 여행길을 생각하면서 저 역시 참선하는 마음으로, 수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줄기차게 중국 서북쪽의 그 황량했던 길을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이은정:다른 시집보다 이 시집에서는 언어의 엄격성 혹은 정치한 시적 긴장은 덜 염두에 두신 듯 보입니다. 시와 더불어 삽입된 사진도 그렇고요. 어떤 특별한 의도가 있으신 건지요?
이승하:제 시적 화두가 ‘혜초의 길’이었습니다. 혜초가 걸어간 5만리 길의 의미를 더듬어보려 했던 것이죠. 유다른 실험이나 상징의 깊이, 애매성과 다의성에 대한 추구는 멈춘 채 혜초의 길과 이 세상 모든 길의 의미를 현대인인 제가 파헤쳐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장 사용한 사진은 앞서 간행한 시에 나오는 사진처럼 시의 일부가 아니고 제 여행의 흔적일 따름입니다. 제가 거기에 갔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는 사진으로 제시하는 것이 실감이 날 거라는 생각에서 몇 장 사진을 시집에 올린 것입니다. 앞에 냈던 시집에서의 사진과는 그 의미가 다르지요. 그간 제가 세계와의 첨예한 대결에 지칠 대로 지쳐 이번 시집에서는 좀 쉬어가려고 쉽게 썼습니다만 안이하게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은정:선생님의 시 가운데 다수의 작품이 개인적인 체험이나 경험, 그리고 가족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고 있습니다. 힘겨운 그 안의 무엇이 혹은 어떤 힘이 선생님을 시인의 길로 이끌었던 것일까요? 폭행, 구타, 욕설, 가출, 자살기도 등등, 어떤 이는 이 고통들로 침몰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를 딛고 일어서 견뎌내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걷기도 합니다. 이 차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승하:제 시집 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와 『폭력과 광기의 나날』이 특히 그렇습니다. 저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웃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웃을 일이 없었으니까요. 10년 넘게 신경성위궤양과 불면증으로 고생했지요. 저의 10대 후반과 20대는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어디로 갈 것이냐 결단을 내리면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학이 저를 타락의 길이나 죽음의 길로 가지 않게 했습니다. 나도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도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한번 써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책에 빠져들게 했고, 글을 써보게 했고, 결국 문예창작학과라는 곳으로 가게 했습니다.
이은정:이어서 여쭙고 싶습니다. 좋은 작가와 시인들을 만나면 으레 어떤 청소년기를 보냈는지 듣고 싶어집니다. 유서를 잘 쓴 것이 연이 되어 문창과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얘기나 이숭원 선생님께서 ‘모계의 문학성과 부계의 신경증’이라고 선생님의 시를 약술하신 점 또한 인상적입니다. 작가의 삶이 평탄치 못한 것이 그에게 오히려 어떤 시적 근원이나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의견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함께 여쭙고 싶습니다. 시를 쓰는데 청년기의 체험은 얼마만큼 중요한 것일까 하는 우문도 함께요.
이승하:처음 서울로 가출하면서 긴 편지 한 통을 써놓고 나왔습니다. 그 겉봉에 ‘유서’라고 써놓아 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나날을 보냈지요.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가 제가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입시를 준비할 때 그 편지의 문장력을 칭찬하면서 중대 문창과로 갈 것을 권유하시는 거였어요. 저는 그때 서라벌예대 문창과는 있지만 중대 문창과는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무튼 지원을 했고, 마침 본고사에 국어와 영어만 있어서 합격했습니다. 수학이 있었다면 무조건 낙방인데.(웃음) 철없던 제 십대 때의 반항과 방황은 제 시의 원천이며 원동력입니다. 저는 잠을 끝내 못 이루다 심야에 산책하는 자의 비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새벽 기차의 우울과 노을 지는 간이역의 고적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그 시절에 읽었던 책들, 예컨대 알랭 푸르니에의 『대장 몬느』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과 『백치』,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 카뮈의 단편들, 김동리와 황순원의 소설들……. 몇 차례의 가출보다 더욱 소중한 체험은 바로 독서체험이었습니다, 그런 책들이 저를 키웠고, 저는 5년 동안 학생이 아니었지만 타락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은정: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봐오면서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도 있고 어떤 열패감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주목해서 읽어온 부분은 그런 개인사를 딛고 일어서서 좋은 시인이 되셨다는 과정과 결말뿐 아니라, 그런 문제들과 끊임없이 고투를 벌이면서도 그 문제들에 함몰되지 않고 그 정황들을 어떤 구조적인 혹은 사회적인 문제로 끌어내 겹쳐서 읽어내시는 시선과 세계관입니다. 그 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이승하: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제가 무척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학년 5월에 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역사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의 고통은 지극히 작고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이 있었습니까. 게다가 이후 수많은 군대 의문사, 분신자살, 박종철과 이한열…….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가 있었고, 육이오가 있었고, 전형적인 경찰국가였던 제1공화국 시대가 있었습니다. 사일구와 오일륙, 그리고 20년 동안의 박정희 시대, 막강한 권위주의가 통한 80년대……. 5천 명의 한국군이 죽은 베트남 파병도 있었지요. 저는 대학시절에 한국 근․현대사나 제3세계 이론서들을 보면서 개인의 고통은 역사의 고통, 사회의 고통, 이웃의 고통과 맞물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연출자로 한 생을 사신 아버지를 최소한도로 이해하게는 되었습니다. 제 아버진 일제 강점기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을 받았고, 육이오 때 경찰에 투신함으로써 일선에 안 끌려가 살아남았습니다. 이승만 시절에는 허울 좋은 ‘민중의 지팡이’로서 돈 대신 쌀자루를 월급으로 받으며 곤궁하게 살았습니다. 결국 박정희 시절에 실업자가 되었지요. 공정하지 못한 사회는 한 사람의 인간성을 굴절시키고 마모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엉뚱하게도 식솔들을 향해 터뜨리며 살아가는 제 아버지를 보면서 내면세계를 깊게 파고드는 서정시의 아름다움에 경도될 수 없었고, 사회와 역사, 아니 그런 거창한 것보다는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은정:여느 작가나 시인이나 그러하지만, 현실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방향 같은 것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스며나오는 일종의 ‘태도’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에는 이 같은 문제의식이 저수지처럼 그득히 고여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태도는 어떻게 해서 지니게 되는 것일까요.
이승하:제가 태어난 바로 다음날 사일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무렵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기에 서울에서 근무하셨더라면 발포 경관의 일원이 될 수 있었겠죠. 이승만 시대 때는 경찰이 정말 가난했었다고 해요. 역사의 희생물이 된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제 때 경성여자사범학교를 다닌 어머니는 광복 이후 외할아버지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와 낙선의 여파로 학제가 바뀐 서울사대부중을 다니다 끝내 집안 사정으로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2대 국회의원 당선 한 달 만에 육이오가 일어나 납북되신 외할아버지의 생사 여부도 알지 못한 채 수십 년 세월을 보내게 되지요. 저는 고려 말에 역모를 꾀했다가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는 와중에 살아남은 이자겸의 후예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어떤 개인사라도 시대사와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는 시를 쓸 때 인간의 한계상황이나 극한상황을 많이 다루게 됩니다. 서해교전,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시에 죽은 우리 장병들,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불가항력 앞에 선 개인의 고통, 억울한 죽음, 상처와 흉터, 뭐 이런 것들이 제 시의 바탕이 됩니다.
이은정 : 말씀을 직접 들으니 선생님의 시가 품은 지평이 더 깊고 넓게 느껴집니다.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삶의 모습 때문에 비난 아닌 비난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습작을 성실하게 하신 것뿐 아니라 술을 덜 마셔서 그나마 일찍 문단 데뷔를 하실 수 있었다고 농담 섞인 진담을 말씀하신 적도 있지요. 일상적 삶의 태도와 문학을 하는 태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승하 : 시인은 무조건 담배도 잘 피우고 술도 호주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에 문단에 나와서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담배는 아버지가 좋아하셔서 아버지한테서 풍겨오는 냄새였기에 제가 싫어하게 되었고, 술은 많은 노력 끝에 소주 반병 정도는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도 잘 못하고 별다른 취미가 없다 보니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천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성실한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저를 어른 범생으로 간주합니다. 대학시절에는 도서관을 제 집인 양 들락거렸는데, 그 시절 학업과 학문을 팽개치고 학생운동에 뛰어든 학우들에게는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시대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 동기와 선후배들도 지금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겠지요. 그들의 몫까지 제가 읽고 써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이은정 : 시를 쓰기 시작한 지 26년이 되셨습니다. 시인이 되셨던 당시 초심으로 “좋은 시인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순수하고 비장한 결심과 의욕을 기억하시는지요. 지금은 어떤 시인이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이승하 : 글쎄요, 저는 중국의 시인 굴원과 두보와 한산자와 이하를 좋아합니다. 몇 해 전에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이란 책을 내면서 이 네 시인에 대한 저의 애정을 숨기지 않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고 그것의 의미를 탐색하는 자가 아닐까요? 물론 잔잔한 서정적 울림도 좋지만 저는 이 세상에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고통을 겪는 이들의 그 고통의 뜻을 시로 표현했던 중국의 네 시인을 본받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좋은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포장하는 이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과 자기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찾아내는 자일 것입니다. 등단작 「화가 뭉크와 함께」의 마지막 문장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를 쓸 때의 그 절박한 심정이 지금까지도 빛바래지 않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은정 : 어느 글에선가 최근 시인들의 시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최근 시에 대한 생각, 그리고 최근에 즐겁게 읽은 시집이 있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이승하 : 2005년 연초에 문학나무사를 통해 시인들의 등단작을 집중 분석한 『2005 젊은 시』를 발간한 이후 올해 일곱 번째의 책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 책을 만들면서 황병승, 박장호, 장석원, 서효인, 이제니 등의 시인을 주목해서 살펴보기도 했는데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알아듣는 데 힘이 듭니다. 시가 길기도 길고 문법에도 잘 안 맞고 환상성이란 유행을 타다 보니 몇몇 시인들이 펼쳐 보이는 상상력의 공간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거나 이국적인 것이 많지요. 읽는 제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 중얼거리는 시가 많아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횡설수설도 미학이 될 수 있지만 어떤 경우 독자인 제가 배반당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 와중에 즐겁게 읽은 시집은 권혁웅의 『소문들』, 김행숙의 『타인의 의미』 등이었습니다. 아, 지금 사진을 찍고 있는 편집장 하린 시인의 첫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도 흥겨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연배가 있으신 분 가운데는 서정춘 시인의 절제(『물방울은 즐겁다』)와 한우진 시인의 진지함(『까마귀의 껍질』)이 감명 깊었습니다. 근년에 시집을 낸 시인 젊은 시인 중에서는 김성규, 김지녀, 손택수, 신용목, 심보선, 여태천, 이영광, 최금진 등의 시집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은정 : 소설로도 등단을 하셨고 소설집을 내시기도 했습니다. 소설 창작은 병행해갈 계획이 혹시 있으신지요. 소설 외에도 선생님의 관심은 광대무변하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2007년에 내신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라는 시집의 어조 또한 선생님의 다른 시집들과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께서 쓰시는 연구논문의 주제 역시 역사와 세계의 끝 간 데 없는 곳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 동력과 에너지는 어떤 관심과 의욕에서 추동되고 있는 걸까요?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를 읽고는 선생님 안에 실은 흥이 참 많으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낯설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흥이 아니라 울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승하 : 소설은 제 몫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습작기 때 읽은 소설은 전후문학과 60〜70년대의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소설을 모범으로 삼아 정통문학의 창작기법으로 소설을 썼었는데 이 시대의 코드에 맞추고자 변신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아 소설은 접어둔 상태입니다. 체력도 부족하고요.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는 전통적 소재들을 현대적 문법으로 복원해보았다고 할까, 우리 전통문화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광대들, 그리고 고전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만난 옛 노래들을 제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해보는 과정에서 쓴 시들입니다. 저는 우리네 정서가 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놀이와 풀이를 통한 유희정신에 있다고 보고 흥겨운 춤판, 즐거운 노래판을 펼쳐보려고 했습니다. 때로는 비장미를 추구해보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이은정 : 이 시집에 담긴 이 시대 ‘광대’의 의미가 그 스펙트럼이 퍽 넓은 듯합니다. 어떤 함의를 담고 있는지요?
이승하 : 광대는 ‘어릿광대’처럼 좀 어리석은 사람, 혹은 남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연희를 주재하는 주체적인 인물입니다. 우리는 광대놀음을 보면서 그 광대의 말 한마디에 몸짓 하나에 일희일비했습니다. 그렇게 놀지 못한 우리가 못난이였던 것이죠. 저는 광대야말로 반상의 구분이 뚜렷했던 조선조 때 천한 신분이면서 양반을 마음껏 놀리며 살았던 풍자의 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국을 유랑한 자유인이었고 멋진 재주를 보여주었던 예능인이었습니다. 그들의 거리낌 없는 삶이 저는 한없이 부럽습니다.
이은정 : 특히 이 시집을 묶을 때 미당 서정주 시인을 강하게 떠올린 이유가 있으신지요?
이승하 : 미당 선생님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고 질마재의 질박한 풍속도를 복원하셨는데 저는 춤꾼들과 구도자들과 옛 노래를 환생시켜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작업은 저의 첫 시집 『사랑의 탐구』 제2부에서 시작된 것이었죠, 『박수를 찾아서』와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거쳐 그 시집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진골 성골 하면서 신분 차별의 너무 심했던 신라에 대한 미당의 지나친 예찬에 저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친일시를 썼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쓰고 전두환 대통령 찬양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저는 절망했었지요. 스승은 신라를 막연하게 동경했고 향가 등 옛 노래에 나오는 인물을 주로 그렸지만 저는 공옥진이나 신기남, 김석출, 박초향, 하보경 등 우리 시대의 예능인에 초점을 맞추어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 시집에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받아 싣는 대신 제가 미당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를 해설의 자리에 썼던 것입니다. 그 글을 보시면 제가 긴 세월 스승에 대해 얼마나 반항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후에 용서를 구했는데 오랜 세월의 애증이 거기에 적혀 있습니다.
이은정 : 문학평론과 연구도 활발하게 하고 계십니다. 창작과 평론 사이에서 괴리감이 없지 않으실 텐데요, 혹시 선생님의 시에 대한 평론이나 연구 가운데 마음에 드셨거나 흡족했던 글은 어떤 것입니까. 선생님의 시를 시인이 바라던 대로 읽어주었다든지 정확하게 분석했다든지, 아니면 그저 맘에 들거나 기분이 좋았다든지 하는 글.
이승하 : 평론도 겸하다 보니 시집 해설이나 서평, 신작소시집 해설 등의 글을 자주 쓰게 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해서 쓴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내기도 했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서 낸 평론집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세속과 초월 사이에서』,『한국문학의 역사의식』은 청탁받고 쓴 글을 모아서 낸 것이 아니라 대개는 제가 목표를 세우고 쓴 글을 묶어서 펴낸 것이라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 시에 대한 평론가들의 진단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거저 고맙게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비판은 비판대로 수용하고 칭찬은 칭찬대로 고맙게 여기지요. 제 시는 독자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니 읽기도 힘들고 부담스러울 텐데 제 시에 대해 언급하고 논하는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은정 : 그간 열 권의 시집을 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의 탐구』『폭력과 광기의 나날』『생명에서 물건으로』를 관심 있게 읽었습니다. 혹시 특히 애착을 갖는 시집이 있으신지요.
이승하 : 열 손가락이 다 꼬집으면 아프니까 특별히 애착을 갖는 시집은 없고……. 40장이 넘는 사진을 쓴 『폭력과 광기의 나날』은 사진 배치에 애를 먹었습니다. 『박수를 찾아서』와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는 자료 조사가 쉽지 않아서 나름대로 산통을 겪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는 아버지로부터 일가친척들 다 모인 자리에 와서 첫 글자부터 끝 글자까지 한 글자 빠뜨림 없이 읽으라는 명을 받아서 경상도 말로 시껍묵은 적이 있습니다. 그 뒤, 아버지에게 올리는 편지의 글을 머리말로 쓴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보내드렸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다」란 시까지 들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시집이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는 사죄행위였음을 아버지가 이해하신 것 같았습니다.
이은정 : 시를 쓰는 일과 시 쓰기를 가르치는 일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거나 상생(相生)한다고 느끼시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이승하 : 시를 쓰는 일은 결과야 어떻든 쓰는 순간에는 희열을 느끼는데 시를 가르치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일을 주로 하니까요. 중대 문창과의 시 합평 시간은 예로부터 ‘전기의자에 앉는다’는 말이 내려올 만큼 살벌했습니다. 제가 미당 선생과 구상 선생한테 시를 배울 때도 그랬었고, 제가 강사 신분으로 후배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이란 책을 내면서부터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학생들의 자발적 시 쓰기를 유도하고자 시를 가르치는 일 또한 즐겁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동시와 시조도 읽고, 시집도 같이 읽고, 영화와 다큐멘터리 프로도 같이 보고, 공통 소재로 쓴 시를 저도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는 등 신세대 교육법을 익히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문창과는 시인을 배출하는 학과가 아니라 시를 좋아하는 문학도를 만드는 학과로 변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시를 많이 읽으면 광고회사 카피라이터가 되어도, 방송작가가 되어도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어떤 장르의 글을 쓰든, 기사문 하나를 쓰더라도 짧은 말 속의 깊은 울림은 시를 써본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해주지요. 결국 시 쓰기와 기 가르치기의 상생을 강단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터득한 셈입니다.
이은정 : 그 말씀은 저도 잘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시인이 아닌 저로서는 시를 가르치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수용과 영향이랄까요, 시인이 되시면서 그 길에서 만나온 선생님의 은사분들과 스승에 대한 얘기들을 감동적으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에 남는 시 쓰는 후배나 제자들에 대한 얘기들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승하 : <다모>와 <주몽>을 쓴 방송작가 정형수는 대학시절에 시 동인을 만들어 시를 열심히 썼었고, 소설가 박민규도 실험적인 시를 많이 썼습니다. 두 사람 모두 대학시절에 소설은 거의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시집을 읽고 시를 쓰면서 내공을 키워 훗날 방송작가와 소설가의 길을 걸어간 것이죠. <국희> <황금시대> <서울 1945> <패션 70년대> <문희> 등을 쓴 방송작가 정성희는 대학시절에 역사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전성태와 김종광도 학점 관리를 잘하는 대단히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대학원에서 만난 시인 송승환, 조동범, 이윤설 등도 참 부지런합니다. 시가 과거에는 천재의 산물이었지만 현재는 노력파의 산물이고 집념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동네에 가도 일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은정 : 시는 천재의 산물이라기보다 노력과 집념의 산물이라는 말씀이 남습니다. 진작 이렇게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으면 저도 시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웃음) 시를 쓸 때 상정하는 독자가 있으신가요? 선생님의 가족, 특히 따님은 아버지의 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딸 민휘에게’라는 부제로 쓰신 시도 있으시지요. 시인인 선생님은 목소리도 낮고 다정하신데 시 속의 화자는 톤이 높고 자주 격앙되어 있지요. 시인일 때와 일상인일 때 어떻게 다르거나 같으신지 궁금합니다.
이승하 : 제 딸은 제가 시를 너무 쉽게 쓴다고, 암호가 없다고 타박을 합니다. 소통 불능의 시에 대한 반감이 저의 시에서 난해함을 들어내게 하는데, 이것이 불만인가 봅니다. 저는 술도 잘 못해 학교와 집을 오가며 나날을 보내는데, 집에서도 주로 한밤중에 제 방에서 시를 쓰기 때문에 시 속의 화자는 제 의식 속의 분신일 따름입니다. 세상사에 분통을 터뜨리게 되지만, 불만을 풀겠다고 술을 마시거나 직접 표출하면 생활이 엉망이 되겠지요. 아이한테 제가 어떻게 비치는지는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이은정 : 앞으로 계획하고 계시는 작업은 어떤 것인지요. 전작 시집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승하 : 내고 싶은 시집이 있는데……. 정신병원에서 나날을 보내는 이들의 일상을 추적한 것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구상 분쟁지역에서의 참상을 담은 것입니다. 전자의 시들을 쓰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준 소설이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입니다. 몹시 어두운 내용인지라 내줄 출판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판매가 안 될 거라 예상되어 원고를 만지고만 있습니다. 광고와 광고기호에 대한 관심이 있어 그런 쪽으로도 시를 좀 쓰고 있습니다. ‘밤’이라는 소재도 저의 주된 관심사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질환’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해보곤 합니다. 문학평론집은 현장비평의 글을 묶은 적이 없어 한번 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발표했던 글들이라 묶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밀쳐둔 상태입니다.
이은정 : 언제 나올지 모르겠으나 그 시집들에 벌써부터 관심이 갑니다. 기대하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의 모습 안에는 천진한 문학청년과 만취한 백수광부, 광대와 욥, 그리고 묵묵히 걷는 구도자 혜초가 모두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가장 자신과 가깝다고 느끼시는지요.
이승하 : 만취한 백수광부는 제가 가장 바라는 인물상입니다. 술에 취한 상태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복이 아니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꿈이겠지요. 나머지는 저의 내면에 어떤 모습으로든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이은정 : “문학은 보다 많은 사람의,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문학관을 갖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대한 부산물”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요. 선생님의 문학적 탄생과 기반이 80년대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학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지요. 덧붙일 말씀은 없으신지요.
이승하 : 그 말을 했을 때의 마음가짐과 별로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형식보다는 내용에 주안점을 두는 리얼리스트입니다. 문학이 소비사회의 상품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깃발, 영혼의 부르짖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그 절규의 장면처럼 이 절망적인 세상을 향해 절규하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이은정 : 그 말씀은 몇 번을 들어도 뜨겁게 다가옵니다. 혹시 이런 인터뷰를 계기로 꼭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 있으신지요. 독자들이 꼭 눈여겨 읽어주길 바라는 시가 있다든지, 이 시는 이렇게 읽어주길 기대해본다든지, 나의 이 시는 오독되고 있다든지…….
이승하 :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저의 등단작이나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폭력과 광기의 나날』이 준 인상이 강해서 그런지 『박수를 찾아서』나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등에 기울인 저의 노력을 몰라주는 것이 조금은 서운합니다. 그리고 서정성을 지닌 시도 많기 때문에 저를 과격한 시를 쓰는 사람으로 일반화시키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은정 : 사실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독자들은 시인의 작품 바깥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좋아하는 배우나 영화, 즐겨보시는 TV 프로그램, 아니면 즐겨 드시는 음식은 어떤 것인지요?
이승하 : 텔레비전 드라마는 잘 안 보는 편인데 ‘걸어서 세계 속으로’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는 즐겨 봅니다. 영화배우는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 <작은 거인>의 더스틴 호프만, <산 파블로>의 스티브 맥퀸,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 <허슬러>의 폴 뉴만을 좋아합니다. <디어 헌터>와 <대부 2>의 로버트 드니로도 참 좋았지요. 이들처럼 역경과 싸워나가는 남성상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영화 속의 인물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 배우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벤허>의 벤허를 좋아하지만 전미총기협회 회장인 찰턴 헤스턴을 싫어합니다. 어릴 때 육류를 거의 못 먹어서 그런지 커서도 잘 안 먹게 됩니다. 음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비빔밥이나 찌개 종류, 탕 종류, 면 종류……. 음식을 갖고 시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이은정 : 모두 강한 캐릭터를 지닌 배우들이라고 여겨집니다. 시를 쓸 때 어떤 개인적인 습관이나 취향이 있으신지요.
이승하 : 아뇨,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가면서 시상을 떠올리고, 밤중에 연습장에 초고를 쓰고 그것을 컴퓨터에 타이핑하면서 고칩니다. 청탁을 받고서 다시 퇴고하고 시집을 준비하면서 다시 고치지요. 지하철은 저의 독서실이고 작업실인데 요즘에는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이 없고 다들 작은 화면을 보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활자문화가 영상문화 속으로 수렴되는 느낌이 듭니다.
이은정 : 모든 특별함은 평범함 속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인데 이 인터뷰가 끝나면 무슨 기다리는 약속이나 계획이 있으신지요? 글 쓰는 일 외에 즐겨 하시는 일이나 취미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승하 :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갈까 합니다. 영화 구경이 취미이지만 시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 고스톱, 포커, 바둑, 당구, 골프, 드라이브, 노래, 술……. 즐기는 것이 없으니 이것도 참 문제입니다. 저는 한마디로 재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농담도 할 줄 모르고. 시도 영 답답하게만 쓰고. 이것이 저의 모습이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네요.
이은정 :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영화에 있으니 괜찮습니다.(웃음) 모처럼 선생님과 오랜 시간 말씀 나누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승하: 좋은 질문들 해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우리는 인터뷰를 하던 도중 점심식사로 쌀국수를 먹었고, 같은 카페로 돌아와 커피를 마셨다. 긴 인터뷰를 끝냈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성탄절을 맞아 북적대는 대학로를 걸어 시인의 행보를 좇아 대중교통에 올랐다. 이승하 시인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저는 재미가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재미가 뭘까. 그 사람을 잘 알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재밌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인터뷰 글도 이승하 시인을 잘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에 따라 재밌기도 하고 덜 재밌기도 할 것이다. 시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이승하 시인과 혜초가 한 모습으로 겹쳐 떠올랐다.
이은정
이화여대 국문과 박사 졸업. 저서 『 현대시학의 두 구도』『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한국여성시학』『명작의 풍경』 등. 현재 이화여대 강사.
첫댓글 며칠전에 중앙대학원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미소로 답례한적이 있어요
저희 중국 조선족문학에도 깊은 애정을 보내주시는 따뜻한 시인이고 교수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