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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45코스
서상게스트하우스-예계항-상남항-작장항-남상마을-염해마을-유포항-노구마을-중현보건진료소
20220112
1.여수 해안의 아침빛과 망운산의 기상
어제 남파랑길 44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었다. 오늘은 새벽 6시 25분 서상항에 도착하여 서상 게스트하우스 앞 남해스포츠파크교 앞에서 남파랑길 45코스를 출발한다. 새벽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고 눈발이 날린다. 어둠을 헤치며 서상교 방향으로 걸어나가 남서대로 서상교에서 왼쪽으로 꺾어 서북쪽 작장리 예계마을 방향으로 걸었다. 남서대로를 따라걷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남파랑길은 GS25시 옆 골목으로 들어가 가물랑산 자락길로 이어진다. 언덕길에서 불빛 밝힌 서상항과 바다 건너 여수 해안의 불빛 행렬을 감상하며 펜션촌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다시 국도77번 남서대로,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예계마을 표석이 있는 곳에서 예계해안으로 내려간다.
예계선착장 불빛이 환하게 빛난다. 아침 7시가 되는 시각이지만 아직 날은 밝지 않았다. 바다는 빛을 찾아 검푸른 몸을 뒤채며 흰 물결을 일으킨다. 바람은 더 거세지고 물결은 더 출렁거리며 소리를 실어 보낸다. 그 소리는 으르렁거리는 듯 여명에서 밝음을 활짝 펼치려는 몸부림소리처럼 들린다. 바다 건너 여수 해안의 불빛은 여전히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 예계 몽돌해안에서 언덕을 오르며 헤드랜턴을 껐다. 동쪽에 해가 솟아오른 듯 건너편 여수 해안이 옅은 붉은 빛을 띄기 시작한다.
미명의 어둠 속 가로등 불빛, 여명의 해안길 헤드랜턴 불빛, 살며시 펼쳐지는 햇빛의 아침 바다, 동트는 새벽을 지나 이렇게 아침을 맞는다. 아직은 활짝 펼쳐지지 않은 빛의 아침이다. 물새들은 아침을 맞아 바다 위를 떼지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아침은 날개를 훨훨 저으며 내 하루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길을 열어 준다. 남파랑길 45코스는 해안을 끝없이 따라가는 길, 이제부터는 아침빛살 속에서 온전한 시각(視覺)으로 그 길의 자연과 인간의 삶을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남파랑길 45코스는 '망운산노을길'이라 명명된 남해바래길13코스, 그런데 망운산 서쪽에서는 아침노을을 만나지 못할 뿐더러 저녁노을은 더더욱 만날 수 없으니 '망운산노을길'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여수 해안의 아침노을과 저녁노을이 멋지게 조망되는 이 길을 '바다노을길'이라고 새로이 명명하는 듯하다. 남파랑길 45코스의 행정구역은 남해군 서면에 속한다. 그 길은 서면 서상리(서상항, 가물랑산 자락길)-작장리(예계항, 상남항, 작장항)-남상리(남상항, 중리마을, 염해항)-노구리(유포항, 노구항)-중현리(회룡마을)까지이다. 해변의 자갈길과 언덕길을 넘어 부두와 마을은 이어지고, 남해의 최고봉 망운산은 동쪽에 우뚝 솟아서 해안을 내려본다. 화려한 불빛의 서상항, 가로등 불빛은 있어도 구석진 곳에서 외롭게 버티는 듯한 예계항, 인적 드문 곳에서 쓸쓸하기만 하던 상남항과 작장항, 흥성한 분위기를 갖춘 고요한 남상항, 현재의 활력적인 삶의 활동이 분명히 느껴진 염해항과 유포갯벌, 주민들의 끈기있는 노동의 현장인 유포들녘과 노구들녘, 교통의 요충지인 회룡마을 등이 남파랑길 45코스에서 받은 느낌이다.
찬 겨울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남상마을에서 만난 어르신이 길손을 걱정해 준 말씀, "이렇게 추운데 얼굴을 감싸고 다니시지. 괜찮겠소?", 지금도 귀에 웅웅거린다. 염해마을에서 방벽 위에 불가사리 등을 말리는 모습, 유포들녘과 노구들녘에서 시금치를 캐는 남정네와 아낙들, 노구리의 가직대사의 푸르른 삼송 등은 가슴을 감동시키는 장면이다. 그런네 노구마을에서 폐교가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려왔다.
여수 해안은 아름다웠다. '麗水'라는 지명이 분명히 감각되었다. 염해항과 유포항 사이의 언덕에서 그리고 유포항에서 노구마을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바라보는 광양제철소와 하동화력발전소의 공업시설물은 우리 경제의 한 축이 되는 모습으로 자랑스러웠다. 그 공업단지 맞은편 남해군 서면의 해안 농어촌의 자연친화적인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남해군의 망운산, 하동군의 금오산, 섬진강변 광양에 우뚝 솟은 백운산에 햇살이 빛나는 풍경에 길손의 마음은 펄펄 끓어올랐다. 섬진강 서쪽 백운산 동쪽으로 지리산을 어림하며 길손은 햇살 쏟아지는 노구마을 방조제를 걸어 회룡마을로 향하였다.
2.초보자에게 주는 조언 - 엘렌 코트(1936~2015)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
모든 것을 한 입씩 물어뜯어 보라.
또 가끔 도보 여행을 떠나라.
자신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가르치라. 거짓말도 배우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만들라.
돌들에게도 말을 걸고
달빛 아래 바다에서 헤엄도 쳐라.
죽는 법을 배워두라.
빗속을 나체로 달려보라.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흐르는 물 위에 가만히 누워 있어 보라.
그리고 아침에는 빵 대신 시를 먹으라.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라.
3.걸은 과정
약 600여 년 전 현풍 곽씨(郭氏) 입남(入南) 시조(始祖)가 지금 마을의 북쪽에 위치한 일명 터밭이라는 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도둑을 맞는 일이 많아 이를 피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양지(陽地) 바르고 따뜻하다고 해서 속칭 '여기방'이라고도 불렀으며 1910년경 '예계(禮戒)'라고 고치어 부르게 되었다. -남해군청에서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한탄치 말라. 놓친 물고기를 생각하고 낚시밥을 챙기지 않음과 같다. - 禪 이야기
남면 평산리의 평산항, 덕월리의 구미항, 서면 서상리의 장항해변과 서상항, 작장리의 예계항. 바다에 뜬 섬은 목도이다.
영조 23년(1747) 서면 '운흥마을(남상마을의 옛 지명)'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력이 비범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했던 그 아이는 자라서 입산수도해 승려가 되었다. 그가 바로 송학당 가직대사이다. 마을 도로가에는 300여 년 의연한 자태로 마을을 지키고 선 노송 한그루가 있다. 가직대사가 '이곳에 곧 길이 날 것'이라며 노구마을과 중리마을 그리고 남상마을에 심은 세 그루 소나무 중 한 그루다. 스님의 예언대로 세월이 지나 큰 길이 났고 주민들은 '가직대사 삼송(三松)'이라 이름지어 보호해 오고 있다. - 남해군청에서
이곳에서 접수한 뒤 차량을 타고 망운산 중턱으로 이동하여 패러글라이딩을 즐긴다고 한다.
남해의 최고봉인 망운산(望雲山, 784.9m) 아래의 중리마을은 1562년 조선시대부터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고 하나 1596년 임진왜란으로 폐허지경에 이르렀다가 1612년 유(柳)씨와 이(李)씨 두 성씨가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고 남상과 염해와 함께 운흥동(雲興洞)이라고 불리었다. 1910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남상과 염해마을의 중간에 있다 하여 중리(中里)라고 개명하였다.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 모르지만 음력 10월 15일에는 동민이 한자리에 모여 정자나무 2곳, 밥무덤 3곳에 동제를 모신다. 마을 한가운데로 망운산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형성되어 망운산에 철쭉이 붉게 물들면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북쪽 송정고개에는 가직대사가 심었다고 하는 삼송(三松)이 우뚝서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 남해군청에서
약 5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주민 대부분이 제염을 했기 때문에 염전포(鹽田浦)라고 불렸다. 그 후 남상·중리·염해마을을 통합하여 운흥동이라고 부르다가 분동되면서 옛날에 소금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염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포마을은 1120년경 망운산 1600m 지점에 있는 면정동으로 불리는 계곡에 화전을 일구고 광석채취를 하며 살던 몇 가구가 바닷가로 옮겨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유포마을은 윗마을, 가운데땀, 양지뜸, 들마을, 저들마을, 갱번가 등 여섯 개 땀에 주민들이 농사와 바닷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유포마을 사람들은 동제를 반드시 길 윗쪽에 사는 사람이 제관을 해야 한다는 유래가 전해져 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길 아랫쪽 마을이 더 커져 1975년부터는 이 관례를 깨뜨렸다. 음력 10월보름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꺼끄랑 나무에서 첫제를 올리고 난 다음, 두 곳의 당산나무를 돌며 밥무덤에 제물을 남긴다. - 남해군청에서
유포해안은 넓은 갯벌에서 갯벌체험을 할 수 있으며 바다 건너 여수 야경을 감상할 수 있어 또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갯벌체험 중 쏙잡이체험은 붓과 전통된장으로 뻘 속에 숨어 있는 쏙을 쏙쏙 잡는 재미나고 신기한 체험이라고 한다. 코로나 영향과 겨울철이어서 안내소는 텅 비어 있다.
태양광을 이용한 들길의 가로등. 가로등 역할을 하면서 해충을 잡는 이중 역할을 하는 듯하다.
남파랑길은 언덕길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노구회관 앞으로가는데, 단축하고자 하면 앞쪽 마을길로 내려가면 된다.
남파랑길은 노구마을을 한 바퀴 돌아 오른쪽 중앙에 보이는 노구회관 앞에서 노구마을로 들어와 노구해안으로 이어진다.
유포마을을 넘어온 언덕에서 언덕길로 서면교회를 거쳐 노구마을 바깥을 빙 돌아서 국도77번 남서대로로 내려간다.
망운산의 끝자락이 병풍처럼 두르고 그 앞으로 넓은 바다가 껴안고 있는 서면 노구마을은 조선시대 말기에 마을 앞에 있는 갈대꽃이 9월에 살이 찐다고 하여 노(蘆), 구(九)자를 따 '노구(蘆九)'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노구보다 순 우리말인 '갈금'으로 부르고 있다. 서면에 있는 삼송 중 하나로 조선시대 가직대사가 심었다고 하는 소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마을이다. 1읍면 1명품으로 지정, 특산물로 자리잡은 박을 재배하고 있다. 노구박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상인들이 무공해박을 사가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기도 한다.
노구마을을 빙 돌아서 이곳으로 왔다. 만약 단축하고 싶다면 왼쪽 언덕 위 소나무에서 길을 따라 바로 이곳으로 내려오면 된다.
노구선착장으로 내려가면 축사와 공장으로 사용되는 폐교가 있다. 정면에 하동의 금오산이 우뚝하다.
왼쪽의 건물은 폐교로서 현재는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옛날 같으면 주막이 있었음직한 삼거리. 서면 회룡마을은 '이리 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라는 유행가를 연상시키는 교통 요충지이다. 마을 버스승강장에서 남쪽으로 가면 노구, 유포를 지나 서상으로 이어져 읍과 남면으로 연결된다. 서쪽으로 길을 잡으면 정포, 갈화를 지나 탑동에서 읍이나 노량으로 갈 수 있다. 또 곧바로 마을 뒷산을 넘어 중현, 도산을 지나면 화방사로 오르는 길이, 바로가면 남해읍으로 이어진다.
회룡이란 마을이름은 망운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이 마치 용이 꿈틀대며 승천하듯 마을 쪽으로 휘감아 돌아 들어왔다 하여 '골용골'이라 불렸다. 그러나 몇해 전 명당을 찾아다니던 처사 한분은 회룡을 지나다 '회룡고조(回龍顧祖), 용이 할아버지를 돌아보는 지형이라 명당'이라고 했다.
망운산(望雲山)의 북쪽에 위치한 옥녀봉과 시루봉 아랫자락인 이곳에 사람이 자리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서기 1650년경부터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이곳은 '마을을 중심으로 양쪽의 산세가 유난히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므로 마치 용(龍)이 이곳을 지키려고 돌보는 형상과 같다' 하여 오랫동안 도롱굴(일명 돌룡골)로 불리어 오다가 서기 1937년에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중현마을과 분리되면서 도롱굴-용이 둘러싸고 돌보는 곳-의 한자어인 회룡(回龍)이라는 마을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첫댓글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이 참 귀하게 다가오네요.
친구랑둘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던길에 만났던 풍경들이 떠오르며
다시한번 보람을 느껴 봅니다.
마음의 댓글에 감사 드립니다.
서상 게스트하우스에서
서상교를 거쳐 예계해안으로 나가는 가물랑산 자락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밝음 속에서 다시 그곳을 가보야 할 것 같아요.
토이아트님의 고운 댓글이
남파랑길 탐방을 기록하는 데
격려의 울림이 됩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