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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河廻마을
안동의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豊山柳氏)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 ..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큰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廻)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江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집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자연부락이다. 대한제국 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내에는 총 127 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유성룡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서 전래의 유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유씨(柳氏) 배판이라는 말대로 최초의 마을 형성은 허씨들이 이룩하여,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허씨들이 벌초를 한다고 한다.
택리지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계거 ..溪居)만 못하다. 대체로 시냇가의 삶은 반드시 큰 고개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평시이건, 亂時이건 오래 살 수 있다. 그러한 계거처(溪居處)로는 영남의 도산과 하회가 으뜸이다.
풍산류씨(豊山柳氏)의 入鄕에 관한 전설
풍산류씨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평상 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山勢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후 이곳으로 터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입향에 관하여 "나눔"의 전설이 있다. 그들이 집을 지으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중 꿈에 신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行人들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活人을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 진출로 점차 성장하였으며,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榮), 귀촌 류경심(龜村 柳暻心), 겸암 류운용(謙菴 柳雲龍),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名臣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 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의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뒷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가 병풍같이 둘러 앉아, 산천지형 또한 太極形 蓮花浮水 형국을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적 지형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崖)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뻑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 "산태극, 물태극 (山太極,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 물 위에 떠있는 연꼿 모양"이라고 부른다.
풍수사상에 따라 하회마을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형상이 태극모양이다. 화천이 부용대를 지나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가면서 자연스레 둥근 원형을 이루고, 산과 들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山太極水太極의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또한 마을이 물 위에 떠 있다고 해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 물 위에 뜬 연꽃)이나 행주형(行舟形 ..떠나가는 배)이라 하기도 한다. 연꽃과 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모두 화천과 연관이 되어 보인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옛날 다리미"모양이라고 한다. 부용대에서 보면, 마을입구가 다리미 손잡이로, 마을전체가 숯을 넣는 다리미 몸통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고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한다. 화천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다른 문화가 병존한다.
하회마을의 문화유산
이곳 하회마을에는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우선 국보 132호로 지정된 류성룡의 "징비록"과 하회탈 및 병산탈이 국보 제121호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서애 류성룡 종가의 문적 11종 22점이 보물 제 160호, 기타서애 류성룡 유물 3종 27점이 보물제4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진당이 보물 제306호, 충효당이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기타 중요민속자료로는 화경당(북촌), 원지정사, 빈연정사, 작천고택, 옥연정사, 겸암정사, 염행당(남촌), 양오당(주일재), 하동고택이 지정되었다. 그리고 하회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이다.
부용대 芙蓉臺
하회마을 강 건너 맞은편 병풍같은 절벽의 얕은 암벽산으로, 부용대는 하회마을을 더욱 운치있게 만든다. 부용대는 그곳에서 하회마을의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부용대의 절경은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이며 해발 64m의 절벽이다. 부용대의 내력은 중국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며 부용의 뜻은 연꽃을 말하며, 처음에는 북애(北涯)라 하였는데, 이는 하회의 북쪽에 위치한 언덕이란 뜻이다.
부용대(芙蓉臺)는 "부용을 내려다 보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의미하며, 하회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보면 하회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한송이 연꽃처럼 보여 마을의 모양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하회(河廻)라는 이름처럼 낙동강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모습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부용대의 허리부분에는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의 두 정사(精舍)를 가로로 연결하는 층길이 나있는데, 이 길로 형제가 왕래하며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북쪽의 병풍처럼 서있는 절벽이다. 부용대에는 화천서원, 옥연정, 겸암정, 상봉정 등 풍류와 교육을 위한시설이 산재해 있던 곳이다. 부용대 아래에는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
부용대 오르는 길 ... 길이, 250m, 걸음걸이, 450步이다
하회마을에서 바라 본 부용대
화천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과 부용대 아래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오가는 나룻배,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에서 그 옛날 선비들은 기개를 담아 詩를 짓기도 하던 곳이 바로 부용대이다. 부용대는선비들의 기개와 풍류를 한 몸에 받아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하회에 삶을 일구었던 선비들은 하회의 아름다움을 시로 지어 칭송하기도 했다. 이를 하회16경이라 하는데, 적벽호가(赤壁浩歌)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용대 위에서 호탕하게 부르는 노랫소리
강가에 푸른 절벽 천 길이나 깎아질렀는데
우렁찬 노래 한 곡조 널리 울려 퍼지네
바람 따라 사라져 가는 은은한 노랫가락
텅 빈 허공에는 하늘과 강만 가득하구나
깎아 지르는 절벽에서 호탕하게 소리 지르며 부른 노래이다. 그 노래 소리는 절벽을 타고 흘러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텅 빈 허공을 내다 보면서 굽이쳐 흐르는 강과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선비들이 풍류를 한껏 느껴보고 싶다면 반드시 부용대에 올라서 노래를 불러도 좋고, 詩를 한 수 읊조려도 좋을 듯하다.
하회마을은 강가에 자리잡았지만 어지간해서는 홍수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회의 물줄기는 부용대에 부딪쳐 돈다. 부용대는 이때 완충작용과 함께 거센 물길이 마을을 비켜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을하고 있다. 부용대의 위치가 조금만 달았어도 마을은매년 물난리를 겪었을 것이라는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하회마을 사람들은 부용대를 신성시한다. 지금도 부용대에서 울리는 소리가 나며 마을에 재앙이 생긴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1940년대 부용대 모습
부용대 절벽은 커다란 붓에 푸른 낙동강 물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한 한 폭의 동양화이다. 붓이 좌우로 흐르면서 춤을 출 때마다 기묘한 형상의 지층이 만들어지고 흘러내린 먹물은 낙동강에 떨어져 갈모바위 등 크고 작은 바위로 변한다. 여기에 소나무 분재와 키 작은 오동나무도 심어보고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달개비와 패랭이꽃을 그려 넣으면 부용대 절벽이 완성된다.
부용대는 안동 하회마을의 서북쪽 강 건너 광덕리 소나무 숲 옆에 있는 해발 64m의 절벽이다. 정상에서는 하회마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의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처음에는 북애(北涯)라고 했는데, 이는 하회마을의 "북쪽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일 것이다. 부용대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보는 하회마을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 강거(江居)의 第一은 평양이요, 계승(溪勝)의 第一은 河廻 "라고 극찬하였다. 또 하회는 삼남(三南) 4대 길지의 하나로 양동, 닭실, 천전과 함께 복거지(卜居地)로 가장 으뜸이며 풍수지리설에 연화부수라는 명당터라고하였다.
또 향언(鄕言)에 " 하회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이라는말이 있다. 이는 許氏가 터를잡았고, 安氏들이 살다가 柳氏가 문호를 열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곳 풍산류씨들은 고려말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의 적선지보(積善之報)로 여기에 이사와서 명당형국을 잘 비보(裨補)하였으므로 복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회 16경 河廻 16景
하회마을에 가면 하회16경이 있다. 서애 류성룡의 손자인 졸재 류원지(졸재 류원지)의 문집에는 하회마을 16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소개한 글이 있다.
1景이 입암청창(立巖淸漲)이다. 입암은 서애 류성룡의 부친인 류중여의 아호이자, 그의 형 겸암(謙庵)을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형제의 우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용대 기슭 겸암정사 앞 물 속에 나란히 잠겨있는 두 바위이다. 실제로 보는 아름다움보다는 立巖이 갖는 의미가 더욱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2景은 마암노도(馬巖怒濤)이다. 말처럼생긴 바위에 성난 강물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부용대 앞 말바위, 갈모바위에 부딪히는 낙동강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3景은 화수용월(花峀湧月)이다. 화산에 솟아 오르는 달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4景은 마늘봉에 구름이 걸려있는 모습으로 하회마을 남쪽의 강 건너편에 마늘처럼 뾰족한 봉우리를 말한다. 산이 좋아 늘구름이나 안개가 서려있어 신령스러운 곳이다.
5景은 눈 내린 만송정 솔숲의 고즈넉한 모습을 말하는데 송림제설(松林齊雪)이며, 6景은 마을 북쪽 반나무 골짜기로 피어 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연상케 하는 율원취연(栗園炊煙)이다. 7景은 수봉상풍(秀峰霜楓)으로 첫 서리 내린 남산의 단풍을.. 8景은 도잔행인(道棧行人)으로 상봉정 비탈길을 지나는 나그네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말한다.
남쪽 나루의 무지개 섶다리를 남포홍교(南浦虹橋), 원지봉에 내리는 비를 원봉영우(遠峰靈雨), 물가 반석 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을 반기수조(盤磯垂釣)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8경의 뒤를 이어 기록해 두고 있다. 12경은 적벽호가(赤碧浩歌)로 부용대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요, 13景은 강촌어화(江村漁火)로 강촌의 고기잡이 불빛을 이르고 있다. 낙동강 나루에 매어있는 나룻배의 모습을 도두횡주(渡頭橫舟)라 해 14景에 부치고, 겸암정사 서쪽 얕은 수리미산에 내리는 노을을 표현한 수림낙하(水林落霞)와 낙동강 백사장 모래톱에 내려 앉은 기러기의 모습을 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묘사하여 15景, 16景으로 불렀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하회마을 동쪽에 있는 화산이 주산(현무)이 되며, 서쪽의 원지산(주작)이 안산의 역할을, 마을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남산(청룡)과 부용대(백호)가 위치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穴에 해당하는 삼신당까지, 명당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 북서쪽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만송정"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만송정은 비보(裨補) 숲인 동시에 방품림, 방수림 구실까지 해 준다. 하회마을은 풍수적으로 완벽한 입지를 가지고 있으나, 북서쪽은 산이 낮아 북풍을 막아주지 못한다. 이런 자연조건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송정을 조성했다는 의견이 있고, 화천의 범람을 막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
화천 花川
낙동강 상류인 화천은 폭 200~300m로 東에서 西로 흘러와서 다시 東으로 역류하다가 西쪽으로 구비쳐 가게 된다. 화천이 마을을 돌아 나간다 하여 "물돌이 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화천의 이런 모습을 일러 東流水, 西流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다. 풍수지리에서 태극형, 연화부수형, 다리미형이라 불리게 된 것도 화천과 연관이 깊다. 또한 배나 다리미 모양을하고 있는 하회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가 침몰한다거나, 불이 꺼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칠선대는 하회마을 남쪽, 남산의 중턱에 위치한 너럭바위이다. 이곳에 서면 하회마을의 전경을 살필 수 있다고 한다. 화천의 구비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칠선대에서 하회마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지금은 들로 변해 버린 허씨와 안씨의 옛 터전을 볼 수 있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뒤늦게 하회마을에 들어와 자리잡은 류씨들이 강가에 터전을 잡은 이유를 알 수있다.
河廻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큰 고개를 거치는 육로와 뱃길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옛날 이웃마을을 가기 위해서 화천의 얕은 곳을 건너다니거나 나무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화천은 하회마을 사람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공급받는 곳이기도 하고, 뱃길을 통해 하회와 다른 마을을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했다.
굽이치는 화천에 배를 띄워 풍류를 즐기는 등 화천은 하회마을 역사와 함께 유유히 흘러 내려 왔을 것이다. 안동에 댐이생기면서 水量이 많이 줄었고, 제방을 쌓아 물이 넘치는 것을 막아 그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유유히 흐르는 花川을 지켜 보노라면 그 옛날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있다.
화산 花山
하회마을의 동쪽에는 일월산 줄기인 화산(花山)이 자리하고 있다. 화산은 태백산맥의 지맥이며, 해발 271m이다. 화산의 줄기는 마을 안까지 뻗어 있다. 화산 자락에 서낭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보면 북쪽으로 부용대와 서쪽으로 원지산, 남쪽으로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로는 논과 들이 들어오고, 그 너머에 집들이 보인다.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는 화천을 보면 절로 "물돌이 마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의 하회마을이 형성되기 전, 화산 아래에는 金海許氏와 廣州安氏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허씨들이 터를 잡기 위해 선택한 화산 남쪽은 전통적인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산을 뒤로 하고, 강을 앞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주안씨들은 허씨들의 터전을 피해 화산 북쪽에 자리하게 된다. 제일 늦게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풍산류씨들은 화산 기슭을 피해 화천 가까운 곳에 터를 잡게된다. 이렇다 보니, 허씨와 안씨들이 떠난 자리가 논과 밭이 되어 , 산 - 들 - 마을 - 강의 순서로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풍수지리상 좋은 입지조건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영험한 산에서 출발하여 그 기운이 수백킬로를 달려 온 산줄기와 연결되어야 하고, 그 산에서 출발한 물줄기와 닿아야 한다. 이 산과 산맥의 물줄기가 서로 통일된 하나의 체계를 이룰 때 명당으로 불린다고 한다.
하회마을의 산과 물, 마을 그리고 들판은 모두 하나의 체계로 경관을 이루고, 마을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이 경관은 마을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기도 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회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花山을 삶의 터전이었고, 조상들의 묘로 연결되며, 서낭당을 지어 길흉화복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풍수에서 경관은 山의 기운을 어떻게 이어받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주로 主山을 등지고 앞에 펼쳐진 넓은 뜰과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의 공급 등 풍수사상은 인간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과도 직결된다 하겠다. 하회마을을 둘러싼 山들은 바람을 막아주는 등 마을을 지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하회마을사람들은 주어진 자연조건에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극복하면서, 하회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켜나가게 된 것이다.
만송정 萬松亭
안동 하회마을의 만송정 숲은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송정(萬松亭) 숲은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위치하며, 조선 宣祖시절, 서애 류성룡의 兄인 겸암 류운용(謙菴 柳雲龍)이 강 건너편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이라고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은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 높이 16~18m, 가슴 높이 줄기지름이 30~70cm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호면적은 476,430㎡이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는 이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 선유(船遊) 줄불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부용대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참나무 숯의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고, 그 빛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라고 한다.
선유 (船遊) 줄불놀이
선유(船遊) 줄불놀이는 공중에 길게 걸어 놓은 줄에 숯가루를 넣은 봉지를 주렁주렁 매단 뒤 점화하면 불꽃이 튀면서 떨어지는 장관을 즐기던 양반들의 민속놀이이다. 선유 불불놀이는 품격과 운치가 곁들여진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불꽃놀이와 뱃놀이 그리고 달걀불과 배 위에서의 시회(詩會)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양반놀이인 것이다. 선유줄불놀이는 선유, 줄불, 낙화, 달걀불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네 가지 몰이 가운데 선유(船遊)가 主이고 나머지는 선유(船遊)의 흥취를 돋우기 위한 부대행사인 셈이다.
이 줄불놀이는 양반들의 뱃놀이(船遊)와 불교행사인 초파일 불놀이가 결합한 놀이문화로 보인다. 풍산류씨가 세거해 온 안동 하회마을의 양반들은 해마다 7월 기망(旣望 ..16일) 무렵이 되면 보름달 아래에서 詩와 歌舞와 함께 뱃놀이를 펼쳤다. 이 놀이에는 다채로운 불놀이가 뒤따랐다.
달걀껍질 또느 바가지 조각에 기름을 붓고 거기에 심지를 박아 띄우는 달걀불(蓮花), 부용대 위에서 화천(花川)쪽으로 불붙인 "솟갑단(소나무 줄기의 묶음)"을 떨어트리는 낙화(落火), 그리고 줄불놀이 등이다. 뱃놀이의 부속 행사로 傳承되어 온 줄불놀이는 일제 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해방 이후 약식으로 몇 번 진행되었다.
음력 7월 열엿새가 되는 날 밤, 보름달이 떠오르면 6~7명의 선비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물 위로 나아간다. 여기에 모인 선비들은 하회마을에 사는 지체 높은 학자와 가까운 곳에서 초청된 시인,묵객들이다. 배에는 네 기둥을 세워 차일을 치고, 주위가 밝게 초롱을 단다. 서로 술잔을 권해서 흥이 돋으면 적벽부(赤壁賦)를 외면서 시창(詩唱)을 시작으로 놀이가 전개된다.
詩會와 함깨 가울바람과 밝은 보름달을 즐기다 보면 하늘에서 "줄불"로부터 다채롭고 화려한 불꽃이 강물 위로 끊임없이 쏟아진다. 한편 부용대 위의 형재암(兄弟岩) 부근에서 한 번에 200~300개씩 달걀불을 띄어 보내면, 많은 불꽃들이 서서히 옥연정사 앞 소(沼)를 향하여 떠내려가서 맴돌아 선유에 흥취를 한층 더한다. 이 무렵에 이따금 낙화(落火)가 행하여 진다.
미리 부용대 절벽 위에 서너명이 올라가 있다가 강물 위의 배 안에서 詩 한수를 지었다는 발표가 나면 강가에 모여있던 관중들이 "낙화야!"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부용대 위에서 솔가지를 묶은 단에 불을 붙여 강 위를향하여 던진다. 이 낙화는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다가 절벽 밑 바위에 부딪치며 산산히 부서져 장관을 이룬다
안동 간고등어
안동지방에는 유난히 고등어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고등어가 많이 잡히는 강구항(강구항)이 속한 이 고을, 영덕의 부자가 허 한 날 고등어껍질로 씀을 싸먹다가 살림살이가 망했다는데, 그만큼 껍질이 맛있다는 말도 되고 , 맛있는 것만 쫓아 먹으면 살림이 거덜난다는 뜻도 될 것이다.
또 " 구운 고등어 대가리 눈 위로 아홉번 베어 먹으면 부자가 된다 "는 속담도 있다. 쳐다 보기만 하라는 자린고비에 비하면, 고등어의 입부터 눈까지 그 좁은 부위를 쪼개서 먹으라는 것이니 인심을 더 베푼 것일까? 또한 옛날에 새 며느리가 부엌에서 고등어 대가리를 굽다가, 자글자글 기름이 돌며 짭조롬하게 익어가는 눈깔 한 개를 몰래 빼 먹고는 친정으로 쫒겨갔다고 한다. 고등어 대가리 굽는 냄새 또한 어두일미이였을 것이다. 어른 허락없이 함부로 반찬에 손대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내륙인 안동에 간 고등어가 생산되는 데는 지리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강구항 등에서 잡히는 풍부한 동해 해산물은 소비지가 마땅찮았다. 가까운 소비지로 백두대간 꼬리인 황장재를 넘으면 관찰사급 대도호부가 있었던 안동에 닿을 수 가 있었다. 강구항에서 고등어를 등에 지거나 달구지에 싣고 왔었다. 하루쯤 지나 고등어가 부패하기 시작하면 배를 갈라 가장 먼저 상하는 내장을 버렸다. 하루쯤 더 지나니 살코기도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소금이라도 쳐서 본전이라도 찾으려는 장사치들의 다급한 심정이 路上에서 소금 간을 하게 되었다.
고등어 소금 간을 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고등어를 잡자마자 배 위에서 하는것을 제자리간이라고 한다. 둘째로 포구에 도착하여 간을 하는 방법이 있다. 소비지역까지 운반하여 나중에 한 번 더 간을 하는 덧간이 셋째 방법이다. 이렇게 염장을 하면 고등어가 부패할 때 생기는 효소와 묘한 조화를 이루어 그 맛이 향상된다. 고등어를 잡은 후 이틀 정도 운반하면 상할랑 말랑 하는 상태가 되는데, 이 때 왕소금 간을 하면 가장 맛있는 간 고등어가 된다.
이런 오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다 보니, 지금도 안동시내 큰 시장에는 간잽이라는 직업이 있다. 겉으로는 단순히 매우 빠르게 고등어에 소금을 대충 흩뿌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등어를 손에 잡자마자 무계에 따른 정확한 소금의 양으로 간을 한다. 오랜 경험이다 보니 다른 지역 사람들은 배울 수도 없어 억대 연봉이라고 한다. 안동 간 고등어의 맛의 비결에 간잽이의 오랜 경험도 한 몫하는 것이다. 생선 뱃 속에 간을 한 고등어를 또하 ㄴ간잽이 고등어라고도 한다.
옛날에 내륙지방인 安東에서 고등어는 머나먼 바다에서 왔으니 貴한 생선이었을 것이다. 안동 간고등어는 불리한 자연조건을 역이용한 획기적인 산물이었다. 수 백년 동안 선인들의 지혜가 소금 간처럼 배어 있는 안동 간고등어... 신선도를 유지하면서도 적당히 쩝조롬한, 흉내 낼 수 없는 천하일미는 바다와 육지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하회별신굿 탈놀이
하회별신(河廻別神)굿탈놀이는 이곳 하회마을에서 12세기 중엽부터 상민들에 의해서 연희되어온 탈놀이이다. 정월 초이튿날에서 보름 사이에 주민들이 병을 앓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기원하며, 서낭神을 위안하는 부락제를 마친 후 벌이는 탈놀이이다. 이 부락제는 반드시 마을 주민들이 지내게 되어 있는데, 서낭신이 대제를 원하는 경우, 10년마다 주민들이 대제를 지내지 않으면 서낭신이 벌을 내려 병자가 생길까 두려워 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별신굿"이란 별나다.. 특별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곧 별난 굿 또는 특별한 굿을 의미한다.
10년에 한 번씩 또는 신탁에 의하여 임시로 거행되는 하회별신굿은 그 준비를 음력 12월 말부터 시작한다. 산주(山主..주제자)는 不淨이 없는 목수를 선정하여 서낭대와 성줏대를 마련한다. 그리고 정월 초이튿날 아침에 산주와 무녀 그리고 광대(廣大.. 별신굿놀이 연기자)들이 서낭당에 모여 제수를 차려놓고 3~4丈 길이의 성줏대를 세우고 강신(降神)을 빈다.
서낭대에는 오색포(五色布 ..홍,백,청,녹색)을 늘이고 꼭대기에 당방울을 달았다. 신이 내려 신령(神鈴)을 울리면 서낭대를 메고 성줏대를 받들고 주악하면서 서낭당에서 하당(下堂..국사당)과 삼신당을 거쳐 구동사(舊洞舍)앞 놀이마당에 이르러 서낭대를 세우고 신령을 울림으로써 별신굿놀이가 시작된다.
이의 첫 科場은 "주지놀음"이다. 주지란 호랑이를 잡아먹는 무서운 귀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주진느 사자(獅子)를 의미한다. 주지놀음은 서막으로서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벽사를 위한 의식무(의식무)로서의 사자춤이다. 붉은 보자기로 전신을 가리고 주지머리를 손에 든 광대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사방으로 휘두르며 돌아 다닌다.
2科場으로는 무녀가 주연하는 "삼석놀음"이 있었다고 하며, 토끼같이 귀가 생긴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지금의 2과장은 서막적인 과장으로 주지와 삼석놀음이다. 본격적인 놀이는 3과장 파계승놀이부터 이다. 그리하여 놀이는 4과장 양반선비놀이, 5과장 떡다리와 할미의 살림살이 가장, 6과장은 백정이 나와 소를 잡는 살생과장, 7과장은 환자(還子)놀이, 8과장 총각과 각시의 혼례과장, 9과장은 신방(新房)과장이다.
다음으로 헛천굿(거리굿)이별신행사 최종일인 정월 보름날, 마을 앞 길거리에서 거행되고 이날밤 자정에 상당(서낭당)에 올라가 당제를 지낸 다음 서낭대는 당에 봉납하고, 하당과 삼신당에 차례로 제를 올림으로써 별신사가 끝나며, 山主와 광대들은 12월 그믐이래 15일만에 처음으로 근신합숙(謹愼合宿)에서 풀려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별신굿의 풍자와 해학
민속놀이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하회별신굿놀이는 지배계층인 양반과 선비들의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써 계층간이 관계를 극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중의 파계를 총하여 당시 불교의 타락상과 종교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상민들의 삶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별신굿탈놀이를 통하여 상민들은 세상살이를 풍자하고,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을 거리낌없이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볼 때 지배계층의 비판으로 일관된 탈놀이가 하회라는 양반마을에서 양반마을의 묵인 하에 또는 경제적인 지원 속에서 연희되었던 것이다.
常民들은 탈놀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으며, 양반들은 상민들의 비판과 풍자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불만을 해소시켜 줌으로써 갈등과 저항을 줄여 상하간의 조화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별신굿이라는 마을공동체 신앙에 포함되어 연희되던 탈놀이의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계급간의 모순과 갈등의 문제점들이 완충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것이 새롭게 공동체의 기존체계를 더욱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세계문화유산
부용대는 화회마을을 마주보고 있는 벼랑이다. 과거,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이 부용대 아래에서 시회(詩會)와 함께 유명한 선유(船遊) 줄불놀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강상류화(江上流花)의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 전승 놀이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은 늘 넉넉해 보인다. 그런데 그 넉넉함은 즐비한 양반가의 기와집이 아니라 양반가를 둘러싸고 있는 민가에서 더 나온다. 색 바랜 초가지붕의 부드러운선과 양감, 흙벽의 안온한 빛깔은 이웃한 각진 와가(瓦家)의 검은 실루엣이 주는 무겁고 음습한 느낌을 너끈히 덮어 버리는 것이다.
하회에 눈이 내려 만송정 숲이 소나무의 푸른 빛과 눈의 은빛으로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일러 "송림제설(松林齊雪)"이라 했다. 하회 16경 가운데 제5경이다. 겨울이 되면 만송정 앞 모래밭에 내려 앉은 기러기를 만날 수 있는데, 이를 제16경 "평사하안(平沙下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만송정 솔숲과 그 숲 아래 드넓은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하회 16경의 두 경치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회 상류 4.5km지점에 건설되고 있는 구담보(구담보)가 하회마을의 수위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없어 물이 정체될 수도 있고, 이 경우 백사장에 개흙이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회가 세상에 알려온 "물돌이 동"의 명성도 위태로워 졌다.
현재의 계획으로도 하회마을의 수로 쪽은 일부 준설하고, 강변 양쪽으로 자전거 도로가 건설될 예정이라니 사람들이 기리는 하회의 아름다운 경관은 옛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고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하회마을의 비극이 되었다.
평사하안 平沙下雁
언제부터인가 하회 16경을 꼽아왔다. 누가 언제 선정하고 명명한 것인지는 몰라도 류성룡의 손자인 류원지(柳元之)가 이를 정리하여 16경을 확정하고 "하회 16경시(河廻 16景詩)"를 남겼으니 그 역사가 400년 가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秋江浩空明 추강호공명 가을 강은 넓고, 하늘은 높고 밝은데
何來遵渚雁 하래준저안 무엇따라 기러기는 이곳에 왔을까
陣疑沙壅水 진의사옹수 모래톱 막힌 물을 의심하고
行如肉貫串 행여육관관 한줄에 꿰어진 듯 줄지어 날아가네
衡陽聲不斷 형양성불단 형양 땅 그리는 목소리 끊이지 않는데
瀟湘眼還慣 소상안환관 소상강 찾는 길 잊지 않고 예대로 찾아가네
己飽江山興 기포강산흥 강과 산의 흥을 넘치게 보았으니
豈謨稻梁渙 기모도량환 내 어찌 나락과 수수로 모이를 줄 가보냐
如能戒口腹 여능계구복 입과 배를 조심할 수 있다면
網羅非汝患 망나비여환 그물은 너의 걱정거리가 아니겠지.
하회탈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로서 지금은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백정, 할미 등 9개의 탈들만 전해지며, 3개의 탈이 분실되었다. 하회탈은 우리나라 학계에서 먼저 그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던 중, 하회탈이 맥타카드라는 외국교수에게 소개되어, 1954년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해외 학계에 발표함으로써 하회탈이 세계 제일의 가면으로 극찬을 받게 되었고, 이후 국내 학계도 연구를 활발히 하여 국보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탈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그 지지리 못생긴 모습들이나 거칠게 다루어진 손질이 용하게도 이렇게 서로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굿거리나 타령같은 속곡(俗曲), 기껏해야 영산곡(靈山曲) 같은 가락에 맞추어서 짚신바람에 추어온 이 탈놀이는 아마 권위니 아첨이니 하는 따위의 잔신경이 당초부터 필요치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민속적인 신앙의식의 한 토막이던 탈놀이가 끝나면 원래 그해에 만들었던 탈들은 모두 불에 태워 없애는경우가 많았다. 옛 사람들의 눈에는 아마 신이 붙었음 직한 탈들이 오히려 불에 깨끗이 타는 것을 보고야 마음이 개운했을지도 모른다. 하회탈 말고는 오래 된 탈이 남아 있지 않다든가, 탈의 솜씨나 재료가 너무도 소홀한 것 같은 느낌은 아마도 이러한 당년치기 탈에서 올 수 있는 한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안동의 하회탈만이 오랜 유물로 남겨졌다.
하회탈의 전설
옛날 안동 하회마을에는 고려 중엽까지는 허씨 문중이 모여 살았고, 그 후에는 안씨가 모여 살았으며, 조선 초부터는 유씨 문중이 살아왔다고 한다. 그때 허씨 문중에 허도령이라는 멋진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하회탈을 만들라는 신탁을 받았다.
허도령은 목욕재계하고 별실에 금줄을 쳐놓은 다음 탈을 만들기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허도령에게는 그를 사모하는 고운 마을 처녀가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감에 이 처녀는 허도령의 안부와 그리운 정을 참지 못해서 금기를 어기고 창구멍을 뚫어서 그의 모습을 엿보았다. 탈의 완성을 서두르던 허도령은 머지막 이매탈의 턱을 맞추지 못한 채 바로 그 순간에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처녀의 연정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연인을 죽였고, 12개의 하회탈 중의 마지막 이매탈은 오늘날에도 턱이 없는 채 전해 온다고 한다.
이 전설로 친다면 각시, 중, 초랭이, 양반, 선비,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떡달이, 별채, 총각 등 열두 개의 하회탈은 고려시대 중엽에 이 허도령이 지었다는 말이 된다. 이 열두 개의 하회탈 중에 떡달이, 별채, 총각 등 세 개의 탈은일제시대 때 미나미 센키치라는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항설을 남긴 채 지금은 간 곳이 없다.
하회탈
하회탈 및 병산탈(倂山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민속공예류의 장신구 문화유산이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마을에서 현존하여 이어지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가장 원류에 해당하는 하회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 종류는 각시탈 등 크게 11가지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상연에 이용된다.
하회마을에서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는 하회탈의 구체적인 탄생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오래 전부터 구전으로 허도령이 탈을 만들어 이어오고 있다는 말이있다. 하회마을 자체 기록에 따르면 허씨 일가가 안씨 일가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 살았고, 그 후 조선 전기에 류씨 일파가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우리 문화재청에서는 고려 중기대부터 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을 경배하고자 매년 정월 대보름 즈음에 타롤이를 하며,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행해졌던 탈놀이는 대개 놀이가 끝나면 탈을 다 태우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하회탈의 경우에는 다루는 법과 보존에 있어 엄격하였으며 함부로 다루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만들며 그 위에 옻칠은 두세번하여 정교한색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턱부분이 없는 이매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 부분을 끈으로 이어 움직이게 한다. 이는 더욱 생동감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하회탈은 한국인의 얼굴로 칭송될만큼 조형예술의 가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나타난 탈의 경우 일반적으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어 오래 보존되지 않거나 현재까지 파악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하회탈은 드문 형태의 목조탈이기 때문에 그 형태를 유지해 지금까지 알려 질 수 있었으며, 분장의 도구로써 뛰어난 작품임을 표현한다
하회탈의 종류 및 특징
하회탈은 11가지의종류가 있다.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등이 있다. 이름에 맞추어 탈이 표현하는 행위도 달라진다. 주지라는 것은 탈놀이 본연의 목적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악귀를 쫒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 잃어버린 탈(총각탈,떡다리탈,별채탈)을 저명한 조각가와 화가 및 미술사 관련 전문가들로 하여금 북원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운보 김기창화백과 그 일행이 하회탈을 면밀히 감상해 보고서 하회탈의 오묘한 이치와 조형적 탁월성에 놀라 자기들로서는 북원이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총각 등 4종류의 탈이 더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유실되어 파악이 불가능하다. 할미는 한평생 고단히 살아온 자신의 恨을 풀려는 몸짓을 베틀로 대신하며, 부네는 가는 눈썹과 오똑한 코, 조그마한 입으로 전통 사회의 미인상을 새겨 놓았다. 대개 첩이나 기생으로 나온다. 각시탈은 한쪽 눈이 가늘다. 이는 각시광대가 얼굴을 살짝 돌리면 상대에게 눈을
흘기는 교태가 되도록 하였다.
양반, 선비는 대개 자신을 과시하거나 학문을 뽐내려는 캐릭터로 이를 풍자하고 해학을주는 탈이초랭이다. 이매는 턱이 없는 탈로 길고 가늘게 축 쳐진 눈웃음이 인상적인 탈이다. 바보같은 선비의 하인 역할을 한다.양반탈은 위로 향하면 웃는 얼굴, 밑을 향하면 성낸 얼굴로 표정 변화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털웃음을 웃을 때에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성을 낼 때에는 얼굴을 아래로 하는 인체공학을 연구하여 조각되어 있으므로, 광대의 몸짓과 자연스럽게 일치되도록 한 점이 두드러진다.
백정탈
부네탈
선비탈
각시탈
초랭이
양반탈
이매탈
중탈
할미탈
하회탈이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
우리나라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의 탈놀이가 끝난 후에는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은 재료가 오리나무로서 표면에 옻칠을 2겹, 3겹으로 칠하여 정교한색을 내었고, 격식과 세련됨을 갖추었으며, 부락에서는 별도로 동사(洞舍)를 세워서 탈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나고 믿어 별신굿을 할 때 외에는 볼 수 없었고, 부득이 꺼내 볼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금기(禁忌)나 제약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하여질 수 있었다.
하회별신굿 탈놀이
하회마을에서 12세기 엽부터 양반을 제외한 상민계층에서 행해지던 연희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굿의 한 형태를 띄고 있다. 현재 전체 구성은 10개 마당, 즉 강신, 무동, 주지, 백정, 할미, 파계승, 양반, 당제, 혼례, 신방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지배계층인 양반과 선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 당시 집권 종교인 불교와 중의 타락상을 풍자하고 있다.
이 하회별신굿놀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별신굿을 하기 전에 신 내림 과정으로 행해지던 강신(降神)과 神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의례인 별신(別神) 그리고 神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송신의례인 당제(堂祭)이다. 이 중 하회별신굿놀이는 별신의 과정인 것이다.
사회자의 간략한 소개 뒤에 이 탈놀이는 시작된다. 바로 무동마당으로 놀이패와 함께 등장하는 각시광대가 무동을 타고 성황신을 마을로 맞이하는 것이다. 흥겨운 풍물소리가 몸을 들썩이게 해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분위기가 한층 뜨거워지자 어느새 새의 형상을 가진 두 마리의 주지들이 마당으로 뛰어든다.
주지는 사자의 형상에 새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상 속의 동물로 마당으로 뛰어드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집중되는데, 더군다나 풍물소리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것도 잠시 갑작스럽게 서로 싸움을 하는데 한 마리의 승리로 주지마당은 마무리된다. 후에 알아보니 승리한 것이 암컷이었고, 암컷의 승리가 多産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지들이 마당을 퇴장한후 백정이 소와 함께 나타난다. 함께 마당을 돌다가 갑자기 내뿜는 오줌 세례가 관람객을 자지러지게 만든다. 백정이 소를 잡고 염통과 우랑을 사라고 관람객을 희롱한다. 겉과 속이 다른 유교체제를 비판하는 마당은 이렇게 끝이 난다.그리고는 굴곡진 몸매의 할머니가 허리춤을 추며 베와 함께 등장한다.
신세타령을 하며 베틀가를 읊는데, 과부가 되어 겪는 고통과 삶의 애환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파계승마당은 왠아리따운부녀가 등장하여 매혹적인 춤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춤을 추던 부녀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주위를 살핀 후 소변을 보는데, 이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보게 된다.
욕정이 치민 스님은 여인의 오줌냄새를 맡게 되는데 이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스님이 여인에게 치근거리다가 포졸이 등장하자 부녀를 들쳐 업고 마당을 벗어나는데, 여기에서 고려 말 불교와 스님들의 타락상을 풍자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재미있는 이매탈마당이 시작된다. 하회탈 제작하던 이를 사모하던 여인으로 인해 미완성 작품이 되어버린 이매탈은 턱이없는 것이 특징인데, 이매탈의 표정이 너무나 맑고 투박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한다. 그 미소로 관객들을 모아 세계인이 하나로 된 놀이판을 연다. 얼씨구절씨구 어깨가 들썩이는 풍물소리와 함께하는 다양한 인종이 하나 된 마당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함박 미소를 짓게 한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당은 양반과 선비 마당이다. 거드름을 부리며 등장한 양반과 선비는 자신의 家門과 학문이 높다라며 서로 말을 섞는다. 양반이 자신이 사대부 출신의 집안이라고 말하면, 선비는 팔대부 출신의 집안이라며 농지거리를 이어간다. 그리고 앞에 등장한 백정이 팔지 못한 소의 우랑을 들고 그들에게 흥정하는데, 관심을 안 보이다가 양기에 좋다는 말에 서로가 차지하려고 몸싸움을 벌인다. 겉으로는 근엄한 척, 존귀한 척, 으스럼거리나 속으로는 음탕하고 유치한 양반과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천서원 花川書院
화천서원은 조선 중기 퇴계학문에서 수학한 겸암 류운룡(謙巖 柳雲龍)의 학덕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서원을 건립하여 묘우(廟宇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셔서 류운룡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제향(祭享)의 기능을 갖춘 곳이다.
하회마을 북안(北岸)인 부용대를 어깨하고 있으며 서원에서 앞을 바라보면 강변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낙동강 또한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에는 하회마을과 아름답고 섬세한 자태의 곡선을 가진 화산(花山)이 있으며, 왼편의 山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하고 오른편으로는 만송정 노송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수정처럼 맑은 강물 속에는 부용대가 깊게 그림자를 띄우고 있다. 이렇듯 자연 경관이 조화롭고, 주거공간인 마을과는 떨어져 한적한 곳이라 사람의 내왕이 번잡하지 않아 서원으로서는 이상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다.
화천서원의 설립 유래와 역사
겸암 류운룡(1539~1601)을 제향하는 서원은 풍기의 우곳서원(愚谷書院)과 이곳 화천서원이다. 화천서원은 류운룡이 1601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185년만인 1786년(정조 10) 9월에 경세제민의 포부를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가학에서 득력(得力)했던 성실봉사를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고,
동방의 도학적전(道學嫡傳)인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누구보다도 처사적인 삶을 희구하였으며, 깨끗한 선비정신과 우애와 효도를 실천한 류운룡의 학덕을 기리는 유림의 뜻을 모아 서원에 묘우인 경덕사(景德祠)를 세우고 위패를 모시면서부터 제향이 시작되었다.그 18년 후인 1803년(순조 3) 윤 2월에 동리 김윤안(東籬 金尹安. 1560~1622)과 졸재 류원지(拙齋 柳元之.1598~1674)를 류운룡의 위패 옆에 종향하였으며, 두 사람은 사승관계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1868년, 사액서원 중 원액서원(元額書院)만 남기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지시에 따라 1차 때에는 철폐되지 않았으나, 3년 후인 1871년 2차 철폐령 때에는 철폐되었다. 그후 100여년이 지난 1966년부터 후손들과 유림들에 의해 기금을 모아 士林의 공론으로 서원을 복원하였다.
겸암 류운룡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6살 때 독서를 시작하여 15세에 사서와 經史의 大義를 관통했고, 16세 때인 1554년에는 부친의 명에 의하여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이때는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을 본격적으로 열지 않았을 시기이었고, 수업하는 선비들고 그리 많지 않을 시절이었다.
류운용은 본래 과거시험 문장인 공령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향시(鄕詩)에 몇번이나 합격하였으나, 나이 30살을 넘기면서는 아예 과거를 단념하고 오직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겸암 류운룡과 각별하였던 송암 권호문이 대표적인 산림처사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겸암의 이러한 현실 대응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는 34세에 이르러 음직(陰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오르는..)으로 출사하는데, 중앙관직으로는 전함사별좌, 의금부도사, 사포서별좌, 한성부판관이었고, 지방관직으로는 진보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인동현감을 지냈다. 이러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애석하게도 사문(師門)에서 갈고닦은 經世濟民의 포부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그는 임진왜란중에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그는 부임 즉시 험준한 죽령 산세를 이용해 왜군을 막을 계책을 세웠다. 명나라의 일방적인 대일교섭에서 우리나라는 당파마저 편승해 和戰 兩論으로 정국이 크게 혼란하였다. 그의 동생 서애 류성룡은 이러한 혼란기에 국가를 책임질 영의정으로서의 위치에 있었으며, 나라를 위해 지공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나, 주화오국(主和誤國)이라는 터무니없는 모함을 받게 된다.
곤경에 처한 아우 류성룡을 겸암은 단순히 동기간의 우애로서가 아니라 나라를 것정하는 관인이요, 至近의 거리에서 줄곧 지켜본 동반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화의(和議)를 통한 자강(自强)이라는 류성룡의 고뇌를 강력하고도 명쾌하게 변호하였다.
門掩蒼苔竹映堂 문엄창태죽영당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는 마루에 비치는데
栗花香動午風凉 율화향동오풍량 밤꽃 향기 한 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
人間至樂無他事 인간지락무타사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 것 없으니
靜坐看書一味長 정좌간서일미장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
겸암 류운룡은 아우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음사(陰仕 ..과거를 통하지않고 벼슬에 오르는 제도)로 벼슬길에 나섰지만, 출사와 퇴사를 거듭하였다. 어머니의 신병 등 어버이의 봉양이 주된 이유이었다. 그의 잦은 퇴사(退仕) 덕분에 세살 아래의 서애 류성룡은 집걱정을 잊고 정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지산루 地山樓
지산루와 부용대 그리고 겸암 류운룡은 "겸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도대체 누문의 이름이 왜 " 땅과 산"인가? 周易에서는 겸손을상징하는 괘가 " 낮은 땅이 위에 있고, 높은 산이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괘의 이름이 지산겸괘(地山謙卦)인데, 괘의 풀이글에서 말하기를...
상대를 높임으로써 오히려 내가 빛이 나고, 내 몸을 낮추되 中庸의 도리를 넘지 아니하니 이것이 군자의 마침이다..라고 하였다. 즉 지산(地山)이라는 樓門의 이름은 겸손을 상징하고 있다. 부용대의 지형을 살펴보면 지산겸괘의 형상을 띄고 있다고 한다. 하회마을 쪽에서 부용대를 바라보면 상당히 높은 바위마루이다. 그런데 화천서원을 끼고 부용대 꼭대기에 몰라서면 100여 명은 족히 쉴 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마치 산이 땅을 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곳 화천서원은 바로 겸암 류운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지산루의 의미는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즉 인물(겸암 류운용), 자연(부용대), 건축물(지산루)이 모두 겸손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하여 통합적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옥연정사 玉淵精舍
옥연정사(玉淵精舍)는 1586년 (선조 19)에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이 세운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후,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안채 8칸, 바깥 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류성룡은 작은 서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늘 걱정하던 중, 탄홍(誕弘)이라는 스님이 10년간 시주하여 옥연정사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옥연서당이라고 했는데, 옥연(玉淵)은 바로 정사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정사(精舍)라고 류성룡이 이름지었다. 건물의 특징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터가 넓고 평탄한 것과, 사랑채와 별당채는 南向으로, 안채와 행랑채는 東向으로 지은 것이다.
이곳 옥연정사는 1576년(선조 9)에 집짓기를 시작한지 10년만인 1586년에 완공되었다. 서애 류성룡의 나이 45세 때이다. 집을 완공한 4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재정적인 도움을 주어 마침내 10년만에 완공된 것이다. 1605년(선조 38)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 삼칸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징비록(국보 132호)를 저술하였다.
옥연정사는 문간채, 바깥채, 안채, 별당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며, 화천이 마을을 시계방향으로 휘감앋 ㅗㄹ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玉沼)의 나쪽에 있다. 소(沼)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간채는 왼편 남쪽부터 차례로 측간과 대문을 두고 오른편에 광을 3칸이나 둔 一자형이다. 바깥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정사각형의 4칸짜리 대청의 오른쪽,왼쪽으로 1칸 반의 방을 두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8칸 겹집형식으로 부엌이 중앙에 있고, 방이 부엌을 중심으로 가로,세로 2칸씩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별당채는 바깥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데,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서쪽 모서리에 2칸의 방이 있으며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인정될 만큼 뛰어난 학자로 출발하여 명정치가, 전략가의 자질을 발휘하고, 은퇴 후에는 사회비평가로, 문학가로서의 풍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이상이었던 통합적 인간의 전형을 그의 생애에서, 그의 건축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절벽 위 좁은 대지에 터를 잡고, 건물들 앞을 지나가는 폭 넓은 통로 양쪽에 대문을 달아서 통로를 마당으로 이용하는 수법을 이용하였다. 건물은 정사 2동과 행랑채 2동으로 이루어졌다. 2채의 정사는 서로 엇물려 있는데 앞쪽의 것은 서애가 쓰던 곳이고, 옆의 것은 제자들의 정사로 보인다. 안행랑채는 앞뒤에 툇마루를 가진 두줄백이 겹집이다. 앞의 행랑채도 감시하고, 안쪽 정사건물의 시중도 들 수 있도록 절묘하게 구성된 건물인 것이다.
옥연정사(玉淵精舍)를 방문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회마을에서는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마을보존회에서 나룻배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한 방법은 하회마을로 들어오지 말고 풍천면 사무소 맞은편으로 난 도로를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다. 광덕교를 지나 좌회전하여 약 500m정도 가면 화천서원과 주차장이 있다. 이 방법은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 부용대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옥연서당기 玉淵書堂記
병술계하 1586년 늦여름 主人 西涯居士 記
나는 이미 원지정사를 지어 놓았으나, 마을이 멀지않아, 그윽한 맛을누리기에는 만족스럽지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북쪽으로 소(沼)를 건너, 돌벼랑 동쪽으로 기이한 터를 잡았는데 아픙로는 호수의 풍광을 지녔고 뒤로는 높다란 언덕에 기대었으며, 오른쪽으로는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으로는 흰 모래가 띠를 두른듯 하였다. 남쪽으로 바라보며 뭇 봉우리들이 들쑥날쑥 섞여 서서, 마치 두 손을 맞잡고 읍하는 형상이 한폭의 그림이요, 어촌 두어 집이 나무숲 사이에서 강물에 아른거린다.
화산은 북쪽에서 달려오다가 남쪽의 강을 대하고 멈추어 섰다. 달이 동쪽의 산봉우리에서 떠 오를 때, 차가운 산 그림자는 반 쯤 거꾸로 호수에 드리워 지는데,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잔잔한 강물에 , 금빛 달 그림자까지 담겨진 듯한 관경이먀말로 매우 볼만한 것이었다.
이곳이 人家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나, 앞에 깊은 沼가 있어 사람이 오고자 해도 배가 없으면 올 수가 없다. 그래서 배를 북쪽기슭에 매어두면 사람이 와서 모래사장에 앉아 이쪽을 향해 소리쳐 부르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면 스스로 돌아가곤 하였으니, 이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히 들어 앉아 사는 일에 한가지 도움이 된다. 나는 이것을 마음 속으로 좋아하여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늙도록 거처할 곳으로 삼고져 하였으나, 살피건데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마침 산승 탄홍(誕弘)이란 자가 그 건축을 주관하고 곡식과 배를 내놓았으니 일을 시작한 병자년(선조9년. 1576)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선조 19년. 1586)에 겨우 깃들고 쉴만 하였다.
집의 구조는 당2칸은 감록헌(瞰綠軒)이라 부르고,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 바라보며 아래로는 푸른 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고, 이 당에 붙어있는 편히 쉴 수 있는 방2칸 이름을 세심재(洗心齋)라 지었으니, 주역 계사편 중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또 북쪽집 3칸은 이 집을 지키는 종을 위해 선가의 말을 따서 완적재(玩寂齋)라 하였다.동향집 2칸은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遠樂齋)라 하였는데, 이명칭은 논어 중에 이른바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라)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이 齋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마루2칸은 세심재와 이웃하고 있기에 애오헌(愛吾軒)이라 하였다. 이 이름은 도연명의 시에 "오역애오려(吾亦愛吾廬 ..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한 詩語에서 따온 것이다. 이 모두를 합하여 편액하기를 옥연서당이라 하였다.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소(沼)가 되었고, 그 물 빛이 깨끗하고 맑아 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받고저 한다면 옥의 깨끗함과, 소(沼)의 맑음이란, 이 모두가 君子가 귀하게 여길 道인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살펴보건데, 인생이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한 것이지, 부귀가 무슨 귀한 것이 되리오..하였거니와, 내가 옹졸하고 부족하여서 평소 행세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사슴과 고라니 같은 내 천성은, 산야에 삶이 알맞지 시정 간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중년에 망녕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넘었다. 손, 발 움직일 때마다, 걸핏하면 해괴한 일만 저질렀으니, 그 당시에 크게 답답했었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속을 그리워하며 즐거움을 삼았던 것이다.
지금은 임금의 은혜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 올 수 있었으니, 정말 벼슬 따위와 같은 영화란 지난 일일 뿐이었다. 새 소리 들리는 언덕과 골짜기의 즐거움이 깊어가는 이때에 마침 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문을 닫고, 찾아오는 이도 사양한 채, 방 안에 깊이 들어 박혀 지내며, 산과 계곡을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며, 때로는 서적들로 취미를 붙여 그 의미를 궁구하기도 하고, 성긴 밥이나 맛있는 음식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니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 모여들면 그들과 굽이진 계곡을 거닐기도 하며, 바위에 앉아 푸른하늘을 바라보고 흰 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물고기 새들과 함께 어울려 호탕히 지내노라면, 이모든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근심을 잊는다. 아! 이것 또한 " 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 것인즉"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 할 것인가? 내 이 말을 굳게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벽에다가 글로 써 붙여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하고져 하노라....
1586년 늦여름 주인 서애거사
이곳에서 징비록(懲毖錄) 저술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기 위하여 이곳 옥연정사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류성룡은 이 징비록의 저술을 통해 임진왜란 전의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비롯하여, 전란(전란)에 임하는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임진왜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은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면서 겪은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이곳 옥연정사에서 저술한 것이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趙洙翼)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류성룡의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 일본 교토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어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유출을 禁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징비록이 갖고있는 또 다른 가치는 .. 솔직한 묘사이다. 징비록에는 조정 내의 분열,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상당수 관료와 군인들의 모습이 가감없이 묘사되어 있다. 실패와 오욕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류성룡은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당시 조선의 전쟁준비 소홀과 그로인한 참혹한 결과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의 징비(懲毖)는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장인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 스스로를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징비록은 결국 임진왜란의 참혹한 경험을 교훈삼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자는 뜻에서 나온 제목인 것이다. 징비록은 사료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도 훌륭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 듯 사건의 경과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어 지금도 임진왜란의 역사를 이해하는 입문서로 꼽힌다. 광복 이후 80종이 넘는 징비록 번역본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를 감안하여 안동에 위치한 하회류씨 종가가 소장하고 있는 징비록 친필 원본이 1963년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거처하던 가옥이다. 이곳은 대가족의 살림과 사당이 있는 종택과는 다른 류성룡만의 학문과 만남의 독립공간이었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랄까? 임진왜란을 여렵게 치른 그의 삶, 생각과 인생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는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玉淵書堂記"로 남겼다. 그는 옥연서당기에서 " 중년에 망령되게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딧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권위적인 왕조, 군력싸움에서 심한 시달림을 겪은 한 학자의 모습이 진하기만 하다.
간죽문 看竹門
노옹파오수 老翁罷午睡 노옹이 낮잠에서 막 깨어나
부수행곡정 負手行曲庭 뒷짐지고 뜨락을 거닐도다
행처의이란 行處意易蘭 거닐다가 기분 더욱 상쾌해지면
출문간수죽 出門看修竹 문을 나서 대나무 숲을 바라보네
적여강풍회 適與江風會 강바람이라도 불어 나부끼면
청음산빙옥 淸音散氷玉 옥이 부서지는 해맑은 소리
시유고문인 時有叩門人 더러 날 찾는 이 있는데
망형수주객 忘形誰主客 누가 주인이고 나그네인지 몰라라
부용대 기슭의 옥연정사 대문은 "대나무를 바라보는 門" 즉, 간죽문이다. 대문을나서면 강 건너 하회를 바라보며 대나무 숲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간죽문 안쪽에 류성룡의 詩 [看竹門] 편액이 붙어있다.
세우춘강상 細雨春江上 봄되어 강 위에는 가랑비 내리고
전산담장석 前山淡將夕 앞 산도 아슴프레 저무는구나
불견의중인 不見意中人 마음에 그리는 사람은 볼 길 없고
매화자개락 梅花自開落 매화만 홀로피었다가 지고있네
겸암정사 謙巖精舍
我兄遺亭館 아형유정관 우리 형님 정자 지어
謙巖有舊名 겸암유구명 겸암이라 오랜 이름 붙였네
竹影淨林階 죽영정림계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 내리고
梅花開滿庭 매화개만정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遊從芳草合 유종방초합 발 끝에 향기로운 풀 냄새 모이고
仙路白雲生 선로백운생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愴憶空垂淚 창억공수루 그리움 눈물되어 소리없이 내리고
江流夜流聲 강유야유성 강물도 소리내며 밤새 흐르네
만송정에서 바라 본 겸암정사
겸암정사는 겸암 류운용이 1567년(명종 22)에 세우고, 후에 학문으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 기슭, 화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어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마을 쪽에서는 낙엽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는보이지 않는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홑집으로 "ㄱ"자형이며 사랑채인 정산즌 곁집 형태의 일(一)자형으로 앞 퇴를 다락집형으로 한 것이 특색이다. 정사의 왼쪽에 부설한온돌 아궁이는 당초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 기능만을 살렸을 뿐 너무나 질박하여 깔끔 떨 생각일랑 추호도 없어 보인다. 겸암정사에 게시된 현판 중에서 "謙巖亭"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하회 류씨들의 2대 지주인 류운룡, 류성룡 형제와 관련된건축들은 항상 하나의 쌍으로 사이좋게 존재한다. 양진당과 충효당, 빈연정사와 원지정사,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그리고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화천서원과 병산서원 ..실상은 양쪽 후손들이 치열하게 벌여왔던 내적 경쟁인 동시에 외적 단합의 표상들이다.
겸암정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이 류운룡이 학문적 자질과 성실함에 감복하여 지어준 것으로 류운룡이 이를 귀하게 여겨 자신의 號로 삼았다고 한다. 절벽 가장자리에 "一"자형 정사가 있고 그 뒷편에 살림채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살림채 좌측에는 초가 방앗간채가 있다. 누 형식의 정사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오른편 뒤에는 1칸 방과 넓은 대청을 두었다.
아래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퇴계는 이 현판을 써 주면서 편지를 보내왔다.
聞君構得新齋好 문군구득신재호 듣건데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는데
欲去同壯恨未如 욕거동장한미여 가서 하룻밤 보내려 하나, 말미를 얻을 수없어 아쉽네
부용대 벼랑에 난 좁은 길을 걷는다.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 한 뼘의 여유도 없는 가파른 길은 그 아래 시퍼렇게 흐르는 강물 위로 현기를일으킨다. 아우 서애 류성룡을 대신하여 종가를 지킨 겸암 류운용이 겸암정사를 오가며 걷던 길이다.
아우 류성룡의 옥연정사가 나루 앞에 널찍한 자리에 터를 잡은것과는 달리 겸암의 정사는 벼랑 위 비좁은 터에 옹색하게 들어 앉아 있다. 그러나 겸암정사는 아우의 정사보다 20여 년 앞서 지어졌다. 그러나 장소 탓인가, 겸암정사는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늘 적요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고, 삶도 마찬기지이다. 항렬과 가족의 위계 따위와는 상관없이 힘의 균형은 부와 권력(벼슬)의 크기에 비례하여 기울어진다. 형제이었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우에 가려 하회에서도 겸암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겸암이 이 정사를 지은 것은 그가 26살 때, 나룻배로만이 마을과 이어지는 외진 이 정사에서 겸암은 글을 읽었고, 7년이 지나서야 그는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아우 서애 류성룡이 벼슬에 나간 후 무려 9년 후이었으니, 立身의 순서부터 형제는 달랐던 것이다.
형제의 길
고색창연한 옥연정사의 간죽문을 열고 400년 전 조선시대의 동양화 속으로 성큼발을 내 딛는다. 아침밥 짓는 연기가 물안개처럼 자욱한 강 건너 하회마을에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만이 낭랑하다. 행여 방해가 될세라 마을을 S자로 휘감아 도는 강물도 숨을 죽이고 산 새조차 날개를 접는다. 서애 류성룡의 체취가 오롯이 남아있는 부용대 벌벽의 오솔길에는 오직 두루미 한 마리가 흰 옷 입은 선비처럼 우아한 날개짓을 할 뿐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3살 위의 친형인 겸암 류운룡과 학문을 논하고 형제애를 돈독히 하기 위하여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오고갔던 "서애 오솔길"은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의 깎아지른 절벽에 외줄처럼 걸려 있다. 하회마을에서 바라 볼 때 낙동강 건너 부용대의 오른쪽 기슭에 자리잡은 옥연정사와 왼쪽 기슭의 겸암정사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서애 오솔길"은 절벽을 가로지르는약 300m의 외길로 지층과 지층 사이의 틈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아찔하다.
이 오솔길의 출발점인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에 완공한 유서 깊은 고건물로 임진왜란 전란사인 징비록은 이곳에서 저술되었다. 앞마당에는 서애가 직접 심었다는 잘생긴 노송 한 그루가 선비의 품성을 닮았는지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은 채 400여 년 동안 인적 드문 옥연정사를 지키고 있다.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 하회마을의 원지정사에 기거하던 류성룡은 거의 매일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 부용대의 옥연정사를 찾는다. 혹은 거인의 발가락 같기도 하고, 또는 연꽃을 닮은 문파대는 악동강에 발을 담근 거대한 너럭바위로류성룡은 이곳의 노송 그늘 아래에 앉아 나룻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오솔길은 "달관대"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에서 시작된다.
멀리 본다는 뜻의 달관대에 서면 발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낙동강이 천년의 세월을 흐르고,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인 벼랑 끝 소나무는 먹잇감을 찾아 맴도는 솔개와 함께 고즈넉한 풍경을 그린다. "서애 오솔길" 최고의 절경은 부용대 중간쯤의 절벽에 걸려 있다. 비라도 피하라는 듯 지층이 지붕처럼 돌출된 오솔길에는 야생대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씨알 굵은 도토리는 벌써 뚝뚝 떨어져 다람쥐를 유혹하고 있다. 이따금 강 건너 하회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절벽에 둥지를 튼 산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오르며 화답을 한다.
류성룡은 평탄한 부용대 고갯길을 놔두고 하필이면 길이 끊기면 나무뿌리가 길을 이어주고 어깨를 펼 만하면 무릎높이로 자란 잡초들이 발목을 잡는 절벽의 오솔길을 즐겨 찾았을까? 외줄처럼 위태롭던 오솔길은 노송 가지 사이로 류운용이 세웠다는 겸암정사가 보일 때 쯤 끝난다. 이른 아침부터 도포자락에 이슬을 묻히며 달려온 아우는 솔향 그윽한 솔밭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겸암정사의 형을 찾아 예를 갖춘다. 그리고 형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낙동강물이 다시 방향을 틀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곳에 자리잡은 정자에 마주 앉는다.
하회마을 하회마을
관광 안동의 명소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하회마을이다.실제로 하회의 풍산 류씨 동성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민속촌이다.나라에서 민속을로 지정한 곳이적지않아, 아산의 외암 민속마을,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 경주의 양동 민속마을, 고성의 왕곡 민속마을, 제주도의 성읍 민속마을 등이 나름대로 특성과 명성을 얻고 있지만,
그 규모와 내용의 다양성 그리고 수려한 풍광에서 하회마을을 당할 곳은 없다. 너무 잘한다고 한 것이 그만 민속의 원형보다 관광용으로 변질되었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최고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북촌댁 北村宅
조선중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류사춘(柳師春)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건립한 것이 이 집의 시초이다. 그 후 경상도 도사(都事)를 지낸 그의 증손인 석호 류도성(石濠 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형적인 사대부 주택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의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체의 대문간축과는 축을 달리 하고 있다. 안채에는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겹으로 구성한 안방과 안대청이 있다. 안방은 독특한 田자형의 4칸방으로 앞의 2개 방은 평소 거처하는 곳이고 뒤의 2개 방은 수장공간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솟을대문이란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을 말한다.
안방 왼편에 3칸이 넘는 큰 규모의 부엌이 있다. 큰사랑인 북촌유거는 은퇴한 바깥 주인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하회에서 북촌의 중심에 자리잡은 북촌댁은 단순히 72칸의 집이 커서 훌륭한 것이 아니다. 1797년에 처음 건물이 세워진 뒤 1862년에 제 모습을 갖추게 된 북촌댁은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온전히 옛 모습을 그대로 강건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북촌을 지키며 하회의 긍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회마을에서 품격 높은 고택이 북촌댁이다. 정식 당호가 화경당(和敬堂)인 이 집은 대지 1,700평에 72칸으로, 칸만 따진다면 하회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택이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ㅁ자형의 구조체 주위에는 사당, 별당 그리고 다른 부속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안채는 두 층으로 구성될 만큼 한옥으로서는 높이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재산은 3,000석 ..안동을 비롯한 영남일대에서 7대 200여 년간 부와 명예를 누리던 집이다. 화경당의 품격은 세 군데의 사랑채에서 나타난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북촌유거(北村幽居), 아버지가 거처하던 화경당, 손자가 거처하던 수신아(須愼窩)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큰사랑인 북촌유거의 누마루에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면, 하회의 절경이 한눙에 들어오는 구조이다 . 동쪽으로는 화산이 들어오고, 북쪽에는 부용대와 강물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산이 마주친다.
이 집이 안동에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859년 여름에 발생한 홍수때문이었다.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사람들을 싣고 마을로 건너오던 나룻배가 뒤집 사건이었다. 상갓집에 조문을갔던 사람들 수십 명이 탄 배가 불어난 물살로 인하여 전복되었던 것이다.
나룻배가 뒤집힌 시간은 어두컴컴한 저녁시간, 가로등이나 손전등이 없었던 시절, 마침 강변에는 잘 말려진 춘양복이 몽땅 쌓여 있었다. 당시 경상도 도사를 지냈던 석호 류도성(石濠 柳道性)이 집을 짓기 위하여 3년 전부터 애지중지 건조시켜 오던 귀한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 춘양목들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 나머지 목재들도 불을 밝히기 위한 火木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많은 목숨들을 구할 수 있었고, 류도성은 어렵사리 춘양목을 다시 구해서 3년 동안 말린 후에야 집을 지었고, 이 소문이 주변에 퍼졌다. 뿐만 아니라 이 집안은 소작료를 싸게 받았다. 다른 부자들이 6할을 받았지만, 이 집에서는 5할을 받았고,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4할만 받기도 하였다.그 적선 공덕은 난리가 았을 때 빛을 발하였다. 부자들을 공격하던 동학군이었지만, 북촌댁에 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만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양진당 養眞堂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류씨의 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 현판은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營. 1515~1573)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은 겸암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1687~1761)의 아호에서 유래하였다.
사랑채는 고려의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의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와 조선의 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入鄕祖인 전서 류종혜(典書 柳從惠)가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 말 건축양식과 조선 중기 건축양식이 혼재하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남향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 오지만, 지금은 53칸이남아있다.
보통의 살림집은 터를 잡으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한 자리를 중히 여긴다. 그런데 하회마을의 주요 가옥인 양진당과 충효당은 뒤로 산이 없다. 이른바 背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풍수지리설에 어긋나느 것이 아니야 하는 평가를 받을만 한데, 이 터에서 명재상을 비롯한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6백년 넘게 기운 생동하는 마을을 주도하고 있다.
그 까닭을 파악하려면 마을의 건너편에 있는 부용대에 올라 이 양진당을 바라보아야 한다. 강 건너에서 바라보면 양진당이 자리잡은 터가 주변의 다른 집들에 비하여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풍수상으로 넓은 들에서라면 한 줌이라도 높게 솟아오른 자리가 좋다는 말과 부합된다.
양진당이라는 당호의 출처인 사랑채로 들어서도 높은 터에 대한 당시 집주인의 애착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사랑채보다도 높이 기초를 쌓아 자리잡은 양진당은 하회의 다른 사랑채 중 가장 권위적이다. 사랑마당에서 90도 꺾어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다. 안대청은 종가집의 수 많은 행사를 고려할 때 규모가 작은 편인데 반대로 높이는 최대한 높게 하여 안채 전체 중에서 대청의 위엄은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대청 앞의 툇마루는 사랑채까지 연결된다.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은 경이롭다. 방과 마루를 교쿄하게 조합하여 미로와 같이 연결된다. 사랑마당에서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에는 내외담(사랑마당이나 외부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문의 위츠를 엇갈려 설치하는 방법)을 설치하여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상징적으로 구획하고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ㅁ자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ㅡ자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쪽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의 불천위(不遷位 ..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용의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 不遷位
불천위는 영원토록 사당에서 옮기지 않는 신위를 말한다. 원래 기제사는 4대에 한정하여 모시지만, 국가에 공훈이 있거나 학식이 뛰어난 학자는 영원토록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이를 불천위, 불천지위(不遷之位), 부조위라하며, 이를 모시고 있는 사당을 부조묘(不窕廟)라고한다.
이와같은 불천위 결정은 국가나 유림, 문중에서 생전 시 업적이나 지위에 대한 평가를한 다음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한 조상 숭배가 아닌 기념비적 내지 추도식의 성격을 갖는다. 더구나 불천위 제사를 이어가도록 관직을 수여하는 등 특별한 우대를 하였다.
제사는 종손이 주관하지만, 참여자가 문중의 구성원만이 아니라 지방의 유림이나 유지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불천위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의 유대관계 및 문중 성원간의 단합과 동질감을 강화시켜 주었다. 불천위는 예조의 승인에 의하였으나, 후에는 道의 유림에서 승인 또는 서원에서 인정하는 불천위가 생겨났으며,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국불천(國不遷), 도불천(道不遷), 원불천향천위(院不遷鄕遷位)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했다.한 집에 불천위가 2위 이상 있으면 각각 사당을 따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작전고택
하동고택
귀촌종택
주일재
충효당
남촌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