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지리산 최고 명당의 명품 고택을 찾아서
- 구례 운조루(雲鳥樓), 곡전재(穀田齋), 쌍산재(雙山齋)
지리산과 섬진강 자락이 만나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과 마산면에는 국내 최고 명당터로 이름난 양택들이 자리하는데, 우리 선인들의 얼과 지혜가 담겨 있는 한옥들로 찾아가는 누구에게나 마음의 위안을 한 아름 가득 안겨준다. 이들 명품 고택들은 시골 외갓집 정서를 체험하는 마음으로 방문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으며, 세 집 가운데 두 집에선 민박도 열고 있어 전통한옥 체험과 지친 심신을 추스르는 데 안성맞춤이다.
화개장터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19번 국도를 잠시 따라가면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五美里)에 닿는다. 오미리는 아름다운 다섯 가지를 갖춘 땅이란 뜻이며, 우리나라 3대 명당에 속한다는 금환락지(金環落地)의 운조루가 자리한다. 금환락지는 ‘선녀의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을 가리킨다.
오미리를 빛내주는 운조루는 240년의 역사를 지닌 명품 고택이다. 1776년(영조 52년) 낙안군수를 지낸 삼수공 유이주(三水公 柳爾冑)가 1,000평의 넓은 대지에 지은 100여 칸의 집이나 현재는 63칸 정도 남아있다.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집’, 또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의 운조루는 사랑채 누마루의 당호이다. 중요민속자료 8호인 이 고택은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으로서 그 품격을 자랑한다.
이 집 곳간채에는 ‘他人能解’(타인능해)라는 글씨가 새겨진 쌀뒤주가 있다. 다른 사람 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양식이 없는 이는 누구라도 뒤주 아래편의 사각형 마개를 열고 쌀을 퍼갈 수 있게 해놓았다. 심지어 뒤주의 위치도 집 주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놓아두어 쌀을 가져가는 이들의 자존심까지 배려했다. 이 집에서는 한 해 200가마의 쌀을 수확했는데, 이 뒤주에서 나가는 쌀이 36가마 정도였다고 한다.
운조루에선 다른 집들과 달리 굴뚝의 높이가 채 1m도 안 되게 낮게 만들어져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배고픈 이웃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 집 주인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보게 한다. 집 주인은 연말에 이 뒤주의 쌀이 남아있으면 손님 대접을 소홀히 했다고 하여 하인들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이런 후덕한 인심으로 6.25전쟁과 각종 민란을 겪으면서도 이 집은 화를 입지 않아 지금까지 후손이 살고 있다.
오미리에는 또 다른 명품 한옥인 향토문화유산(2003-9호) 곡전재(穀田齋)가 있다. 승주의 7,000석 부호 박승림이 10년 동안 명당을 찾아다닌 끝에 집터를 잡은 곳으로 1929년 금환락지의 형태로 6채 53칸(현재 5채 51칸) 규모로 집을 지었다. ‘곡전’은 박승림과 함께 명당을 찾아다닌데 이어 1940년 이 집을 사들인 이교신의 호이며, 현재 그의 5대손이 살고 있다.
곡전재는 동행랑과 누각인 춘해루 옆에 연못을 조성, 이 물이 마당 가운데로 흘러가며 사철 꽃이 피는 아름다운 정원을 일구고 있다. 조선후기 건축으로 영호남 부자들이 선호한 부농의 민가 형식으로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모두 一자형으로 배치했다. 높은 기둥을 써서 지은 고주(高柱)집, 기둥과 서까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 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호박돌로 쌓은 높이 2.5m의 담장이다. 한옥 배치를 금환락지 형태로 하고 있는 데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담장은 금가락지를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또 하나는 솟을 대문 위에 자리한 ‘곡노’라는 창이다. 대문 위에 다락방처럼 자리한 이 곡노는 사랑채 안벽에 달린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논을 내다보며 농사짓는 상황을 살펴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오미리에서 가까운 마산면 사도리에는 약수터로 이름난 ‘당몰샘’이 있는데, 이 샘터 바로 뒤로 또 하나의 명품 고택 쌍산재(雙山齋)가 있다. 해주 오씨인 주인장의 6대조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뒤, 고조부가 집안에 서당인 쌍산재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1만6,500㎡의 넓은 터에 살림채 여러 동, 별채와 서당채, 대숲과 잔디밭까지 자리한 아늑한 가옥이다.
양반 가옥이 아니라 소박한 여염집 같이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해놓은 주택의 분위기부터 주목이 된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책과 자연을 가까이하며 검소하게 살고자 한 선대의 가풍이 그대로 배어 있어 감동적이다. 쌍산재는 곡전재처럼 ‘한옥체험’의 민박을 열고 있는데, ‘고택에서 시골 외갓집 정서를 체험하는 마음으로 찾아달라’는 안내문이 이 선비 집안의 내력과 고고한 뜻을 읽게 해준다.
쌍산재의 선조들도 보릿고개 시절 ‘나눔의 뒤주’를 두어 봄에는 맥류를, 가을에는 미곡을 채워두고 식량이 부족한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만큼 이용하게 했다. 그 해에 이자 없이 받아 채워두고 그 다음해에 또다시 가져가게 했다는 것. 세속에 구애받지 않은 전형적인 유학자 집안의 정신이 울창한 대숲 사이 돌계단 등에 배어있는 듯하다. 가족 단위로 민박을 하면서 집안 안팎을 거닐어보면 이 집안이 얼마나 소중한 교육의 장이 되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