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암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태조 이성계가 이 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 굴
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 창건설화
의상과 함께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원효대사가 강산을 유행하다가 이 산의 승경에 끌려 들
어 왔는데, 온 산이 마치 방광(防光)하는 듯 빛났다고 한다. 초옥을 짓고 수행을 하던 원효
는 이곳에 보광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보광사에서 백일 기도를 올렸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감사의 뜻에서
사찰을 둘러싼 산의 이름을 금산이라 부르게 했으며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
으로 삼으면서 보리암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보광전과 금산 정상.
보광전 내부
보광전 앞 요사체
극락전 내의 아미타부처님.
선은전 가는 길.
선은전 전경
금산 영응 기적비
경남 문화재 자료 제277호로 지정됐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곳에서 선유제를 지내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금산38경 중 하나인 삼불암 아래 있는 단이 바로 선유제를 지냈던 이태조 기단이다. 그 후 조선 철종은 금산이 가장 선연이 깊다며 중조붕 아래에 전각을 짓고 전패(殿牌)를 모셨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전각이 낡아 1903년에 용문사 후원으로 전각을 옮겼다. 이 때 금산 보리암 옆에는 의정부 찬정 윤정구의 지휘로 비각을 짓고 금산영응기적비와 대한중흥송덕축성비를 세웠다.
이곳에는 똑같은 규격의 비 2기가 나란히 있다. 비석은 넓이 1m, 높이 55㎝의 큰 거북을 받침석으로 하고 있으며, 옥개석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남해군 전주이씨 씨족은 남해에 들어온 뒤로 이태조가 기도들인 장소에서 매년 이태조의 탄신다례제와 산신제를 지내왔다. 이 자리를 이태조 기단이라 하는데 남해금산 영응기적비와 대한중흥 송덕축성비가 건립되면서 비석의 보호와 연, 전패를 모시기 위해 원래의 토담을 헐고 1960년에 전주이씨 남해군 분원장이 당시 전주이씨 종가의 헌금을 받아 축조한 것이다.
선은전에서 바라다본 보리암.
보리암 범종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3대 성지, 3대 기도도량은 남해 보리암,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이다.이들 세 곳은 모두 신비한 창건 설화와 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내려 오며 오늘날에도 불교 신도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기도도량이다.
삼층석탑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남해 금산(錦山) 상봉에 위치한 보리암 앞에 있는 3층석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683년 에 원효(元曉)의 금산 개산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수로 왕비 허태후(許太后)가 인도의 월지국(月之國)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 못했는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운 것이 바로 이 탑이라 한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상륜부 이상은 약간 파손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개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보리암과 금산 전경
좌선대에서 바라다본 보리암.
정상에서 바라다본 보리암과 상주 해수욕장.
산영각
산신 탱화
상사바위
이조 숙종 때 전남 돌산에 사는 청년이 남해로 머슴 살러왔다.
돌쇠는 자태가 고운 안방마님을 흠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렸다.
예나 지금이나 약도 없는 상사병에 청년은 시름시름 죽어갔다.
이를 보다 못한 과수댁 안방마님은 금산으로 돌쇠를 불러냈다.
금산에서 돌쇠는 상사병을 낳게 되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훗날 상사바위라 했고 상사풀이 할 때 뒷물로 썼다는 구정암.
금산 38 경 중 28경 구정암은 엉덩이 크기 9 개 홈이 물확 같다.
숙종 때 남해로 귀양왔던 약천 남구만은 구정암을 보고 감탄한다.
해수관세음과 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