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하나로 사랑을 가르치는 사랑 지난 6월15일 안양시 만안보건소 5층 대회의실에서는 ‘선사랑 누드크로키’ 수업이 열렸다. 12명의 학생들이 각자의 그림에 열중해 있고 대여섯명의 사람들은 그들을 돕느라 분주하다.
어느 미술 수업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림을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선생님 모두가 장애우라는 점이다. 매주 화요일이면 이곳에서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입에 붓을 물고 화선지 위에 여체를 그리는 모습은 보는 이마저 비지땀을 흘리게 한다.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장애우들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의수화가 석창우씨(http://myhomw.naver.com/cwsuk)다. 그는 전라북도서예대전, 서울서예공모대전 입선 및 특선,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입선 및특선, 그리고 8번의 개인전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화가다.
“장애인들은 뭔가를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어요. 특히 그림은 보통 사람들 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받아주는 학원도 없고 혼자만의 힘으로 그릴 수 없어서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해요.”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장애우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줄 것을 부탁 받아 혼쾌히 받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석창우씨도 또한 어렵게 그림을 시작했기 때문에 같은 장애우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석씨는 장애우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이 불편 한 사람끼리 어떻게 하면 잘 그릴 수 있을지 ‘함께’ 연구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매주 화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진행되는 수업이 끝나면 석씨는 개개인의 그림 한 점씩을 골라 품평회를 한다. 낙관은 어느 곳에 찍는 것이 좋은지, 그림에 따른 묵의 농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색을 넣을 때 유의 할 점은 무엇인지 등 꼼꼼하게 설명해 준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이용해 남을 돕는 석씨는 자원봉사라는 것이 거창한 일이 아님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전기주임에서 유명화가가 되기까지 그는 나이 서른에 장애우가 됐다. 명지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중소기업에서 전기주임으로 일하던 지난 84년 2만 볼트의 전류가 몸을 통과하는 전기감전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양손이 잘려진 후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팔마저 절단해야만 했다. 혼자서 인내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런 시기였다.
1년 반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날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 아들 종인이가 새 그림을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직접 그려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의수에 볼펜을 낀 채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꽤 괜찮은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우연히 이를 지켜본 처형의 강력한 권유로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도 했다. 하지만 그를 받아 줄 만한 학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요양을 위해 전주 처가에 내려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지금의 스승 여태명(원광대 교수)선생이다.
처음 여 선생은 석씨를 보고 “그림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씨의 간절함은 여선생의 마음을 돌리게 했고 이 때부터 밥먹는 시간만을 제외하고는 온통 그림에만 열중했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는 게 꿈 석창우씨의 본명은 석순기다. 1회 개인전을 연 시기에 이름을 바꿨다. 넓을 敞에 우주 宇, 이름을 바꾼 이유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 속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화가가 되고픈 소망에서다. 그는 현재 11월에 파리와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원래 다작을 하는 그지만 요즘에는 더 많은 작품을 그린다. 그의 작품에는 자유가 묻어있다. 회화의 평면성에서 벗어나 동적인 자유를 화선지에 담아낸다. 특히 인체는 끝없는 그의 작품소재가 된다. 일상의 모든 것이 소재라며 촬영을 하던 카메라맨의 셔터 누르는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새 그림을 가져와 그려달라고 조르던 종인이는 어느듯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그림에 소질이 많아 미대에 진학하고자 한다. 그런 아들이 석씨는 내심 자랑스럽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몫이고 노력 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며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아들에게 특별히 해주는 것은 없다고 한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닐까.
끝없이 자유를 꿈꾸는 석창우씨는 정상인이 아니기에 자유가 더 간절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애는 느끼지 못하면 장애가 아니다. 단지 조금 불편한 것일 뿐, 그런 의미에서 석창우씨는 장애우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