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좋은글 퍼와서 이렇게 뿌려주시니
너무 잘 밨습니다.
자격만 된다면 보스턴거리를
내달리고 싶은 기분입니다.
앞으로도 도움이 되는 많은 글
부탁 할께요,
--------------------- [원본 메세지] ---------------------
*** 작년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한 분의 후기인데 올해 보스턴 참가하시는
정승호님을 비롯하여 가까운 미래에 보스턴에 참가하실 회원님들은
마니마니 참고바랍니다. **************************************
2001년,105회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하고 난 뒤의 대회참가 후기입니다.
참고가 되실 것 같아서 올려놓습니다.
주로에 음식,음료등은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이니 안심하시길 바랍
니다.(105회 정영주)
................................................
올해 우리 나이로 53세인 소생은 지난 4월16일(월요일) 열린 제105회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서 완주하고 돌아왔다.
그 동안 이 대회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한다고는 했지만 소생이
피니쉬라인을 통과한 넷타임 기준 3시간26분03초(건타임 기준 3시간29분
34초)의 기록은 기대 이하였다.솔직히 말해서 약간 불만스럽다는 느낌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내심 3시간5분이나 7분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 정도는 뛸 수 있었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기록이 저조했느냐라는 의문에 대한 변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보스톤대회의 의미부터 새겨보도록 하겠다.
이런 마음에 안드는 완주기록을 제외한다면 이 대회참가는 소생의 아마
추어 마라톤 경력에서 큰 의미를 가진 대회라고 생각된다.
천하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갖는 "꿈의 대회"에 드디어 지천명
(知天命)의 나이에 소생도 참가하여 완주했다는 사실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고 영광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마라톤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보면 웃을 지도 모를 일이나 소생에게는 "가문의 영광"이고 자손대대로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까지 생각된다.
보스톤대회가 별 것 아니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있다고 하는 일들은 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생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뜻에서 소생의 일천한 마라톤 경력에서 이 대회참가는 큰 획을
긋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쿠베르탕 남작에 의해 근대올림픽이 열린 이듬해인 1897년에 시작된 보스톤 마라톤 대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이
면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로 알려져 있다.처음 이 대회는 미국 독립전쟁
의 시발에 해당하는 보스톤 티 파티 사건을 기념하는
마라톤대회라고 할 수있었다.한동안 보스톤 티 파티 사건이 일어난 날을 기념한 미국의 "애국의 날(Patriots Day,4월19일)" 행사의 하나로 마라톤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한편 이 대회는 우리나라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에게는 세계의 어느 유명
대회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대회이며 우선적으로 참가하고 싶은
"꿈의 대회"다.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마라토너들과 가장 인연이 많은
대회였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일제로 부터 해방되고 난 이태 뒤인 1947년 서윤복
선수가 2시간 25분대의 당시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면서 우승한 대회가
이 대회였다.이 우승은 일제시대 손기정선수의 베르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계승한 세계제패여서 우리나라가 마라톤의 세계적 강국임을 만천하에 알린 대회였다.
또 1950년에는 함기용,송길윤,최윤칠등 우리나라 선수들이 나란히 1,2,3등을 휩쓸었다.이 우승으로 우리나라는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같은
나라 선수들이 1,2,3등을 차지한 첫번째 나라로 기록돼 있다.
참고로 두번째 1,2,3등을 한 나라는 일본이고 세번째는 케냐이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의 주로는 코스라는 단어 앞에 항상 "전설적인(legendary)"이라는 말이 꼭 붙는다.그래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보스톤 대회의 주로가 지형적으로 어떤 특별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렇지 않았다.코스자체는 별 특징이 없었기 때문이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대회로 약 100년 간이나 같은 코스에서 대회가 열리다보니 주로에 얽힌 옛날 얘기들이 많아 "전설
적"이란 관형사가 붙었다고 보는게 맞는 말이다.
보스톤시에서 서쪽으로 약 26마일 떨어진 홉킨턴(Hopkinton)에서 보스톤 시내로 들어오는 이 코스는 아스팔트 포장이 좀 오래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시골 2차선 국도이다.주로는 스타트지점에서 한동안은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완만한 내리막 길이다가 약 26km 이후부터
오르막이 시작돼 32km 지점까지 계속된다.
그 오르막의 마지막 구간에 "하트 브레이크 힐"이라는 좀 가파른 언덕이 있고 32km 이후 결승선까지는 내리막 코스였다.비교적 좋은 기록을
낼 수있는 코스로 생각될 만큼 대체로 평탄한 코스라는게 뛰어본 뒤의
느낌이었다.
주로에 얽힌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 가운데 하나가 "하트 브레이크 힐" 즉 "상심의 언덕"에 얽힌 얘기다.그리고 지난해 세기의 주자(Runner of the century)로 선정된 "존 A 켈리"의 달리는 동상이 이 언덕이 시작
되는 길가에 세워져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 뛰면서는 보지 못했다.
1908년생으로 올해 만93세인 존 A 켈리는 보스톤 마라톤의 살아있는 상징이다.이번 105회 대회 스타트지점에도 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마스터스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홉킨턴의 스타트라인 뒤로 1천명씩 무리를
지어 모여서서 12시 정각으로 예정된 출발 대포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1만5천6백여명의 마스터스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소생이 참가 기준기록에 따라 배정받은 배번호(Bib number)는 6837번.
따라서 7번째 그룹에 있었던 관계로 스타트라인 근처의 본부석에 있던
그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진행자의 확성기소리로 그의 등장을 알
수는 있었다.또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이 장면이 TV,라디오등으로
중계방송됐다고 한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의 스타트는 참가 기준기록 순으로 1천명씩 모두
15개 그룹들이 스타트라인 뒤에 늘어선다.
기록이 좋은 그룹이 맨 앞자리의 등록선수들 바로 뒤에 서고 그 다음
으로 기록이 좋은 그룹이 약 10m 간격을 두고 그 뒤에 서는 식으로 이어서서 출발대포소리와 함께 스타트라인에 설치된 매트를 밟고 통과하도록 돼 있었다.물론 넷타임의 시작은 선수들 신발에 부착된 챔피언칩이 이
매트를 통과하는 시점부터 계측되고 건타임은 대포소리를 기준으로 계측된다.
따라서 참가 기준기록이 저조할 수록 스타트지점의 매트와는 더 많이
떨어진 지점에서 출발하게 되고 따라서 건타임과 넷타임의 계측시점이
차이가 커지도록 돼 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였다.
다시 존 A 켈리 얘기로 돌아가기로 하자.그는 만20세이던 1928년 보스톤 마라톤에 첫출전했으나 완주를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다.1931년 세번째로 출전한 대회에서 비로소 완주했고 첫 기록은 3시간2분 정도였다.
그 뒤 그의 나이 만84세 때인 1992년까지 모두 58회나 보스톤대회에서
완주했다.게다가 그 가운데 1935년과 1945년 2회 우승했다.그의 마라톤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기념해서 2000년초 세계유수의 마라톤 잡지인
런너스월드誌는 그를 "세기의 주자"로 선정했고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주관하는 B.A.A.(보스톤육상연합)는 그를 보스톤 마라톤 대회 명예
총감독(Grand Marshal)으로 임명했으며 매년 대회가 열리면 스타트라인에 나와 참가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가 1935년 첫 우승한 이듬해인 1936년 그는 출발지점에서 26km 떨어진 뉴턴 힐의 시작지점에서 선두주자인 엘리슨 브라운을 추월하면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선두로 달려갔다.그러나 이에 자극됐는지
"타잔"이란 별명의 인디언출신의 브라운은 당시에 갑자기 힘을 내기 시작해서 뉴턴 힐의 가장 가파른 마지막구간에서 다시 존 켈리를 추월해
앞서 달려갔다고 한다.
이 장면을 취재한 보스톤글로브지의 체육담당 기자의 이튿날 아침기사
에서 이 언덕구간을 "존 켈리의 상심의 언덕"이라고 표현했고 이 말이
유명해져 뉴턴 힐의 마지막 구간은 그 때부터 "상심의 언덕"(heart break hill)이라고 불리게 됐다.우리나라 신문,잡지등에서 이 구간을
"심장 파열 언덕"이나 "심장 터지는 언덕"이라고 번역한 것은 적절하지 못할뿐 아니라 이 이름의 유래와도 전혀 맞지않는 오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홉킨턴에서 보스톤에 이르는 전설적인 주로를 달리면서 가장 당황했던
일은 연도의 관중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일을 볼 수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주자로서 나쁜 습관이지만 소생은 출발 직후 2-3km 지점쯤 가면
소변이 보고 싶어진다.이번에도 예외없이 소변볼 곳을 찾았지만 너무
빽빽히 늘어선 관중들 때문에 일을 볼 수가 없었다.더구나 가슴에는 태극마크,뒤에는 영어로 크게 "KOREA"라고 새긴 마라톤복 상의를 입고 있어서 "자연수세식" 이용은 내키지 않았다.간이 화장실의 지붕 같은게 연도의 인파 뒤에 가끔 보였지만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 일을 볼 형편이 못됐다.나중에 매스컴의 추산으로 약 50만명의 관중이 주로에 늘어서서
환호했다고 한다.보스톤시 인구가 약 300만명이고 매서추세츠주 인구는
6백만명이다.그러니 이날 전체주민중 대단히 큰 비중의 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거의 고함에 가까운 함성으로 달리는 주자들을 응원
한 셈이다.솔직히 말해 너무 광적이어서 나중에는 귀가 멍멍해졌고
급기야 주로의 왼쪽,오른쪽 가장자리 길을 번갈아 옮겨가며 오른쪽,왼쪽 귀의 고막에 걸리는 부하를 고르게 만들면서 달리기를 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피니쉬라인의 아취가 설치된 보일스톤 거리쪽으로 좌회전
해서 약 1km 되는 직선주로에 들어섰을 때는 길 양쪽의 인파가 소생의
상상을 넘을 정도였다.
또 이 때 고색창연한 고층빌딩 사이로 멀리 보이는 보스톤 마라톤 대회 상징문양이 새겨진 아취의 모습은 너무 훌륭했다."마지막 사력을 다해"
라는 말을 지금까지 많이 사용해 왔지만 소생은 이때 문자 그대로 이
말에 걸맞는 전력질주로 당시의 감격을 달랬다.오랜동안 기억에 남을
아름답고 감격스런 광경이었다.
보스톤시내에서 스타트지점인 홉킨턴까지는 학생들 통학버스를 전세낸
대회 임시버스를 타고 이동했다.개별적으로 홉킨턴의 이동은 교통문제로 통제하고 있었다.
보스턴시내의 홉킨턴과는 반대쪽 외곽에 묵고있던 우리 일행은 대회날
아침 6시15분쯤에 호텔을 나와 20인승 전세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복잡한 보스톤 중심가를 헤멘끝에 터몬트거리에 대기하고 있는 노란
색갈의 대회버스를 타고 약 1시간을 달린 끝에 8시40분쯤 홉킨턴의 대회장에 도착했다.이동 버스에 같이타고 있었던 선수들은 소생의 눈에 전부 같은 미국사람들로 보였지만 나중에 몇마디 말을 나눠보니 내 옆자리의 40대 남자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왔다고 하고 유럽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다.홉킨턴에서는 이 버스가 바로 물품보관소로 변해 주자들의 비닐
백을 맡아서 보스톤의 코플리 광장에 있는 피니쉬라인 뒤쪽까지 운반해 주었다.배번호를 버스차창에 순서대로 써두고 그 창문으로 비닐백을
맡기고 그 창문에서 나중에 찾도록 돼 있었다.
스타트시점인 정오까지 약 3시간 가까이 대회장에서 기다려야 하므로
다소 지루할 것으로 생각됐으나 다들 잔디 위나 천막속에 누워 간이무대 위의 공연을 구경하거나 줄을서서 도너스나 음료수들을 지급받아 먹기도 하면서 기다렸다.우리일행은 스타트라인 바로 옆에 있다고 하는 한인장로교회를 찾아갔다.그 곳에서는 교민들이 모여 박수로 우리일행을 환영해
주고 출전을 격려해 주어 고마왔다.
이봉주선수도 여기서 만났다.우리일행은 이 선수에게 단체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힘을 외쳤다.이윽고 출발시간이 임박해져서 이봉주선수는 등록선수 스타트지점으로,우리들은 각자가 속한 스타트 그룹으로 헤어졌
다.
도로의 굴곡 때문에 대회본부에서는 안보이는 곳까지 스타트라인 뒤의
2차선 도로는 참가선수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식전행사가 진행되는 확성기 소리가 들리고 좀 있다가 대포소리가 났고 또 한참 기다리자 서서히
거대한 참가선수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출발 때의 온도는 화씨
53도로 섭씨로는 12.6도,바람은 잔잔했고 뛰기에 좋은 날씨였다.다행히 주로도 내리막이어서 다들 초반 오버페이스를 염려하면서 출발했다.
이번 레이스에서 소생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출발전에 너무 많이 먹어 배가 빵빵해서 도저히 뛸 수가 없을 정도였다.왜 그렇게 많이 먹어댔는지 정말 미스테리다.기록에 집착한 나머지 불안하고 초초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과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때도 뭔가 불안해지면 나도 모르게 과식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시합 당일날 새벽부터 정오까지 사이에 밥을 3끼나 먹다니!
어떻게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수 있었는지,지금 생각하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이 대회를 위해 훈련일지라는 것도 쓰고 매일매일 시합을
염두에 두고 다른 대회때의 준비보다 더 열심히,더 많이 훈련했다.
지난 3월18일 동아대회 이후에는 남산 산책로의 새벽달리기도 본격화
했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사무실 인근에 있는 중앙문화센터에 가서
헬스기구로 몸도 단련하고 트레드밀 달리기도 하는등 나름대로 다른
대회때 보다 더 신경을 써서 준비했다.작년가을 춘천대회에서 처음
시도해본 식이요법도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시도했다.그래서 D-4일부터
시작한 카보로딩 직전의 몸무게는 59kg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대회날 새벽 4시쯤에 일어나 서울에서 싸온 찰밥 한덩이를 물과 김,
마른 멸치를 반찬으로 좀 넉넉히 먹었다.스타트는 8시간 뒤인 정오에
하게 될 것이므로 좀 많이 먹어두는게 좋을 것 같았다.그런데 어쩐지
나중에 배가 또 고플 것 같아 마지막 남은 찰밥 한덩이는 시합장으로
갖고 갔다.그런데 보스톤시내에서 출발지점인 홉킨턴으로 참가자들을
운반할 버스 대기장소로 가는 우리일행의 전세버스 안에서 보스톤 한인
식당에서 준비해준 찰밥도시락을 또 먹었다.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물반찬을 곁들인 1인분을 먹었다.그리고 홉킨턴의 대회장에 도착해서 서성거리거나 스트레칭을 몇번하고 나서 오전 10시30분 쯤에 다시 서울서 부터 갖고 간 마지막 찰밥 한덩이를 먹어 치웠다.8시간동안 이렇게
3끼분의 식사를 했는데도 그렇게 배가 부른 느낌이 없었다.지금 생각
해도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출발시점까지 과식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것저것 다른데 너무 신경을 쓰고 있어서거나 일부러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일종의 마인드콘트롤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시합장에 나가서는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고 생각하도록
하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자기
체면을 걸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홉킨턴의 스타트라인을 출발하고 약 1km 쯤 갔을 때 왼쪽 옆구리가 땡기면서 위가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왔다.완만한 내리막길이어서 다들 초반 오버페이스를 의식했는지 사람들이 빽빽한 가운데서 뛰고 있어도 다른
대회처럼 앞사람을 추월해 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소생도 처음 5km 정도만 가면 위가 부담스런 이런 과식 후유증도 없어질 것이므로 그 이후에 속도를 좀 올려서 뛰기로 마음먹었다.
소생은 원래 초반 오버페이스를 감수하면서 빨리 뛰는 쪽이 결과적으로 더 기록이 좋다.초반을 빨리 뛰던 천천히 뛰던 후반에는 어차피 지쳐서 속도가 일정하게 늦어지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이날은 초반에 천천히 가면서도 나중에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낙관을 하고 있었다.
5km를 지나자 이번에는 위의 부담스런 느낌이 없어지기는 커녕 화장실에 가서 큰 것을 보고싶어졌다.정말 큰 일 났구나 싶었다.자연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길가의 간이 화장실을 열심히 찾으면서 뛰었지만 길가의 관중 뒤의 어딘가에 묻혀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과식으로 뱃속이 거북한 것 이외에도 의외로 첫 스타트 이후에 몸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컨디션이 안좋은 느낌이 들었다.아마도 18~9시간씩 장거리 비행기를 타고 온 덕분에 시차적응하는 시간이 부족한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우리일행 18명 가운데 자기기록을 경신한 사람은 두사람 밖에 없었고 소생을 포함한 나머지 16명은 모두 자기의 평소기록보다 5~10분 더 늦었다.보스톤 도착후 하루 쉬고 바로 다음날 대회날이 되도록 여행스케쥴을 짠 것은 잘못이었다.
시차적응에 걸리는 시간을 너무 짧게 잡은 것이다.하루쯤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다.
주로에는 1 마일 마다 표시가 있었고 5km 마다는 칩을 신발에 달고 지나가면 독특한 전자음을 내며 랩타임을 계측하는 매트가 깔려있고 눈으로 건타임을 확인할 수있는 시계도 설치돼 있었다.
어쨌든 첫 5km 부터 기록이 좋지않았다.그리고 스타트 이후 시간이 경과할 수록 계속 속도가 느려져서 결과적으로 완주시간은 이 대회에 참가신청할 때 소생이 제출한 기준기록(3시간19분)보다 약 7분이 더 걸린 3시간26분이었다.
첫 5km 부터 5km 마다 걸린시간을 보면,
0 ~ 5km 22분47초,---
5 ~10km 23분06초,+19초
10~15km 23분14초,+8초
15~20km 24분30초,+1분16초
20~25km 24분22초,-8초
25~30km 25분05초,+43초
35~40km 25분44초,+39초
(40~42.195km 11분19초)
첫5km 22분47초의 기록은 소생이 3월18일 동아대회때 첫5km 랩 21분55초 보다 못한 기록이다.그 뒤 구간의 랩타임도 전체적으로 동아대회의 같은 구간랩 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으로 나타나 이날 스피드가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0 ~10km 랩타임에서 이 대회는 45분53초,동아대회때는 43분26초(-1분27초).
10~20km 랩타임에서 이 대회는 47분44초,동아대회때는 44분40초(-3분04초).
20~30km 랩타임에서 이 대회는 49분27초,동아대회때는 46분58초(-2분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