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0일(토) 오전 성경 73 전권 녹음을 완료하다. 비록 일부 점검 확인할 부분을 남겨두긴 했지만. 사실은 12월 9일(금) 어제로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오늘은 221년전 1801년 대역죄인으로 서소문 형장에서 육시형을 받고 산화한 공경하올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기일이니 이 거룩한 날에 맞추고자 의도적으로 하였다. 그래도 감회가 남다르다. 우연히 이 날짜에 맞추어지다니...(문득 생각 한 줄기....,한국 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황사영, 정약종, 이벽 이 세 어른들이 성경을 대하실 기회가 길고 충분했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활화산 같은 신앙 분출이 용암되어 조선은 물론이고 세상을 뒤 덮었으리라. 천주실의와 칠극의 공부만으로도 이 깊은 신앙을 증거하였으니...)
각 장마다 개별 녹음을 하였기에 수북수북 쌓인 녹음 파일들, 그때마다 엄청난 부자가 된 듯 충만한 기쁨을 주었기에 정작 오늘의 심경은 덤덤하다. 그렇지만 그동안 가볍지 않은 자신과의 투쟁이 있었다. 진작에 할 걸 저문 나이라 소리도 늙은데다, 2년동안 집중과 몰입은 가뜩이나 시원찮은 시력과 청력의 퇴화로 이어졌다. 심지어 성대에도 거북함이 감지되었다. 그럼에도 거룩한 충전에 전력 질주를 하도록 재촉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어이 형용하리. 그리고 하나 더 새롭고 충만한 체험을 완주한 스스로가 대견함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2021년 초에 좀 어지러운 개인적 역사가 있었다. 퇴행성으로 고장난 무릎 수술과 그 후 좌천성처럼 느껴지는 뜻 아니한 잦은 이동. 내심 늦게 철 든 순진한 수도 공동체를 향한 애정공세로 고장난 기계 잘 고쳐서 열혈 투신하려는 갸륵한 계획에 찬물 세례를 받는 듯. 임명장을 주신 분은 절대 아니라지만, 받은 입장에서는 그랬다. 심정상 정황상.
위축 받고 상처 받은 심신의 열불을 꺼트려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창조적인 몰두와 몰입이었다. 가끔 강의할 기회에 목소리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어번 지인 카타리나 소장님도 수녀님은 목소리가 좋은데 유튜브로 좋은 책 녹음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했다. 솔깃했다. 곧 어두움이 드리울 내 인생의 오후시대 나의 신앙· 공부· 놀이를 위한 ‘오디오’ 매우 그럴듯할 것이었다. 목소리가 더 늙고 허약해 지기 전에 흠모하는 분 황사영의 르포 소설 ‘피의 증거’와 ‘성경‘만큼은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맹렬해졌다.
’피의 증거‘부터 시작했다. 아파트형 협소한 개인 침방 툭 하면 관리사무소의 방송이 나오곤 했다. 게다가 함께 사시는 선배 수녀님은 낮 동안 긴 시간을 중국어로 현지 수녀들을 영성지도를 해야 하셨다. 두어 달 녹음 시간이 걸렸다. 처음이라 더욱 정성을 다했다. 안산에서 넉 달 살고 다시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더위가 팔팔하게 널 뛰는 팔월에. 단독 주택형 3층 개인 침방은 머리에 슬라브 지붕을 이고 있어 여름 더위가 가열찼다. 이럴 때 이열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성경녹음을 시작했다. 이미 코헬렛부터 시작한 텍스트를 필두로 무섭게 몰입하였다. 여러 방해가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심신의 컨디션과 신앙과 정서의 상황들이었다. 2년의 과정을 거치며 눈, 귀, 성대의 노화와 이상까지 경험하면서 두 번 다시는 못할 것이다. 무슨 성경을 그리 읽냐고 해서 그냥 통독한다고 했다. 녹음한다고 하면 고향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 예수님처럼 될까 저어되어. 자수없이 녹음 하려니 다닥다닥 같이 붙어 살고 있는 수녀님들의 생활 동정은 예민 그 자체였다. 수시로 발생하는 소리들에 때로는 인내를, 때로는 사정를, 때로는 협상에 항의까지. 이제 끝났으니 조만간 자수하여 광명을 찾아야겠다. 빌라가 많은 골목 잡상인 차량의 홍보용 스피커도 한 몫 했다. 그리고 바로 집 앞에 설치된 쓰레기 분리대. 여름철에는 자정을 넘긴 야심한 시간까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큰 소리도 잡담까지 하면서. 나의 침방 맞은 편 앞 집 큰 개 소리는 최악이었다. 음대 성악과를 졸업한 동기 수녀가 발성 연습 때 개 소리로 연습시켰었는데, 수십년 후 이제 비로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개 소리는 녹음에 최악의 직격탄이었다. 기계음에 바로 인정사정없이 녹음되었다. 그리고 그 개는 시도 때도 없이 짖었다. 낯선 사람들이 지나간다고 짓고, 동네 친구 개들이 지나가면 더 미친 듯 짖고, 추우면 춥다고 짖고 더우면 덥다고 짖고. 기분 좋아서도 짖고 기분 나빠서도 짖고. 에고 개님 시키.
스마트폰 녹음 기술을 미리 잘 숙지하지 않아 완료 한 달 전까지, 한 글자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쌩으로 반복하였다. 질리기도 했다. 나중에 편집 기술을 보태니 좀 수월해졌다. 대신 다른 한쪽인 온 몸의 긴장과 무딘 손가락이 힘들어야 했다. 수치를 집어넣는 편집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자르고 붙이고를 해야하니. 역대기의 야릇한 유대인의 이름들은 발음하기가 참 어려웠고 숫자는 틀리기 딱 좋았다. 아라비아 숫자였다면 편하고 좋았으련만.
어릴 때 별명이 찰거머리였다. 하도 어머니를 밝히고 쫓아 따라다닌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미워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아무데나 찰거머리 근성을 드러내지 않지만, 중요한 것에 한 일면을 드러내니 스스로 갸륵하다. 무엇보다 은혜로운 말씀이 더욱 다가와 큰 공부가 되었다. 신앙과 경외로 승화할 일만 남았다.
2022년 12월 10일(토) 공경하올 황사영 알렉시오의 기일 미사를 다녀온 밤에.
최 마리 에스텔 입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