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말씀의 전례
구약성경의 한 장면, 거룩한 독서와 그 원리를 설명해주는 느헤미야 8장을 살펴보자. 일곱째 달이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저마다 제 성읍에 살고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 광장의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딸 초하룻 날이었다. 그는 ‘물 문’앞 광장에서 해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사의 말씀을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율법 학자 애즈라는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에즈라는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들에겐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레위인들도,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하며 온 백성을 진정시켰다.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
여기에서는 유배에서 막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최초로 행하고 있는 일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말씀의 전례에 깃든 신학을 엿볼 수 있다. 이 날 이스라엘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순간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당신 백성 안에 뚜렷한 현존으로 드러나신 것이다. 이 일은 남녀노소 온 백성이 소집된 거룩하고 성대한 전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날은 경신례의 책임을 맡은 일들뿐 아니라 온 백성이 사제요 예언자의 자격을 지녔다는 것을 드러내주었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이 축제일에 성경을 낭독하는 이를 위해 설교대)독서대가 마련되었다. 하느님을 장엄하게 찬양하고 백성을 위한 축성 기도를 드린 후 독서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연속 독서로 하루종일 이어지는 것이었다. 단락단락 읽으며 아람어 밖에 모르던 백성에게 히브리어로 된 말씀이 번역되어 해석되어 전해졌다. 에즈라와 레위인들이 말씀을 풀이하고 해설해주었다.
이 하느님 말씀은 영혼을 꿰찌르는 쌍날칼과 같아 이사야가 그랬듯이 자신의 과오를 바라보게한다. 말씀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건드리시며 꿰뜷으시기에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동반하는 법이다. 이 장면은 “회당의 거룩한 독서”라 할 새로운 예배 의식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희생 제물을 봉헌하지 않고, 단지 하느님 말씀만으로도 의식이 거행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안식일마다 백성들은 자기 마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신앙과 일상이 연결된다. 즉 여기저기 흩어진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나자렛, 그리고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행하신 일도 이같은 형태의 거룩한 독서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거룩한 독서의 방법을 심화시켜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것은 그분이 성서가 말하는 바를 당신 안에 실현시키는 분이시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오늘에 적용시킨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실 때 예수께서는 이를 현재에 적용시킨다. 그래서 제자들은 여러 세기가 지난 묵은 말씀인 이사야서의 그 말씀이 예수의 선포 속에서 ‘오늘’ 현재화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오늘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니 거룩한 독서를 할 때마다 우리가 작동시켜야 할 것은 바로 오늘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고학적 탐구 수준이나 사변적인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오늘, 이루어졌습니다.”라는 이 예언의 말씀... 옛적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말씀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게 되며 ‘하느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힘 있게 깨닫게 된다. “오늘,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앙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오늘을 창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제요 왕이며 예언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서 본문에 “오늘”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것은 거룩한 독서의 능력과 권한을 지니기 위해 본질적이고 없어서는 안 된 자질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또한 말씀이 그리스도와 동시에 모든 신앙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오늘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요 왕이며 예언자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것은 거룩한 독서의 능력과 권한을 지니기 위해 본질적이고 없어서는 안 될 자질이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오늘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교회란 사제요 왕이며 예언자의 직무를 지닌 백성으로서 말씀의 선포를 그 첫 의무로 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첫 임무는 성서의 실현이다.” 교회는 말씀을 간직하고 이해한다. 그것은 교회가 성령의 성서를 감도하신 성령을 모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교회 안에 당신의 도구들을 두셔서 그를 통해 가르치시기 때문이며,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입술이요 그분의 시편 집이며 그분 가르침이라 할 변사들을 두셨기 때문이다.”
모든 말씀의 전례에서 우리가 성소 본문의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신앙에 비례하여 말씀을 우리 마음에 풀이해 주신다. 성령의 권능은 각 개인의 신앙의 힘에 협력하시며 개인 기도나 공동 기도의 절실함에 비례하여 나타나신다.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는 성소 본문이 현재적인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거룩한 독서에 앞서 기도의 노고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석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를 읽기 위해 자유로운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시며 몸소 당신 말씀을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해설해 주신다.
신명기에 “너희 두 눈이 말씀을 보았다”라고 표현하고, 이사야서도 “이사야가 환시로 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등, 말씀을 ‘본다’는 유별난 표현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씀은 원래 듣는 것인데 어찌하여 말씀을 두고 “그들은 보았다”, ” 봄”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일까? 사실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이를 듣는 이는 신앙 안에서 듣는 것인데 그렇다면 말씀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씀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보이는 것이며, 우리는 이 내밀한 봄을 통해 말씀을 그 진면목대로 즉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를 불러 세우며 우리로 하여금 신비 생활에 들어서도록 하고, 우리의 온 실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중심을 잡도록 이끌어주는 그런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뵙는 것이다. 물론 듣는 이 측면에서는 봄을 향해 개방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봄의 능력은 경청의 능력과 비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성서 말씀 속에 숨어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기도와 마음의 평화, 시편 낭송과 독서 등 한마디로 사람의 영을 밝게 비추어 주는 모든 것 안에서 항구한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