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은인자중
2015. 1. 7. 19:10
32.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http://blog.daum.net/mahatop7/5492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스스로의 성품(실체)을 얻을 수 없으므로
菩提薩埵
보리살타 : 보리살타(보살)은
依般若波羅蜜多故
의반야바라밀다고 :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心無罫碍
심무가애 : 마음에 걸림과 장애가 없으며,
無罫碍故
무가애고 : 걸림과 장애가 없으므로,
無有恐怖
무유공포() : 공포(두려움)이 없다.
[해설]
가(罫) : 걸림, 거리끼다. 걸리다.
애(碍) : 장애, 방해되다.
왜 마음에 거리낌과 장애가 없을까요?
위에 설명이 나온 대로 스스로의 성품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전편에서 상세히 설명했다시피 <의지할데 없는데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空하여,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나"라는 성품이 있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마음에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것이 있고
그 나의 것에 손해가 오면 화를 내고, 이득이 오면 애착을 합니다.
이것이 탐진치입니다.
*삼독(三毒) 탐진치(貪嗔癡)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스스로의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명이며,
나/나의 것에 이득이 올 때 애착을 하는게 탐심이며,
나/나의 것에 손해가 올 때 화를 내는게 진심입니다.
또한 "너"에게도 성품(실체)가 있다라고 여기고,
네가 하는 짓이 아니꼬우면 미워하고, 네가 하는 짓이 이쁘면 애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와 나에게 정말로 고정불변의 영원한 자성(실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미워하거나 좋아할 대상 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설사 눈에 보여지고 들려지더라도, 거기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걸 알아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됩니다.
더 이상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의 의미는 인연(因緣)과 연연(緣緣)이 화합해서 법(法)이 생겨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조건(緣)에 의해 발생되므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겨난 법(法:존재&사물)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언제나 온갖 조건들의 바뀜에 의해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항상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조리 다 변화한다라는 것은, 모조리 다 空하다라는 뜻입니다.
일체가 다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입니다.
일체개공!!!
모조리 다 空한걸을 확실히 안다면, 그 어디에도 집착할 꺼리나 대상이 아예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엔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이란 뭘까요?
걸림/장애입니다.
마음에 걸리적 거리고 장애되는 게 바로 두려움입니다.
마치 하늘에 큰 바위가 떡 버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두려움이란 탐진치에서 진(嗔), 즉 분노에 해당합니다.
왜냐면 중생들은 두려움을 싫어합니다.
싫어한다는 게 바로 미워한다는 의미이므로 두려움은 분노에 해당됩니다.
해탈의 증거로 삼는 것이 바로 <두려움 없음>과 <희망(바램)없음>입니다.
<희망없음>이란 탐심이 없다는 증거이며,
<두려움없음>이란 진심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뭘 무서워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놀란다면 그것은 해탈이 안됐다라는 증거입니다.
어떤 실체/자성이 있다고 여겨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걸림/장애입니다.
내 마음 속에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반드시 두렵게 되고 역시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게 사실은 좋은 게 아니고, 고통의 뿌리입니다.
"나"라는 것은 속제에서는 있지만, 진제에는 없는 것 입니다.
진제가 진실한 것입니다.
수행자에겐 악마(타화자재천마)가 큰 장애입니다.
이런 장애가 생기는 것은 "나"에게도 실체가 있고 "악마"에게도 실체가 있다고 여겨서 그렇습니다.
대지도론에 보살은 악마나 부처나 둘 다 똑같이 차별없이 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나 진제의 측면입니다.
겉모습(속제)은 분명히 차별이 있어서 악마는 무섭게 생기고 부처님은 자비스럽게 보여지지만,
본래모습.......즉 진제의 측면에서 따져보면
악마에게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부처님에게도 또한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똑같은 것 입니다.
둘 다 텅 비어 있는 것이므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보살은 악마라고 해서 미워하지도 않고, 부처라고 해서 더 애착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미워할 대상도 없고 애착할 대상도 역시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는 미워하고 애착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에 팔뚝질하는 것과 매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에서 너에게도 실체가 있고 나에게도 실체가 있다고 착각해서 미음과 애착이 발생됩니다.
중생이 무엇으로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가 하면 바로 모습(相)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을 취해서 그걸 나로 여기고 그걸 너로 여긴다는 뜻 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에 냄새 맡아지고..나머지도 역시 그런 특징들을 모습으로 삼아 집착하는 것 입니다.
이런게 바로 세속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면 그 보이는 대로 진짜라고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게 다 진짜라면...즉 스스로의 성품(自性)이 있다면 변화가 생기면 안됩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 입니다.
변화하는 것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과 연의 화합으로 생겨난 모든 것들(유위법)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지지만,
그 자체에는 독립적인 실체(자성)이 없으므로 꿈/환영/거품/그림자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몽환포영이란 거짓이란 의미입니다.
세속의 모든 것들은 거짓이란 뜻이죠.
꿈이란 무엇일까요?
꿈꿀 때야 정말 진짜 현실처럼 눈에 보여지지만, 꿈에서 깨고나면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모든 유위법들은 꿈과 같이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거짓이냐면 거기엔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여지건, 귀에 들려지건, 마음으로 알아지건.....그 모든 것엔 스스로의 성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인데,
중생은 이걸 몰라 모두가 진짜라고 여기니 애착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 입니다.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답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연기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더 요약하면 空을 깨닫고 익히는 것이죠.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으로써 두려움을 포함한 일체고액을 넘어가서 <도일체고액>입니다.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